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심녀성컵' 제8회 생활수기 공모 수상작

혹한을 견디면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1. 하늘이 무너지던 해 

 

   인생이 순풍에 돛 단듯이 순탄하면 좋으련만 살다보면 사람의 의지로 좌지우지 못할 때가 있다. 결혼후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나는 그해 겨울에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2001년 11월 7일 새벽 5시경,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있던 나는 요란한 전화벨소리에 놀라 깨여났다. 이 새벽에 무슨 전화지? 불길한 예감에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혼수상태다. 엊저녁에 머리 아프다며 일찍 누웠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가는 숨만 몰아쉰다.”

   청천벽력이였다! 자고 있는 애들을 남편한테 맡기고 정신없이 차를 잡아타고 한시간반가량 달려서 친정집에 도착했을 때는 엄마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러나 이것이 비극의 시작일 줄을 미처 예감하지 못했다.

   비보를 듣고 황망히 차를 몰고 달려오던 남편이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해 비명횡사하게 될 줄이야! 불과 몇시간 사이에 벌어진 악몽같은 현실앞에 나는 그만 실신하고말았다. 엄마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도 못했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나니 이번엔 난데없는 빚군들이 몰려들었다.

   남편이 생화재배기술을 연변에 보급할 목적으로 그해 여름에 개인투자로 15만원을 꿔서 생화실험온실을 지으면서 림시공을 썼는데 2만원이나 되는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그외 농약장사를 하면서 외상으로 들여온 농약빚 10여만원에 다른 빚까지 합치니 무려 35만원이나 되였다. 월급이 몇백원밖에 되지 않던 그 때 상황에선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천문학적수자였다.

   하지만 그런 충격도 잠시,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그 때까지 온실에 난방시설을 설치하지 못하여 온실에 심어놓은 생화와 미나리가 당장 얼어죽게 될 판이였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 장례식이 끝난후 시부모님과 친정아버지까지 로인 세분이 발 벗고 나섰다.

   온실에서 일손을 돕다가도 터져나오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락루하시는 시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이제 며느리도 잃고 손주들도 다 잃게 되겠구나. 너를 앞세우고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꾹 누르고 얼굴이 사색이 되여 일에만 몰두하는 두 아버지의 침통한 모습은 너무 처참했다. 내 생애에 그렇게 비참했던 적은 없었다. 며칠간의 노력끝에 일단 급한 불은 껐다.

   부모님들이 집으로 돌아가자 그제야 참았던 슬픔이 터진 보뚝처럼 밀려왔다. 당신한테 시집와줘서 고맙다며 매일 마주보고 있다는게 꿈만 같다던 남편이, 잠을 더 자라며 조용히 일어나서 아침을 차려주던, 당신보다 나를 더 아껴주던 남편이였기에 그 슬픔은 오리오리 가슴을 찢었다. 꿈속에서도 남편을 부르다 놀라 깨여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잔혹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숨막히는 아픔에 더는 잠들 수 없어 터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가로등이 희미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로 날을 밝히군 하였다.

   하지만 우는 것도 나에겐 사치였다. 림시공 둘을 고용했지만 일손이 딸려 매일 온실에 붙어있어야 했고 하루가 멀다하게 찾아오는 빚군들 때문에 울새도 없었다. 생화와 미나리를 팔아 그 수입으로 림시공 월급을 해결하고 내 월급까지 보태가면서 빚도 조금씩 갚아 나갔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칼바람을 맞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빙판길을 달려 매일 룡정시의 식당들을 누비며 미나리를 팔아야 했고 꽃상자를 이고 뻐스를 타고 연길, 지어 도문까지 다니며 생화를 도매했다. 생화가 남으면 연길서시장 길목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송이, 두송이 팔기도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빙판길에서 미끌어져 넘어지는 일은 례상사였고 아찔한 접촉사고를 내여 오토바이 외각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뼈가 부서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였다.

