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강철

제1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꽃

 

2011년 9월 16일에 중국 북경공인(노동자)체육관에서 처음으로 공연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일본의 인기 그룹 스마프(SMAP)가 처음 열창한 노래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꽃>(世界に一つだけの花)이었다. 특별한 노래는 아니지만 나의 심금을 울렸다.

텔레비전에서 북경공연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10여년전의 일이 생각났다. 나카노 다모츠(中野有)라는 한 일본친구가 있는데 그해 가을에 미국 워싱턴에 있는 유명한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e)의 초빙연구원으로 떠나면서 친구들을 모아 파티를 열었다. 그때 한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는데 친구가 “이 노래는 너무나도 훌륭하고 내용이 좋아서 연합국의 주제가로 추천해야겠다”고 하였다. 그 친구(나카노)는 예전에 연합국 공업개발기구(UNIDO)에서 10여년 근무한 경험이 있는 글로벌한 경력이 있으니  이런 발상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천박한 이해력으로는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또 노래의 의미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적어도 10년이상 일본에서 열창된 노래를 이제야 이해 하다니. 나의 음악 센스도 감상 수준도 너무나 문제가 되어 부끄럽기도 하나 이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노래를 들어보니 너무나도 재미있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노래라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이 노래의 가사는 대략 아래와 같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꽃](世界に一つだけの花)

 

넘버원(으뜸)이 되지않아도 좋다.

원래 특별한 Only One(하나밖에 없는)

꽃 상점에 진열된 여러가지 꽃을 보고 있었는데

취미는 각자 서로 다르겠지만 어느 꽃이나 다 아름다워 보인다. 

이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이라는 다툼도 없이

 꽃병에 보람차게 가슴을 확 내밀고 있구나.

그런데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서로 비교만 할려고 하네.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 다른데 왜서 꼭 그중에서 제일이 되려고 하나?

그렇다 우리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꽃이요

 한사람 한사람 서로 다른 씨앗을 품고 있으니

 그 꽃을 피우는데만 온 정력을 다 쏟으면 되는 거야.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망서리는 사람이 있다.

열심히 피어난 꽃은 어느 것이나 아름다우니 어떻게 할라나.

겨우 꽃집에서 나왔다.

그 사람이 안고있는 색갈이 알롱달롱한 꽃과 기뻐하는 얼굴 

이름도 몰랐지만 그날 나한테 웃는 얼굴 보이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피어난 꽃처럼 

그렇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꽃이야.

작은 꽃 큰 꽃 어느 하나도 똑 같은 것이 없으니

제일이 되지 않아도 된다.

원래 특별한 Only 0ne이니깐.

 (作詞/作曲:槇原敬之: 마키하라 노리유키 )

 

내가 이 노래 가사에 감명을 받은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유도 있겠지만 또한 나 자신의 특수한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지나온 인생과 현재의 인생에서 추구하는 인생 가치에 관한 생각이 이 노래속에 깃들어 있는것 같다. 나의 인생가치관과도  우연히도 일치했다. 

첫째, 나는 자기의 인생에서 누구와 경쟁을 하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없었고 둘째, 실제로 누구와 경쟁한 일도 별로 없다.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대학원 그리고 유학시절, 사회생활, 이 전반 인생과정에서 누구하고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경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남보다 더잘 나아갈 때도 있고 남보다 잘못하여 실패할 때도 많았지만 그것은 의식적으로 경쟁하거나 비교하면서 한 것이 아니라 지나간 과정과 결과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물론 내 주변의 사람들이나 제 삼자 중에 이강철을 경쟁자이자 ‘강철’같이 강한 자라고 겨뤄 보려고 한 누군가는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의식과 전혀 상관이 없고 나는 내가 해야할 일만 열심히 착실하게 하면 된다고 언제나 생각하고 또 그렇게 실천해왔으며 현재에도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항상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가 해야 할 일만 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고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배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산대의 청년절활동 기념 사진.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저자)
생산대의 청년절활동 기념 사진.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저자)

제2화 못난 송아지도 정성들여 기르면 훌륭한 황소가 된다.

 

나는 나의 반생을 총화 할 때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불우한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닌가고. 흉년세월에 태어난 못난 송아지와 같지 않은가고. 나는 먹을것이 모자라는 흉년시대(대약진시기)에 태어나서  장애인의 인생을 걸어 왔기에 자신감이 약했는데 당시 중국의 생장환경에서 큰 꿈을 갖기도 여려웠다.

옛날에 농촌 생산대에서 사과배를 따서 시장에서 팔기 위하여 등수를 나눴는데 1등,  2등,  3등으로 등수를 나눴다. 3등 품은 나와 같은 운명이어서 팔리지 않거나 낮은 값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업 제품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결함 상품(缺陷商品)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의 인생은 열심히 그 결함상품을 수리하고 보충하여 일반 인간(정품 혹은 완성품)으로 수정하여가는 과정이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3등품인 나는 3개의 큰 결함(핸디)을 갖고 있었다.    

