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만: 목단강시 양명구 출생. 흑룡강성 교육학원 조선언어문학전공, 1977년3월~2005년5월 교사.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흑룡강성조선족작가협회 회원, 칼럼니스트. 신문, 잡지, 라디오방송에 수필, 칼럼 백 여 편 발표, 수상 다수. 동포문학 "독수리의 비상". 수필 우수상 등 수상. 공저
최세만: 목단강시 양명구 출생. 흑룡강성 교육학원 조선언어문학전공, 1977년3월~2005년5월 교사.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흑룡강성조선족작가협회 회원, 칼럼니스트. 신문, 잡지, 라디오방송에 수필, 칼럼 백 여 편 발표, 수상 다수. 공저 "독수리의 비상".  동포문학 수필 우수상 등 수상. 

거리距离,말그대로 양자간 떨어진 간격을 지칭한다. 거리로부터 파생되어나간 낱말도 많다. 이를테면 마음의 거리, 생각의 거리, 신분의 거리, 감정의 거리와 같은 것이다.

향간 마을에서 사는 사람을 가리켜 산골 사람, 향하인乡下人이라고 한다. 산과 계곡의 가까운 거리에서 산다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귀에 거슬리는 말이 되기도 하다. 농촌이 약간 넓은 벌이라 할지라도 시가지와 거리가 있으면 여전히 시골로 불리운다. 내가 처음 살았던 고향의 현성은 산에 겹겹이 포위되어 있다. 하지만 목단강, 계서, 가목사로 가는 철도선 갈림목에 위치해서인지 산골 취급을 하지 않는다.

사천의 중경, 판기화攀技花,산동의 청도 역시도 산성山城이다. 산과 구릉에 의존해서 세워진 명 도시다. 교통, 수려한 산과 아름다운 물의 조화를 잘 맞추어도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닌지. 자기가 살았던 시골도 언제 가는 시가지로 변모할지 누구도 모른다. 관광, 교통, 경제, 교육문화가 발달하고, 인차마룡人车马龙의 성황을 이룬 곳이 도시이다.

도시에서 살고 싶고 적어도 도시와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환한 불빛의 밤거리, 오색령롱 반짝거리는 네온등의 대형 상점들을 바라보다 나면 어스레한 산촌의 정경이 떠오를 게다. “쪽걸상에 앉아 섹시하게 걸어가는 이뿐 여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봐도 기분이 참 좋지” 90년대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동향 친구의 롱이 떠오른다.

도시 꿈-그것이 현실화 되었다. 특히 조선족이 맨 앞장에 섰다. 도시 진출, 연해 도시 진출, 해외나들이로 번 돈으로 도시 에다 멋진 아파트를 사놓고 산다. 눈 깜박 사이 도시인으로 변모한것이다. 도시 생활은 좋은 것도 많지만, 불쾌한 점도 많다. 누구나 알겠지만 이웃끼리 서로 모르고 지낸다. 도시의 이웃은 시골의 이웃처럼 그리 순박 하지도 않다. 서로 경계하는 눈빛이 흐른다. 소통없이 마음의 거리를 두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문만 닫아걸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허나 농촌은 다르다. 서로 오래 살았고, 산과 물이 인접해 있듯이 마음의 거리를 확 열어놓고 산다. 온돌방에 앉아 음식도 나누고 술도 마세 가며 소통하며 산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서로 발벗고 나선다.              

2002년 봄, 내가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어느 하루 아침에 일어나니 어머님께서 옆집 나그네(이혼남)가 밤새 앓음 소리 하더라고 했다. 70년대, 하향 지식 청년들을 위해 지은 벽돌 기와 연방连房인데, 간벽间壁 이 엷어 데시벨이 좀 높아도 아래 집에 다 들린다. 나그네는 나하고는 동갑이고 이웃인 지라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 나는 고정 전화로 기차로 1시간반 떨어진 거리에서 사는 옆집형님한테부터 알렸다. 그리고 학교 출근을 하면서 옆집에 들려보았다. 노크해도 기척이 없었다. 때마침 길가에서 친구가 소속된 생산 대장을 만나 친구 상황을 여쭈었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2교시가 끝 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보았다. 옆집에는 누구도 오지 않았다. 나는 집게로 그 집의 뒤창문을 뜯고 들어갔다. 친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는데 숨은 쉬고있었다. 나는 대뜸 내 집 고정 전화로 촌 의사한테 알렸다.             

