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무라 선생이 오신다네요.”
그날도 피치 못할 술자리가 있어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서자 집사람이 반색을 하며 알린다.
“언제요?”
“북경에 있는 따님네 댁에서 전화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내일 저녁 일곱 시 10분 연길공항 도착이랍니다.”
왜 오실까? 올봄 정년을 했고 지난해 말 서울대학교 세미나에서 그분의 제자인 호테이 토시히로(布袋敏博)씨를 만났을 때『오오무라 교수 정년기념 논문집』을 내니까 논문 한편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이젠 정년을 하셨으니 부득부득 연변에까지 와서 자료를 찾을 리도 없다. 황차 2년 전 연변에 오셨을 때 선생은 다시 연변에 올 것 같지 못해서 부인과 함께 정든 연변대학교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았다고 했다. 그 때 선생의 얼굴에 비꼈던 쓸쓸한 미소를 보는 것 만 같은데 또 연변에 오신다니 잘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다시 연길에서 오오무라 선생 내외분을 뵙게 된 일이 기뻤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그들 내외분의 정다운 얼굴이 선히 떠오른다. 

오오무라 교수, 윤동주 묘소앞에서 
오오무라 교수, 윤동주 묘소앞에서 

연변을 찾은 일본인 교수 

1985년 4월 12일, 연변대학 캠퍼스에 동부인을 한 미남형의 일본인이 문득 나타났다. 이 분이 바로 일본 와세다대학(早蹈田大學校) 교수인 오오무라 선생이다. 그 무렵 나도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는지라 가끔 도서관에서 선생 내외분의 얼굴을 뵐 수 있었다. 50대의 오오무라 선생은 머리에 흰서리가 내렸지만 수려한 얼굴에 짙은 눈썹, 언제나 조용히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다. 그의 부인 아키코(秋子) 여사는 제주도 출신의 한국인인데 서화에도 능했고 말솜씨도 좋았다. 그녀는 언제나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고 오오무라 선생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난감한 장면이 벌어질 때마다 재치 있게 농담으로 넘겨버리군 했다. 한국여성이라 하지만 말 그대로 부군의 손과 발이 되어 부지런히 움직이는 예의 바른 “옥상”이었다.

일본어깨나 하는 연변대학 학생들은 자신의 일본어 실력을 테스트해 보려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다가가 말을 걸군 했다. 오오무라 선생은 온화한 얼굴에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인데 그 대신 사모님이 상글상글 웃으며 말을 받아 주었다. 나는 명색이 대학원생이라 주책머리 없이 일본어로 말을 걸 수도 없어 후배들의 짓거리를 재미있게 건너다 볼 뿐 선생네 내외분에게 직접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오오무라 선생을 연변에 초청한 분은 정판룡 선생이었다. 그 무렵 정판룡 선생은 연변대학교 부총장으로 외사부문도 관장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경(田京) 외사부장으로부터 한 일본인이 연변대학에 와서 조선족문학사도 배울 겸 무료로 일본어를 강의해 주겠다고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서류를 본즉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학교 교수였다. 한창 일본어 교수가 부족하던 때였으니 이야말로 설중송탄이 아닐 수 없었다. 서둘러 초청장을 띄워 보냈고 마침내 오오무라 선생 내외는 연변땅을 밟게 되었다.

