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문학 13호 평론부문 최우수상 수상작

류경자 약력: 현재 서남민족대학교 강사. 연변대학교 중문과 학사∙석사,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역서 『디지털기술과 신사회질서의 형성』. 논문 「루쉰의 탈경계적 상상력과 치유의 글쓰기」, 「장용학 소설의 자기반영성과 메타픽션적 글쓰기」외 다수.
류경자 약력: 현재 서남민족대학교 강사. 연변대학교 중문과 학사∙석사,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역서 『디지털기술과 신사회질서의 형성』. 논문 「루쉰의 탈경계적 상상력과 치유의 글쓰기」, 「장용학 소설의 자기반영성과 메타픽션적 글쓰기」외 다수.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그간 많이 다루었던 한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의 삶에 관한 것이다. 너무 많이 다루어서 식상하다 싶을 정도지만 이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조선족들의 현재 삶이다. 식상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 주변의 삶 속에서 예리하게 발견할 수 있어야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논하고자 하는 소설 세 편은 식상한 주제를 식상하지 않게 하는 맛이 있는 소설들이다. 삶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는 작가들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백한의 <단무지는 죄가 없다>, 이동렬의 <내가 차버린 공>, 류일복의 <우상이란 뻥튀기>는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으며, 서술자인 ‘나’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조선족들이다. 소설은 그들의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의 한 단면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1. ‘무’와 ‘단무지’ 사이에서: 백한의 <단무지는 죄가 없다>
백한의 글은 언제 읽어도 항상 깔끔한 맛이 있다. 언어의 사용이나 문장의 구성, 소설의 전체 구조 모두 군더더기 없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단무지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유수와도 같이 단번에 쭉 읽힌다. 이번 소설 <단무지는 죄가 없다>는 한 여자를 중심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있다. 정확히 한국인 여자의 세 번째 가게 방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첫번째와 두번째 방문이 중간에 삽입되고 다섯 번째 방문까지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며 서술자의 이야기가 조금씩 완성된다. 

(1) 여자의 다섯 번의 방문과 미스터리의 지연
소설은 여자의 세 번째 마라탕 가게 방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진회색의 옷차림에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는 여자는 소설 첫 등장부터 하나의 미스터리이다. 여자가 자리 있냐고 물어봤을 때 ‘나’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홀에서 식사하는 걸 막고 싶을 정도로 그녀가 반갑지 않은 손님임을 밝힌다. 남편의 ‘가르치려던 지난번 그 고객’이라는 발언은 여자에 대한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도대체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가게 손님으로서 그렇게 환영 받지 못하는 것일까, 이 여자에게서 또 무슨 일이 발생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독자들은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무슨 큰 사건이라도 발생할 것 같은 마음에 조마조마해진다. ‘나’에게 이 여자는 “아무리 걸러내도 잘 걸러지지 않는 숙주나물 껍데기처럼 걸리적”거리는 불편한 존재이다. 그런데 드디어 사건이 터지고 만다. 음식을 다 먹고 여자는 한입 먹다 남긴 단무지가 딸려 나왔다고 한다. ‘엄연한 물증’ 앞에서 ‘나’는 죄송하다며 여자를 보내고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결국 영업을 마감하고 CCTV를 확인한 결과 그 여자가 일부러 한 것임이 밝혀진다. CCTV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눈을 떼면 중요한 범죄현장을 놓칠 것만 같”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화면을 보는 장면에서는 독자들이 함께 범죄현장을 잡는 듯한 긴장감을 가지게 만든다. 

단무지 사건 이후, ‘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여자의 첫 번째, 두 번째 방문을 서술한다. 처음 방문했을 때 여자는 “길 가다가 누군가에게 쫓겨서 급히 몸을 숨길 요량으로” 가게에 들어온 사람 같았고 여자의 몸에서는 불안한 기류가 흘렀다. 분위기로 보아 이 여자에 대한 서술은 처음부터 무슨 일이 발생할 것만 같다. 여러 가지 음식에 대해 물어보고 작은 메뉴 하나만 포장해 간 여자는 “염탐꾼 같기도 하고 호기심 가득한 어린애 같기도” 했다. 여자가 첫 방문에서 중국 음식의 메뉴에 관해 질문을 했다면, 두 번째 방문에서는 음식의 구체적인 내용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방문에서 여자는 ‘나’를 인사를 할 줄도 모르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가르치려 든다. 이에 남편은 그 정도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고 불편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나’의 시선으로 보는 여자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사는 사람’, ‘친구가 없는 외로운 사람’, ‘어떤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편견을 가진 여자의 말을 ‘호의’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나’의 이 생각은 오래 가지 못하고 세 번째 방문 이후 ‘단무지 사건’으로 그녀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된다. “누구랑 살까? 왜 매번 혼자 와서 식사를 할까? 치매환잔가? 아니면 조현병인가? 그것도 아니면 싸이코패슨가? 어디에 살고 있으며 누구랑 살고 있을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걸까? 외로운 걸까? 아니면 어디에서 마라탕가게를 운영하는 우리의 라이벌인가?” ‘나’와는 달리 남편은 ‘혼자 사는 외로운 여자,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라며 진상고객이라고 단정 짓는다. 여기까지 여자가 무슨 의도로 그런 사건을 저지르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으며 여자의 정체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의문만 더해간다. 

이어 네 번째 방문에서는 ‘이상한 털 사건’이 발생한다. 여자가 음식에서 이상한 털을 집어낸 것이다. 여자의 방문에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여자의 공격은 항상 예상 밖에서 일어나며 ‘나’를 방어불가 상태로 만든다. 그러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입장에서 문제를 크게 만들면 가게만 불리해지기 때문에 무조건 미안하다며 전액 환불에 음료수까지 한 병 들려보낸다. 단무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후 여자와 관련된 어떤 사건이 발생해도 이제 독자들은 그 진위가 더이상 궁금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상한 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독자들은 그 진위보다는 그 여자의 의도가 더 궁금해진다. 그녀는 왜 매번 이런 일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리고 마지막인 다섯 번째 방문에서는 여자가 어떤 남자 손님에게 이유 없이 욕을 하고 젓가락을 뿌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기까지 와서야 우리는 이 여자가 정신 이상자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게 되자 이제는 여자가 그런 일을 저지르는 의도보다 더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여자가 일을 저지른 후 그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자는 매번 일을 저지르고는 어떠한 보상 같은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항상 태연하게 사라진다. 단순히 괴롭히기 위해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이것이 여자가 무료한 삶을 견뎌내는 방식일까? 물론 누구도 알 수 없다.