   하지만 무정한 하늘은 이렇듯 처절한 몸부림에도 련민과 동정을 베풀지 않았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두달이 지난 어느날, 밤새 내린 폭설로 유일한 희망이던 온실마저 폭싹 내려앉는 참변을 당했다. 모든 것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절망에 빠져 죽고싶었다. 하지만 신은 나에게 죽을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죽음이 뭔지 모르는 철없는 3살짜리 딸애가 아빠를 찾으며 울어댔다. 아빠가 하늘로 갔다는 말에 “비행기 타고 아빠 보러 하늘로 가자.”며 졸라댈 때면 억장이 무너졌다. 이제는 사탕과자를 사들고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집에 들어서는 아빠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8살짜리 아들은 방구석에 앉아 소리없이 눈물을 훔치기도 하여 내 가슴을 더욱 미여지게 했다. 

   하지만 내가 슬퍼하면 애들도 따라 슬퍼하기에 애들에게만은 슬픔을 주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쳤다. 애들을 위해서 눈물을 거둬야 했고 이를 악물고 살아야 했다.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빚도 갚을 수 없고 애들도 키울 수 없기에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남편을 잃은지 다섯달만이였다.

22. 이별의 아픔을 딛고 

 

   첫 정착지는 위해였다. 거기에 잘 나가는 고중동창 몇이 있어 직업을 찾기가 상대적으로 편리했다. 어떻게 될지 몰라 애들을 잠시 시부모님께 맡기고 떠나기로 했다.

   할머니의 등에 업혀 두팔을 내밀며 기를 쓰고 나한테 오겠다고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딸애와 나를 꼭 붙잡고 눈물이 그렁해서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아들애를 매몰차게 뒤로 한 채 모진 마음을 먹고 차에 올랐다.

   친구의 소개로 한국조명전자회사에 입사하였고 약 한달간의 실습을 마친후 한국 본사에 가서 1년간 근무하기로 하였다.

   생물을 전공한 나로서는 전자분야에 문외한이다보니 처음엔 아무것도 몰라 난감했다. 낯선 환경에서 생소한 일을 접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컸지만 금쪽같은 자식들과 생리별을 한 심적고통은 참기 힘들었다. 길에서 비슷한 또래의 애들만 봐도 눈물이 왈칵 솟았다. 하지만 애들을 하루빨리 내품으로 데려오려면 한시급히 일을 배워야 했다.

   집생각할 일각의 틈도 주지 않기 위해 몸을 혹사하며 미친듯이 일에 몰두했다. 매일 아침 첫사람으로 회사문을 열었고 저녁 마지막 사람으로 회사문을 나섰다.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수첩을 들고 다니며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으며 노트에 적어넣었다. 한참 어린 직원들의 “그것도 모르냐?”는 비아냥도 웃음으로 넘기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끈질기게 배웠다. 약 두달이 지나니 맡은 업무에 익숙해졌고 차츰 다른 부서의 일까지 주동적으로 도우면서 일을 배울 수 있었다.

   저녁 8시에 퇴근하면 가로등길을 뛰면서 지쳐 쓰러질 지경으로 운동을 하였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자리에 들었다. 몸이 극도로 피곤해야만 집 생각할 새 없이 잠자리에 들자마자 바로 잠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빚도 갚아야 하고 고향에 있는 애들과 시부모님의 생활비도 섬겨야 했기에 돈 한푼도 허투로 쓸 수 없었다. 한해동안 한국에서 쓴 돈은 한화로 백만원도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주는 옷을 받아 입었고 애들의 옷도 지인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평일에는 회사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고 주말에는 전날 식당에서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채웠다. 한번도 시내구경을 해보지 못했고 주말에도 일에 묻혀 살았다.

   한국에서 보낸 1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다망했던 시간이였고 또한 가장 많은 것을 배운 나날이기도 했다. 짧은 1년사이에 회사의 시스템을 익숙히 장악했고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3. 가족과의 상봉, 그러나 ...

 

   이듬해 8월말에 나는 위해로 돌아왔다. 곧 개학인지라 시부모님이 애들을 데리고 위해로 달려왔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세집에 들고 아들의 학교와 딸의 유치원도 순조롭게 찾았다. 며칠후 시부모님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꿈속에서 그리던 애들과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다. 리별의 쓰라린 아픔을 맛보았기에 상봉이 그렇게 눈물겹고 소중할 수 없었다.

