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다. 
 “2004년 12월 15일 성탄절 점심 자택에서”라고 최윤갑 교수님께 편지를 써서 보내었는데 18년이 지난 오늘 2022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오후,  우리 중국 조선어 정보학회 초대 이사장인 최윤갑 교수님의 타계 소식을 가슴 아프게 전해 들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 빈다…….

중국 조선어학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 이 추운 겨울에 코로나 사태의 역경을 이겨 내시다가 가신 것  같다. 또 우연한 날짜의 일치라 할까 해서 그때 최윤갑 명예 이사장님께 보내드린 편지를 그대로 올려 본다.
                                                   
  현룡운/ 2022-12-25   자택에서
 

- 아래는 편지 전문이다.- 

    *  *    *  *    *  *

존경하는 최윤갑 명예 이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병원에서 퇴원하셨지요?
류은종 교수님으로부터 일단 수술이 잘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번 심양회의에 대하여 저 나름으로 대충 정리한 것을 보고드리면서 양해를 구합니다.

오른쪽 두 번째가 최윤갑 교수
오른쪽 두 번째가 최윤갑 교수

1) 경위
 지난 11월 중순에 제가 평양 방문에서 북측에서 이번 심양회의에 참여하겠다는 구두 답복을 받고 12월 1일에는 북측 대표단 명단과 논문 제목이 팩스로 날아왔습니다.

여태 10년간 제가 이 모임의 조직과 연락을 주관하던 중 북녘에서 대회시작 전에 논문 제목과 명단이 오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오히려 남측의 명단이 더 늦게 확정 전달되어서 민망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북측 상황에서 두 달 사이에 단장이 출국을 두 번하는 일은 이례적입니다. 박영신 서기장은 10월에 중국에 초청하여 회의에 참가하셨다가 제가 11월 5일에 평양에서 만났으니깐요.
역시 대단한 관심을 가진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중국도 아주 짧은 시간내에 인가를 받았지요. 심양시의 과학기술국에서 비준하였습니다.
장소는 연길로 정하였다가 교통편의와 經費 절약의 차원에서 심양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학회의 이사진 중 김진용 교수님(김진용 교수님은 현재 한국 대전에 거주 중)을 꼭 모셔야겠다고 제가 생각하여가 한국에 긴급 통보을 하였더니 KIST 최기선교수,  변정용교수님께서 자기네가 경비 조달하여 꼭 모시간다고 이 메일로 저한테 연락이 급히 왔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요)
꼭 모시고 오려고 그분들이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못 참석하시어 저도 섭섭 하였습니다. 또 여러분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 숨은 사정은 저의만 알아야되겠습니다.

그리고 연변대학 인문학원 원장이자 1994년 최초부터 KOREAN COMPUTER처리 학술 조직을 사회했던 (아마 그때 40代후반이었지요.) 전학석 교수님(학회상무이사,  중국 조선어 술어위원회 대표,  조선어 학회 회장)은 금년도 마지막 강의를 12월 20마치고 심양에 꼭 오시기로 저하고 약속하였었습니다(대회사회를 해야 할 분인데).  그런데 그날 12월 20일(月)연길에서 심양행 항공은 缺航이였습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10년 만에 잔치인데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도 많았고,  10년이면 강산이 한 번 변한다 하였는데,  30代가 40代로,  40대가 50代로,  60대가 70대로 되었고 또 그 사이에 幽溟을 달리 한 분들도 계셨고….

심양의 김호범 교수님게서는 70고령에 달아 다니면서 수속을 받아냈습니다. 원래 심양의 有知인사이니깐요.

우리 연변은 역시 행정 급수가 낮아서인지,  아니면 민감한 사안이라도 있어서인지 이런 회의 거행은 보통 적어도 6개월 걸리지 않았습니까.

