-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9장 엄마의 DNA를 물려받은 네 마리 '룡' (4)

 

국자가에 ‘휴양’ 온 ‘룡’

                                                   남룡일 (남씨네 넷째)
                                                   남룡일 (남씨네 넷째)

   막내 동생 남룡일은 1960년생으로 연변의학원을 졸업하고 한때 연변약검소에서 약제사(药剂师)로 3년간 근무하다가 형들의 영향을 받아 ‘하해’하여 한국, 북경, 심수 등지를 전전하면서 비즈니스 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와중에 두만강하류지역 개발이 의사일정에 오르게 되면서 곧장 훈춘을 목표로 정하고 자기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내가 연길에서 ‘멜로디노래방’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끈이 되어 훈춘에 가서 ‘멜로디노래방’을 오픈한 것이다. 아마도 훈춘에서는 처음으로 문을 연 노래방이었을 것이다. 노래방 운영이 정상화되니 큰형님이 운영하는 노래방 기계 판매까지 맡아 하게 되였는데 사업이 차츰 확장되고 귀틀이 잡혀갔다. 이렇게 훈춘에서 3년간 종자돈 벌어가면서 사업범위를 확장해나갔다. 

    그 후 우후죽순처럼 일떠서는 노래방문화에 힘 입어 신바람이 나게 노래방기계 판매를 시작했다. 연길에만 300집이 넘는 노래방이 오픈했는데 거기에 반 이상 노래방이 동생의 고객이였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후 ‘금영’이라는 브랜드가 그 분야를 석권하면서 방향전환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상황에서 2003년도에 심천으로 들어가 한국인과 합작해 음향회사를 꾸렸다. 

    그러던 중 갑자기 허리통증이 생겨 한 밤중에 광주 중산병원에 찾아가 요추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의사의 집도에 문제가 생겨 한 때 휠체어에 앉아 다니는 지체장애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하던 사업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극이 벌어지다 보니 허리 통증도 통증이거니와 마음의 아픔까지 견뎌내야 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수십 차에 달하는 재수술과 재활치료를 병행하여 거의 정상인에 가까운 건강을 찾았다고는 하나 다시 사업에 손을 댈 수는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사업적으로는 형들에 미치지 못했지만 형들을 대신해 부모님 가까이에 있으면서 형들이 다 하지 못한 효심을 보여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남룡일 가족 (넷째),손자부부와 한때를 즐기시는 어머니
              남룡일 가족 (넷째),손자부부와 한때를 즐기시는 어머니

    하지만 막내에게는 사업보다 더 내세울만한 비장의 ‘카드’가 있어서 형제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그것인 즉 슬하에 두 자식을 두었는데 맏이는 세계 최강기업인 아마존의 마케팅 팀장으로 활약하고 있고, 둘째는 대학에서 상당히 각광받는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두 아들의 미래가 상당히 기대되어서 동생 내외도 마음이 든든하겠지만 우리 남 씨 가문에서도 그들 형제에 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남룡일 가족 (넷째)
                                                 남룡일 가족 (넷째)

    특히 이 자리를 빌려 다년간 부모님의 신변을 맴돌면서 형들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해왔고 특히 어머님의 마지막 림종을 지켜준데 대해 형제 모두가 십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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