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5일 12시, 걸출한 언어학자 최윤갑 교수가 92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본지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이 글을 싣는다 - 편집자

              
최윤갑:

  1930년 2월 28일 길림성 연길현 마록구촌에서 출생.
  1948년 2월 룡정 평안중학교(지금 동성중학교)에서 어문교원으로 교편을 잡음.
  1949년 4월 연변대학 어문학부 입학.
  1952년 10월 졸업 후 연변대학 어문학부에서 교편을 잡음.
  1970년 ‘문화대학혁명’ 때, ‘쓸모없는 교원’으로 쫓겨나 2년 동안 ‘로동개조’. 
  1972년 복직, 1993년 정년하기까지 42년간 근무, 정년 후에는 초빙교수로 6년간 강의, 도합 48년 동안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음. 선후로 조선어학 강좌장, 언어문학부 학부장, 조선언어문학연구소 소장 등 역임. 연변조선어학회 리사장, 길림성조선어학회 리사장, 중국조선어 규범위원회 주임고문,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과학연합회 부주석, 고문 등 력임.
  1993년 한국 ‘한글날’에 대한민국 ‘대통령상’ 수상.
  2009년『한국어문법신강』출간, 한국고등교육재단과 연변대학에서 공동으로 시상하는 “와룡학술상” 수상.


Ⅰ. 들어가며

연변대학 총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병민 교수는 연변대학 과학연구의 초석을 놓은 대표적 학자의 한 분으로 저명한 언어학자 최윤갑崔允甲 교수를 손꼽았다. 최윤갑 교수는 일찍이 연변대학 언어문학학부 학부장, 조선언어문학연구소 소장 등을 력임했고 중국조선어학회 회장, 중국조선어 규범위원회 주임고문,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과학연합회 부주석, 고문 등 사회직무를 두루 맡아 오면서 중국의 조선어연구의 큰 봉우리를 이루었다. 1952년에서 1993년까지 연변대학에서 42년간 교편을 잡았고 정년 후에도 석좌교수로 6년간 연변대학에서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에 혼신의 정열을 다 바쳐왔다. 어디 그뿐인가? 팔순을 넘어선 지금도 학술연구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다. 그를 두고 김병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윤갑 교수는 분명 근대조선어 학자들인 주시경, 최현배 등 대가들에 의하여 전개된 국문운동과 국어연구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 시대 중국조선족이 낳은 저명한 조선어학자이다.”

 최윤갑 교수의 저서와 논문의 목록과 그 내용을 보면 김병민 교수의 평가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최윤갑 교수는 2009년 80고령에 출간한 저서『한국어문법신강』서문에서 “금년은 연변대학 창립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필자는 자신을 키워준 모교 연변대학 창립 60주년에 이 책을 바칠 수 있게 되어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진정한 학자의 모교에 대한 사랑은 학문적 성과로 표현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최윤갑 교수는 고령이지만 학문에 대한 그의 집념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이는 학문을 떠난 학자의 삶은 가치가 없다는 그의 인생철학과 리념을 증명해준다. 이는 또한 1956년에 이미 “앞으로 대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한 북한의 언어학 대가 정열모 선생의 예견이 적중했음을 증명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조선어 인재양성과 조선어연구, 나아가 조선어 규범화사업에서 쌓은 그의 업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과분하지 않다. 그가 배양한 제자들은 모두 훌륭한 어학자가 되었다. 류은종(절강 월수외국어학원), 최희수(산동 빈해대학), 전학석(연변대학), 강은국(복단대학), 염광호(청도대학), 강보유(복단대학), 최순희(북경언어문화대학) 등은 모두 중국의 대표적인 한국어 연구자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또한 무릇 한국어학과가 설치되어 있는 중국 경내의 대학교에는 반드시 최윤갑 교수의 제자들이 중견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Ⅱ. 청년 최윤갑의 선택:

역사의 소용돌이

하늘이 사람을 낼 적에, 그 사람에게 적절한 소임을 준다고 했다. 물론 그 소임은 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소임을 ‘완성’하라는 것이다. 의사로 일하기로 한 사람은 의사로서의 소임을 완성하고, 농부는 농부로서의 소임을, 학자는 학자로서의 소임을 완성하라는 뜻이다. 물론 이 ‘완성’은 자신이 맡은 소임을 훌륭하게 마무리함을 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소임을 완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 리유는 다양하다. 이를테면 솔씨가 천년 소나무로 자라려면 그 씨앗의 씨앗됨만이 아니라 그 씨앗이 떨어진 토양과 싹틀 수 있는 시기 등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문학사가인 이폴리트 테느가 말한 ‘종족과 환경과 시대’의 조건처럼 이 3대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그 솔씨가 싹을 틔우고 천년 소나무로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려면 그 사람의 됨됨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가 산 환경과 시대와의 력학관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으로 그가 살아온 험난한 력사적 환경과 질곡의 시대를 살펴보면 최윤갑 교수가 얼마나 열악한 조건에서 학자의 길을 당당히,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올곧게 걸어왔는지 알 수 있다.

최윤갑은 1930년 2월 28일, 룡정현 마록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18년 조선에서 두만강을 건너와 북간도에 이주해왔다. 어린시절에 부모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알아본 그의 고향은 어림잡아 정선군 둔양면 삼포동 부근으로 짐작된다. 그는 7남매의 막내였다. 여섯이나 되는 형과 누이들은 모두 조선에서 태어났는데, 최윤갑은 큰형과는 무려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나는 늦둥이였다. 부친 최영규가 그를 쉰에 낳았다고 해서 그는 ‘쉰둥이’로 불렸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쉰둥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물론 이 ‘귀염둥이 막내’의 특성이 그의 삶의 특성과도 이어졌을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거나 좋아하는 일이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외골수’, 무슨 일을 하나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몰두하는 ‘집중력’이 바로 그 힘이다. 물론 그만큼 자기중심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최윤갑의 가족이 조선에서 룡정으로 이주한 그 시점, 조선의 상황은 점차로 각박해지고 있었다. 1912년에 시작한, 조선 땅을 강점하기 위해 벌인 그 악명 높은 ‘토지조사사업’이 1918년 6월에 완료되었다.  이 조사로 농민들은 더욱 궁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 최영규 일가는 붙여먹을 밭뙈기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최영규 내외는 여섯이나 되는 어린 자식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왔다. 이 때 맏이가 9살이었는데 모든 식구들이 달라붙어 밭을 일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윤갑이 태어난 그 이듬해인 1931년에 그의 가족은 화룡현 흥성촌 룡천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최윤갑은 소학교시절을 보냈다. 1944년 3월 최윤갑은 연길공업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던 1945년 8월 8일에 러시아 군대들이 훈춘을 거쳐 연길에 진군하여 일경과 충돌하고 폭탄을 터트렸는데, 최윤갑은 이 난리를 피해 룡정으로 피란을 갔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투항과 더불어 광복을 맞았다. 어린 학생들은 더 이상 억지로 일본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었다. 최윤갑은 룡정 동흥중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화룡 룡천동에서 동흥중학교까지 15리,  하루에 4시간씩 산을 넘고 들을 가로질러 통학을 해야 했다. 하지만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 즐거운 원인 중의 하나가 조선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동흥중학교에는 젊고 의욕적인 리준섭이라는 교사가 있었는데 그에게서 최윤갑은 ‘우리말 사랑’의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그 시절에는 한글로 된 교재가 거의 없었고, 자연과학 쪽의 교재는 다 일본어로 된 것이었다. 그러나 리준섭 교사는 스스로 연구하고 자료를 모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리준섭 교사가 어렵게 구한 『한글맞춤법통일안』과  최현배의 『중등조선말본』을 통해 최윤갑은 우리 말과 글을 배웠다. 그는 그때 우리 말과 글을 배우는 재미에 깊숙이 빠져들었으며, 우리 말을 통해 조선인의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그 무렵, 최윤갑은 배움에 눈을 뜨고 세상물정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동흥중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민족의 장래를 위한 사명감을 심어주려고 애썼기 때문에 최윤갑도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늘 가슴이 뜨거웠다.