여자의 정체는 다섯 번째 방문을 할 때까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소설의 결말에서 연두색 옷차림으로 바꾼 여자가 한 남자의 팔짱을 끼고 가게 앞을 지나는 모습이 보인다. 이에 ‘나’는 다시는 여자가 가게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 결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나’를 괴롭히는 여자의 행동이 멈출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어쩌면 무료한 삶을 견디는 다른 출구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소설은 여자가 하나의 미스터리인 채로, 그 여자가 만들어낸 사건의 진위를 밝히기보다는 그녀의 의도가 더 궁금해지게 되며, 결국은 다섯 번째 방문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는 ‘정신 이상’이라는 결과로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게 된다. 그러나 ‘정신 이상’이라는 결과로 여자를 둘러싼 모든 미스터리는 독자들을 허무하게 만든다. 소설의 시작에서 제시된 여자의 정체에 관한 수수께끼는 마지막인 다섯 번째 방문에서 반전을 가져오며 소설의 전개 과정에서 그 미스터리의 지연은 끊임없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지연이 여기서는 끝까지 지연된 채로 독자들을 허무의 함정으로 빠트리고 만다.

(2) 단무지의 은유와 ‘무’에 담긴 기억
‘단무지는 죄가 없다’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단무지’는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이다. 여기서 단무지는 은유로써 작용하며 여러 가지 함축적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단무지는 겉과 속이 같다는 긍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여자의 네 번째 가게 방문에 위선적이지 않고 솔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여자가 단무지와 같았으면 한다. 그리고 단무지는 메인 메뉴가 아닌 사이드 메뉴라는 측면에서 ‘나’의 신세와 닮아 있다. ‘나’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간과 쓸개는 고사하고 영혼도 없는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메인 메뉴가 될 수 없고 사이드 메뉴로 무시만 당하는 자신의 신세를 단무지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여기서 겉과 속이 같은 긍정적 측면과 아무리 노력해도 사이드 메뉴밖에 될 수 없는 부정적 측면으로, 상반되는 단무지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더 나아가 단무지의 역사를 볼 때, 겉과 속이 같은 이 순수한 단무지는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단무지는 원래 일본에서 발명한 타쿠앙즈케이며 한국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중화되었고, 현지화 된 단무지는 한국화 된 일식으로써 특이하게도 한국화 된 중국음식인 중국집 요리와 궁합이 좋아서 자장면이나 마라탕에 곁들여서 나온다. 한마디로 현재 단무지는 한국 음식인데 일본에서 유래했고 중국음식과 함께 식탁에 오른다. 여기서 단무지는 그것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무와는 대조적인 이미지이다. 여자가 무는 그 자체로도 맛있는데 왜 단무지를 만들었냐고 질문하는 ‘나’의 상상에서 드러나듯이, 무는 순수성을 상징한다. 한국인은 항상 단일민족이라며 순수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 순수혈통의 유지란 가능할까? 한민족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쉽게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국민양념으로 둔갑한 케첩도 원래는 중국의 복건성에서 유래”했듯이 전 세계 어느 민족을 보나 순수한 단일민족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단무지라는 음식에서 서술자는 서울에서 마라탕 가게를 하고 있는 자신과 연결시켜 단무지의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무의 변신이 예측 불가능하듯이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며 ‘나’ 또한 서울에서 마라탕 가게 사장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무가 단무지로 둔갑했듯이 미래가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변신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이렇게 단무지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한 몸에 안고 있다. 겉과 속이 같은 솔직함과 순수함, 메인이 아닌 사이드 메뉴로 항상 주변부에 머물러야만 하는 소외감, 한국, 일본, 중국 등 여러 이미지와 요소가 뒤섞인 혼재된 양상, 무에서 단무지로 둔갑한 예측 불가능성. 이러한 단무지의 속성은 조선족의 운명을 상징하며, 단무지의 역사 또한 조선족의 역사이다. 원래 순수했던 무가 일본, 중국 음식과 어울려 지금 단무지의 모습이 된 것처럼 조선족은 역사의 변천 속에서 항상 주변부에만 머물러야만 했고 여러 속성이 혼재된 채로 미래 또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모습이다. 

위의 단무지의 이미지와는 달리 ‘단무지의 본질’인 무는 소설에서 항상 고향의 기억과 함께 ‘나’가 힘들 때 등장한다. 여자의 세 번째 방문이 있은 후 ‘단무지 사건’으로 인한 고달픔을 달래는 것은 서술자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무를 먹는 꿈이었다. “엄마, 아버지, 고모,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와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서 무를 먹는 꿈이었다. 동생들은 초저녁에 이미 잠에 곯아떨어졌고 나는 깔깔대며 달큰한 맛이 나는 무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의 이 꿈은 모든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있는 꿈이다. 행복하게 달큰한 무를 먹는 꿈은 단무지 사건으로 지친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여자가 무가 그 자체로도 맛있다고 한 상상 속의 발언과 비교해 볼 때, 온 가족이 모여 순수한 무 그 자체로서 즐기는 장면은 어떠한 불순물이나 이물질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가족들로만 구성된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현재, 이제는 무가 서술자의 과거 기억에만 존재한다.