오오무라 선생은 1933년 생, 1957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아무리 명문대학이라 해도 모든 학부가 다 유명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와세다대학 하면 정치경제학부와 문학학부가 유명하다. 그런데 선생은 정치경제학부를 다녔지만 문학을 좋아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 도쿄도립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중국문학을 전공했고 그 후에는 한국문학에 매료되었다. 한국문학을 연구하자면 한국어를 배워야 했다. 그래서 오오무라 선생은 시나노마치(新濃町)에 있는 조선회관에 가서 조선어를 공부했다. 바로 거기서 우연히 아키코라는 조선인 처녀를 만나 서로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다. 민족은 달랐지만 두 청춘남녀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조선어를 배우고 한국문학을 널리 탐독했다. 특히 최서해, 김정한, 정지용, 이육사, 윤동주의 작품에 몰입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이들의 사랑은 양쪽 가정의 극심한 반대를 받았다. 정치경제학을 공부해 일본경제를 주름잡을 경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랐던 오오무라의 부친은 애초부터 자식이 경제학을 포기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일을 고깝게 생각하던 차 조선인처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결사반대를 했다. 고집스러운 노인은 임종을 앞두고도 자식을 용서해 주지 않았다. 노인은 세 아들에게 똑같이 유산을 남겨놓았으되 막내아들 오오무라 마스오에게만은 “그놈의 몫은 남겨두었다가 회과자신을 하거든 주어라”고 큰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아키코 여사의 가정도 그녀가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오오무라와 아키코는 와세다대학 초대총장을 지낸 오오쿠마(大隅)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오오쿠마강당(大隅講堂)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양 쪽 부모들이 참가하지 않은 쓸쓸한 결혼식이었다. 오오무라 선생의 큰형이 부친 몰래 참가해 얼마간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결혼은 했지만 오오무라 선생이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지내면서 받는 몇 푼 아니 되는 월급으로는 자택을 마련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옮겨 앉으며 토끼장만한 셋방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선생은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고 아키코 여사도 군소리 하나 없이 선생의 박봉으로 용케도 살림을 꾸려나갔다. 고진감래라고 1964년 오오무라 선생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는 와세다대학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에 오오무라의 형님들은 가문을 빛냈다고 막내 동생을 용서하기로 하고 그의 몫으로 남겨두었던 유산으로 살림집을 마련해 주었다.

오오무라 선생 내외는 슬하에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따님은 벚꽃같이 화사하게 생긴 전형적인 일본미인이다. 그런데 이름은 미찌노이다. 말하자면 조선의 삼천리강산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미찌노(三千野)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젠 이 딸도 세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처녀시절 북경대학에 유학을 와서 중국어를 배우다가 역시 같은 대학에 유학을 온 이탈리아 총각과 사귀게 되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북경 주재 이탈리아회사에 근무하고 있어 일가족 다섯 식구가 북경에 살고 있다고 한다. 젊은 내외에 사내자식 셋이다.
“사내놈 둘을 낳았는데 올해 또 사내놈 하나를 낳았다오. 우리 사위나 딸년이 다 욕심꾸러기지! 이렇게 계속 가을무 뽑듯이 낳다가는 아들만 한개 분대를 낳을 거야!”
언제인가 아키코 여사가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던 일이 떠오른다.

 

한 점 한 점 바둑을 두듯이

연길에 다녀 갈 때마다 먼빛으로만 뵈어 오던 오오무라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1989년 초봄, 나는 연변대학의 추천을 받고 방문학자로 일본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우리 조문학부 교원들 중에서 처음으로 일본에 가는 판이라 그야말로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월 12만 엔(약 1,000달러)의 연구기금은 연변대학을 후원해 주고 있는 한국 민간재단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니 나를 초청해 줄 일본의 대학만 찾으면 되었다. 일본에 전혀 인맥이 없는 나로서는 앞이 캄캄했다. 나는 또 정판룡 선생을 보고 떼를 쓸 수밖에 없었다. 정판룡 선생은 그 때 마침 연변에 와 있던 오오무라 선생에게 부탁을 해보자고 했다. 

정판룡 선생이 일러 주는 대로 연변빈관에 머무르고 있는 오오무라 선생 내외를 찾아갔다. 내가 어설픈 일본어로 인사를 드렸더니 오오무라 선생은 오히려 표준적인 한국말로 맞아주었다. 일본에 돌아가면 와세다대학 당국에 제출해 보겠다고 했다. 먼저 전임교수회의, 그 다음 관리위원회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초청 절차가 꽤 까다로운 것 같았다. 
앞으로 크게 신세를 질 분이라 저녁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오무라 선생은 선약이 있노라고 하면서 굳이 사양했다. 중국에서는 식사대접을 사양하면 대체로 부탁한 일을 건성건성 해치우기 마련인지라 나는 오오무라 선생이 진짜로 힘을 써줄는지 적이 근심이 되었다.