그때 최윤갑은 자기의 진로를 두고 두 가지로 생각했다. 하나는 력사를 연구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는 길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듣고 겪은 것은 그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과, 그 가족과 조선인들을 핍박하는 일본인과 중국인들과의 변별성이었다. 그가 민족의식이 뛰어난 선생님들을 통해 배운 것은 다른 민족과 다른 우리 민족의 변별성은 ‘민족의 력사’와 ‘민족의 언어’를 통해 계승, 발전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력사와 언어를 통해 민족성이 구현되고, 민족이 보존될 수 있다는 그러한 믿음은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최윤갑은 이 두 갈래 길을 두고 한동안 망설였다. 일제에 의해 여지없이 파괴된 민족의 력사를 제대로 배워 후학들에게 우리 력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과, 광복을 맞아 다시금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우리 말과 글도 잘 배워 민족 얼을 올곧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 말과 글을 말살하려 들었던 리유의 바닥에 깔린 것이 바로 민족말살이었다는 생각과, 중국 땅에서 자칫하다가는 중국어에 파묻혀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민족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념려가 더 깊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물론 배우면 배울수록 재미있는 우리 말과 글의 매력이 그를 더 끌어당겼다. 그래서 그는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47년 8월, 중학교 4학년을 마치게 될 무렵에 4개 중학교가 합병하여 룡정중학교에 고중반을 설립했다. 그러자 최윤갑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고중에 진학했다. 그런데 그때 학교에서는 편안하게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내어 연필 대신 낫이나 삽을 들어야 했고, 팀을 묶어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해야 했다. 수업시간은 고작 한두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글자 하나, 문장 하나가 어린 최윤갑에게는 감로수가 되고 이슬비가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본다는 말이 있듯이, 틈틈이 우리말을 공부하던 그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1948년도 2월, 평안중학교(지금의 동성중학교)에서 어문교원과 수학교원을 구한다는 통지가 내려왔다. 먼저 학급 별로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선출하고, 그 다음 교사들의 추천을 거치고 나중에 학교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학급 친구들과 교사들은 학업성적이 우수한 최윤갑을 추천했다. 특히 리준섭 교사가 어문교원으로 최윤갑을 적극 추천했다.

최윤갑은 운이 좋게 고중공부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평안중학교 어문교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애초에 우리 말 연구의 길을 선택했을 때부터 교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갑자기 이루어진 꿈에 적응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연히 최현배의 『우리말본』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책은 그에게 천금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었다. 그는 그 책을 며칠 밤을 새워 독파했고, 이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술술 암기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공부했다. 그 책을 통해 우리 말의 얼개를 공부하고 우리 말의 부분과 전체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는 공부할수록 우리 말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새로운 지식에 대해 갈구하게 되였다. 그는 마치 횃불이나 된 것처럼 우리 말 공부와 연구를 위하여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 불길은 아직은 어딘가 단순하고 맹목적인 데가 없지 않았다.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가르쳐야 할지 막연할 때가 많았다.

그러던 그에게 다시 천금 같은 기회가 문득 찾아왔다. 1949년 3월 20일, 아직 국내해방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건국 전야에,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설립된 것이었다.

 

Ⅲ. 삶의 전환:
연변대학의 설립과 입학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은 모두 강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 개화기부터 불어온 신교육의 열기가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온 황해도 지방에서 먼저 불붙어 평안도와 함경도 곳곳에 번지기 시작했다. 그 불길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와 중국동북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의 가슴에도 옮겨와 붙었다. 연변의 조선인들도 미래를 위한 확실한 투자가 교육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라가 일제에게 강탈당한 것은 무지의 소치이고, 자신의 가난이나 이민족들에게 받는 설움 역시 모두 힘이 없기 때문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깨달은 연변의 지식인들은 대학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이는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인 모두의 소망이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연변대학의 설립은 필연적이었다. 1948년 연변지역 5개현에 있는 중학교는 위만주국시기의 18개소로부터 26개소로 늘어났고 학생도 7,119명에서 11,466명으로 늘어났다. 연변의 중학교 수는 길림성 중학교 수의 63.4%, 전체 학생의 57.1%를 차지했다. 1948년에 와서 연변지역에는 향(鄕:한국의 면에 해당함)마다 중학교가 있고 마을마다 소학교가 있었다. 1949년 3월, 동북국 민정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동북3성에는 조선족중학교 70개소에 교사 550명, 학생 16,700명 있었다. 소학교는 1,500개소에 교사 5,500명, 학생 180,000명 있었으며 사범학교는 4개소에 학생 850명 있었다. 1948년 3월 통계에 따르면 연길시 제2중학교, 민주학원, 그리고 룡정의 중학교들에는 모두 고급학급(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1949년 길림성교육청에서 연변에 고급중학교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런 학교에서는 모두 조선어로 강의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중국어 수준이 아주 낮았다. 그러므로 고급중학교 졸업생들이 중국어로 강의하는 한족대학(漢族大學)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급중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학생들은 대학교육을 받으려면 부득이 북한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1948년 3월 23일에서 24일까지 연길시 제2중학교에서, “연변 교육-문화인 좌담회”가 열렸는데 이 좌담회에 참석한 지도자들이 논의한 것은 조선인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대학교에 입학시키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 조선인 중학교를 졸업한 일부 학생들은 동북대학이나 군정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언어소통이 원활치 못해 입학생 수가 아주 적었다. 연변을 비롯한 동북지역에서는 조선인 학생의 절반쯤만 고급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북한에 가면 고급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문대학이나 대학교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급중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학생들은 적잖게 북한으로 건너갔다.