저의가 사전에 양측에 제안서를 발송하였습니다. 보낸 제안서에서 명백히 거명한 특별 초청 인사들 중 베이징에 와서 강의 중인 문영호 조선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 소장과 김영황교수가 사정에 의해 참석 못하고는 대신 예하면 조선과총서기장 박영신 대외사업부장 장종남 외 사회과학원 국어사정위원회 서기장 신병호선생(1938년8월 16일생)이 오셨고 조선 체육대학 과학부학장 오창복 교수(과학원 부원사1946년1 1월 생),  리수락 박사(1941년6월생),  김명규 (1953년1월생)실장,  최년소(年少)박명일, 1974년10월 1일생, 삼일포 정보센테 프로그람작성기사)등 모두 13명의 대표단이 오셨습니다.(명단 별첨, )

제가 보기에는 완벽한 老中靑少의 결합이였습니다.

년말이고 또 불시에 회의를 조직하였지만 사전 현지 조율이 가능하였기에 저한테는 구체적인 명단과 대회진행 토론 의제 내용 조율시 간을 조정할 틈은 좀 있었습니다. 물론 말 못 할 사정은 많았습니다.

그래도 역시 10년 전 유선팩스 전송시대에서 인터넷e-mail전자 전송시대로 발전이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도 2004년 하반기 내의 코리안 학자들의 최대 규모의 , 최 연속 같은 내용으로의 학술회의의 총화모임을 열학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무릅쓰고 조직할 수 있어 진짜 국제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 학술 회의 10년 총화였습니다.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최윤갑 교수.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최윤갑 교수.

2)학술토론 조직과정

대회의 행정 수속 절차와 후근(식숙,  교통)을 우리 학회 부이사장인 김호범 교수님이 전임학장으로 계시던 심양 발해대학에서(현임 학장 천문갑)책임지고 학술문제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은 조선의 교육성 프로그램센터 소장 리수락 박사,  한국 KIS의 최기선 박사,  김호범교수가 공동주석으로,  제가 주제넘게 대회 3일간의 집행주석을 맡아 집행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중국중문신식학회에서는 조우치부회장겸 비서장께서 친히 왕림하셔서 개회사를 하였습니다. 역시 대단히 다망하신 분인데 참석하셔주었습니다.

한국의 명단도 여러 번 교체된듯합디다.

학술토론조직에서는 주로 전문용어와 자연언어분과,  체육용어등 내용들이 발표되였습니다. 생각밖에 각 측의 발표 주제가 같은 분야의 내용토론이 많았습니다.

개막식에서 료녕대학의 전임총장인 풍옥중 교수는 “나는 이번 회의에서 중국인으로서 두 가지를 즐겁게 발견하였다, 첫째는 韓민족 학자들의 求同 문화,  협상 문화, 共存을 위한 타협문화을 보았고, 둘째로는 미래를 지향하는 한민족의 IT분야의 내심 적으로 존재하는 박력을 발견하였습니다. 2008년 대비하여 미리 연구하는 당신들 자체가 대단한 예견성이 있는 민족 문화의 공동 발전을 위한 시도이다”라고 하셨고, 조우치 비서장도 이번 기회에 2008년을 대비한 전문 용어의통일과 정보처리분야의 공동연구를 한국과 조선, 중국의 학자들에게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앞줄 왼쪽 세 번째가 최윤갑 교수
앞줄 왼쪽 세 번째가 최윤갑 교수

최윤갑 교수님:  
저는 최윤갑 교수님을 대독하셔서 읽는 기조연설에서(류은종 박사님이 집필, 저가 자료 일부 제공) 제가 제기하는 것은 전산처리(IT분야)분야에서 한국과 조선, 중국의 조선어 전문용어들이 차이가 많아 사전(事前)컨텐츠 작업에서 어느 정도 통일이거나 복수 안이 마련된 다음 공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미리 중국 측을 대표하여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하려는 목적이였습니다.