하지만 귀국 후 어김없이 서류를 보내주었고 연구계획서를 쓰는 요령까지 자상히 적어 보내왔다. 1989년의 “6.4사태” 때문에 오히려 내 쪽이 발목을 잡혀 시간을 많이 지연시켰지만 오오무라 선생은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겨우 출국수속을 마치고 동경에 도착하는 일자를 알리매 와세다대학에서 10분 걸리는 곳에 있는 와게이쥬끄(和敬塾)라는 숙소까지 잡아주었다. 마에가와(前川) 라는 기업인이 헌금해 지은 학생기숙사인데 방은 좀 비좁았지만 별도로 자체의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원은 숲이 우거지고 소형 배구장, 테니스장 등이 구전해 참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지내기가 좋은 곳이었다. 나는 거기서 편히 지낼 수 있었지만 한 달 숙박비 7만 엔씩 고박꼬박 내야 했다. 연변의 가난한 대학 강사로 놓고 말하면 너무나 비싼 편이었다. 호사스럽게 지내다가도 달마다 숙박비로 7만 엔의 거금을 낼 때는 우리 중국에서 온 젊은이들의 어려운 사정을 잘 모르는 오오무라 선생이 적이 원망스러웠다.

처음으로 와세다대학에 나간 날, 오오무라 선생은 나를 데리고 와세다대학 중앙도서관이며 여러 학과에 있는 자료실들을 돌아보며 관계 부서 인원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실은 오오무라 연구실에 있는 책만 다 보자 해도 몇 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연변에서는 한 책도 구할 수 없는 한국의 문학관계 서적들과 『한국문학』,『문학사상』과 같은 문학잡지들이 사면에 둘러선 높다란 책장에 무너지게 꽂혀있었다. 두어 달 후 오오무라 선생네 자택에 갔다가 더욱 놀랐다. 과수원 속에 자리 잡은 아담한 2층 양옥인데 1층 절반은 거의 자료실로 쓰고 있었다. 중국문학, 일본문학, 세계명작은 더 말할 것 없고 중국조선족 관련 도서가 거의 빠짐없이 꽂혀 있었다. 그야말로 자그마한 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이 많은 책을 언제 보나? 

오오무라 연구실을 함께 쓰기로 했다. 나는 문학부의 필요한 강의도 방청하고 도서관도 다녔으며 가끔 선생을 따라 여러 가지 학회도 참가해 귀동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일본의 학자님들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착실한 국민학교 생도 같았다. 죄송하지만 오오무라 선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한 달에 한번씩 나를 데리고 동경외국어대학에 가군 했는데 거기서는 “한국문학을 읽는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이 모임의 회원 중에는 머리가 허연 대학 교수도 있고 새파랗게 젊은 대학원생도 있었다. 심지어 문학을 사랑하는 작업복 차림의 보통 직장인도 있었다. 동경에서 기차나 버스로 서너 시간 걸리는 해변도시 닝아다(新瀉)에 사는 젊은 시간강사도 번마다 빠짐없이 참가하군 했는데 이들은 모여 앉아 최서해의 「탈출기」나 김동리의 「무녀도」와 같은 단편소설들을 읽고 있었다. 오오무라 선생도 새파란 젊은이들 속에 앉아 한국소설을 열심히 읽고 토론을 했다. 모임이 끝나면 동경외국어대학 정문 앞에 있는 자그마한 찻집에 들려 차 한 잔을 나누고 갈라지는데 서울이나 연변에서처럼 술타령을 부르는 자는 한 놈도 없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자그마한 나무 접시에 담겨져 나오는 영수증을 받고 그 대신 500엔씩 각자가 돈을 내군 했다. 간혹 오오무라 선생 같은 연장자가 찻값을 몽땅 내면 좌중이 경건한 모습으로 일어서서 “아링아도우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와세다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산하 부회모임도 자잘하게 놀기는 대동소이했다. 중국문화부회요, 조선문화부회요 하는 부회가 20여 개 남짓이 되는데 오오무라 선생은 조선문화부회의 책임자였다. 먼저 부회의 간사장이 회원들에게 모임을 알리는 왕복 엽서를 보낸다. 그러면 회원들은 되돌아가는 엽서 쪽에 참가 여부를 명시한다. 간사장이 참가자 수에 따라 오벤또(도시락)를 주문하면 회의가 끝날 무렵에 오벤또가 어김없이 배달된다. 회원들은 오벤또를 달게 먹고 자리를 뜨는데 “술 한 잔 걸치고 갈라지세” 하고 소리치는 놈은 역시 한 놈도 없다. 우리 연변이라면 학술모임을 끝낸 다음에는 으레 술집에 몰려가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취토록 마시지 않는가! 