조선인 학생들이 대학 교육을 받게 하려면 시급히 연변에 민족대학을 건립해야 했다. 이는 연변지역 조선인 기본교육의 발전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 좌담회에서 일차적으로 연변지역의 조선인중학교 졸업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어려운 상황을 분석하고 민족대학을  건립하기로 합의했다. 마침내 1949년 2월 1일, 동북조선인민대학 명의로 《동북조선인민보》에 학생모집 광고를 냈다. 시험자격은 다음과 같았다.

“사상이 진보하고 작품이 단정하며 신체가 건강한 자. 고급중학교 1학년 이상의 학력 혹은 구제舊制 중학교 4년 이상의 학력을 갖춘 남녀 청년학생. 중소학교에 재직하는  교사는 제외됨.”

청년 최윤갑은 중소학교에 재직 중인 교사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는 기사를 읽고 그 자리에서 사직서를 써냈다. 어떤 결정을 내리면 대담히 실천으로 옮기는 그의 행동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교사직을 버린다고 그를 말리는 사람, 그의 생각을 바꾸려고 설득하는 사람, 심지어 바보짓을 한다고 수군대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최윤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최윤갑은 주위의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연변대학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중학교 시절에 리준섭 교사의 강의를 통하여 우리 말에 대한 사랑의 불길을 지필 수 있었다면 대학에서 만난 두 스승을 통해, 그는 학문연구의 올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었고 학문의 정도(正道)를 걸을 수 있었다. 연변대학 초창기에 문리학부에 소속되었던 어문학과(조문학과)에는 교수가 2명밖에 없었는데, 최윤갑은 이 두 교수를 만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했고 평생 이 두 교수를 본보기로 삼았다. 이 두 교수가 바로 오봉협과 김창걸 교수이다.

오봉협 교수는 어문학과에서 ‘한글개론’을 가르쳤는데, 학식이 넓고 깊었으며 누구보다도 학구정신과 탐구정신이 강했다. 그는 출근할 때 집에서 학교까지가 몇 걸음이며, 그 사이 어느 지점에 백양나무가 몇 그루 서있고 새 둥지가 몇 개 있다는 것까지 꼼꼼히 살피는 섬세한 성격의 학자였다. 그러니까 자신의 주위에 일어나는 현상이나 그 본질을 다 꿰뚫고 있었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스로 살펴 아는 수행자 같은 스승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학자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은사였다.

오봉협 교수는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소학교를 마쳤으며, 1923년 열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룡정으로 이주했다. 그는 1930년 3월 동흥중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소학교를 돌며 교편을 잡았고, 1937년 7월 신경에 가서 《만선일보》, 《한민신보》의 기자로 있었다. 광복 후 《연변일보사》 사회부장, 연변고급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49년 3월 개교와 더불어 연변대학으로 옮겨와 선후로 어문학부, 사범학부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어문학과 초대주임으로 있을 때 학과의 기틀을 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여기서 그는 ‘한글개론’, ‘훈민정음원문해석’ 등의 학과목을 가르쳤고, 사지학과(史地學科) 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중국근대사’, ‘중국통사’, ‘고고학’, ‘조선고문’, ‘심리학’ 등의 학과목을 강의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과목을 가르치기 위해 그는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의 전공은 철학이었지만 력사학, 천문학을 공부했으며 독학으로 공부한 일본어, 영어, 러시아어, 한어에도 정통했다. 그는 연변대학의 장서가로 알려졌는데, 생활은 궁핍했으나 일단 돈이 생기면 책만 사들고 돌아와 가정풍파도 적잖게 겪었다. 그는 그림도 잘 그렸는데 《만선일보》 기자로 있을 때 만화를 그려 신문에 냈고 연변대학 교수로 있을 때도 늘 만화로 일기를 썼다. 또 책을 사들고 왔다고 바가지를 긁는 부인을 때리겠다고 빗자루를 들고 설쳐대는 자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연변대학의 유명한 에피소드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만화일기』는 1950년대 초 지식인개조운동 때 연변대학 전람관에 전시된 적도 있다. 그는 몸이 허약했으나 단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었다.

김창걸 교수는 전반생은 작가로, 후반생은 교육자로 살았다. 광복 전에 그는 재만조선인문단의 중견작가로 활동했다. 광복 후 연길시 신흥가(新興街)에 자리를 잡은 그의 자택 들창에서는 깊은 밤에도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는 1936년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내놓은 후 『암야』와 같은 우수한 단편소설 30여 편을 발표했다. 광복 후에는 연변문학연구회 문학부장, 연변문학예술연합회 부주석 등을 력임하면서「새로운 마을」, 「행복을 아는 사람들」 등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연변대학에 어문학과가 서자 오봉협과 함께 부임해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발휘해 42년간 성실하게 일했다. “왜 작품을 쓰지 않느냐”고 물으면, “난 부교수와 문학창작을 바꾸었어” 하고 농담을 했다. 초창기라 교원이 없어서 아주 많은 과목을 담당해야 했는데, 그는 ‘조선문학’, ‘조선어문법’, ‘현대조선문선’, ‘습작’, ‘소설론’, ‘연극론’등 무려 7개 학과목이나 가르치느라고 항상 바삐 보냈다. 그에게는 주말도 명절도 없었다. 자그마한 서재에 앉으면 밤이 가고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책을 보고 교수안을 짜야 했다.

최윤갑은 학자가 되려면 무조건 오봉협 교수 같은 탐구 정신, 김창걸 교수 같은 간고분투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들 두 스승을 유난히 따랐다. 거의 날마다 두 스승의 집을 방문해 책을 빌렸다. 책을 빌리기보다 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수시로 질문을 해서 두 스승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학구열은 참으로 왕성해서 어떤 의문을 가지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매진해야 직성이 풀렸다.

오봉협 교수는 《만선일보》에 있을 때 늘 신경도서관에 가서 한문공부와 한글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그 도서관의 단골손님이었던 북한의 저명한 민속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전몽수(田蒙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와 더불어 한글문제를 담론하던 중 한글의 기원에 대해 연구해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전몽수는 홍기문과 함께 1949년에 『훈민정음역해(訓民正音譯解)』를 펴냈고 민속학 관련 론문도 다수 발표한 우수한 학자였다.

오봉협 교수는 ‘훈민정음 원문해석’이라는 학과목을 강의할 때 가끔 혼자 힘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곤 했다. 그러다가 『주역(周易)』을 읽는 도중에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조선문하도기원설(朝鮮文河圖起源說)」이란 론문을 집필, 발표하게 되었다. 그는 이 론문을 가지고 1949년 9월 중순 학생들에게 강의했고 나중에《교육통신》에 연재했다. 이 론문은 16개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인지의 상형기원설을 기본적으로 시인하면서도 세종대왕이 봉건사회의 지배적인 철학이었던 역학적 우주관에 의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폈다.

