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강철

 

들어가는 말

 

내 인생이 60고개를 넘고 보니 세상이 좀 보이는것 같다. 공자(孔子)는 “오십에 천명을 알고 육십에는 귀에 순하라”(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顺)라고 했는데 이제야 자기의 천명을 좀 아는것 같다. 하지만 나한테 60세는 아직 반생(半生)으로 생각되고 있어 앞으로도 걸어야할 길이 멀고 해야할 일이 많은것 같다. 그런데 왜서 도중에 이런 글을 쓰려고 하는가?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세가지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몇 년 전에 우리 집 형제들을 만났을 때 우리 가족사를 후세에 남겨둘 가치가 있지 않느냐고 누님과 형님들이 여러 번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을 추진 하자면 현역에 대학교수로 있는 나하고 나의 곧 위의 형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대 우리 둘은 한창 사업 전성기라 거기까지 돌볼 여유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정년퇴직 하고 여유가 있는 누나 형님들한테 글을 써보라고 부탁했더니 반년동안에 다 써 냈고 동생들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마음속에서 줄곧 프레셔(압력)로 되어서 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10년 사이에 누나 세분이 세상을 뜨고 형제들이 모두 회갑을 넘었으며 생존하고 있는 둘째 누나는 80세를 넘어섰다. 그래서 책 한 권이라도 만들어내야 되겠다는 강박 의무감으로  가을 부터 매일 밤잠을 두시간씩 줄여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두번째 이유는 나 자신도 한번 인생의 중간 총결을 하고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고 살아갈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이제 부터의 인생은 오르막 길에서 내리막 길로 전환하는 시기이고 지금이 곧 그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 등산에 비교한다면 오르막 길에서 내리막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오르막 길보다 내리막 길이 어렵다(上坡容易下坡难)는 중국의 고전 속담과 같이 내리막 길에서 곤두박질 하면 큰일이다. 오르막 길을 걸을 때보다 경험도 지혜도 많아졌지만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되니 말이다. 

기실 40대부터 체력은 내리막길을 걸고 있다. 하지만 경험과 지혜를 잘 살려서 지혜로운 인생을 지향한다면 내리막 길도 천천히 비탈길을 밟으면서 멋지게 내려올 수 있고 때로는 다시 오르막 길을 걸을 수도 있지않겠는가.

세번째 이유는 우리들이 걸어온 인생의 경험을 하루빨리 젊은 세대들에게  전해주어 그들이 인생에서 굽은 길을 적게 걸고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도록 거울을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 가지만 선배나 선대의 경험교훈을 잘 섭취한다면 더욱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을 거점으로 조선족네트워크 구축 활동을 하는 것도 내가 얻은 지혜와 인생 자원을 우리 젊은이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이다. 자기 이름을 남기거나 유명해지거나 어떤 이익을 얻거나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 한다(人怕出名猪怕壮)는 속담이 있듯이 너무 이름나면 남에게 당할 때가 많다.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자기 인생 만을 살고 싶다. 허나 생각대로 되지않는 것이 사람의 인생인가 보다.  

나와 우리가족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중국의 근현대사가 한 농민 가족의 옛말로 엮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만주시대로 부터 새중국이 성립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우리 가족의 역사를 통해서 엮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며 아래에 간단히 나의 가족을 소개하려고 한다.  

가족사진, 앞줄 어머니 옆에 앉은 아이가 저자 이강철
가족사진, 앞줄 어머니 옆에 앉은 아이가 저자 이강철

  우리 집은 중국의 길림성 연변(옛날에는 만주지역의 간도)에 있는 아주 평범한 중국 농촌의 한 농가(農家)였다. 그렇지만 또 평범하지 않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쓸 수 있는 이유도 있었다. 하나는 우리 가족이 중국 농촌의 농민 전형으로서 가난하기 짝이없이 살아 왔고 구 만주 시대와 현대 중국사회의 역사적 풍파를 빠짐없이 겪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사우남년 마전동이라는 마을에서 살다가 일제의 조선 강점과 식민지 지배 때문에 할아버지가 가족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 만주의 간도(연변 조양천 물리거우촌)에 왔는데 그것이 1910년대로 추정된다.