어느 한번은 다카바시(高橋) 라는 젊은 시간강사가 「재일조선인이 만든 첫 영화―‘조국’」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발표를 하는데 종전(終戰) 직후에 나온 영화라 필림이 낡아서 스크린에 비추어지는 화면은 그야말로 고분의 벽화와 같았다. 젊은 시간강사는 스크린에 비친 화면을 설명하기도 하고 그 당시 신문에 실린 광고며 관중들의 반향 등을 소개하기도 하면서 이 영화는 재일동포예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노라고 역설했다. 좀 지루한 느낌이 들어 가만히 오오무라 선생의 눈치를 보매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는 품이 좋은 발표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과연 돌아오는 길에 오무라 선생은
“괜찮은 발표였어. 새롭게 발굴한 자료를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했어요. 실속이 없는 거창한 담론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한 점 한 점 바둑을 두듯이 열심히 조사를 하고 발굴을 해서 역사의 진실을 하나하나 밝히는 작업이야말로 가치가 있거든요.”
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바둑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오오무라 선생의 바둑 두는 수준은 거의 프로급이다. 나는 바둑을 둘 줄 모르지만 연변문단의 바둑대왕으로 소문난 고 김성휘 시인도 오오무라 선생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술 한잔 마실 줄 모르고 아키코 여사를 내놓고는 여자도 모르는 백면서생 오오무라 선생, 공부하다가 머리가 아프면 동네의 기원(棋院)을 찾아가 바둑을 두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란다. 사실 그는 연구도 바둑을 두듯이 그렇게 열심히 한다. 말하자면 그는 거창한 가설을 내놓고 도도하게 논리를 펴는 그러한 스타일의 학자가 아니다. 그야말로 한 점 한 점 바둑을 두듯이 세파에 매몰되고 인멸된 사료를 발굴해 문학사의 공백을 매우는 그러한 치밀한 스타일의 학자이다. 그는 문학연구의 기초는 원전 검토이며 그것은 연구의 성과와 직결된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오직 학자의 성실성과 피타는 노력으로 연구대상에 대한 실증적 엄밀성을 기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연구자의 자세와 그의 발로 뛰는 조사, 연구에 의해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 『사진판 윤동주 자필시고 전집』, 「조양천농업학교시대의 김조규」, 「김학철의 발자취」등 학계가 공인하는 무게 있는 논문과 저서들을 펴냈다.
하기에 서울대학교 김윤식 교수는 오오무라 선생을 두고 그 “탐구자로서의 열정 및 그 밀도의 지속성”이 경이롭다고 했고 중앙대학교의 임헌영 교수는 “우리 민족이 아닌 학자로 우리 문학에 대하여 오오무라 교수처럼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인사는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윤동주 시인을 찾아준 오오무라 선생

처음 연변에 온 후 선생 내외는 이미 작고하신 전임 총장 박규찬 선생네 이웃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선생은 연변대학에서, 아키코 여사는 연변농학원에서 열심히 일본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정판룡 선생의 말마따나 “비둘기는 콩밭에만 마음이 있다”고 오오무라 선생은 짬만 나면 지프를 구해 가지고 용정으로 내달렸다. 조문학부의 권철, 이해산 등 교수들이 배동하군 했다. 그것은 한 시인의 무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시인이 바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 후코카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尹東柱)였다. 선생은 윤동주의 묘소를 찾기 위해 연변에 온 것이다.

