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어학자 최윤갑 교수

2022년 12월 25일 12시, 걸출한 언어학자 최윤갑 교수가 92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본지는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이 글을 싣는다 - 편집자

2012년 8월 9일, 교직종사 60주년 기념학술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최윤갑교수
2012년 8월 9일, 교직종사 60주년 기념학술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최윤갑교수

중국 조선어연구의 선구자

얼만 전 나는 최윤갑 교수가 요간판탈출로 괴롭게 보내던중 대학부속병원에 입원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학교 리용서기님과 함께 문병을 갔다. 방금 수술을 마치고 병상에 누워있는 최교수는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최교수는 우리에게 지금 연변대학이 추진하고있는 캠퍼스확장공사는 아예 상상할수도 없는 거창한 공사로서 앞으로 대학발전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것이라는 확신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금년에 개교 60주년을 맞이하니 자신도 감개무량함을 금할수가 없다고 하셨다. 최교수는 새로 출간하는 자신의 저서 《한국어문법신강》 서문에 “금년은 연변대학교 창립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필자는 자신을 키워준 모교 연변대학교 창립 60주년에 이 책을 바칠수 있게 되여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고 특히 밝혔다고 하셔서 나는 무등 감격을 금할수가 없었다. 진정한 학자들의 대학사랑은 학문적성과로 표현되고 있음을 나는 피부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최교수는 80고령이지만 학문에 대한 집념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젊은이들도 “컴맹”이 많았던 90년대 초반부터 최교수는 남먼저 컴퓨터를 사용하여 《중국에서의 조선어발전과 연구》(1992), 《중국,조선,한국에서의 조선어차이에 대한 연구》(1993), 《조선어한국어연구》(1998), 《한국어문법》(2000), 《한국어문법신강》(2009) 등 수십만자의 학술저서 집필을 끝낸바 있어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였다. 이에 앞서 최교수님은 《조선어어음론》(1974), 《조선어문법》(1974), 《조선어학사전》(1984), 《중세조선어문법》(1987), 《조선어규범집해설》(1987) 등 저서를 펴내여 대학교재로 활용함으로써 문화대혁명후 대학에서의 조선어 교육과 연구 그리고 중국에서의 조선어 발전, 규범화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학문을 떠난 학자의 삶은 가치가 없다는것이 최교수의 인생철학이고 리념이다. 연변대학교의 제1기 졸업생인 최교수님은 학생시절 민족어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어학교원으로 학교에 남았고 몇년 지나지 않아 어학강좌장으로 되여 조선언어학부의 조선어 교수와 연구를 이끌어갔다. 일찍 1956년 조선의 저명한 어학자 정렬모 교수는 연변대학 방문시 최윤갑교수와 학문적교류를 하고나서 최교수의 학문적자세와 수준을 두고 “앞으로 대학자가 될수 있다”고 평가한바 있다. 과연 최윤갑 교수는 저명한 어학자가 되여 중국에서의 조선어 연구와 발전에 남다른 기여를 하였으니 대가의 혜안은 틀림없다 하겠다.

민족정풍과 문화대혁명 동란시절에 최윤갑 교수는 갖은 수모를 당했지만 학자적인 인격과 량심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개혁개방 후엔 더욱 왕성한 기력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조선언어문학 석사학위수여권을 쟁취하여 연구생양성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중국의 제3대 우수한 어학자들인 류은종, 최희수, 전학석, 강은국, 전경언 등 교수들은 물론 렴광호, 강보유, 최순희 등 우수한 어학자들도 모두 최교수의 제자들이니 실로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겠다. 최교수는 또한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조선어강좌장, 학부장, 조선언어문학연구소소장 등 보직을 력임하셨고 대외로는 중국조선어어학회 회장, 중국조선어규범위원회 주임, 연변조선족자치구 사회과학련합회 부주석, 고문 등 직을 맡으시면서 중국의 조선어연구의 선두에 나선 대학자이시다. 중국에서의 조선어 인재양성과 조선어연구 나아가서 조선어 규범화사업에 바쳐진 그이의 업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과분하지 않을것이다. 