                                                      위해 바다가에서 
                                                      위해 바다가에서 

   하지만 함께 있는 즐거움도 잠시, 현실은 록록치 않았다. 저녁 8시에 퇴근하여 집에 오면 그 때까지 저녁도 못 먹고 눈이 빠지게 엄마를 기다리는 애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저녁 늦게 밥을 먹고 나면 아들은 금방 잠들어 숙제를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연변의 학교와 교재도 다르다 보니 아들의 성적은 하위층에서 헤매고있어 애간장이 탔다.

   출퇴근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소학교 4학년에 다니는 아들은 그나마 저절로 뻐스를 타고 통학할 수 있었지만 유치원에 다니는 딸애는 매일 데려가고 데려와야 했다. 아침 출근길에 내가 유치원에 데려다주면 아들이 방과후 유치원에 들려 데려오군 하였다.

   하루는 아들이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오다가 길가의 놀이터에 잠간 정신이 팔린 사이 동생이 사라져서 한바탕 소동을 벌리기도 했다. 동생이 잃어졌다는 아들의 울먹이는 전화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현장으로 달려가서 미친듯이 골목길을 훑으며 목이 터져라 딸애의 이름을 부르며 뛰여다니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눈물범벅이 되여 울고있는 딸애를 찾았을 때는 지옥에서 헤여나온 심정이였다. 딸애를 와락 껴안는 순간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길에서 유괴범이라도 만났더라면 어쩔번 했나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났다.

   그렇게 속 태우며 몇달간 살던 어느 날, 한국의 어느 소가전회사에서 처음으로 중국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근무지가 멀고도 낯설은 광동이였지만 재택근무라는 조건이 자석처럼 마음을 끌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돈을 벌 수 있다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운좋게 면접에 합격되였다. 주위의 견결한 반대도 무릅쓰고 광동으로 가기로 결정지었다. 때는  2004년1월이였다.

 

4. 고난의 행군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공교롭게 떠나기 전날밤에 폭설이 내려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버스가 끊기고 택시마저 드물어 속을 바질바질 태우다가 탑승마감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강심장으로 무작정 떠났지만 미지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걱정한대로 첫 시작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우선 아들의 학교입학부터 문제였다. 당지호구가 아니여서 국립학교에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몇번 학교로 찾아가서 사정하였지만 번마다 거절당했다. 애간장이 탔다. 하루는 작심하고 교장선생을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교무실에 없었다. 복도에서 한참이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무작정 집으로 찾아갔다. 문앞에서 몇시간 기다려 주위가 어둑어둑해서야 나타난 교장선생은 무척 놀라는 기색이였다. 나는 다짜고짜 앞길을 가로 막고 애걸하다싶이 사정했다.

   “선생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는 오늘 한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몇천리 고향을 떠나 두 아이를 데리고 살길을 찾아 여기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낯선 고장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생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애를 꼭 받아주셔야 합니다.”

   아마도 나의 얼굴에 씌여진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비장함과 절절한 모성애의 절규가 교장선생을 감복시킨 것 같았다. 끝내는 특별 채용으로 학교에 붙이기로 했고 딸애도 힘들게 지방유치원에 붙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동관은 사회치안이 문란하여 시퍼런 대낮에 행인의 물건을 강탈하는 일이 비일비재로 발생했다. 동관에 온지 얼마 안되여 나도 수천원어치의 재산을 강도한테 강탈당하고 허탈감에 망연자실하여 길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40여평방 되는 세집에서 1.5미터 너비의 침대에 가로누워 다리도 펴지 못하고 새우처럼 꼬부린 채 서로 엄마곁에 눕겠다는 애들을 량옆에 달래여 눕히고 잘 때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가끔은 나의 무모한 도전이 잘못된 선택은 아닐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만 말똥하니 쳐다보는 애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마주하면 주저앉을 수 없었다.

   일단 회사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죽기내기로 일해야 했다. 일들이 생소하여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업무량도 과부하여서 매일밤 자정이 지나서야 자리에 들군 했다.

   출장이 잦다보니 집에 애들만 있을 때가 많았다. 내가 출장 갈 때면 둘이 서로 의지하며 지냈는데 사이좋게 놀다가도 가끔 싸우기도 하여 딸이 울면서 핸드폰에 불이 날 지경으로 전화를 걸어올 때면 속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싸움도 잠시, 아들애가 중학교에 붙어 기숙사생활을 하게 되자 집에 딸애만 달랑 남게 되였다.