선생은 젊은시절부터 윤동주 시인에게 크나큰 매력을 느끼고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그 감동과 흥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노상 말하곤 한다. 그는 윤동주의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의 인간적인 면을 좀 더 깊이 알려고 하던 끝에 1984년 여름 우연한 기회에 일본 도쿄에서 윤동주 시인의 아우 윤일주 선생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윤일주 선생은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이며 동시작가인데 학술회의 참가 차 잠간 도쿄에 왔던 것이다. 오오무라 선생은 도쿄 히비야(日比野)에 있는 한 자그마한 다방에서 윤일주 선생을 만나 약 2시간가량 그의 형 윤동주 시인에 관한 많은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윤일주 선생은 40여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윤동주 시인이 일본 유학시절 가지고 있던 책 보따리 속에 어떠어떠한 책이 들어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윤동주의 무덤은 옛 은진중학교로 이어지는 구릉의 옛 동산교회 묘지에 있다고 하면서 약도까지 그려 주었다. 오오무라 선생은 윤동주의 묘소와 그가 살던 고향을 찾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다. 윤동주를 요절케 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의 한(恨)을 위무하며 그를 더욱 진실하고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의 고향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오무라 선생은 연길에 도착한 후 사람을 띄워 윤동주의 묘소를 찾게 했다. 그들은 동산교회묘지를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지만 끝내 찾지를 못했다. 연길시만은 1985년 2월 개방도시로 돼 외국인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지만 윤동주의 묘소는 연길시가 아니라 용정진의 교외에 있었다. 공안국의 허가증이 나오자 오오무라 선생 내외간은 연변대학의 지프를 타고 용정으로 향했다. 연변대학의 권철, 이해산 선생이 동행했다. 먼저 옛 대성중학교 터에 있는 용정중학교를 방문하고 현지 역사에 밝은 한생철 교원을 동행으로 요청했다.

옛 동산교회묘지로 올라가는 흙길, 지프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구릉의 급경사지에 밭과 어설픈 숲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선의 회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비껴가고 그 좌측에 끝없이 이어진 구릉의 여기저기에 무덤과 묘비가 어설프게 누워 있었다. 산기슭 쪽의 묘비들은 부서지고 넘어진 게 상당히 많았다. 일행은 윤동주의 묘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축구 선수 출신이라 앞장을 서서 걸어가던 이해산 선생이 가슴을 치는 비석 앞에 가서 정면을 보니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한문 글발이 보였다. 끝내 찾아낸 것이다.

다시 사위를 둘러보니 윤동주의 묘소는 산기슭에서부터 지프로 10-15분 올라가서 비탈길을 조금 내려온 곳에 있었다. 5월 중순이건만 동토의 땅 연변의 날씨라 새싹은 아직 돋아나지 않았고 묵은 풀대가 을씨년스럽게 덮여있었다. 원래 봉긋하게 성토를 했을 봉분, 그 앞에 서남쪽을 향해 묘비는 서있었다. 묘비에 새겨진 비문을 한문투로 훈독(訓讀)하면 다음과 같다.

아! 그 선조가 파평인 고 윤동주 시인. 어린 시절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화룡현립제일교 고등과에 편입한 뒤 다시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3년의 학업을 마치고 평양의 숭실중학으로 전학하였다. 학업을 닦느라 그 곳에서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중학부를 졸업하였다. 1938년 경성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의 겨울을 지내고 졸업을 하였다. 공부는 이미 성공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아직 미진타 하여 이듬해 4월에는 책을 싸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대학 문학부에서 진리의 탁마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 몸은 자유를 잃고 형설의 생애는 조롱에 갇힌 새의 운명이 되었다. 게다가 병이 깊어져 1945년 2월 16일을 기해 운명하였으니 그때 나이 스물아홉, 사람됨은 당세에 큰 인물이 됨직 했고 그의 시 비로소 세상에 울려퍼질만 했는데 춘풍이 무정하고 꽃은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했나니 아아, 애석하도다 그대여. 하현어른의 손자이며 영석선생의 아들인 그대, 영민하고 배우기를 즐겨하며 신시를 좋아해 작품이 많았으니 필명은 동주라 하였도다.