첫째, ‘신체적결함품’이었다. 나는 중국의 대약진 시대(1958-60년) 에 가난 속에서 세상에 태어나 영양불량으로  면역이 낮아져 소아마비에 걸려 불구자가 되었다. 처음부터 하느님은 나한테 평등한 인생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때문에 인간의 본능으로 다른 기능을 개발하여 부족한 기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체적결함품’이라는 장애자로서 결핍을 극복하려고 나는 불편한 다리로 소학교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학급 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학교에서 농업을 배운다고 체력 노동이 있어도 다른 학생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을 먹고 적극 참가했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친구들속에 휩쓸려서 축구공도 차고 배구도 치고 탁구도 하고 뭐나 뒤떨어지지 않는 인간을 지향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대학에 들어가서도 장애가 있는  다리를 가지고 대학의 마라톤 대회까지 참가하는 등 모든 체육활동에 참가했었다. 촌말로 하면 악돌이고 보통말로 말하면 완강한 의지력을 어릴 때부터 길러 왔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도 자부심이 부풀어 오른다. 

둘째, ‘지식적결함품’이었다. 내가 소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기는 1967년부터77년까지 중국의 문화대혁명 10년 동란시기와 맞먹는다. 당시 교육방침으로 학제를 단축하고 공농(로동자와 농민)에게 배워야 한다기에 정상적인 학교 교육 체제가 파괴되어 정규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때문에 나의 두뇌는 ‘지식적결함품’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학교5년간, 중학교2년간, 고등학교2년간으로 결국9년간 공부 했으나 중학교졸업이 된다) 열심히 공부 했다고 해도 학교에서 워낙 노동시간이 많고 농촌 집에 돌아와도 노동이 많았으니 얼마나 공부 했겠는가. 졸업하여 농촌에 돌아가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혹한 농업 육체 노동이었다. 그것도 ‘신체적결함품’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시골을 벗어나려고 가혹한 육체노동(농사)을 하면서 짬을 타서 자습하고 대학입시시험을 치렀으며 4년동안 꾸준히 시험을 본 끝에 끝내 변강 산촌의 시골에서 일약 수도 북경의 대학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예상도 못했던 기적이며 나의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셋째, ‘심리적결함품’이었다. 집 형편이 가난하고 신체장애를 가졌기에 그것을 극복하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엄마가 동네 사람들 앞에서 막내 아들을 공부 잘 시켜서 청화대학에 보낸다고 자랑하는 바람에 ‘청화대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마을 친구들한테서 ‘청화대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며 왕따를 당했다. 그때의 나에게는 ‘청화대학’이라는 별명이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실제적으로 나를 욕하고 놀려주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신체에는 결함이 있지만 공부는 잘하니까 주위에 동정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왕따 주고 헐뜯는 사람도 있었다. 가난한 데다가 왕따를 당하니 자연히 심리적 약점이 생기게 되었고 결과 ‘심리적결함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팩한 성격에 자신감의 부족을 가지고 사춘기를 지냈다. 그러나 청년기에 들어서서는 농촌에서 생산대 회계로 중요한 책임을 맡게 되었고 사원(농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감을 키우게 되었다.

더욱이 대학에 들어가서는 입학성적이 우수한 데다가(1981년 당시 전 길림성 문과 3위를 했는데 북경대학 입학 점수도 훨씬 초월) 학급에서 나이도 제일 위이고 사회 경험도 있다고 반주임 선생님이 반장으로 임명 하면서 학급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리더로 성장해가면서 심리적 콤플렉스는 점차 해소 되었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40여년이 흐르는 동안 자연히 성격도 많이 부드러워지었고 인내심도 강해졌고 심리적 결함도 극복되었다.

대학시절 숙소에서 열린 오락회에서 손풍금(아코디언)을 켜는 저자 이강철
대학시절 숙소에서 열린 오락회에서 손풍금(아코디언)을 켜는 저자 이강철

60여년간의 인생을 총화 해보면 매일 매일 자기의 부족을 보충하고 자기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드는 분투의 과정이었다. 나는 글을 쓸 때 필명을 ‘민들레’로 쓰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수많은 풀 속의 한 떨기의 민들레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길가의 민들레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밟히면서 말없이 꾸준히 자기 삶을 살아가며 꽃을 피워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나는 그런 민들레와 같은 조용한 풀 한 포기이다. 강인한 생존력, 끈임없는 노력, 그리고 자기의 특색을 살려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Only one의 민들레라고 지금은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속편 제3화 민족과 나라를 넘어서서 [동북아시아인]으로)

저자 이강철
저자 이강철

저자 약력

이 강철 李 鋼哲 

 1959년 길림성연길현출생. 1985년중앙민족대학 철학전공졸업, 1987년  중국북경시위당교연구생 졸업. 1987-1991년 중화전국총공회 중국공운학원 강사.

1991년일본류학, 립교대학원 경제학연구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2001- 2006년 일본도쿄재단연구원, 내각부정책연구소연구원,  2006년부텨 호쿠리쿠대학교 교수,  일본 조선족연구학회 회장 역임(현재 명예회장). 

2020년 일반사단법인 동북아미래구상연구소 설립, 소장으로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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