최윤갑은 오봉협 교수의 강의를 듣고 그의 론지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여러 해 동안 훈민정음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책을 본 그로서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그는 다시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조심스러우나 단호하게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라는 짧은 론문을 집필해 자기 견해를 밝혔다. 최윤갑은 이 론문에서 조선어라는 문자는 하도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훈민정음」이 나온 후 그러한 철학적 원리를 부여한데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이 주제는 다시 정식 론문으로 보완되어 1979년에 같은 제목으로 『어문연구』 창간호에서 다루어졌다. 아무튼 최윤갑의 론문은 자기의 스승 오봉협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오봉협 교수는 최윤갑의 론문을 보더니 대노하기는커녕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참 잘 썼어. 아주 훌륭해!” 하며 치하했다. 바다 같은 도량을 가진 스승의 지도를 통해 최윤갑은 연이어 「의성의태어에서 밝은 소리와 흐린소리」라는 짧은 론문을 써서 학교 잡지에 발표했는데, 발상이나 접근법이 좋고 무게가 있는 론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런 피나는 노력과 철저한 학구적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1952년 10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어학교원으로 대학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에 오봉협 교수는 45세라는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최윤갑은 교원이 되었지만 배울 것도 많고 지도를 받아야 할 것도 많았는데 오봉협 교수는 젊은 최윤갑의 가슴속에 그리움을 심어놓고 홀연히 가버린 것이었다.

1956년 북한의 저명한 언어학자 정열모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연변대학에 와서 언어학 교원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는 최윤갑을 만나보고 그의 올곧은 학문적 자세와 우리말에 대한 연구의 깊이를 가늠해보고 “앞으로 대학자가 될 수 있다”고 평가한 바 있는데 이 언어학 대가의 판단은 십분 적중했다.

 

Ⅳ. 고난의 세월:
‘민족정풍’과 ‘문화대혁명’

1957년 ‘반우파투쟁’과 1959년의 ‘민족정풍’가운데서 최윤갑 교수는 갖은 수모와 괄시를 당했다.  온 사회에 사악한 기풍이 팽배하고 진리나 과학이 외설의 대상이 될 때 정의를 주장하고 참된 학자의 인격과 량심을 지키자면 큰 화를 자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윤갑 교수는 학자적인 인격과 량심을 지키면서 여전히 우리 말 연구에만 정진했다.

1958년 5월부터 연변대학에서는 사생원공들을 조직해 마르크스주의 민족리론과 당의 민족정책 및 중앙민족사업회의 문건을 학습했고 민족문제에 대한 대대적인 변론을 벌였다. 200여명에 달하는 사생원공들은 대자보 10만여 장을 내다붙였고 일인당 평균 50차 이상의 대소 회의에 참가했으며 10여 차례 대형보고회를 가졌다. ‘대명, 대방, 대자보, 대변론’의 형식을 통해 조국관념, 민족구역자치, 민족단결, 민족형식 등 문제에 대해 변론을 진행함과 아울러 ‘다조국론’, ‘민족우월론’, ‘민족언어순결론’, ‘민족형식 불가침범론’ 등 관점들을 집중적으로 비판했으며 상술한 문제들을 리론적으로 깨치고 마르크스주의 민족관점을 수립하여 민족문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극좌사조가 득세했기 때문에 시비가 전도되고 바른 것을 그릇된 것으로 몰아 매도했다.

1959년 3월에서 7월까지 진행한 ‘민족정풍’에서 조선문학부는 중점대상으로 되었고 조선언어문학학과는 직격탄을 맞았다. 김창걸 교수는 조선문학을 강의할 때 민족정서를 고취했다는 죄를 들쓰고 교단에서 쫓겨나 자료실에 가서 일하면서 ‘사상개조’를 받게 되었다. 현대조선어를 가르쳤던 김학련 교수는 조선어가 어휘구성이 풍부하고 특히 의성의태어가 발달되었다는 강의를 했다가 '조선어우월론'을 고취한 '반혁명민족주의분자'로 지목되어 교수직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최윤갑 교수 역시 비켜갈 수 없었다. 그는 ‘조선어우월론’의 동조자로 지목되어 학과장 직무를 해임당하고 학교농장으로 쫓겨가 ‘로동개조’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기가 꺾이거나 주눅이 들지 않았다.

1966년 문학대혁명 때에도 최윤갑 교수는 갖은 수모와 괄시를 받았다. 그가 소속된 조문학부는 거의 파국을 맞게 되었다. 조선족 교수 36명 중 25명이나 여러 가지 리유로 교단에서 쫓겨났다. 조문학부는 워낙 학교의 규정대로 조선족학생들만 모집했지만 1970년에 와서는 27명의 학생 중에 한족학생이 15명이나 차지하였다. 그리고 ‘조선문학사’, ‘중국조선족문학’, ‘고대조선어’ 등 학과목들도 취소되었다.

1970년 문화대혁명이 고조되자 연변대학에서는 교수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첫 번째 부류는 '쓸모 있는 교원', 두 번째 부류는 '두고 관찰해야 할 교원', 세 번째 부류는 '쓸모없는 교원'이었다. 최윤갑 교수는 세 번째 부류에 들어가 '구린내 나는 아홉째가 되었다. 그는 1970년 1월말 출생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아이를 업고 화룡현 복동진 룡덕촌에 쫓겨 가서 2년 반 남짓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민족정책이 짓밟히고 민족교육의 근본이 흔들렸으며 조선어 교육과 연구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최윤갑 교수는 가장 재능과 정열을 빛낼 수 있는 40대의 나이에 농촌에 추방되었지만 단 하루도 우리말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었다. 고된 밭일을 하면서도 특수한 문장의 구조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품사의 성질이나 그 쓰임새들을 생각하곤 했다. 이처럼 그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시절은 그에게 아주 값지고도 고요한 연구의 시간이 되었다.

1972년, 이른바 '공부하면서 혁명하자'는 시책에 따라 공농병학원을 모집하게 되었는데 어학교수가 없어서였던지 최윤갑 교수는 연변대학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하루의 절반은 농장에서 일을 했지만 다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밤을 세며 책을 읽고 교수안을 준비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로 또다시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72년급 한어학과 학생들에게 ‘조선어문법’을 강의할 때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과 원리 및 의의를 설명하면서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문자를 만들어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얼마 뒤에 한 학생이 ‘흠차대신’ 격으로 연변대학 내려와 있던 로동자선전대에 고발했다.

로동자선전대는 불온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을 감시하고 그들을 교육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그 권력이 막강했다. 로동자선전대는 학부에 분대를 두고 학교에 지도소조를 두었는데 그들은 학교혁명위원회와 공산당위원회까지도 쥐락펴락했다. 학부의 로동자선전분대 책임자가 최윤갑 교수를 불러놓고 질책했다.

“왜 강의할 때 왕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했소? 그게 바로 인민대중을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오?”

그러나 최윤갑 교수는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폈다. 결국 최윤갑 교수는 로동자선전대 책임자에게 불려가 직접 심문을 받게 되였다.

“훈민정음이란 게 뭐요?”