1945년 6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씀
동생 일주 광주 삼가 세움

그날은 묘 주위의 마른 풀대들을 꺾어버리고 돌멩이들을 치우기만 하고 산을 내렸다. 5월 19일 오오무라 선생은 정판룡, 권철, 이해산 등 연변대학의 선생들, 그리고 연변민속박물관의 심동검 관장, 연변박물관의 정영진 관장 등과 함께 지프 2대에 분승해 윤동주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연변박물관의 제기(祭器)들을 빌려다가 그 우에 두만강에서 잡은 송어, 조선산 명태 등속을 놓고 순전히 조선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윤동주의 묘소를 찾은 뒤를 이어 오오무라 선생은 용정중학교에서 윤동주의 학적부를 발견하고 윤동주와 함께 옥사한 반일청년 송몽규의 무덤, 윤동주의 생가터, 명동교회를 비롯하여 윤동주의 삶의 궤적과 그 주변의 많은 사실들을 소상히 밝혀냄으로써 윤동주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연구 결실은 연변에 윤동주의 붐을 몰고 왔으며 문학인들을 비롯한 연변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서자랐고 지금도 이 땅에 묻혀 있는 위대한 시인의 처절한 삶과 주옥같은 시편들을 두고 커다란 흥분과 감동의 도가니에 잠기게 되었다.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불멸의 시인으로 각광을 받았고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로들 다투어 가며 읽을 정도로 애독서가 되었다. 독자들의 열망에 부응해 연변의 문인들은 1985년 11월 『문학과 예술』제6기에 처음으로 윤동주 시 10수를 실었다.

오늘 한국과 연변 지성인들의 공동의 노력에 힘입어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가 복원되었고 그의 삶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명동촌, 용정중학교, 옛 동산교회 묘지 등은 일약 역사유적과 관관명소로 각광을 받아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한 정직한 일본인 학자의 노력에 의해 “윤동주가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이외에도 오오무라 선생은 연변 소설가들의 소설들을 추려서 일본어로 번역해 『시카코 복만이』이라 제목으로 일본에서 출판했고 젊은 소설가 최홍일씨의 중편소설집 『도시의 곤혹』을 일본어로 번역해 『새로운 중국문학』총서에 넣어 장건공(陳建功), 장승지(張承志), 지리(池莉) 등 중국문단의 중견작가들과 나란히 세워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간에는 김조규(金朝奎)의 사진자료를 새롭게 발굴해 학계에 소개했고 김학철 선생과의 수십 차에 걸치는 대담을 기록해 발표하기도 했으며 다년간의 연구성과를 종합해 『중국 조선족문학의 역사와 전개』라는 저서를 일본에서 출판함으로써 우리문학을 세계화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오오무라 선생은 늘 겸허하게 말한다.
“난 문학을 잘 몰라요. 여러분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원전을 찾고 고증을 할뿐이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철길은 닦아놓겠지만 기차를 운전해 목적지까지 가는 작업은 진짜로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몫이겠지요.” 
학자는 정년이 없다
우리 부부는 연길공항에서 오오무라 선생 내외분을 맞아 상우호텔에 모셔갔다. 기내식으로 저녁을 드셨다고 하기에 잠간 호텔 방에서 한담을 나누었다. 오오무라 선생은 새로 펴낸 『조선근대문학자와 일본』이라는 책을 꺼내더니
“김호웅 선생님께, 대촌익부, 2004년 9월 19일”
라고 정히 사인해 선물한다. 이 젊은 사람에게 책을 선물할 때마다 “님”자까지 붙여주어 민망하기 짝이 없다. 오오무라 선생은 권철, 김동훈 등 옛 친구들을 만나볼 겸해서 왔노라고 하면서 심호수 선생 댁에 한 번 더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얼마간 깨도가 되었다―
“오, 또 심련수 때문에 오셨구나.” 
정년은 했지만 연구만은 계속하고 있는 오오무라 선생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심련수(沈連洙, 1918-1945년)는 위만주국시기의 조선인 시인인데 1945년 8월 8일 광복을 며칠 앞두고 흑룡강성 영안현에서 용정으로 돌아오던 도중 왕청진 춘양진에서 위만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시인이 남긴 230여 수의 시와 기타 유고, 책들을 그의 동생 심호수씨가 반세기 넘게 보관해 오다가 학계에 내놓아 큰 진동을 일으킨바 있다. 그런데 연변학자들의 경험부족으로 말미암아 2001년 8월에 간행된 『심련수문학편』을 보면 많은 첨삭이 가해져 텍스트의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고 말았다. 오오무라 선생은 2002년 심련수의 시들은 복사해 갔지만 그가 남긴 일기와 문학서적들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찾아갔을 때 심연수의 가족은 일기와 장서만은 복사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9월 20일 정오,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소설가 장지민 선생이 핸들을 잡고 권철, 김동훈 선생이 배동해서 용정 쪽으로 내달렸다. 그 날 저녁은 오오무라 선생을 뵙지 못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권철 선생이 나에게 전화를 주기로는 다시 용정으로 간단다. 
그 날 저녁은 우리 집에서 조촐한 저녁상을 차렸다. 오오무라 선생 내외분을 모시고 들어서던 우람진 체구의 권철 선생이 “아이구, 오오무라 선생한테는 손을 들었어!” 라고 하면서 혀를 내두른다.