여기서 무에 담긴 기억은 서술자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며 ‘나’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준다. ‘단무지 사건’ 이후 ‘나’는 고향에서 가족들과 모여 달콤한 무를 먹는 꿈을 꾸며 지친 마음을 달랜다. 또 생계 때문에 글을 빨리 써낼 수 없어 괴로워하는 자신을 달래는 것 역시 무와 관련된 기억이다. 그 기억에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에 당근, 김장김치, 무 등 갖가지 음식이 등장하며 할머니가 김치움에서 꺼내 온 무는 그 무엇보다도 단 맛이었다. 그러나 “그 무가 왜 설탕과 식초물에 푹 쩔어서 본연의 상큼한 맛을 잃고 단무지로 둔갑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여기서 무가 과거 온전하게 존재했던 조선족 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단무지는 지금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 조선족의 존재를 의미한다. 과거의 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작가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본연의 상큼한 맛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부정적 시선이 여자와의 접촉을 거듭할 수록 변신을 수긍하는 모습으로 변한다. 여자가 무가 그 자체로도 좋다고 하는 것처럼 여자에게는 무가 순수한 한국인의 정체를 의미한다. 이방인들의 도래는 무를 지향하는 여자에게는 위협적이고 불편한 존재이다. 그래서 여자가 아무런 결과도 바라지 않으면서 매번 ‘나’에게 트집을 잡는 것은 “그녀도 나처럼 단무지가 되고 싶지 않은 무였을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앞에서 미스터리인 채로 풀리지 않은 그녀의 수수께끼, 즉 여자가 왜 매번 사건을 만들어내고 또 왜 매번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사라지는지에 대한 답은 여기서 제시된다. 그녀의 행동은 단무지로의 변신이 두려워 어떠한 이방인의 침투도 용납할 수 없는 거부감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무가 또 언제 어떻게 변신할지 모르는 것처럼 순수혈통이라고 자처하는 한국인 또한 단무지로의 변신은 불가피하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에서 작가는 ‘단무지면 또 어떠냐’며 “어디에 있든 어떤 형태로 있든” 본질이 무면 되고 그걸 잊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단무지는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 소설에서 이미 단무지 신세가 된 ‘나’는 아직도 무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여자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 매일 바쁘게 가게를 운영하며 숨가쁘게 살면서도 장애인들을 위해 과자를 준비해 놓을 정도로 경제적, 심리적 여유가 있으며 심지어 틈틈이 글을 쓰며 책도 내고 있다. 이는 마라탕 금액 100원의 차이를 따지는 여자와는 대조적인 이미지이다. 

이처럼 백한의 이 소설은 단무지라는 은유에 의해 구성되었다. 탄탄하게 잘 짜인 스토리에 중간중간 톡톡 튀는 비유는 이 소설의 단무지처럼 사이드 메뉴로써 다른 별미를 선사한다. 

(3) 상호텍스트성과 메타적 글쓰기, 그리고 노마드의 역사 쓰기
이 소설은 소설의 주 서사에서 벗어난 ‘글쓰기 서사’가 함께 등장한다. 서술자인 ‘나’는 마라탕 가게를 운영하며 틈틈이 글을 쓰는 작가이며, 수시로 편집의 원고 독촉에 시달린다. 그 원고 독촉으로 써낸 것이 바로 이 소설 <단무지는 죄가 없다>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소설의 작가는 텍스트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소설 쓰는 작가, 그리고 소설 쓰는 과정 모두 텍스트 안에 존재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서술자는 소설을 쓰려고 하지만 마라탕 가게 운영 때문에 도저히 글 쓸 시간이 나지 않아 괴로워하는 작가다. 

서술자의 작가 신분은 ‘나’가 운영하는 마라탕 가게 안에 비치해 놓은 여러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편견’, ‘신곡’, ‘백년의 고독’, ‘데미안’, ‘고도를 기다리며’, ‘관객모독’ 등을 통해 독자들은 작가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손이 가는대로 책을 꺼내서 읽다가” 손님이 오면 주방에 들고 들어와 선반 위에 되는대로 꽂아놓는다. 이미 아는 내용이지만 <백년의 고독>을 집어드는 ‘나’의 행동은 이 책이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이 작가가 쓰고 있는 소설과 관련되어 있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렇게 서술한다. “마르케스의 위대함은 어느 페이지를 읽든 독자를 흥미진진한 이야기속으로 끌어당긴다는 데 있다. 나는 이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로 걸어 들어간다. 책장을 덮으면 나는 마콘도에서 벗어나 내 추억속의 고향으로 떠난다.” 작가는 ‘백년의 고독’에 등장하는 마콘도라는 마을을 자연스럽게 추억속의 고향과 연결시킨다. 할머니와 돼지풀을 뜯으러 다니던 일, 할아버지와 미꾸라지를 잡던 일, 자전거 바퀴를 손질하는 아버지 곁에 앉아있는 모습, 엄마와 배추며 무를 캐던 가을의 텃밭, 할아버지가 매준 마당의 그네. 가족들이 모여 함께 사는 이 평온한 고향 모습은 마콘도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마콘도는 초기에는 죽는 사람도 없고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불화도 없이 화목하게 지내며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곳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소설이 전개될 수록 현대 자본주의 질서가 들어서면서 그곳은 수많은 불화에 휩싸이게 되고 파멸을 향해 굴러 떨어지며 결국은 부엔디아 집안도 마콘도도 망해버린다. ‘고독’을 대물림하며 번영과 몰락을 거듭한 부엔디아 가문 100년의 흥망성쇠는 조선족 공동체라는 조선족들의 과거와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현재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조선족 공동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위와 같이 이 소설은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상호텍스트성을 형성하고 있는 동시에 소설 쓰는 과정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메타픽션이다.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여러 곳에서 청탁을 받았지만 글 쓸 시간이 없어 초조해한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나’와 달리 거의 같은 시기에 소설쓰기를 시작한 선배언니는 남편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전업작가가 되어 문학상까지 받는다. 이렇게 글을 잘도 써내는 언니에게 ‘나’는 글의 ‘소스’를 빼앗긴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의 에피소드를 자기 소설에 넣겠다는 것을 막기 위해 얼떨결에 소설 제목까지 생각해 놓았다며 ‘단무지는 죄가 없다’라고 말해버린다. 이렇게 이 제목은 심사숙고한 끝에 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글쓰기 소스가 언니에게 도용될 위기에 처하자 급조해낸 제목이다. 이 소설이 기획된 것이 아닌 우연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계획되지 않은 서술자의 소설쓰기는 이와 달리 치밀하게 짜여 있다. 그리고 거의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코로나로 격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서야 ‘나’는 미리 정해진 이 소설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나는 노트북을 열고 한글창을 띄웠다. 그리고 ‘단무지는 죄가 없다’, 라고 제목을 입력했다.” 이렇게 이 소설은 드디어 시작을 하게 되며 다시 독자들이 완성된 소설을 읽는 것으로 순환구조를 가진다. 즉 소설의 결말에서 쓰기 시작한 이 소설은 독자들이 읽기 시작하는 것으로 완성이 되는 셈이다. 