훌륭한 학자가 되려면 반드시 훌륭한 인간이 되여야 한다. 훌륭한 인간이 되여야만 자신의 학문으로 사회발전에 기여할수있다. 인격은 인간량심의 체현이다. 유가(儒家)에 이르기를 “인간의 심성은 본래 선한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의 혼탁함에 물젖어 심성이 비뚤어지기가 십상이다. 권세와 명예, 녀색과 물욕에 빠져 인격과 량심을 버리는 인간도 비일비재이니 실로 슬프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선을 목표로 하며 권리, 금전보다 인격과 량심을 소중히 여긴다. 그들은 학문의 세계에서 삶의 재미를 만끽하면서 인격과 량심을 지킨다. 최윤갑교수가 바로 인격과 량심을 튼튼히 지켜오면서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대성한 어학자이다. 그이는 명실공히 연변대학의 정신구축에 이바지한 문화적장인이라고 할수있다. 그이는 분명 민족어교육이 민족의식 함양과 정체성형성 그리고 서로 다른 민족사이의 문화교류에서 일으키는 거대한 역할을 심장으로 체험한 대가이시다.

최교수는 조선어연구에서의 탁월한 공헌으로 1993년에는 한국 “한글의 날”에 영광스럽게 대통령상을 받았고 1997년에는 동숭학술상을 받았으며 2009년 10월 연변대학교 개교 60주년 축제기간에는 대한민국 고등교육재단과 연변대학에서 공동으로 시상하는 한국학연구학술상 “와룡학술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최교수는 국무원 특별수당, 길림성우수인재상 등을 받아 학자로서의 영예를 따내기도 했다. 물론 그이 삶의 목적이 이러한 영예를 받기 위한것이 아니였다. 언젠가 내가 대통령상에 대해 문의한적 있는데 기억이 잘 안난다고 했고 기념사진도 찾지 못했다. “와룡학술상” 시상식날 내가 “축하합니다!”라고 말씀드렸을 때도 그이는 “나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상을 받아 부끄럽습니다.” 라고 간단하게 한마디 할뿐이였다. 남달리 감동을 받는 기색이 전혀 없어 적지 않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하기도 했다. 그이에게 있어서 명예와 학문은 별개의 존재였던것이다. 현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푼짜리 일을 해놓게 메달따먹기에 열중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얼굴이 뜨겁다.

 

《훈민정음》 사건전후

학술독립은 대학정신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아울러 학술독립의 핵심은 학자의 인격독립이다. 학자가 “눈치보기”가 되여 시세에 맞추어 우왕좌왕하게 된다면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학문은 자체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문화대혁명과 같은 그런 살벌한 력사시대에 있어서 학자적인 인격을 지킨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학자들은 “구린내나는 아홉째”로 몰리여 자칫하면 생존권리마저 박탈당할 위험이 있었기때문이다. 학자의 삶을 선택했던 최윤갑 교수의 운명도 비극일수밖에 없는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였다. 1970년경 연변대학에서도 문화혁명이 고조되여 교수를 세부류로 나누었다고 한다. 제1부류는 쓸모있는 교원, 제2부류는 두고 관찰해야 할 교원, 제3부류는 쓸모없는 교원이였다고 한다. 당연 최윤갑교수는 제3부류로 지목되여 화룡현 농촌에 쫓기워가서 2년간이나 농민으로 일했다. 민족정책이 짓밟히여 민족교육이 필요없을뿐만아니라 조선어 교육과 연구는 더욱  필요없다고 인정했던 시대의 희생품으로 된것이였으리라.