사연은 이러했다. 심호수씨는 한 외국인 연구자의 애착과 집념에 감동되어 일기와 책을 내놓았고 오오무라 선생 내외는 심련수 시인이 보던 100여 권의 책을, 그것도 권철 선생의 말을 빈다면 쥐가 썰어놓은 것 같은 너덜너덜한 책들을 하나하나 털고 닦으면서 책명과 출판사, 출판 일자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 책 여백에 적혀 있는 심련수 시를 몇 수 더 발굴했고 특히 심련수가 인도의 시성 타고르(1861-1941)의 시에 얼마나 심취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오오무라 선생은 온종일 시골집에 앉아 자료를 뒤지고 기록했는지라 안면에 좀 피곤한 기색이 돌았다. 그러나 송이버섯과 두부를 맛있게 들었다. 이젠 오랜 친구가 된 권철 선생과 아키코 여사가 실없이 농담을 주고받았고 어디서 들었는지 나더러 무슨 생뚱같은 장(長)으로 출마해야 한다느니, 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하고 옥신각신 쟁론을 했다. 나도 술 한잔이 된 김에 무슨 열변을 토했던가 보다. 오오무라 선생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수걱수걱 음식만 들었다. 손님을 바랜 후 집사람이 
“언제 뵈도 오오무라 선생님은 참 무거운 분이예요. 주인인 당신까지 왜 그리 떠들어요.” 
하고 넌지시 나를 빗대고 고시랑거렸다. 사실 우리 집사람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오오무라 선생은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일단 입을 열면 좌중을 포복절도케 했다. 2000년도 하와이 조선학학술대회에 참가했을 때다. 폐회식은 만찬 장소에서 했는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던 한 아무개라는 선생이 폐회사를 했다. 그런데 이 어른이 한국어로 한 단락 웅변을 토하고 나서 다시 영어로 자작 통역을 해대는데 이건 200여명 학자들 앞에서 내놓고 영어실력 자랑을 하는 격이었다. 폐회사는 거의 반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차려놓은 음식은 식어가고 좌중은 연회가 늦어진다고 수군수군하며 불쾌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데 오오무라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술 취한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우리 좀 참읍시다.”
그 말에 우리는 하마터면 홍소를 터뜨릴 뻔 했다. 
내친 김에 오오무라 선생의 일화 한두 가지 더 하자. 