“최초의 조선 문자를 훈민정음이라 합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발명했다고 강의를 했소?”

“력사문헌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아니, 참 답답하구려. 모주석께서는 로동인민이 력사를 창조했다고 교시하셨소. 당신은 력사문헌을 턱 대고 모주석의 말씀에 맞서겠소? 어찌 왕이 문자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이요?”

"저의 강의는 력사기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세종임금은 왕이기 전에 벌써 학자였습니다.  진시황도 문자를 통일했다고 하는데 진시황은 왕이 아닙니까? 제가 본 력사문헌이 거짓이라는 사실 증명해보이기 전에는 절대로 저의 견해를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이 사건으로 최윤갑 교수는 다시 된서리를 맞았고 불온분자로 지목되었다. 실로 기괴망측한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에만 볼 수 있는 희비극이었다. 대학문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로동자가 제 마음대로 학자를 문책할 수 있었으니 이는 인류문명과 문화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험난한 시대에도 최윤갑 교수는 학자의 도덕과 량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비정과 비리에 끝까지 저항하고 싸울 배짱을 갖고 있었다. 이미 농촌에서 2년 반 동안 농사일을 하고 와서 그런지, “그래. 해보자! 또 쫓기면 다시 농사일을 하면 되지! 까짓것, 농사일도 할만 하더구만!”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튼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 로동자선전대는 비판대회가 있을 때마다 이 문제를 들먹였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문자를 창조하였다”는 최윤갑 교수의 용기 있는 발언은 연변대학 교수와 학생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어느 날 조선언어문학학과 72년급 학생들은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다. 최윤갑 교수는 로동자선전대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옹근 한주일 동안 학생들에게 창제원리를 문헌의 기록대로 상세히 가르쳤다. 학생들은 스승의 연박한 지식과 논리 정연한 강의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일로 하여 전학석, 강은국 등 학생은 여러 번이나 로동자선전대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Ⅴ. 학자의 삶:
끊임없는 연구와 도전

어학자 최윤갑 교수의 특이성은 세인을 경탄케 하는 그의 모든 업적이 대부분 독학과 자습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을 거의 다 사회적 혼란기에 보냈다. 그에게는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 류학, 연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978년 개혁개방이 되고 그가 퇴직한 1993년까지 그에게는 그렇게 흔한 국내 연수나 외국나들이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주요 론문과 저서를 펴낼 때도 거의 참고할 만한 새로운 서적이 없었다. 오로지 그는 원본에 집중해 깊이 사고하고 우리말의 체계를 스스로 구축해나갔다. 언젠가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맏누이 남편이 해방공간에 한국으로 간 것이 정치적 문제가 되어 자격을 취소당했었다. 그는 스스로의 끈질긴 노력과 창의력으로 학문의 정상에 올랐다. 고대조선어에서 현대조선어에 이르기까지, 어음론으로부터 문장론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방언학에서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연구의 모든 영역을 아울렀고 모두 빼어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가 평생 심혈을 들여서 남긴 저서들과 피를 말리며 편집한 교재들은 후학들을 키울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최윤갑 교수는 중학교 교원으로 일하던 시절도 그랬지만, 대학생시절에도 변변한 교재가 없어 애를 태웠다. 그는 선생님의 강의를 철필로 마분지에 죽기내기로 필사하면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구할 수 있는 책은 어떻게 해서라도 구했고, 만약 구할 수 없다면 철필로 긁고 등사를 해서라도 만들었다. 그가 연변대학 교사로 남게 되자 먼저 착수한 것이 교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김창걸 교수가 문학분야를 강의하고 1953년 오봉협 교수마저 세상을 뜨자 어학분야 교원은 이제 갓 졸업한 최윤갑과 리세룡, 그리고 그 뒤에 부임한 김학련뿐이었다. 이들 젊은 교원 셋은 밤낮 교재를 펴내기로 했다.

1957년 소련이나 북한에서는 어음, 문법, 문장, 어휘를 차례로 배운다는 것을 참조했다. 이들은 자신이 배운 《조선어문법》의 내용들을 보완해서 『현대조선어』라는 교과서를 만들었다. 어음론은 리세룡, 어휘론은 김학련, 문장론은 최윤갑이 각각 맡아서 프린트 본을 펴냈다. 철판으로 긁어 등사한, 지금 보면 초라한 교재였으나 그들에게는 값지고 귀중한 성과물이었다.

그 후 연달아 일어난 '반우파투쟁'과 '민족정풍' 으로 7년 동안이나 여러 가지 로동개조를 받고나서 학교에 복직한 최윤갑 교수가 가장 먼저 착수한 것 역시 교과서 편찬이었다. 로동개조를 받는 동안 골똘히 사색하고 모색한 결과였다.

1973년에 『조선어어음론』을 편찬하고, 1974년에 『조선어문법(문장론)』을 편찬했다. 1977년부터는 교연실의 동료, 후배들을 동원하여 『언어개론참고서』, 『조선어어음론참고서』, 『조선어형태론참고서』, 『조선어문장론참고서』, 『조선어어휘론참고서』, 『고대조선어참고서』 등을 모두 인쇄본으로 출판하였다. 특히 1980년 출판한 『조선어문법』은 기존에 각각 분리되어 있던 문장론, 어휘론, 어음론을 통합시켜 하나의 완전한 교과서를 만들었다.

다른 한편, 그가 착수한 것은 고대조선어였다. 그는 학습 효과를 높이자면 우리 말의 기원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조선어’강좌를 신설하려 했으나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북한 조선사회과학원의 언어학자 유열이 북경대학교에 초빙교수로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북경으로 가서 유열을 만났다. 북경대학교에서 일주일 동안 유열의 교수 방법을 꼼꼼히 살피고 그에게서 『용비어천가』,  『금강경언해』 등 자료를 빌려왔다. 그는 그 자료들을 필사해서 프린트 본 『고대조선문선집』을 펴내고 중국에서 최초로 ‘고대조선어강독’ 학과목을 개설했다. 이리하여 조선어학강좌는 전교의 모범강좌기 되었다.

최윤갑 교수의 논저목록을 보면 최신 참고자료가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룬 업적으로는 경탄할만한 수준이었다. 그가 편찬한 교과서를 내놓고도 그가 펴낸 저서는 13권이고 론문은 50 편을 넘어선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론문집필과 저술활동을 계속할 것이므로 그의 학문연구에는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최윤갑 교수의 주요 저서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간략한 해제를 덧붙임으로써 그의 학문적 성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에 펴낸 최윤갑 교수의『조선어문법』은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어음론, 형태론, 문장론으로 나누어 서술되었다. 그는 이 저서에서 다년간의 교수와 연구에 근거하여 현대조선어의 어음체계와 문법구조의 특성을 구명하려고 했고 실제 언어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중국에서 조선어의 문법체계를 북한일변도로 채택할 때 이 저서에서는 덮어놓고 북한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견지하였다. 형태론에서 북한에서는 ‘상토’를 인정했지만 최윤갑 교수는 ‘상토’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문장론에서는 술어(서술어)의 중심론을 견지하고 단일문과 복합문은 술어가 몇인가에 따라, 즉 술어가 하나인가, 아니면 둘 또는 그 이상인가에 따라 분류하였다.