 그뒤로 만주사변 (1931년 9월18일), 만주국 시대(1932-45년), 중국의 국공내전과 토지개혁시기(1945-49년), 중화인민 공화국 성립 (1949년10월1일), 조선전쟁 (1950년 6월 25일 -53년 7월), 중국의 대약진과 인민공사시기(1958-60년), 문화대혁명시기 (1966-76 년), 개혁개방시기(1978년 -현재) , 천안문사건(1989년) 등 중국의 근현대  100년 역사를 겪어왔다.

  우리가족은 보기드문 대가족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1여5남을 낳아서 길렀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조선땅에서 건너와 6남6여를 낳아서 기르고 타계하셨다. 그리고 우리 부모는 4남4여를 (8남매)를 낳았고 1995년에 선후로  타계하셨다. 

부모님 회혼례 사진
부모님 회혼례 사진

   1994년3월에 우리형제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60주년 (다이야몬드 혼)을 축복하는 대 잔치를 룡정시호텔에서 굉장하게 치렀다. 예전에는 회갑잔치를 치르는것이 부모의 장수를 축하하고 자식들의 효성을 표시하는 큰 행사였지만 우리 집에서는 회혼례까지 치를 수 있었으니 다복한 가정이라 할만 하다.

 형제자매 8남매와 그 가족들, 그리고 사촌(친사촌 고종사촌 이종사촌 외종사촌) 모두 합치면 100여명이 되며 거기에 3촌에서 5촌 이상 8촌 친척들을 넣으면 헤아리기도 힘들다. 잔치날에는 내빈, 외빈을 포함해 200여명이 참석하여 용정시가 들썩 하였다. 

이 잔치는 연변의 조선족 가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기에 룡정시의 문 부시장이 친히 참가하여 절을 하고 축사 올리었다. 또한 연변텔레비전 방송국에서 특별 취재 팀을 구성하여 취재하고 [사랑으로 가는 길]이란 특별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방송하였다.

가난한 농가의 8남매중에 6명의 대학생과 1명의 군인장교가 배출 되었으니 그리 쉬운일은 아닌것이다. 우리가 살던 산간마을에서 보면 대 출세 가족인 것이다. 또 우리 부모들은 재간도 좋다. 4명의 딸을 낳아서 시집을 보내고 4명의 아들을 낳아서 장가 보내 며느리를 삼았으니 수출 수입이 딱 평형을 잡은 것이다.

  큰누나 인숙(仁淑)이는 가난한 생활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연변대학 수학학부를 졸업하고 용정에서 일생동안 중학교 교원으로 인재육성 사업에 종사한 후 정년퇴직 생활을 하다가 2012년10월에 사망했다. 향년 76세였다. 남편도 용정고등학교의 역사교원으로 교육사업에 종사 했으며 정년퇴직 후 여유로운 생화를 하시다가 금년(1923년) 1월 6일에 90세로 코로나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 1남2여를 두었는데 모두 결혼하여 지금은 중국위해(威海)와 일본 도쿄에서 직장에 다니고있다. 

 둘째 누나 월순(月順)이는 가난을 벗어나려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체육학교에 들어가 악전 고투한 결과 자전거 한 대로 연변과 길림성, 전중국 나아가서는 세계대회(신흥역량 운동회, 인도네시아,1963년11월)에서 금메달을 타서 이름을 날리고 건장급 운동원이 되었다. 일생 동안 체육 사업에 종사 하였으며 길림체육학원의 교련원(감독)으로 있다가 지금은 장춘에서 정년퇴직 생활을 하고있다. 남편은 군인으로 장교였고 자식 2여를 두었는데 결혼하여 맏딸은 장춘에서 직장에 다니고 둘째 딸은 일본유학을 하고 돌아가 길림대학교에서 부교수로 있다. 

셋째 누나 일금(日今)이는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개산툰소학교 교원으로 일생 동안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정년퇴직하고 2005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남편은 장교였는데 퇴역하고 개산투섬유팔프공장의 공회주석으로 일하다가 정년퇴직 하였으며 2009년에 사망되였다. 1남2녀를 두었는데 지금은 결혼하여 중국과  일본에서 각자 직장에 다니고있다.

넷째 누나 순림(順林)이는 유명한 용정고중을 졸업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의 풍파로서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분투하면서 나중에 연변대학의 특별강습반을 걸쳐 소학교 교원으로 변신하여 일생 동안 인재 양성에 힘을 다했으며 연길에서 정년퇴직 후 2019년9월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남편은 용정철합금공장의 사장으로 있다가 1996년에 돌아가셨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지금은 가정을 이루어 서울과 중경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다.