   하루는 열살밖에 안되는 딸을 집에 홀로 남겨두고 출장을 갔는데 자정이 지나서 갑자기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집에 귀신이 있어요. 금방 귀신이 언뜻 지나가는 걸 봤어요. 무서워서 자지 못하겠어요.”

   꿈을 꾸다가 놀라 깨여난 딸은 공포에 질려 목소리마저 떨고있었다. 딸애 곁으로 당장 달려갈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눅잦히며 나는 전화로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귀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단다. 전화기를 들고 자리에 누워라. 엄마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게. 옛날 옛적에...” 하면서 딸의 숨소리가 고르로와질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창 엄마 손길이 필요한 어린 것을 모질게 홀로 두고 떠나온 미안함에 나는 온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하여 나는 저녁과 주말 시간을 리용하여 외국어강습반에 가서 한국어강사도 하였고 소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본어과외보도도 해주었다. 그렇게 몇년을 열심히 벌며 아껴 쓴 덕분에 빚도 다 갚고 보금자리까지 마련할수 있게 되였다.

5. 애들과 함께 공부하고 성장하며 

 

   일도 일이지만 애들의 공부가 더 큰 문제였다. 광동에 처음 왔을 때 애들은 한어도 서툴었지만 아들은 소학교를 4곳이나 옮겨 다니다보니 공부에 지장이 컸다. 딸애도 소학교에 갓 입학했을 땐 락제점수를 맞을 정도로 성적이 매우 낮았다. 하여 일하는 외의 모든 정력을 애들의 공부에 몰붓기로 했다.

   소학교공부는 그런대로 쉽게 가르칠 수 있었지만 중학교 과목은 직접 가르치기 어려웠다. 특히 딸애는 리과과목을 힘들어했다. 그렇다고 과외보도는 너무 비싸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고민끝에 내가 직접 공부해서 지도해주기로 결심했다. 한달음에 서점에 달려가 참고서를 사왔고 애들의 학교 진도와 같이 자습하면서 저녁마다 보도해주었다. 출장갈 때면 가방에 참고서를 넣고 다니면서 차안에서도 문제풀이를 했고 저녁이면 전화로 지도하군 했다. 그렇게 초중 1학년부터 고중 2학년까지 애들의 수학, 물리, 화학 과목을 전담하여 보도해주었다. 애들을 키우는동안 나는 TV를 켜본 적이 없다. 나의 일상은 오직 돈벌이와 애들 공부를 위한 것 뿐이였다.

   딸애가 초중 3학년 때 담임선생이 나더러 학부모회의에서 자식교육 경험담을 소개해달라고 하여 강연한 적이 있는데 20여년 교원경력의 담임선생은 다 듣고나서 “이렇게 열성적인 학부모는 처음 본다.”며 감탄하였다. 딸애는 초중을 졸업할 때 입학률이 1% 밖에 안되는 동관중학에 입학하였다. 아들도 빈번하게 학교를 옮기는 어려움속에서도 재학하지 않고 순탄하게 본과를 마치고 미국에서 석사공부를 마친후 지금은 뉴욕중심에 자리잡은 글로벌회사에서 근무하고있다. 딸애도 해외 명문대학에서 학사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석사시험 준비중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 자식은 내손으로 잘 키워내겠다는 신념으로 손주들을 키워주겠다는 시부모님의 손길도 마다하고 애들과 같이 전국을 누비며 험난한 길을 헤쳐왔다. 고생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보람이 더 컸던 것 같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듯 하던 불행은 오히려 이악스레 살아가는 동력이 되였고 그것을 계기로 한걸음 한걸음 성장할 수 있었다.

 

6. 도전은 계속된다

 

   그동안 회사의 중국사업도 많이 키웠다. 상해에 영업부가 세워지고 동관엔 공장을 세웠다. 상해지사 설립초기엔 상해로 뛰여가서 직원모집, 영업망구축 등 기반을 닦아놓았고 동관에 공장을 세울 때도 공장건물 계약부터 시작해서 인테리어, 직원모집, 부품업체개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주도하여 추진했다. 그리고 매일 점심휴식시간을 리용하여 직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줘서 직원들이 본사에서 보내온 자료와 보고서를 자체로 리해할 수 있도록 했다. 공장을 차리면서 막중한 책임감에 발편잠을 자보지 못했고 새치 한오리 없던 머리가 반백이 되였다. 지금은 회사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년매출 5,000만원의 실적을 내며 생산한 제품을 세계 각지로 수출하고 있다.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고 20여년간 오직 애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성애에만 집착하여 살아오다보니 자신이 녀자라는 것을 잊고 지낸 것 같다. 남편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나는 지금도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장차 내 눈앞에 맘에 드는 멋진 남자가 나타난다면 그것도 내 운명이라 생각하고 주저없이 잡을 것이다.

