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수  시인/칼럼니스트
정성수 시인/칼럼니스트

올해에도 신문들은 신춘문예 당선자를 발표했다. 신춘문예가 갖는 비중은 대단하다. 까닭은 신문사라고 하는 권위와 전파력에 있다. 다른 하나는 심사의 공정성이 보장된다는 점이다. 심사위원이 사전에 공개되지 않아 인맥에 따르는 부작용이 적다. 거기다가 상금이라는 프리미엄이 있다. 그야말로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격이다.

신춘문예 공모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작품 첫 장에 응모부문, 주소, 본명, 나이, 연락처, 원고량을 기재해야 한다. 주의 사항에서 왜? 나이를 묻는지…. 문학에는 정년도 구조 조정도 명퇴도 없다. 문학을 하는 노년층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다. 나이를 묻는다는 것은 백세시대에도 걸맞지 않다. 응모자의 본명을 밝히는 것까지는 수긍할 수 있으나 심지어 응모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곳도 있다. 부득이 나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야 할 경우라면 당선자가 결정된 후 그때 요구해도 늦지 않다.

둘째는 심사의 신뢰 문제다.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를 위해서는 한 사람이 심사해서는 안 된다. 가능하다면 다수의 심사위원에 의해 심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학적 성향이 다른 심사위원들의 공통분모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매년 심사위원을 고정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특정인이 심사위원으로 연임한다는 것은 투명성이나 공정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같은 사람이 같은 해에 여러 신문의 심사를 겸하는 것도 배제 시켜야 한다.

셋째는 신춘문예 응모자들이 당선에 급급하다 보니 작품성보다 신문사 특유의 스타일을 따라 작품을 쓴다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심사위원의 취향과 입맛에 맞는 작품을 쓰는 것이다.

넷째 당선 작품이나 당선자들의 단명성이다. 신문사마다 당선자를 내놓고 그 후로는 관리를 하지 않는다. 어떤 당선자도 밀어주고 끌어줘야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당선작이 최후의 작품이 되어버린 불행한 당선자도 있다.

다섯째 등단자는 신춘문예 당선을 금한다는 문제다. 모 신문에서 당선자를 기성 문인이라고 당선을 취소했다.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다. 요즘 등단하지 않는 문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 공부를 하면 등단은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다. 함께 문학 공부를 하는 문우와의 경쟁과 강사들의 권장에 너도나도 등단하기 때문이다. 당선자들의 프로필을 봐도 수년 또는 수십 년을 문학 공부를 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수상 경력이 화려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여섯째 동일 작품 중복 투고와 표절 문제다. 부적절한 행위로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고 명예를 얻는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다. 중복 투고나 표절은 도덕성 결격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특히 표절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한다. 그러나 당선작이 다른 신문사와 중복되었다면 낙선 처리가 아니라 두 신문사에서 동시에 당선작으로 발표함으로써 당선자를 아낌없이 축하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실력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 하나를 동시에 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이미 출간 경력이 있는 문인 역시 당선에서 배제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요즘은 원고와 경비만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도 출간할 수 있다. 문학성이나 작품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책 한 권 출간하지 않으면 문인으로 대접도 못 받는 세상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려면 적어도 책 몇 권은 출간해야 할 정도로 작품을 많이 쓰고 문학 공부를 많이 해야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여덟째 수상에 관한 문제다. 같은 부문의 타 신문사에서 수상한 사람은 기성 문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작품 자체를 응모할 수 없다. 신춘문예는 ‘새봄을 뜻하는 글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작품성만 본다는 데 의의를 둔다면 어떤 수상을 했든 간에 상관이 없다.

끝으로 시 부분 공모에 한마디 하고자 한다. 요즘 시 당선작은 난해하고 때론 난삽해서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 간다. 평론가나 시의 고수들만이 알 수 있는 시는 죽은 시다. 감동도 없고 가슴에 와닿지 않는 시들이 당선되고 그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면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반문한다. 물론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작품과 차세대를 끌고 갈 시인을 발굴한다는 취지는 이해한다. 신문 헤드라인만 조합해 놓은 것 같은 해독 불가한 ‘시’야만이 당선된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것이 문제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