  맏형 희철(喜哲)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짓다가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여 군부의 석유정제공장의 기술원으로 일을 하다가 폭발사고에 의해 눈에 큰 부상을 입었으나 공로자로 되고 결국은 장교로(대위) 승진했다. 퇴역후에는 장춘의 길림성 야금연구소에서 보위과 과장으로 있다가 정년퇴직 생활을 하고있다. 자녀는 딸 둘이 있는데 장춘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둘째 형 장철(長哲)은 문화대혁명의 풍파 속에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들을 정성껏 모셨으며 생산대장 등 직을 맡았다. 장기간 건축사업에 종사하여 많은 집을 지어 사회에 공헌을 했으며 용정과수농장의 직원으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연길에서 정년퇴직 생활을 하고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연길과 한국에서 직장에 다니고있다. 

   셋째형 동철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짓다가 1977년에 길림대학(중국유명대학) 일어학부에 입학 하였는데 졸업하고 연변대학외국어학부에서 일본어 교수로 일 하다가 1989년에 가족을 거느리고 일본에 가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시간강사 등 사업을 18년간 하다가 연변대학에 돌아가 일본학연구소 소장으로 활약 했으며 정년퇴직 후에 한국과 중국에서 대학교수로 재 초빙 받아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아들과 딸 2명을 길렀는데 일본에서 직장에 다니고있다.

어린 시절의 저자 이강철
어린 시절의 저자 이강철

   나(강철)는 대약진 운동시기인 1958년에 태어나 굶주림 속에서 자랐으며 문화대혁명 10년간에 소학교로부터 고등학교까지 동란 속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고 77년부터 농촌에 돌아가 농사를 지었다. 1981년에 북경의 중앙민족대학교에 입학 했으며 북경시공산당대학원을 걸쳐 전국총공회의 대학강사로 되었다. 1989년 천안문사건을 친히 체험 하였고 글로벌화와 출국 붐을 타고 91년에 일본에 유학하여 10년동안 다시 공부를 하고 2001년부터 일본 도쿄의 국가 정책연구기구에서 사업하였다.  2006년부터 가나자와시(金沢市)에 있는 호쿠리쿠대학교(北陸大学)의 교수로 현재까지 일하고있다. 북경에서 공부하는 기간 연길 출신 여성과 결혼하여 함께 일본유학을 하였으며 일본에서 아들 하나를 낳아 길러서 현재는 도쿄에서 벤처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우리가족의 소개에서 보다시피 우리 가족은 중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열심히 인생의 길을 개척하여 살아온 결과 나뿐만 아니라 형제, 자식들도 새대의 변화에 따라 중국, 일본과 한국에서 각자 활약하며 다국적 대가족으로 변신했다. 

나는 이세상에 태어나서부터 중국 현대의 대 풍파속에서 성장했으며 연변의 시골에서 수도 북경으로 인생의 길을 개척하며 살아갔고 또한 일본이라는 이국 땅에서 새로운 인생의 길을 개척하여 살아가고 있다. 나의 전반(前半)생애에 중국의 현대사를 몸소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이방에서 세계적인 시야를 넓혔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을 자서전 형식으로 정리 하였는데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다음기1.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

 

부록: 기실 이 원고는 2010년경에 흘룡강신문사 한광천사장의 부탁으로 쓰기 시작하여 20번에 나누어서 연재 했는데 그후 조글로 김삼 사장이 조글로 홈페이지에 올리고 싶다고 해서 응날을 받고 전재 했던 글이다. 그것을 베이스로 다시 수정하여 독자들과 재차 대면하게 된다.

저자 이강철
저자 이강철

저자 약력

이 강철 李 鋼哲 

 1959년 길림성연길현출생. 1985년중앙민족대학 철학전공졸업, 1987년  중국북경시위당교연구생 졸업. 1987-1991년 중화전국총공회 중국공운학원 강사.

1991년일본류학, 립교대학원 경제학연구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2001- 2006년 일본도쿄재단연구원, 내각부정책연구소연구원,  2006년부텨 호쿠리쿠대학교 교수,  일본 조선족연구학회 회장 역임(현재 명예회장). 

2020년 일반사단법인 동북아미래구상연구소 설립, 소장으로 취임.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