자기반영적 성격이 강한 메타적 글쓰기는 글을 쓰는 동시에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을 돌아보고 성찰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현재 쓰고 있는 소설에서는 그 창작 과정을 보여주면서 허구라고 분명히 밝히지만, 동시에 그 글이 현실에서 실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그 진실성이 더 강조된다. 메타적 글쓰기의 이 이중성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소설에는 또 남편이 작가인 ‘나’에게 댓글을 열심히 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야 마라탕 가게가 맛집 랭킹 순위에 오르고 노출도가 높아져 주문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편이 ‘나’에게 작가가 댓글도 멋있게 못 다냐고 할 때 ‘나’는 장편소설도 아니고 뭘 길게 쓰냐고 대꾸한다. 음식점에 남기는 댓글은 먹어본 고객의 진실한 평가로서 그 존재 의미가 있다. 그러나 남편이 말하는 댓글은 거의 조작 수준이다. 말 그대로 소설 쓰는 작가에게 댓글은 소설과도 같은 허구의 것이며, 여기까지 읽으면 독자들은 실제 삶이 허구인지, 소설이 허구인가 이미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여기서 작가가 이러한 서술 방식을 택하는 것은 진실된 조선족 공동체의 역사를 말하면서 이 역사를 문학작품으로써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조선족 공동체를 문학이라는 방식으로 다시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국가와 같은 형식을 통해 거주하는 자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들뢰즈는 “노마드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했다. 현재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노마드이다. 이 소설의 ‘나’와 ‘나’의 남편처럼 조선족들은 언제 어디서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창조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족들의 정체성이 위기에 처한다고 해도 죄가 없는 단무지의 변신처럼 조선족들의 이야기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역사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현실에서의 존재는 사라질지라도 역사로서, 기억으로서의 조선족 공동체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백한과 같은 조선족 작가들의 글쓰기는 조선족 공동체를 서사의 방식으로 기억하게 하며 오늘날 우리가 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2. 공감의 부재: 이동렬의 <내가 차버린 공>
이동렬의 소설은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반복해서 읽고 음미해야 애매모호한 기표들 사이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1인칭 시점으로 쓰인 <내가 차버린 공>의 가장 큰 특징은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은 서술자인 ‘나’(욱이)가 한국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후부터 시작한다. 서사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한국에서의 현재 ‘나’의 삶이 소설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할머니와의 과거 고향에서의 삶이 기억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중간중간에 삽입되며 두 서사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1) 아이의 냉정한 시선과 외로운 존재들
이 소설에는 ‘나’(욱이), 아버지, 새엄마,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아무 사이도 아닌 윤구름이 등장한다. 17살인 ‘나’를 중심으로 가족들 간의 관계가 밝혀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가족들 간의 관계라 해도 사실은 가족과 ‘나’와의 관계이지 그들 간의 관계는 거의 서술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중심으로 연결된 그 가족관계도 매우 위태롭다. 가족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냉정하다. 

우선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보자. 아버지는 ‘나’가 유치원에 입학하던 날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이튿날 한국으로 떠난다. 그날 찍은 사진은 아버지가 오랜 세월을 보낸 사진처럼 소중히 남기고 싶어 흑백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아버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진 이야기’가 ‘나’에게는 ‘동화 같은 얘기’로 들린다. ‘나’는 아버지의 감정에 전혀 공감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아버지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공항에 마중 나왔을 때도 ‘겁날 것 없다며 공부 잘해야 한다고’ 일방적인 사상 교육을 혼자서 신나게 한다. 또 17살이면 자립을 해야 한다며 대한민국에서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으니 공부가 안 되면 자신과 현장 가서 노가다나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새 아파트를 구입하고 ‘나’의 방을 고급스럽게 채워 넣는가 하면 대학교만 가면 차도 사주겠다고 한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자식 교육을 보충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아버지는 욱이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는가 하면 협박에 유혹에 갖은 공세를 퍼붓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과 달리 욱이는 ‘부담스럽고’ ‘서먹서먹하고’ ‘안 좋은 기색을 내보이며’ 싫기만 하다.

새엄마와의 관계는 그녀가 ‘나’를 부르는 호칭에서부터 드러난다. 아버지가 여러 번 고쳐주어도 ‘우리 아들’ 혹은 이름인 ‘욱이’ 대신 ‘학생’이라고 부른다. ‘욱이’라는 이름 혹은 ‘우리 아들’은 매우 친근한 호칭이지만, ‘학생’이라는 호칭은 길거리에서 아무에게나 길을 물을 때나 쓸 법한 아무런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호칭이다. 이 호칭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새엄마는 ‘나’를 아들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새엄마는 ‘나’에게 ‘한민족’, ‘한핏줄’이라는 이유로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에게 했을 법한 질문인 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면 누가 이겼으면 좋겠냐는 질문이나 한다. 그러나 ‘나’와 혈연관계가 아닌 새엄마는 부담스러운 아버지, 어머니와 비교했을 때 “두 팔을 풀면 참새처럼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어서 전혀 부담이 없으니 오히려 “힐링하는 기분”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와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새엄마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듯이 나 또한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에 대한 ‘나’의 호칭은 시종일관 ‘여자’이다. 5년하고 두 달여 만에 만나게 된 어머니는 “나를 덥석 끌어안”고 눈물을 쏟아내지만, ‘나’는 이상한 눈길을 보내오는 주변 시선 때문에 오히려 창피하고 짜증이 난다. 잘 살고 있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힘겹게 살고 있다.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대학 갈 ‘나’의 학자금은 마련해 놓았다며 아버지가 돈이 없다고 하면 어머니가 대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나’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는데도 뼈아프게 번 돈을 달갑게 내놓으려고 한다”며 ‘보상심리’ 정도로 취급한다. 