2001년 초가을 김학철 선생과 정판룡 선생이 둘 다 병상에 누워 경각을 다투고 있었다. 오오무라 선생은 연변의 두 어른과 모두 허물없는 사이었다. 오오무라 선생 내외가 찾아가자 김학철 선생은 “정판룡 선생은 어떠한지요?” 하고 물으면서 “내가 선배이니까 먼저 가야겠는데” 라고 하더란다. 이에 오오무라 선생이 
“먼저 가는 게 이기는 겁니다!”
하고 한 마디 농을 던지니 김학철 선생은 
“이쯔 미데모 오오무라 센세이와 스바라시이 오도꼬데시다네!(언제 봐도 오오무라 선생은 멋진 사내야!)”
하고 빙그레 웃으시더란다. 
한번은 고려대학 교환교수로 있을 때 어느 방송사 기자의 인터뷰를 받았는데 철딱서니 없는 기자가 
“선생께서는 윤동주의 자필시고를 조사, 검토해 책을 내고 그 외에도 한국문학 관계 논문을 많이 발표하셨는데 이러한 연구의 밑바탕에는 한국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한국과 일본 가운데서 어느 쪽을 더 사랑합니까?” 
하고 묻더란다. 오오무라 선생이 답하기를 
“나는 일본사람입니다. 그런즉 일본을 더 사랑하지요. 연구야 밥을 먹기 위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고 웃어넘기더란다. 생방송이었으니 기자나 방송사 측에서 얼마나 민망스러웠겠는가.

 

맺는 말 

9월 23일 오후 4시 경, 오오무라 선생 내외를 택시로 연길공항까지 바랬다. 아키코 여사는 시원하게 펼쳐진 부르하통하 수면을 바라보면서 소녀처럼 흥분되어 있었다.
“참으로 연길이 크게 변했어요. 저렇게 땜을 만들어 물을 잡아넣으니 얼마나 좋아요. 어제 밤에는 호텔에서 나와 저 연신교를 거닐었어요. 수면에 천자만홍 불빛이 내려 앉아 그야말로 서울의 한강에 온 느낌이 들더군요. 오오무라 선생, 어제 밤 참 좋았지요?” 
하지만 오오무라 선생은 공항으로 나가는 길에 한 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앉아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오오무라 선생을 거들어 짐을 부치고 나서 승강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선생은 개찰구 앞에서 나의 손을 잡아 주면서 느닷없이 한마디 당부를 했다. 
“호웅 선생, 나도 좀 생각해 보았는데, 어제 저녁에 얘기가 있었던 그 무슨 장(長)인지 하는 벼슬은 하지 마시지요.”
나는 오오무라 선생의 깊은 속내를 얼마간 짐작할 수 있었다. 더는 벼슬에 미련을 두지 말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글을 써달라는 주문이다. 
오오무라 선생은 검사대를 지나 젊은 여성 관원의 앞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선생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처녀 관원은 할아버지 벌 되는 오오무라 선생을 이리저리 돌려세우면서 불경스럽게 시커먼 탐지기를 이리 대고 저리 쓸고 한다. 하지만 선생은 여전히 포로병처럼 손을 든 채 곰상곰상 검사에 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70십 고령의 노학자가 무엇을 바라고 이 거친 연변을 찾아오는가?

한평생 학장 한번 해보지 못하고 평범한 학자로 살아온 오오무라 선생, 하지만 민족을 뛰어넘는 깊은 사랑,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치밀한 실증정신, 그의 약속과 믿음의 힘, 말수가 적고 겸허하나 가담가담 내비치는 기지와 유머는 우리 모두를 매료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임헌영 선생의 말 그대로 “진지한 학자이며 원만한 인격자요,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는 삼위일체”로 오오무라 선생은 영원히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학자에게는 영원히 정년이 없는 법이니 명년에도 오오무라 선생 내외는 아름다운 철새 한쌍처럼 어김없이 연변을 찾아오리라 생각한다.

 ― 2004년 9월 28일, 한가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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