그 당시는 한국의 연구 성과를 볼 수 없었으므로 다만 그 자신의 교학실천과 연구를 통해 집필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중한수교 후에 보니 한국 학자들의 견해와 대동소이했다. 연변대학 언어학자 김광수 교수는 최윤갑 교수의『조선어문법』은 저자가 다년간의 문법교수경험을 총결함과 아울러 선행 학자들의 문법연구 성과를 집대성하여 대학생들과 중소학교 교원 및 어문연구자가 사용하기 편리한 교과서라고 하면서 이 저서는 중국조선족 조선어문법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1984년 최윤갑 교수는 리세룡 교수와 함께 『조선어학사전』을 집필하여 연변인민출판사를 통해 출간했다. 이 사전은 조선어 어음론, 문법론, 어휘론, 수사학, 조선 어사 등에서 쓰는 학술용어, 일반언어학에서 흔히 쓰는 학술용어를 풀이했다. 그리고 조선어 토(조사, 어미), 조선어학사에 나오는 서적, 인물, 연구기관 등 고유명칭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풀이했다. 이 사전에서는 그 당시 연변에서 쓰고 있던 중소학교 문법체계와는 달리 ‘격토’에서 비교격을 더 설정하고 일부 도움토를 격토로 삼았으며, 상토를 상의 접미사로 잡았다. 문장성분에서는 상황어와 보어를 합쳐 수식어로 잡았는데, 중소학교 문법체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편리하게 해주기 위해 수식어에 괄호를 쳐서 그에 걸맞는 상황어나 보어를 밝혀두었다. 이 사전은 학술용어, 고유명칭, 토를 세 개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는데 학술용어와 고유명칭 부분은 최윤갑 교수가 집필하고 토 부분은 리세룡 교수가 집필했다.

1987년 최윤갑 교수는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와 도서관과 연계하여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언해본),  『룡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절』 , 『월인석보』, 『구급방언해』 등 20여권의 고대문헌들을 입수해 치밀하게 비교,  연구하여 중요한 실용가치가 있는, 24만자에 달하는 『중세조선어문법』을 편찬, 출판하였다. 이 책을 저술할 때도 북한의 자료는 거의 구하지 못했고 한국의 자료를 전혀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이 출판되자 남북한의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하여 중한수교 후 한국에서 재판될 정도로 한국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북한에서도 2012년 재판했다.

이 저서는 문자 및 어음론, 품사론, 형태론, 문장론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문자 및 어음론에서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 없어진 글자의 음가, 15 세기 조선어 어음 체계와 한자음 체계, 조선어의 사성과 한자어의 사성, 어음의 력사적 변화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했다. 품사론에서는 15 세기 조선어 품사와 그 특성에 대하여 서술했고, 그 당시의 조선어 철자법과 그 변화에 대하여, 형태론에서는 체언토와 용언토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였고, 토들의 변화에 대하여, 문장론에서는 단어의 결합, 문장 성분, 문장성분의 호응, 문장구조의 특징과 문장구조의 변화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 『중세조선어문법』은 중세조선어의 문법구조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삼았는데 이 연구에 앞서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와 조선어어음체계에 대한 연구도 함께 하였다. 중세조선어문법의 연구목적은 훈민정음, 중세조선어어음체계, 중세조선어문법구조를 파악하여 중세조선어로 된 문헌을 손쉽고 바르게 해독하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조선어의 력사연구와 현대조선의 연구를 더 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연구는 주로 조선고유문자로 기록된 문헌을 통하여 연구했지만 조선어방언과 현대조선어 자료도 일부 이용했다. 이는 고대조선어의 잔재는 방언에도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어에도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최윤갑 교수의 이러한 연구 성과는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가 중국의 국가중점학과로 부상하고 조선언어문학학과와 조선어학과가 국가의 ‘특성 있는 학과(特色學科)’로 선정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1987년 최윤갑 교수는 류은종, 문창덕 교수와 함께『조선어규범집해설』을 집필했고, 1992년 『중국에서의 조선어 발전과 연구』(주필, 공저)를 펴냈다.『중국에서의 조선어의 발전과 연구』에서는 중국공산당의 민족어문정책과 중국에서의 조선 어문사업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해방 후 중국에서의 조선어 어음, 문법구조의 변화와 발전, 조선어 어휘구성의 변화와 발전, 조선어 단어의 의미 변화와 발전, 조선어 문체론적 수법의 변화와 발전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서술하였으며, 해방 후 중국에서의 조선어 각 분과의 연구, 이중 언어 연구, 정보처리의 연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1994년 최윤갑 교수가 편찬한 『중국, 조선, 한국에서의 조선어 차이』(주필, 공저)는 한국에서 큰 인기몰이를 하였다. 분단된 고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중국, 조선, 한국에서의 조선어(한국어) 차이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오랜 세월 서로 문화적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 각기 다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언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등에 대해 무척 알고 싶어 했다. 최윤갑 교수는 이들의 심정을 깊이 헤아려 이 책을 집필하였다.

이 저서에서는 조선어의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부호, 외래어표기법, 표준발음법의 차이에 대해 서술하였고, 어휘규범화기준의 차이, 어휘정리의 차이, 어휘사용의 차이, 즉  방언어휘사용의 차이, 외래어사용의 차이, 새말사용의 차이, 단어의 의미표현의 차이, 그리고 학교문법체계의 차이와 학술적 견해의 차이에 대하여 상세히 다루었다. 최윤갑 교수가 쓴 이 책의 머리말을 보면 이 책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조선이 해방되고 조선의 남과 북이 갈라진 지도 어언간 48년이 되었다. 이 48년 동안 조선의 남과 북의 모든 내왕이 단절되고 언어규범이 달라짐에 따라 통일된 조선어는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의 조선어는 그 규범에 있어서 대체로 조선을 따랐으나 나라가 다르고 언어 환경이 다름에 따라 조선과 완전히 일치될 수는 없다.

이리하여 조선어에는 중국, 조선, 한국에서의 하나의 통일된 규범이 작용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이 대외로 개방하고, 한국, 조선과의 거래가 빈번하여짐에 따라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조선어의 차이를 직감으로 느끼고 이 차이의 실태를 알려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조선어의 통일의 방도를 찾고 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런 심정을 헤아려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은 비단 조선어의 차이를 알려는 사람들에게만 도움을 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보다 더 중요하게는 조선어의 통일을 구상하고 통일의 방도를 애써 찾고 있는 지성인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데 있다. 왜냐하면 통일성을 알려면 우선 차이성을 알아야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조선어(서사어도 포함)의 차이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언어구조에도 서사법에도 속하지 않는 '중국 조선 한국의 조선어규법문법'을 넣었다.