아버지, 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나’를 향한 ‘일방통행’이라면, 할머니와 ‘나’의 관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쌍방통행’이다. 소설의 표현대로라면 끈끈한 ‘운명공동체’이다. 할머니와 ‘나’는 각각 자식과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사람이다.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나’를 보살피는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는 것이다. 부모가 그립지만 내색하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는 ‘나’처럼 할머니도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지 않고 우악스럽게 산다. 다만 ‘나’와 같이 살면서 넋두리가 부쩍 늘게 된다. 잘못을 저지른 ‘나’에게 한국에서 잘 사는 부모가 왜 아들을 데려가지 않고 자신을 고생시키냐며 자식에 대한 서러움을 ‘나’에게 퍼붓고는 미안한 마음에 또 위로를 해준다. 외롭게 사는 할머니는 이렇게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아이인 ‘나’한테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며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내심 아버지가 할머니를 한국으로 모셔 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가 왜 여기 편한 고향을 놔두고 너네 남조선에 가서 살겠니?”라고 말할 게 뻔하다. 할머니는 조선족 1세대에 가까운 존재로서 자신의 뿌리가 있는 한국에 오고 싶어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너네 남조선’이라고 말하며 분명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물론 ‘나’의 짐작이지만 평소에 할머니가 그런 생각을 자주 드러냈기에 이런 짐작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한국 바람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서러움일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은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기서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를 보여주는 디테일을 발견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할머니의 죽음에 걱정이 태산이라면서도 별로 슬퍼하지 않는 목소리이다. ‘나’가 할머니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가신다. 할머니의 죽음은 자신에게 의지가 되었던 유일한 존재가 사라짐으로 인해 그 ‘운명공동체’가 와해되면서 발생하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가족들과는 달리 욱이는 아무 사이도 아닌 윤구름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윤구름의 아버지는 사업 말아먹고 종적을 감추었고 어머니는 그해 딴 남자를 만나 시집가버려서 그녀는 현재 혼자 살고 있다. “스스로 독립해서 남보란 듯 잘 사는 것”이 인생 최고 목표인 윤구름과 아빠한테 손 안 내밀고 소비돈을 벌 수 있으면 떳떳해 질 수가 있고 사람 구실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욱이는 서로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결국 욱이는 돈을 쉽게 번다는 생각에 윤구름이 끌어들이는 보이스피싱과 같은 범죄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어렸을 때 배운 격투기 덕분에 경찰의 손에서 벗어나긴 하지만 CCTV가 도처에 깔려 있는 한국에서 숨을 곳은 없다. 소설에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실형을 받고 추방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중국에 돌아가면 ‘나’와 함께 할 사람은 없다. 그나마 운명공동체인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제 이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 
이상과 같이 ‘나’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담스러운 존재이고, 새엄마는 쉽게 털어버릴 수 있는 가벼운 존재이며, 할머니는 “매일 입는 옷이나 먹는 밥”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부모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떨어져 산 관계로 그리움 같은 것은 없으며 기껏해야 나중에 “의지해야 할 것 같은 존재”이다. 욱이는 시종일관 가족들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족들 사이에는 온정이 느껴지지 않고 최소한의 소통도 없이 각자 살아가며 모두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외로운 존재들이다. 

(2) 유동하는 공의 은유와 위로
이 소설은 디아스포라에 관한 이야기이자 유수아동(留守兒童)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것은 고향에 남은 아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아이가 다 자라서 부모와 마주한 후의 이야기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의 상처는 커서 치유가 가능할까? 소설을 읽는 순간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되며 그 치유의 열쇠를 찾기 위해 끝까지 읽어 내려가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나’의 부모는 어렸을 때 주지 못한 사랑을 뒤늦게야 보상해주고자 한다. 그러나 제목이 암시하듯 ‘내가 차버린 공’이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차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공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유동적인 이미지이다. 소설 속의 부모가 떠나버릴 때는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자식이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아니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무턱대고 ‘자식을 위한’이라는 명목을 앞세우며 행동한다. 그것이야말로 부모들의 비열한 이기주의이다. 이 소설은 한 아이의 시선으로 그것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고 있다. 

과거 기억을 통해 드러난 욱이의 유년 시절은 외로우며 여러 가지 상처로 얼룩져 있다. 잘 때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며, 어른들이 애가 외로워 어쩌겠냐고 하지만 ‘나’는 햄버거, 콜라, 게임을 할 수 있는 폰만 있으면 된다고 하고, 친구들에게 얻어맞은 후에는 남몰래 종합격투기도 배운다. 스스로 외롭고 힘든 삶을 이겨내는 방식이다. 이때 무엇보다도 큰 위로가 되는 것은 할머니가 젖통 대신 쥐어 준 작은 공이다. ‘나’는 이 공으로 “친구 뒤통수를 정확히 맞출 수가 있고 벽에 튕기며 날아다니는 꼴을 보고 즐기기도 했고, 길을 가면서 차거나 뿌리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서 이 공은 공격의 도구, 소통의 도구이자 외로움을 달래는 위로의 도구이다. 그래서 이 공은 ‘나’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항상 불룩하게 솟아있”으며, “손으로 쓰다듬으면 온기가 살아났”고, “가슴에 엉켜있던 이름 모를 불안들이 슬그머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불행히도 교실 유리창을 박살내면서 ‘나’는 이 정든 공과 이별하게 된다. 이렇게 사라졌던 공이 한국에 오면서 할머니가 ‘나’의 짐에 몰래 넣어 다시 ‘나’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할머니의 젖통 대신 어렸을 때 위로의 의미로 쥐어 주었던 것처럼 자신을 떠나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다시 그 공을 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공으로 새엄마를 맞추는 상상을 하며 기뻐한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 공으로 사람을 실제 공격하지는 않는다. 공을 던지는 행동을 멈추는 동시에 욱이는 깡통을 차는 새로운 버릇이 생긴다. 깨끗한 대한민국에 하필이면 깡통이 유난히 욱이의 눈에 띈다. 그리고는 그 깡통을 차고 싶은 생각에 발이 근질거리며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차버린다. 마음의 의지가 되었던 유년의 공이 성인이 된 욱이에게는 깡통으로 이동한다. 유년의 욱이에게 공이 큰 위로가 되었다면, 성인이 된 욱이에게 깡통은 이제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 공에서 깡통으로의 이동은 고향에서 타지로, 과거 할머니와의 삶에서 현재 부모와의 삶으로, 따뜻한 위로에서 걸리적거리는 불필요한 존재로, 그 이미지가 유동한다. 유동하는 시간, 공간과 현실에 따라 그 이미지도 유동하는 것이다. 고향에서 공은 욱이에게 위로와 치유가 되는 사물이다. 그러나 그 치유적 기능을 가진 사물이 뒤늦게 찾아온다면 치유의 역할 또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공이 욱이에게는 위로가 되었지만 이미 ‘냉혈동물’이 되어버린 욱이에게 시간성과 공간성이 부여된 깡통은 더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욱이에게 깡통은 항상 차버리고 싶은 사물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욱이는 늘 혼자 상처를 치유했고 스스로 강해지면서 결국은 할머니가 말한 ‘냉혈동물’이 되어버린다. ‘냉혈동물’이라는 할머니의 애칭처럼 부모의 감정과 사랑에 욱이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며, 부모 또한 욱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며 그의 감정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욱이에게는 오히려 공이 소통의 대상이 되며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소중한 물건이자 받지 못한 부모 사랑의 대체물이다. 다 자라서 드디어 한국의 부모 곁에 올 수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부모가 필요하지 않을 때였다. 욱이의 부모는 돈을 버느라 아이를 버리고 한국으로 떠났지만 지나간 세월은 돈으로 보상되지 않는다. 욱이 어머니의 “이제 다 커서 왔으니 이젠 시름이 놓인다고, 부모님들이 고생한 보람 이제 빛을 볼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은 할머니가 아닌 어머니가 고생스레 키운 듯한 발언으로 들려 유치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아빠와 엄마는 자기들의 수요에 의해 나를 분할했고, 어느 한 쪽에다 양육권을 귀속시켰고, 자식 스스로의 어떤 수요에 따라 양쪽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부모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나’는 비아냥조로 그들의 이기주의를 비판한다. 