첫째는 중국의 올림픽은 디지텔 올림픽을 승낙한 다종언어 전산처리 올림픽과 같습니다, 
둘째는 중국에서도 조선어는 법정 문자인데 이 문제를 왜 자꾸 꼭 남, 북의 문제로만 보느냐?입니다. 
세째는 술어기지 구축은 적어도 세 측(중국, 조선 , 한국)이 공동 참여,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공학徒인 제가 중문 신식학회에서도 당당히 우리 말과 글에 대한 事前預見를 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고, 그 때(2008년)에 가서야 서둘다가는 전문 용어분야에서 의사소통이 전사법과 전자법 자체에서 억망진창인 된 우리의 글 전달이 잘못될 우려가가 심각합니다.

동족들의 공동의 행위와 언어표현의 차이나 , 수화 제스쳐를 눈뜨고 볼 수 없는 진풍경의 연출을 미리 막자는 취지였고 학문적 접근과 통일표준도 市場경제에 맞게 연구하고 가행성 연구 ( 타당성연구)를 하여보고 투자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예하면 지금 BP(호출기)용어는 3년 만에 사용자가 없어졌습니다.
이모티콘과 신조어가 우리 글에서도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중국에 200만 동포가 거주하고 몇 십개 대학에서 소위 우리글과 말을 가르쳐 준다는데…

제가 김호범교수님(전임 중문 신식학회 3기 조선족유일 대표, 이사)의 추천에 의해 중국 중문식신학회의 선거로 당선된 중국조선족정보처리 분야을 대신하는 대표하는 이사이고 최명수 주임도 이사이자 소수민족 문자 처리위 주임이고 (藏語 ,維語., 蒙語,朝語 정보처리총괄)한데 이 정도의 사전 조율은 남측과 북측과 해야 그 사명을 동포 학자로서 사전에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추진합 겁니다. (나중에 우리를 중국의 후각(后覺)자라 욕 말라는 사전변명 장치입니다)

제가 지금 이 문서를 타이핑하는 오늘 12월 25일(성탄절) 점심 중앙 1 TV 톱 뉴스에서 중국에서 이미 互聯罔 전송속도가 지금의 속도에 비하여 1000배 빠른 시스템이 개발되어 정보전송용 광 케이불망 건설 기술이 세계 전열에 서게 되었다는 보도를 발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대회에서는 중국 논문 6편, 한국 논문 24편, 조선 논문 10편이 발표되었고 우리 학회의 오랜 벗이면서 코리안IT교류, 협력의 동참자, 견증자이신 한국의 포항공업대학 박찬모 교수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전10년 행사 기록으로 돌이켜보는 특강이었습니다.

논문을 발표하는 최윤갑 교수 
논문을 발표하는 최윤갑 교수 

3) 긴장하고 숨 막히기 전 순간들
 
최명수 상무부회장의 부탁으로 제가 우리 학회 대표로 회의 준비작업 때문에 심양에 들어갔을 때에는(12월18일) 아직도 논문들이 인쇄가 미완성이었습니다.
 
회의장을 체크하여 보니 군부대(심양군구 초대소)인지라 호텔방에서 국제전화와 인터넷이 안되여 발해대학 천문갑 학장한테 문제를 제기하였고 강력히 호텔 측과 항의하여 그래도 조건이 좋다하는 방으로 6개를 실랑이를 벌린 끝에 빼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전 5차에 거친 연변회의 전통 관행에 비하면 협조 미흡이라 호텔을 옮기려고 벼르면서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만 후근 조직자들의 체면도 있고하여 그만두었습니다.

 또 거기에다가 심양에 폭설이 와서 공항이 통제되여 연길에서 심양, 한국인천 국제 공항에서 심양 항공편이 취소 연기되어 전반 회의를 연기하였습니다. 그러니깐 예정지 금시 변경이 또 무리가 있었습니다. 