학자의 생존과 학문연구의 권리를 박탈하는것이 혁명으로 정당화되였던 비극적인 력사시대에 선배학자들은 아픔과 슬픔을 참고 살아왔음을 우리 후배들은 잊어버려서는 안될것이다. 학자의 리상과 포부가 가장 불타오르던 40대의 중년에 농민으로 운명을 바꾸어야 했던 그 심정은 자신을 내놓고는 누구도 몰랐을것이다. 이 시각 나는 약간의 곱슬머리에 이목구비가 청수한 미남자형 학자가 가족을 거느리고 교정을 떠나야 했던 그 광경을 그려보면서 비극적인 력사시대의 희생품으로 되였던 수많은 학자분들에게 무한한 동정을 보내지 않을수가 없다. 학자들의 “정배살이”는 실로 20세기 “신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1972년 대학모집이 회복되여 이른바 “공부하면서 혁명한다”는 시책에 따라 공농병학원을 모집하였는데 어학교수가 없어서였던지 최윤갑 교수는 학교에 돌아오게 되였다. 그런데 어렵사리 복직을 하게된 최교수는 상상외의 봉변을 당하게  되였으니 그것은 바로 1443년에 창제되고 1446년에 반포된 《훈민정음》과 련관된 사건이다. 최교수는 열심히 교수안을 준비하여 한어학과 학생들에게 조선어문법과목을 강의하면서 《훈민정음》의 창제과정, 창제원리와 의의 즉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문자를 만들어낸 과정을 설명하였다. 물론 세종대왕이 쓴 《훈민정음》 서문을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강의가 끝난 뒤 학생들은 별반 반영이 없었는데 한 청년교원이 당시 학교에 “흠차대신”격으로 내려와있는 로동자선전대한테 일러바쳤다고 한다. 

로동자선전대는 학교사무처리에서 권한이 대단했다. 아마 지식분자는 사상이 불온하기에 로동자의 교육과 감시를 받아야 한다는 론리였다. 로동자선전대는 학부에 분대가 있었고 학교에는 령도소조가 있었는데 학교혁명위원회 지어는 당위까지도 쥐락펴락하는 형국이였다. 학부의 로동자 선전분대 책임자가 최교수를 불러 “어째서 강의시간에 왕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했느냐” 라고 하면서 로농대중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고 비난했음에도 최교수는 그닥 굴복하지 않았다. “덕분”에 최교수는 학교로동자선전대 책임자에게 불리워가 직접 “심문”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인민군중이 력사를 창조한다고 했는데 어찌 왕이 문자를 창조할수 있단 말이요.” 로동자선전대책임자의 질문에 “나의 강의는 력사기록에 근거한것입니다.” 라고 최교수가 대답하자 “아니, 진시황도 문자를 통일하였는데 황제의 업적은 왜 말하지 않고 감히 속국인 조선왕의 업적을 말한단 말이요. 그리고 송짠감보도 중국의 경험을 섭취하여 장족문자를 만들었는데 왜 이는 먼저 말하지 않았는가 말이요.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 조선왕만 추켜세웠소?”라고 하면서 로동자선전대는 터무니없이  정치적인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에 최교수는 자기의 견해를 조금도 굽하지 않았다. “조선어강의시간에 조선어의 창제과정과 원리를 말한것도 차실입니까? 력사를 왜곡하여 강의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최교수의 반문이다. 이로하여 갓 학교에 돌아와서 정열적으로 강의에 나선 최교수는 강서리를 맞아야 했고 불온분자로 지목받게 되였다. 실로 기괴망측한 론리가 지배하던 시기이다. 대학문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로동자가 학자를 심문하고 학문을 평가해야만 하는 그 력사시대는 인류문명과 문화에 대한 최대의 희롱이였다. 그러나 그러한 험난한 시대에도 최교수는 학자적인 도덕과 량심을 속일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호하는것보다 학문자체의 진실을 보호하는것이 더욱 소중하였기때문이였으리라. 바로 이것이 학자만이 가질수 있는 독립적인격이고 량심이며 그것은 그대로 대학정신의 정수일것이다. 대학은 이러한 학자들의 인격독립으로 학술독립을 이루어가게 되며 대학의 선진적인 문화정신을 갖추게 된다.