한국에 온 ‘나’는 공을 노는 대신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긴다. 돌고 돌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2호선 전철을 타고 몇 바퀴씩 돌고 도는 것이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2호선처럼 중국에 있으나 한국으로 오나 시간과 장소의 이동만이 있을 뿐 욱이는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채로 제자리에 있다. 아버지가 선물한 시계는 “1분마다 일정하게 회전해 손목의 움직임이나 위치에 관계없이 중력의 영향을 균일하게 받도록 설계”돼 있으며 “지속적인 회전을 통해 시계에 가해지는 중력의 영향을 상쇄”시킨다. 마찬가지로 이 시계처럼 어떠한 움직임이나 이동에 상관없이 ‘나’의 시간 또한 중력의 영향을 균일하게 받으며 일정하게 회전한다. 고향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든, 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든, 범죄를 저지르든, 할머니가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지든, 어떠한 움직임이나 변화에 상관없이 욱이의 시간은 여전히 정확하게 흐를 것이다.

 

3. 치유의 메타포: 류일복의 <우상이란 뻥튀기> 
류일복의 <우상이란 뻥튀기>는 차별에 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같은 한국 회사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이동우, 조선족인 이홍수와 ‘나’(류수동) 등 세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회사일과는 전혀 무관한 사적인 관계로 갈등을 겪는다. 한국인과 조선족과의 갈등이 아니라 두 조선족의 갈등이다. 소설의 지적대로 지금 한국에는 흔한 이씨보다 더 많은 것이 연변사람이다. 소설은 두 사람의 갈등을 중심으로 조선족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과 차별을 정면으로 다룬다. 

(1) 차별의 논리와 보이지 않는 폭력
이 소설은 이방인으로서의 조선족이 한국에서 당하는 차별을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행동과 언어 속에 내재해 있는 구조적 폭력을 폭로하는 데에 있다. 이방인들은 흔히 자기들에게 잘해주는 비이방인들에게 선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고 감사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선의에는 우리가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차별이 존재한다. 물론 차별을 하는 사람이 의도적일수도 있겠지만 차별을 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모두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 소설에서 이홍수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바로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고 발견하지 못하는 차별이다. 
1인칭 서술자인 류수동은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이다. 한국의 회사에 입사한 후 한국 동료인 이동우가 류수동에게 같은 조선족인 이홍수를 소개해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 주눅이 들지 않으려고 미묘한 힘겨루기를 한다. 같은 조선족이지만 이홍수에 대한 류수동의 불편함은 소설이 전개될 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첫 만남부터 “어딘가 건방진 데가 있어 슬그머니 비위가 상했”고, 또 별로 돈도 안 되는 회사에 왔다고 몰아치는 바람에 불쾌했고, 공무원 퇴직의 경력과 자신의 재산에 대해 공개하며 심심해서 일한다는 이홍수의 ‘심심소일의 코드’는 부질없는 과시욕처럼 들렸다. 그리고 간식을 미리 챙겨줬다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홍수가 얄망궂었고 도시이야기만 하는 그에 대해 반감만 더해졌다. 이렇게 같은 조선족인 두 사람은 이동우의 “같은 연변사람끼리인데 잘 지내”라는 바람과는 달리 사이가 더 나빠지기만 했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은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나 반응에서도 상반된 두 가지 사유를 보여준다. 