                                       시상식에서 전경숙의장(오른쪽)과 함께
                                       시상식에서 전경숙의장(오른쪽)과 함께

   어렵고 힘들어서 삶이라고 한다. 남은 여생에 또 어떠한 시련이 닥칠지 모르지만 삶의 자양분이라 생각하며 달갑게 받아들이고 날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깨달으며 성장하는 보람을 느끼면서 즐겁게 살아갈 것이다.

 

전복선의 다른 작품 찾아보기    

가작상 수상작 (4) || 상처 입은 ‘어미새’의 애달픈 사랑 / '애심녀성컵' 제7회 생활수기 수상작 (10)

 

심사평

 

 

   일반 녀성들이 일생에 한두번 겪을가말가한 여러가지 불행들을 거의 다 겪으며 악바리정신으로 일과 자녀교육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은 글쓴이의 끈기와 의지력, 자녀교육을 우선시한 현명함과 실천력에 탄복을 금할수 없게 된다. 불행을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시련을 삶의 자양분으로 삼으며 단단하게 일어선 주인공, 어쩌면 개혁개방후 이 땅에서 역경을 딛고 도전, 분투하며 새로운 력사를 써낸 우리 민족 녀성들의 전형적인 대표가 아닐가싶어 본보기로 추천하고싶다.

   저자는 20여년의 파란만장한 인생려정을 씀에 있어 시종 꾸밈없는 진솔한 필치로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긴박감있게 써내려가고있다. 서두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소제목들이 가이드역할을 해주어 글이 길지만 주인공의 운명이 궁금하여 끝까지 읽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수작이다. 편폭의 제한으로 자녀교양에 필묵을 많이 두면서 본인의 창업스토리는 스치듯이 살짝 언급했는데 그 스토리에 관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억척녀성으로 숨가쁘게 달려온 그녀가 이제는 여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그 행복한 앞날을 축복하고싶다.

                                                 一남복실 (심사위원장)

 

                                  
                                  

 

수상소감

 

   작년의 가작상에 이어 올해엔 이렇게 묵직한 금상을 받게 되여 감개무량합니다. 저의 살아온 삶에 주는 상인 것 같아 감회가 깊습니다.

   평안하던 삶이 하루아침에 낭떠러지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니 어둡고 긴 터널도 끝내는 끝이 보였고 쨍하고 해뜬 날도 보게 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 한 가족이 단란히 모여앉아 식사를 하며 하루의 이야기로 웃음꽃 피우는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였습니다.  

   지나온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였습니다. 시련이 있었기에 피타는 노력을 하게 되였고 그래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맑은 날만 지속되면 사막이 되듯이 사람도 편안하기만 하면 성장이 멈추고 고진감래의 진미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역경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문학에 입문하면서 애심녀성포럼을 만나게 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였습니다. 2년간의 수기응모를 통하여 저의 문필이 눈에 띄게 성장했음을 놀랍게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남복실위원장님의 사심없는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같은 초학자들에게도 문학의 창을 열어주시고 날개를 달아주신 애심녀성포럼 관계자분들과 심사위원분들에게도 진심으로 되는 경의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숨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도전은 계속될 것입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복선(全福仙)략력:

 

 

1966년 길림성 도문시 월청진 출생/1985년 연변1중 졸업/1989년 심양농업대학 졸업/1990년~2002년 연변농업과학연구원 부연구원/2004년~ 한국 엔유씨전자 중국법인/2020년 문단 데뷔, <할머니 유산>, <개구리가 들려주는 동년의 추억>, <영화 구경>, <금반지>, <엄마의 메아리>,  <부유한 깍쟁이>,  <바다의 정>, <빈 성>,<외가집 이야기> 등 수필 다수 발표.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