비극적인 력사시대에도 그 본질을 파악하고 학문의 진가를 터득하려는 훌륭한 학생들이 있어서 너무나 다행스러웠다고 최교수는 오늘도 감개무량하게 회포에 잠긴다. “훈민정음” 사건이 있은 뒤 갓 학교에 남은 권기홍 선생은 최교수를 찾아와 자신도 한번 훈민정음 창제과정과 원리를 듣고싶다고 청을 들어 그럼 한번 들어보라고 쾌히 승낙을 하였다. 당시 전학석씨가 반장을 맡고있는 72년급 조선언어문학학과 학부생들의 강의를 맡았던 최교수는 로동자선전대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역시 세종대왕을 거론했다. 이에 전학석, 강은국, 등 어학공부에 열중하는 학생들은 모두 박수갈채를 보냈고 권기홍 교수도 “최교수님의 강의는 참으로 도리가 있고 진실하다.”는 정평을 내렸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 조선어연구를 지향했던 전학석씨, 강은국씨 등은 여러번이나 로동자선전대에 불리워가서 조사받았다고 한다. 학자가 될 사람은 학자를 따르고 학문을 존중하는것이 상례이다. 과연 전학석, 강은국, 권기홍은 후에 훌륭한 학자, 교수가 되여 대학발전과 학생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호라, 강의 잘하여 학생들에게서 특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던 권기홍 선생은 1992년 50대가 되기전에 타계하였고 어학자로 대성한 전학석 교수도 2006년 60대가 되기전에 하늘나라에 가셨다. “생사는 명에 달렸다”고 하지만 옥황상제는 왜 때론 좋은 사람들을 먼저 불러가는지 알바 없다. 혹시 저승에 호인이 급히 요구되여서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나도 75년도에 로농병대학생으로 연변대학에 입학하였는데 1976년  황초골농장에서 일하면서 공부하였다. 최교수님은 농장의 숙소온돌에서 우리 반급에게 조선어문법강의를 하였다. 지어는 우리들과 함께 일하던 쉴참에도 학생들을 모아놓고 책을 펼쳐들고 학문만을 담론하였다. 아마 그이는 학문 이외에는 다른 이야기를 할줄 모르는 분이였으리라. 우리 반급의 조선어강의 시간에도 최교수는 역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창제를 직접 완성했다는 강의를 했다. 그때 우리 반급 학생 중 강의시간에 잠자는 학생이 있어 무척이나 노여워하시면서 우리들에게 민족력사와 학문을 존중할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최교수의 랭정하고 엄숙한 태도를 되새겨보면서 나는 과연 학자는 선을 목표로 하되 진리를 위해서는 한보의 양보도 없어야 함을 깊이 터득하였다. 《훈민정음》사건은 줄곧 시시비비를 끌다가 문화대혁명이 끝나서야 해명이 되여 오히려 연변대학의 대학정신을 구현하는 하나의 대목으로 력사에 남았다.

우리 반급에서는 최교수님을 무척이나 존중하였고 최교수님도 우리들을 지극히 믿어주시였다. 최교수는 학문엔 빈틈이 없었으나 기타 일에 대해서는 전혀 숙맥이였다. 하여 반급의 학생들이 최교수댁의 온돌을 고치는 등 집안일들을 도와드리기도 하여 오고가는 정이 아주 두터웠다.

졸업을 앞둔 좌담회에서 남긴 최교수의 부탁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최교수는 우리 졸업생들에게 학문에 정진하고 사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라고 부탁한 뒤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나는 한평생 학문을 했지만 절름발이 학자입니다. 한어로 론문을 잘 쓸수 없고 영어를 잘 모르니 최신정보와 방법론을 늦게 받아들일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한테 한어를 중시하고 외국어를 잘 배울것을 부탁합니다.” 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다. 진정한 학자만이 할수 있는 너무나 솔직한 고백이다. 학술을 숭상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전제는 진실이다. 그러나 쉬이 자기를 낮추어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 하면 학자, 지성인들은 자존심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기때문이다. 오로지 대성한 학자들만이 대담하게 자신의 부족점을 털어놓을수가 있다. 하기에 학문에 발을 들여놓는 초기에는 내가 무엇이나 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좀 지나면 나는 안된다며 실망하게 되며 또 좀 지나면 진정 모르는것이 너무 많다는것을 절감하게 된다. 나중에 득도나 달관의 경지에 오르면 이 세상의 학문길은 너무도 멀고 자신은 힘과 정력이 너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하여 학문이라는 높은 산앞에서 경외감을 느끼게 되여 실속을 털어놓게 된다. 사실 모른다는 학자가 바로 진정으로 학문을 깊이하는 학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것이다. 최윤갑 교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자세를 낮출수 있는것은 바로 진정한 학자의 경지에 이르렀기때문이였으리라. 도가에서 가라사대 말 않하는것이 말하는것이고 늦게 가는것이 빨리 가는것이며 밖에 있는것이 안에 있는것이라 했거늘 실로 진리임을 알겠다. “내가 모른다, 나는 학자가 아니다.” 라고 말할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학자만이 진정으로 대성한 학자일것이다. 남을 비하할줄만 알고 자신의 허점을 모르는 사람은 훌륭한 학자로 될수 없다는것이 학문세계의 철칙이다.