북측 대표단은 약 45분 지연된 저녘에 심양에 도착하였습니다
 
회의 예산도 문제로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상하게 통신수단이 연변보다 못하였습니다. 호텔 수준도 그렇고….
하는 수 없이 카드전화를 사서 국제통화을 하면서 “심양에 눈이 내린다, 심양의 눈이 내리지 않습니다. 除雪 작업 중입니다...”등등 긴급정보를 인천공항에 보냈습니다.
연길에서 오시기로 한 최명수 주임과 문창덕 선생도 이튿날 11시에야 연길공항을 이륙할 수 있었습니다. 픽업하는 영접자도 없이……

회의는 부득불 연기, 도착 미상 중견인물이 여러 명인데다가 또 감나라 배나라하는 사람도 있어 골치 아팠지만 저의  저돌적인 성격으로 고군작전하면 “독재”(獨裁)하였습니다. 

그때의 저의 입장은 똑 마치 그젠날에 제가 농촌 생활에서 본 겨울철 결혼식 날 폭설이 내려 시골 버스를 타지 못해 兩가집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마을 동구밖의 버스정류소를 목만 빼들고 보는 장모님의 마음과 시아버지의 며느리 꽃차를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이었습니다. 

연말연시이고 모두가 국제적으로 바쁜 양반들이니까.
그래도 하느님의 조화라 瑞雪引路, 送舊迎新의 기분이고 3년만의 재회라서 별 탈은 없이 이튿날의 오전 회의를 오후로 미루었습니다.

대신 오전 각 측의대표단 단장의 예비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
대회개회 직전에 최명수 주임과 문창덕 교수님이 눈길을 누비면서 간신히 도착하였는데 식사도 못한 채 개회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아직도 북과남의 호칭 문제 때문에 북 측과 저하고는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남측에서 많이 수용하였습니다. 제가 좀 강하게 남, 북측의 팀 개별선수들과 3시간 정도 “새벽 배갈투입 전투”를 하였지요. 역시 술로 공략전을 벌려 연변주량을 억지로 과시하면서 酒中 긴급합의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남, 북 새벽 배갈 투입 醉中 림시 구두 합의 때문에 3일간 잠잔 시간은 도합 6시간입니다.
 
조선과 한국이라고 중국에서 호칭하는 것 외교 원칙인데 데 꼭 “북, 남”으로 표기하면 앞으로 이 자료를 후세에서 漢族들이 보면 북중국, 남중국이 있었나? 하지않을까요?  

최윤갑 교수님: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濟芳, 百家諍鳴)의 학술회의인데 3국 코리안 제방(濟芳), 쟁명(諍鳴)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1995년 11월 3일 최윤갑 회장님을 모시고 한국 국어정보학회 방문시 김도현 문화부 차관 ,진용옥 회장, 독일 학자들과 정보학회 학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1995년 11월 3일 최윤갑 회장님을 모시고 한국 국어정보학회 방문시 김도현 문화부 차관 ,진용옥 회장, 독일 학자들과 정보학회 학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최윤갑 교수님, 
심지어 무슨 우주 언어랍시고 목에 핏대 세우고 역설하는 선비 아닌 자칭 대부자도 있단말입니다, 저하고 리수락 박사가 사회하다가 우수워서 그냥 대충 넘겨 갔습니다

다음,  
역시 이번에 보면 뒤에서 수고 많은 분들도 있었고 또 수군수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저는 정상 현상으로 일단 봅니다. 원래 잔치에는 시비가 많은 법이지요.

심양의 김호범 교수님의 고생과 수고가 가장 많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진짜 수고를 많이 한 분입니다.

남측의 김수열 선임연구원, 김술옹 목원대 교수. 김미형 상명대 교수 (제가 한국 팀에서 처음 본 녀(여)교수 발표자—저하고는 동생하기로 했습니다.)등 이런 분들이 가장 뒤에서 수고를 많이 한 분들 같은데 제가 주량이 모자라서(시간도 없고)술 한 잔도 못 했고 당신들이 정말 수고 많았다는 집행주석으로서 말씀도 못 한게 가슴 아픕니다.

 마지막 날은 저도 홀로 밤새고 한국 측 이일병 교수(문재인 정부 외교부 장관 강경화의 남편)와 사전 早餐조율을 하면서 총결 내용문 초안을 작성하였습니다. 그후 다시 대회 토론, 북 측과 협의 등등 모두 뒤 이야깁니다. 결국 집행주석 보고서로 결과 보고를 통과시켰습니다.