우리는 이 책의 집필을 끝마치면서 조선의 분열로 결국 쓰지 말아야 할 이 책을 쓰게 되었고,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 이제 와서 조선분열의 고통을 더 맛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담담하면서도 민족 분단의 아픔이 행간에 쓰라리게 배어있어 문득 가슴을 치게 만드는, 사려 깊은 언어학자의 진정이 넘쳐나는 서문이다.

1988년 최윤갑 교수는 한국, 조선, 중국의 학자들과 함께 노력하여 『조, 영, 한, 중, 일 정보기술표준용어사전』을 집필하여 중국의 조선어정보처리사업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그에게 '길림성사회과학원우수성과상'을 안겨주었다.

최윤갑 교수는 정년 후에도 학술연구를 중단하지 않았고 새로 복건한 조선어학과의 초빙을 받고 조선어연구 특별강좌를 설치하여 청년교원들의 자질향상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또 조선어를 배우는 한족연구생들이 한국어를 보다 빨리 정확하게 배우게 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과 연구에 근거하여 2000년에『한국어문법』을 집필했다. 그는 이 저서를 내게 된 의도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한족 석사연구생들에게 한국어문법 강의를 하면서 한족학생들에게 하는 한국어 문법 강의는 한국어 문형 즉  한국어 말들이 한족학생들의 머릿속 깊이 박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이어 그는 한국어 문형을 이루는 동사, 형용사 연구에 착수하였고 이어 한국어동사의 문법적 범주, 문형의 전환, 부사의 역할 등을 연구했다.

최윤갑 교수의 언어학 연구는 멈출 줄을 모른다. 이 글의 서두에 언급 바 있지만 2009년 최윤갑 교수는 80고령에 평생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하여 『한국어문법신강』을 출판했다. 10여 년간 연구한 끝에 출판한 이 책은 한국어문법에서의 전통적 동사, 형용사 분류를 갱신하였고 학계에서의 종속문의 시칭은 상대적 시칭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한국과 북한에도 없는 새로운 분류방법을 적용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학자의 리론과 일본어, 영어, 중국어 등의 어학리론을 두루 섭렵하여 새로운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이 저서에 대해 김광수 교수는 「중국에서의 조선어 연구 현황과 전망」이라는 론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저서에서 최윤갑은 동사의 새 분류, 형용사의 새 분류, 용언의 문법적 범주, 명사의 새 분류, 통사론 등 부분으로 나누었다. 본서는 동사와 형용사를 새로운 리론과 각도에서 문법적으로 즉  자리 값에 의해 분류하였는바 동사를 한 자리 동사, 두 자리 동사, 세 자리 동사로 나누었고 의지동사, 무의지동사, 동태동사, 정태동사, 지속동사와 순간동사로 나누었다. 형용사 역시 한 자리 형용사, 두 자리 형용사로 나누었고 일반형용사와 심리형용사로 나누었다. 명사의 분류에서도 필자가 일찍부터 제기한 동명사와 형명사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고 통사론에서도 종래로 설명이 없었던 복문에서의 종속성 문제와 일부 부사의 역행수식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였다. 본 연구는 학자 최윤갑 교수의 다년간의 교수 실천과 탐구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마분지에 철필로 한 자 한 자 적어서 연변대학의 첫 언어학교재를 만들던 그는 그 뒤에도 수십 년 간 후학들을 위하여 노익장의 정열로 교재편찬에 힘을 쏟아 거친 황무지에 아름다운 꽃밭을 일구어냈다.

최윤갑 교수는 조선어연구에서의 탁월한 업적을 쌓았으므로 1993년에는 한국 한글날에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97년에는 ‘동숭학술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 10월 연변대학 개교 60주년 축제기간에는 대한민국 고등교육재단과 연변대학에서 공동으로 시상하는 '와룡학술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국무원 특별수당, 길림성우수영재상, 길림성사회과학우수성과상 등을 수상했다. 동북3성과 자치주에서 받은 상은 부지기수이다.

물론 그의 삶의 목적은 이러한 영예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어떤 상을 받았는지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의 자택에는 기념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최윤갑 교수와 같이 평생 학문을 연구하면서 학자적인 인격과 량심을 지킨 진정한 석학이 있다는 것은 연변대학의 긍지이고 자랑인 동시에 우리 중국조선족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중국조선어 발전과 연구와 갈라놓을 수 없다. 그가 있었기에 연변대학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가 국가중점학과로 선정되고 조선언어문학학과와 조선어학과가 국가에서 선정한 특성 있는 학과로 선정되었다. 또한 현대조선어과목은 국가의 정품과목으로 선정되었고 그가 키워낸 제자들은 그의 학통을 계승해 중국 경내 조선어학계의 중견으로 자라났다. 이 모든 것은 최윤갑 교수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최윤갑 교수의 학문에 대한 집념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는 지금도 자택에서 손녀딸과 나란히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론문 집필에 여념이 없다. 그는 만년의 정열을 오로지 조선언어의 규범화를 위하여 고스란히 바쳐가고 있는 중이다. 그에게 당면한 문제는 연변식 문법을 바꾸는 것이다. 1977년에 중국에서 조선말맞춤법을 제정할 때 북한일변도였으나 점차 그것의 문제점을 발견해 수정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테면 사잇소리 표기, 띄어쓰기, 철자, 맞춤법 등등에 문제가 많아 이것을 수정하기 위해 론문을 쓰고 있다. 그리고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도 있다. 조한번역. 한조번역은 연변대학 조선한국학원이 선두주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교재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어와 한어가 함께 뜻 표기로 되어 잇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 학문 연구에는 정년이 없다. 최윤갑 교수는 하늘이 그에게 맡긴 소임이 언어학자임을 알고 그 소임을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다해 완성하려고 한다.

 

[주] 위의 글은 저자가 2012년에 쓴 것임을 밝혀둔다. 

 

주요 저술 및 참고문헌 목록

저서:

최윤갑,『조선어어음론』, 연변교육출판사, 1973.

최윤갑,『조선어문법(문장론)』, 연변교육출판사, 1974.

최윤갑,『조선어문법』, 요녕인민출판사, 1980.

최윤갑 공저,『조선어문 수첩』, 요녕인민출판사,, 1982.

최윤갑 주필,『조선어문법』, 연변인민출판사, 1983.

최윤갑 공저,『조선어학사전』, 연변인민출판사, 1984.

최윤갑,『중세조선어문법』, 연변대학출판사, 1987.

최윤갑 주필,『조선어규범집해설(수정본)』, 연변인민출판사, 1987.

최윤갑 공저,『중국에서의 조선어의 발전과 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2.

최윤갑 주필,『중국, 조선, 한국에서의 조선어차이에 대한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1994.

최윤갑,『조선어, 한국어 연구』, 도서출판 홍문각, 1998.