 

연구생양성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바쳐

최윤갑 교수는 연변대학의 제1기생으로 어학자들은 오봉협, 리호원 등 교수님들에게서 어학을 배운후 자수성가한 어학대가이다. 그에게는 출국류학도 국내연수의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학문의 첨단을 톺아올랐다. 고대어로부터 현대어에 이르기까지, 어음론으로부터 문장론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방언으로부터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연구의 모든 령역에서 학문적으로 최고발언을 할수 있는 학자로 성장했다. 연변대학의 어학자들, 나아가서 중국의 조선어연구학자들은 거의 최교수의 제자로서 그이를 숭배하고있다. “괴짜연구생반”이라 불렀던 제1기 조선어석사연구생들은 모두가 우수한 어학자가 되였다. 미남이지만 고지식하기로 유명했던 전학석 박사는 방언과 어음분석전문가로, 호남아로 에너지가 초인간적이였던 류은종 박사는 한때 “바다에 뛰여들어” 잠수함 장사를 한다고 “야단”쳤지만 문체론, 의미론의 권위적인 전문가로, 전혀 남과의 화해와 타협을 몰라 적지 않은 “오해”를 받았던 최희수 교수는 고대음운연구와 더불어 한족학생에 대한 조선어강의 전문가로, “강털보” 별호를 버릴수 없었고 구들에 배를 착 붙이고 수십만자의 저서를 집필했던 강은국 박사는 조선어문법 특히는 문장론의 권위적인 전문가로, 농민연구생이였던 전경언도 어학연구원으로 성장하였다. 개개인은 “괴짜” 들이여서 서로 사이에 쟁론도 많은것 같다. 그러나 그 “괴짜”정신이 학자적인 개성과 창발력이 되여 그네들을 학자로 되게끔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최교수님을 따랐고 그이에게서 학문의 첫 대문을 열지 않았겠는가? 그뒤에 제자들은 렴광호 박사는 고대조선어 전문가로, 강보유 박사는 현대조선어 전문가로, 최순희 박사는 조선어교수 그리고 언어조탁에 뛰여난 수필가로까지 되였다. 

어학대가로서의 최교수님이 박사생지도교사로 되지 못했다는것은 본인이 물론 연변대학의 립장에서는 대단히 유감이다. 일찍 1982년에 최윤갑교수의 명의로 소수민족언어문학과(조선언어문학학과) 박사학위수여권을 신청하여 초심에 통과되였으나 최종심의자료를 제때에 제출하지 못하여 실패했었다. 그뒤 정판룡 교수의  명의로 1986년에 외국문학학과(조선언어문학학과) 박사학위수여권을 신청하였으며 드디여 연변대학교는 자체로 박사학위를 수여할수 있게 되였다. 조선언어문학학과는 중국에서 이중적인 학과성격을 가지고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박사생지도교수 심의비준권은 국가학위위원회에 있었으니 최교수는 결국 박사생지도교수로 되지  못한것이다. 제1기 문학박사생은 정판룡 교수명의로 모집했고 2년 지나 역시 정판룡 교수의 명의로 제1기 어학박사생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어학지도교수가 없는 형편에서 부득불 최윤갑 교수는 지도교수는 아니였지만 리득춘, 김동익 등 교수들과 함께 박사생강의를 맡아야 했고 론문을 지도, 심사해야 했다. 명색이 지도교수가 아니지만 박사를 키움에 있어서는 모든 정열을 바치시였다. 자신의 명예와 직위보다 학생들의 성장과 진보를 소중히 여기는 그 정신적경지는 학자적 량심과 품위를 갖춘 교수에게서만이 찾아볼수 있을것이다. 무명의 세계에서 유명의 세계에로 꿋꿋이 걸어가신 그 걸음걸음마다에는 학자의 인격과 량심이 고여있었으리라.