이동우는 자신이 입던 옷을 이홍수에게 주려고 한 적이 있는데, 류수동은 그것을 이동우의 호의로 생각하고 이홍수는 조선족이 못산다고 깔보고 그러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홍수는 하청직원과 정직원을 함께 일을 시켜 젊은 사람이 급여를 훨씬 더 많이 받으면서도 나이 든 자신을 몸 쓰는 일을 시켜 힘들게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한국인인 이동우는 비정규직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한국은 나이 차이 문제가 아니라 직장경력에 따라 선후임을 따라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홍수는 그의 말에 비정규직에다 조선족이기 때문에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다. 여기서 이동우의 대답에서는 평소에 갖고 있던 그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쓸데없이 문제를 만들지 말고 입 닫고 조용히 돈 벌어서 귀국하라는 이동우의 말은 억압이나 별 차이가 없다. 이 논리대로라면 이방인들이 한국에서 어떠한 차별대우를 받아도 돈만 벌면 되니까 참고만 있어야 한다. 진지하게 타이르는 이동우가 동포들을 위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이미 차별과 편견이 체화된 사람이다. 스스로도 본인이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조용히 있으라는 이동우의 ‘진지한’ 태도가 더 문제다. 이동우는 한국인인 자신도 정직원이 아닌데 조선족들이 어떻게 정직원이 될 수 있냐는 뉘앙스로 말을 한다. 단지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정직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차별이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나’가 이홍수를 중국식 호칭으로 ‘노리’라고 부르고 이홍수가 ‘나’를 연변식 호칭으로 ‘류수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다 둥글게 살자고 하는 거”니까 환경지배를 따라야 한다며 듣기 거북하다고 한다. 정주민에게 노마드는 자신의 질서와 체계를 파괴하는 위협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노마드를 완전히 동화시켜 자신의 일부분을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동우는 “환경지배를 따라야 한다”는 이유로 둥글게 살아야 된다면서 호칭에서조차 이홍수와 류수동에게 한국의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여기서 이홍수와 류수동이 한국인 중심의 규범을 내면화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이러한 환경 자체가 그들에게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물론 물리적인 형태의 폭력은 아니지만 조선족들에게 일방적으로 기대된다는 측면에서 차별적이다. 부르디외는 “지배구조의 사고방식이나 지배형태, 문화양식을 사회의 자연스러운 질서인 듯 보이는 상황”을 상징적 폭력이라고 했다. 이동우의 아무 말 말고 조용히 돈만 벌고 귀국하라는 말이나 한국식 호칭을 따라야 한다는 발언은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지배형태를 묵묵히 따라야 하는 조선족들의 무기력한 상황을 보여주며 조선족들이 쉽게 이러한 상징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하는데,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객관적 폭력인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홍수와 류수동에게 누구보다도 친절한 이동우의 경우가 객관적 폭력에 해당한다. 술집에서 다른 한국인들이 ‘조선족 새끼들이 남의 땅에 왔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라는 말로 이홍수에게 퍼붓는 욕설은 명확히 식별 가능한 주관적 폭력이다. 이러한 주관적 폭력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대응할 수 있지만, 이동우의 경우처럼 보이지 않게 만연해 있는 객관적 폭력은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흔히 간과하기 쉽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홍수처럼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공동체로 통합될 수 없는 이방인들을 그 경계선 밖으로 추방, 배제하는 행위가 바로 폭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2) 뻥튀기의 은유와 유동하는 이미지
류수동의 시선으로 보는 이홍수의 이미지는 뻥쟁이다. 이홍수는 이동우가 자기가 입던 옷을 주는 것을 거절하기 위해 자신이 연변 부주장의 동창이며 과거 노무송출 무역회사 사장으로 한때는 잘 나갔다며 거짓말을 잔뜩 늘어놓는다. 류수동과 이동우는 뻥튀기가 심하다며 이홍수를 비웃는다. 뻥튀기는 사기처럼 남한테는 직접적인 해나 누가 되지는 않지만 그 대화 상대를 미덥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며 검증에는 취약한 시한폭탄과도 같다. 노란 옥수수는 하얀 튀밥으로 몸피를 불려 ‘완전한 탈바꿈’을 이루지만, 뻥튀기를 그대로 방치하면 미세먼지처럼 서서히 만연되고 검증을 견디지 못하면 어느 순간 폭발한다. 류수동은 이홍수의 이 뻥튀기의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어릴 적 고향의 뻥튀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어릴 적 고향 동네에 울려 퍼지는 “옥씨 튀우개 튀우시오” 하는 뻥튀기 아저씨의 소리와 함께 ‘나’는 강냉이 자루를 둘러메고 신바람 나서 뛰어나간다. 뻥튀기를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화기애애하게 모여들며 아이들은 희희낙락 다가온다. 추운 몸을 녹이면서 노란 강냉이들이 하얀 목화송이처럼 둔갑해 나오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뻥튀기 아저씨의 구수한 천일야화 같은 옛말에 빠져든다. 특히 ‘백두밀림의 호랑이를 잡은 명포수의 이야기’는 뻥튀기 만큼이나 구수하다. 뻥튀기에 깃든 과거 조선족 공동체가 함께 모여 사는 아름답고 따뜻한 추억이다. 이 화면이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은 뻥튀기와 함께 아저씨가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들은 풍문과 설화를 제법 그럴싸한 입담으로 걸쭉하게 엮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 뻥튀기와 아저씨의 옛말은 옛말처럼 잊혀져 갔고, 가끔 마음이 추울 때면 그 차디찬 겨울 바깥에서도 남녀노소를 화기애애하게 모아주던 살가운 이웃 같던 뻥튀기 난장의 따뜻한 화로를 떠올려 보는 것으로 애써 데울 뿐이다. 이렇게 뻥튀기의 추억은 고향의 온정이 가득한 채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기억은 추운 겨울에도 몸을 데울 수 있을 정도로 항상 따뜻한 위로가 되며 힘든 마음을 달래 준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뻥튀기 가게를 보게 되자 ‘나’는 근처에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뻥튀기 가게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생각나면 퇴근길에 들려서 뻥튀기를 사왔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뻥튀기를 먹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직장에서 누군가와 부대낀 날이면 더 치열하게 뻥튀기를 움켜쥐어 스트레스를 녹여내듯 와삭와삭 씹어댄다. 그러면 몸이 가뿐해지고 뇌리가 조금씩 비어가는 것 같으며, 어떠한 불쾌함과 피로도 바로 잊혀진다. 심지어 ‘나’의 뻥튀기 얘기에 별거 가지고 다 신비해한다고 웃는 이홍수에 대해, ‘나’는 “옛 정감도 없는 저 사람”을 과연 “고향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든다. 뻥튀기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홍수에 대해 고향사람이라는 정체성까지 의심할 정도로 뻥튀기는 고향으로 치환되며, 말 그대로 뻥튀기는 ‘나’에게 위로이자 치유이며 고향 그 자체이다. 이렇게 뻥튀기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고향과 결부되면서 위로와 치유라는 따뜻한 긍정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뻥튀기’가 긍정적 이미지인 ‘우상’이라는 기호의 부정적 변화와 마주치게 되면서 또다시 부정의 이미지로 변모한다. 