최윤갑,『한국어문법』, 연변교육출판사, 2000.

최윤갑,『한국어 문법 신강』,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9.

론문:

최윤갑, <체언이 술어로 될 때 나타나는 “이”의 본질>,『학습과 연구』, 연변대학, 1957.1

최윤갑,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 문제>,『연변일보』, 1957.11

최윤갑, <한어와 조선어 어음체계의 대비>,『어문참고자료』(8), 1959.5

최윤갑, <해방후 조선어어휘구성의 발달에 대한 간단한 고찰>,『어문참고자료』(9), 1959.7

최윤갑,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어문연구』, 1979.

최윤갑, <조선어복합문의 특성>,『연변대학 학보』, 1979.

최윤갑, <조선어 “상토”에 대하여>,『연변대학 학보』, 1980.2

최윤갑, <조선어 단일문과 복합문의 구별>,『민족어문』, 1982.4

최윤갑, <조선어의 한자어와 동명사(형명사)>,『제1회 Korean학 국제교류론문집』,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3.

최윤갑, <언어구조의 층차성과 문장의 층차분석에 대하여>, 『조선어 학습과 연구』, 1983.1

최윤갑, <규정어의 확대와 전환>,『조선어 학습과 연구』, 1983.3

최윤갑,<조선문자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하여>, 『조선어 학습과 연구』, 1983.3

최윤갑, <反映在朝鮮三國時期漢子音的漢語上古音>, 『연변대학 학보』, 1986.

최윤갑, <關于朝鮮文字訓民正音的創製>,『조선언어문학론문집』, 1987.

최윤갑, <하강적단어결합에 대하여>, 『중국조선어문』, 1987.4

최윤갑, <조선어문을 대학입학시험과목에 넣지 말아야 하는가>,『중국조선어문』, 1987.6

최윤갑, <초기조선어표기법의 모범-“월인천강지곡”>,『조선언어문학론문집』, 1988.

최윤갑,<조선어의 형성 1, 2>, 『중국조선어문』, 1988.2

최윤갑, <조선의 문자생활>, 『중국조선어문』, 1988.4

최윤갑, <고대조선어>,『중국조선어문』, 1988.5

최윤갑, <전기중세조선어>,『중국조선어문』, 1988.6

최윤갑,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의 받침소리에 대하여>, 『조선학연구1』, 1989.

최윤갑, <후기중세조선어>,『중국조선어문』, 1989.1

최윤갑, <근대조선어>, 『중국조선어문』, 1989.2

최윤갑, <현대조선어>, 『중국조선어문』, 1989.3

최윤갑, <북조선과 중국에서의 조선어 문법연구>, 『한국학의 세계화 1』, 1990.

최윤갑, <중국에서의 조선어의 변화>, 『이중언어학회 7』, 1990.

최윤갑, <현대조선어 접속토의 형성>, 제3차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 론문요지, 1990.

최윤갑, <리두의 발생과 그 성격>, 『중국조선어문』, 1990.6

최윤갑, <복합문에서의 분문(分句)들의 결합적특성>, 『연변대학 제2차 국제조선학학술토론회 론문집』, 1991.

최윤갑, <조선어에 있어서의 한어차용 문제>, 『새국어생활』, 1991.4

최윤갑, <중국 조선민족 산재지구에서의 아동들에 대한 조선어 교육>,『교육한글』, 1991.4

최윤갑, <현대조선어 련결어미의 형성>,『국어학연구백년사 1』, 한국 일조각, 1992.

최윤갑, <리두의 발생과 그 성격>,『중국조선어문론문집』, 1992.

최윤갑, <현대조선어 접속토 (어미)의 형성>,『중국조선어문』, 1992.2

최윤갑, <모음자 “ㆉ,ㆌ,ㆇ,ㆊ,ㅠㅖ”과 그 음가에 대하여>, 『중국조선어문』, 1992.6

최윤갑, <이두음에 잔존한 일부 한어 상고음>,『애산학보』,1992.

최윤갑, <중국에서의 조선어 교육과 사용으로부터 본 조선어 통일의 필요성>, 『Korean 컴퓨터처리 국제학술토론회 론문집』, 1995.2

최윤갑, <중국에서의 조선어규범화와 조선어사용의 현황>, 『중국조선어문』, 1996.2

최윤갑,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사업에 대한 회고와 현재 부딪친 문제>, 『Korean규범문제와 관련한 국제학술토론회 론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7.

최윤갑, <조선어띄여쓰기의 변화로부터 생각되는 조선어띄여쓰기통일안>, 『Korean규범문제와 관련한 국제학술토론회 론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7.

최윤갑, <기념론문집 “말.글.얼”을 보고>, 『중국조선어문』, 1997.1

최윤갑,<류은종선생의 저서 “조선어의미론연구”를 보고>, 『중국조선어문』, 1997.4

최윤갑, <접속토 “고, 며”의 의미와 그 쓰이는 조건>,『조선어학론문집』, 1998.

최윤갑, <21세기 중국에서의 조선어의 전망과 발전>, 『중국조선족 공동체연구』, 2000.

최윤갑, <조선문자 자모의 배렬순서에 대하여>, 『Korean 컴퓨터처리 국제학술토론회 론문집』, 2001.

최윤갑, <조선어의 의지동사와 무의지동사>, 『중국조선어문』, 2003.

최윤갑, <조선어의 정태동사>, 『중국조선어문』, 2004.

최윤갑, <자리값에 따른 조선어 동사의 분류>, 『중국조선어문』, 2005.1

최윤갑, <중국에서의 조선어문법연구>, 『중국조선어문』, 2006.1

최윤갑, <중국에서의 한국어 문법 연구>, 『국어사 연구 어디까지 와 있는가』, 태학사.  2006.

최윤갑, <형용사의 문법적분류>, 『중국조선어문』, 2007.2

최윤갑, <조선어 종속절의 시칭은 절대적인가?>, 『중국조선어문』, 2011.1

최윤갑, <사이소리표기에 대하여>, 『중국조선어문』, 2012.2

참고문헌:

강기주,『중국조선민족항일투쟁사연구』, 민족출판사, 1988.

손동식,『연변대학대사기(한문판)』, 연변대학출판사, 1999.

현룡순,『겨례의 넋을 지켜-연변대학 조문학부가 걸어온 45성상』, 연변대학출판사, 1994.

류연산, 『연변대학 산책』, 민족출판사, 2009.

김호웅,『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조선족교육가 림민호평전』, 재외동포재단, 2007.

김병민, <와룡산일지-최윤갑>, 『장백산』. 2011.

전은주, <중국조선족이 낳은 대 언어학자-최윤갑>,『우수공산당원』 북경민족출판사. 2012.

강보유, <최윤갑 선생의 실사구시정신과 기능주의문법사상>, 『중국조선어문』. 2012

연변대학언어연구소,『중국에서의 조선어연구 론저 목록』, 연변대학출판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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