의사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왔다. 의사는 보더니만 빨리 진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달려가 3륜차를 불렀다. 때마침 친구 형님도 도착했다. 환자를 3륜차에 싣고 진 병원으로 달렸다. 가자마자 주치 의사는 산소호흡기부터 꽂는 것이었다. 미구에 좀만 늦었어도 환자가 잘 못 되었다고 의사가 말했다. 친구 형님도 나의 손을 꼭 잡고 ‘내 동생이 좋은 이웃을 만나 고맙다’고 연신 말했다.

며칠 지나 친구의 입을 통해 안 것인데, 그날 친구는 고독한 김에 맥주 4병을 따서 내처 마신 것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는 것이다. 일이 있은 후, 이웃에 사는 한족 아줌마들은 “최선생 아니면 옆집 나그네가 죽었다.” 고 자주 말했다. 내가 한 일이어서 그런지 “이웃이 사촌 보다 낫다”는 말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농촌에서 이웃이면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 도시 생활에 사람의 감정 거리는 갈수록 빈약해지고 있다. 내가 살던 진 소재지 중심에 위치해 있는 조선족 마을도 원래는 2백호 동네였는데, 지금은 출국, 도시 이사를 해서 몇 십 호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산지사방 여러 도시에 흩어져 생활한다. 이렇게 되다 나니 고향의 가까운 친구와도 멀리 떨어져있는 현실이다. 그러니 마음의 거리도 시골 있을 때와 다르게 좀 틈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리가 아름다움을 낳는다” 고 했다. 멀리 떨어져서 살다 보니 ‘아름다움도’ 서서히 도망가는 느낌이다.            

오늘, 흩어지고 멀어져 가는 마음 거리는 위챗微信의 ‘탄생’으로 그 거리가 좁혀 지고있다. 과거 일부분 사람이나 컴퓨터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영상 통화를 하던 것이, 지금은 모두 휴대폰 위챗 영상통화로 갈아치웠다.

아울러 위챗그룹微群 동아리 같은 것이 생겨났고, 그 조직 체계도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규칙적으로 움직이는지 모른다. 나의 위챗그룹에는 조선족신문문화, 작가협회, 퇴직교사 등 통합 인수가 904명이 된다. 어떤 그룹에는 국장, 사장, 교수, 문학가들이 ‘포진’되어 있다. 이들이 위챗그룹을 빛내주고 존경의 대상, 흠모의 대상이 된다. ‘계급 높은’ 어르신님들도 채팅방에서 그 어떤 틀도 갖추지 않는다.

채팅방에서 서로 배우고 부지런히 링크를 나르고 성과와 글을 ‘홍보’하기도 한다. 성과를 낸 학자, 작가들의 공적패功绩牌,상패가 그룹방에 뜨면 하트가 날아오르고,  ‘미사여구’가 동원되며 찬양일색이다. 이들의 경력과 총명 재질, 근면과 희생이 재 인정을 받는 행복한 순간들이다. 거기서 열심히 응원 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덤덤하며 부럽게, 조금은 시기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성과 자, 강자는 약자의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고저귀천高低贵贱이 따로 없다 한들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가. 현실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이 떠받 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자타自他가 공인하는 일이다.

잘 나가고 인기 인물 앞에서 누군가는 무형의 신분 거리를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시기도 하면서 자기의 학력, 학위, 성공을 중시하며, 문인이라면 한 번쯤이라도 ‘명작’을 고심한다. 자기 대에서 글러먹었다면 자식대에서라도 그 희망을 놓지 않는다. 도시 나와 열심히 자식 뒷바라지를 드는 것도 자식을 대학, 명문대를 보내려고 하는데 있다. 자식을 훌륭한 인물로도 키우고, 출세 시켜 거기서 ‘대리만족’도 얻고, 명인 들과의 신분 거리도 축소시켜 보려고 시도한다. 

떨어져 있게 되면서 소외되어 가는 마음, 자격지심에 따른 ‘신분의 거리’ 같은 것도 변함없는 마음, 정열과 용기 앞에서는 스스로 깨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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