마음이 맞지 않는 이홍수와 ‘나’는 ‘우상’이라는 영화에 나타난 조선족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는 같은 불쾌감을 드러낸다. 영화 ‘우상’의 감독은 ‘개인이 이루고 싶은 꿈이나 신념이 맹목적으로 변하면 그것 역시 우상’이라고 했다. 여기서 감독이 말하는 우상은 베이컨의 4대 우상 중의 ‘극장의 우상’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럴듯하게 꾸며진 철학이나 학설, 전통을 무조건 믿는 것에서 생기는 선입견과 편견을 말한다. 우리가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꼭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맹신하지 말아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무엇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진실 앞에 귀를 막고 눈을 가리게 하며 비판적인 사고 없이 무조건 믿게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우상이란 뻥튀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상’과 같은 꿈이나 신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란 완벽한 탈바꿈을 하는 허위적인 뻥튀기와 같은 것이어서 가끔은 왜곡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편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 후 이제는 의미가 없다며 다시는 회사에 나오지 않으려는 이홍수를 보고 오히려 ‘나’에게는 이상적이 아니었던 고향이 이홍수에게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우상적인 고향’이라며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나’는 “조상의 뿌리도 돌아보려 하지 않고 돈밖에 모르는 속물이 연변의 얼굴”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동우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갔다는 말을 뻥튀기로 생각한 것과 그동안 이홍수를 뻥쟁이 취급한 것, 이홍수의 아들이 그를 ‘도시로의 떠돌이 허풍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말로 하늘 높이 비행기를 태워준다고 나도 너도 우리 모두 똑같은 타국의 직장생활이 하루아침에 무릉도원”이 될 것이라는 맹신, 이 모든 것이 ‘우상이란 뻥튀기’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제한된 인간군상의 양치기’일 뿐이다. 작가는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그냥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상식의 선에서 그쯤 해야 한다는 바람은 잘못된 결정타가 되는 오식의 틈새를 만들었고, 어느 순간 뻥튀기는 뻥튀기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살상무기로 빛기둥을 뚫고 튀어 올랐다.” 진리처럼 이동우와 이홍수가 허풍 치는 것이라는 맹목적인 확신은 ‘뻥튀기가 다시 뻥튀기처럼 살상무기로 전환’하는 오류나 다름없음을 자각한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으로 ‘우상’에 대한 맹신의 와해는 ‘나’를 어렸을 적의 ‘뻥튀기’ 향수가 깃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 물론 고향에서의 삶이란 또 오랜 한국에서의 생활 때문에 쉽게 적응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내 한국 또한 우리가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맹신을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는 “아랫집과 이웃집으로 끈끈히 녹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는 다시 한국으로 가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이 아닌 단지 ‘먹고살기 위한’ 일시적인 ‘책략’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떠돌이 뻥튀기 아저씨’인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서두의 ‘희망이란 우상’이라는 긍정적 이미지에서 ‘우상이란 뻥튀기’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뻥튀기의 이미지가 고향과 결부되면서 부정에서 다시 긍정으로, 추억의 뻥튀기에서 다시 희망으로 ‘사계의 무한 순환’처럼 순환한다. 

이 소설에서 이홍수의 ‘도시로의 떠돌이 허풍인생’ 이미지는 류수동의 어릴 적 고향 뻥튀기 아저씨의 이미지와 겹친다. 여기저기 떠돌며 호랑이 이야기를 하는 뻥튀기 아저씨와 허풍이 심한 이홍수는 미묘하게 닮아 있다. 이홍수의 뻥튀기와 고향의 뻥튀기 정경의 연결은 시한폭탄 같은 ‘뻥’이 아름다운 ‘옛말’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변화는 백한의 <단무지는 죄가 없다>와 묘하게 비슷하다. 단무지와 뻥튀기의 이미지는 모두 고향과 연결되면서 차츰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한다. 백한은 메타적 글쓰기라는 문학적인 방식을 통해 조선족의 역사쓰기를 가능하게 했다면 류일복은 뻥튀기 아저씨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옛말 이야기를 통해 조선족 서사를 이어간다. 
백한, 이동렬, 류일복은 모두 재한조선족 작가이다. 그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한국이라는 먼 타지에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이며, <단무지는 죄가 없다> 속의 ‘나’처럼 바쁜 일상 속에서도 틈틈이 글을 써 나간다. 그들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자기 위안이기도 하며 타지에서 받은 상처를 보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리 바쁜 일상이라도 글쓰기를 멈추려 하지 않는다. 백한 소설의 ‘나’는 코로나에 걸려서 격리되었지만 오히려 그러함으로써 자유를 얻게 되며 “가슴은 오랜만에 희열로 벅”찬다. 코로나에 걸렸지만 그 병이 오히려 약이 되어 ‘나’의 상처를 치유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 세 편의 소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세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단무지, 공, 뻥튀기는 모두 소설의 주제를 복합적으로 드러내며 은유로서의 중요한 기능을 한다. 단무지, 공, 뻥튀기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과거 고향의 이미지와 연결되며 단무지, 공, 뻥튀기를 매개체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주인공은 위로를 받으며 치유에 이른다. <단무지는 죄가 없다>에서 ‘나’에게는 무가 고향이며, <내가 차버린 공>에서 욱이에게는 공이 할머니이자 고향이며, <우상이란 뻥튀기>에서 류수동에게는 뻥튀기가 고향이다. 여기서 무, 공, 뻥튀기는 고향과 타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이며 주인공들을 과거의 고향으로 초대한다. <단무지는 죄가 없다>에서 온 가족이 모여 무를 먹는 기억은 고향의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기억이며 단란한 가족에 대한 기억이다. 무에 대한 기억은 ‘나’가 힘들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과거이며, 그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나’의 상처는 스스로 치유된다. <내가 차버린 공>에서 공은 고향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자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유년에 대한 기억이다. 공은 유년의 욱이에게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며 심지어 소통의 도구이자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우상이란 뻥튀기>에서 뻥튀기는 고향 그 자체이며, 어렸을 때 고향에서 들은 뻥튀기 아저씨의 옛날 이야기와 뻥튀기에 대한 기억은 한국에서 힘들게 사는 류수동에게 큰 위로가 되며 그가 받은 상처 또한 치유된다. 

이와 같이 단무지, 공, 뻥튀기는 모두 치유의 메타포로써 기능을 한다. 그렇다고 이 이미지들은 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며 소설의 서사와 함께 끊임없이 유동한다. 무에서 겉과 속이 같은 단무지로의 변신, 위로가 되는 공의 이미지에서 불필요한 존재인 깡통으로의 이동, 뻥튀기의 노란 옥수수에서 하얀 튀밥으로의 ‘완전한 탈바꿈’. 단무지, 공, 뻥튀기의 이미지가 끝없이 유동하며 그 변신이 예측 불가능한 것처럼 시대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조선족의 운명 또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모르며 그 무한한 변화에 잘 대처하는 것만이 우리의 현명한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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