교통편도 폭설 뒤 행차라 전부가 연장(딜레이)되었고 여건상 바래는 교통편도 정확치 못하여 연변 팀에서도 (최명수 주임, 문청덕 교수, 류은종 교수) 영하 –31Ċ 완행 열차 동짓날 강추위에 연길 돌아갔습니다. 저도 力不縱心의 나날이인 듯합니다.

남측 대표단은 24일 귀국 오전 9시경 항공편으로(일부는 개별 적으로 행차하였고) 오늘 오후(12월25일) 15시경에 조선 대표단 13명은 심양을 떠나 평양으로 갑니다.
저도 어제 저녘에 연길로 왔습니다.

총 적으로 말썽 없이 그래도 성공적으로 잘 된 듯은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에 북에서(조선)의 최연소 참석자, 그 선수 이름이 박명일인데 그 친구 나이70세이면 2044년입니다. 진짜 세기와 더불어 하는 대화장이었습니다.
22세, 1974년생. 그럼 우리 최윤갑 교수님이나 김호범 교수님과는 거의 半甲자(50살) 정도 차이입니다. 

김호범 교수님 폐막식에서 중국에서 후배 양성이 소홀하였다고 하시면서 부끄럽다고 통탄하였습니다. 
저마저 제가 후배 없이 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는데 주변에서 얼마 보기가 모두 구차했겟습니까.

저의 팀은 편균 년령이 64세이니 중국 조선족 노년학자 모임 (표현이 대단히 죄송 합니다)을 하는 듯 하였고 60이 지난 류은종 교수님(62)마저 서기원, 짐꾼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중국 팀의 일일히 연령공개는 제가 “극비”로 부쳤습니다.
연변과기대 김진경 총장님이 지난번 연길 회의 참석 시 “제자를 키우는 것이 사회 큰 재산을 키우는 것이다.”한 말씀이 새삼스레 느껴져서 연변과기대 김동일 교수 일행을 부랴부랴 심양北站 막차에 바래면서 “우리 함께 해봅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자칭 중국의 조선족 집거지 최고 명문 연변대학에서 좀 이 분야에 신경을 쓰도록 한번 선량하신 이 조선어문계의 최고 권위인사이신  최윤갑 명예회장님께서 毒說을 현직 총장이자 제자들한테 한 번쯤은 하였으면 합니다.

조선어 처리와 다국어처리는 자연계와(공학)인문과학의 集合과학인데 모두들 돈이 안 된다고 연구가 미약한 연변학계의 현실입니다. 대학교직원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저도 안타깝습니다. 얼마든지 프로젝트화(項目)할 수 있고 국제 컨쇼시엄을 할 수 있는데 말 입니다.

罪悚합니다 
우리 학회도 신생 혈액(納新)을 영입하자고 이번 심양 이사회에서 홍병용 회장의 주재로 뜻깊은 심양 이사회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상 서투른 보고를 드리면서 대회집행주석의 보고서(집행주석 현룡운(중국)—모든 잘못은 저한테 넘기라는 뜻에서 제가 집행주석일 뿐입니다)를 전송합니다, 

최윤갑 명예회장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다시 찾아서 소상이 회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4년 12월 25일 성탄절 점심 자택에서

 현룡운 拜上(아래-보고서)

 

추신: 최윤갑 회장님, 출원은 일단 하셨다는데 날씨도 추우신데 몸조리와 치료에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근일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심심풀이로 읽어주시고 고견을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김진용 교수님께서 문안을 전하여 왔습니다. 집 전화를 알려 드렸습니다. 
 안녕히.

 2004년 12월 27일 
 현룡운 올림 

  *  *
18년 전 오늘 최윤갑교수님께 전달한 자료;
다국어정보처리국제학술회의 대회주석단집행주석 총결보고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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