최윤갑 교수는 퇴임한후에도 학술연구를 중단하지 않았고 새로 복건한 조선어전업 최희수 주임의 초빙을 받고 조선어연구 특별강좌를 설치하여 청년교원들의 자질향상을 위해 로고를 아끼지  않았는바 그때 강좌를 청강했던 교원들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있다.  최교수는 또 조선어를 배우는 한족연구생들이 한국어를 보다 빨리 정확하게 배우게 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과 연구에 근거하여 《한국어문법》, 《한국어문법신강》을 집필하시기도 했다. 최교수는 자신의 체험과 의도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한족 석사연구생들에게 한국어문법 강의를 하면서 한족학생들에게 하는 한국어문법강의는 한국어문형 즉  한국어말틀이 한족학생들의 머리속 깊이 박히게 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고 하면서 한국어문형을 이루는 동사, 형용사 연구에 착수하였고 이어 한국어동사의 문법적범주, 문형의 전환, 부사의 역할 등을 연구했다고 한다. 학자의 밀어버릴수 없는 사명감이였다. 그러나 최교수가 받은 보수는 실로 보잘것 없었다. 당시 나는 최교수님을 만날 때마다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외국같으면 퇴임후 석좌교수로 초빙받았겠지만 아직 우리의 현실은 불가능했다. 나는 대학교육 특히 인사제도 개혁의 절박성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최희수 교수는 스승님인 최윤갑교수를 평가하여 “빈틈없는 학술자세”와 “학생에 대한 엄격한 요구”를 지니신 어학자라 했고 “미문달필”인 문학평론가 김호웅 교수는 “최윤갑 교수의 학술문장은 한글자 더 넣을수도 없고 한글자 더 빼낼수도 없이 짜여있다.”고 찬탄하였다. 80고령에도  언어학연구를 멈추지 않고 평생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하여 출간한 《한국어문법》, 《한국어문법신강》 등 저서를 두고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김영수 원장은 “최윤갑 교수님이야말로 진정한 학자이시다. 최윤갑교수님은 연대어학전통의 창시자인 동시에 최고 권위자이시다.”라고 하면서 “그이가 건재해있으므로 하여 조선-한국학학원은 무한한 긍지와 자랑을 느낀다.”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어학자가 아닌 내가 그이 학문의 창조성 업적에 대해서는 학술적인 평가를 아낄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최윤갑 교수는 분명 근대조선어학자들인 주시경, 최광억 등 대가들에 의하여 전개된 국문운동과 국어연구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 시대의 중국조선족이 낳은 저명한 조선어학자라고 말하고싶다. 분명 그는 조선언어에는 민족의 넋과 지혜가 있다고 절감했을것이고 이로 하여 그의 민족사랑이 민족어사랑으로 이어졌고 어학연구를 민족의식함양의 수단으로 여기고 필생의 열정으로 분투하였을것이다.

최윤갑, 그이의 이름은 중국조선어 발전과 연구와 갈라놓을수 없다. 최윤갑교수가 있으므로 하여 연변대학의 위상은 한결 높아졌다.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가 국가중점학과로 자리매김하고 조선언어문학전업과 조선어전업이 국가에서 선정한 특색전업으로 되였다. 현대조선어과목이 국가 정품과목으로 평선된데는 선배님들의 포석과 갈라놓을수 없으며 특히 최윤갑 교수와 같은 대학자가 학통을 구축하고 후배학자들을 양성해낸 성과들과 갈라서 생각하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최윤갑 교수와 같은 평생 학문을 추구하면서 학자적인 인격과 량심을 지닌 진정으로 출중한 학자교수가 있었다는것은 모든 연대인의 긍지이고 자랑으로서 연변대학은 물론 우리 민족인 모두가 무한한 자랑과 긍지를 가지고있다. “청출어람승어람”이라, 나는 제2의 최윤갑 교수, 아니 최윤갑 교수를 릉가하는 어학대가가 빠른 시일내에 나타날것을 기대해본다. 역시 최교수님의 희망사항이고 연변대학교 어학계의 미래가 아니겠는가?

최윤갑 교수님께서 내내 건강하시여 연변대학교 어학연구와 중국 조선어교육의 새로운 발전을 지도해주시고 지켜봐주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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