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경제학박사, 전 한나라당 정읍시 지역위원장, 중앙당 장애인위원회 부위원장)

“르완다 정부는 안정된 정치, 높은 주인의식 및 투명한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하여 개발 협력의 효과성이 높다. 이 정부는 높은 혁신성 및 개방성으로 혁신적인 국가 간 협력 성과를 타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산하는 등 높은 전략적 가치를 보유한 국가이다.” 이는 2022년 1월 우리 정부가 발표한‘르완다 국가협력 전략’내용이다. 우리나라와 르완다는 경제·과학기술협정(2006년), 투자증진‧보호협정(2013년), 개발협력협정(2013년) 및 대외경제협력기금차관협정(2014년)을 체결했다.

천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나라(Land of a Thousand Hills)로 알려진 르완다는 아프리카 중앙 동부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는 콩고민주공화국, 북쪽으로는 우간다, 동쪽으로는 탄자니아, 남쪽으로는 부룬디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르완다는 2023년 현재 13,957천명 인구를 가진 중앙 동부 아프리카 5대호 안에 있는 작은 내륙국으로 남한 면적의 1/4 정도이며 수도는 키갈리(Kigali)이다. 세계은행 발표에 따르면 1인당 국민소득(GDP)은 833달러(2021년 기준)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다. 민족은 후투족 84퍼센트, 투치족 15퍼센트, 트와족 1퍼센트로, 종교는 가톨릭 56.5퍼센트, 개신교 37.1퍼센트, 이슬람 4.6퍼센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르완다는 과거 벨기에 통치를 받다가 1962년 독립하였다. 프랑스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1994년 대학살 사건 이전까지는 프랑스의 영향이 매우 컸다. 하지만 내전 이후 투치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특히 지난 2006년 프랑스 법원에서는 르완다 내전과 관련한 재판이 있었다. 1994년 대학살 사건 직전 르완다에서는 당시 후투족인 주베날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인종 간 갈등이 증폭되었다. 

르완다에서는 은타라마 교회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1994년 4월부터 100여 일 동안 다수족인 후투족에 의해 무려 100만 명의 소수족인 투치족과 투치족을 감싼 온건 후투족이 살해되었다. 전체 르완다 인구 740만 명의 13퍼센트 정도가 죽은 것이다. 키갈리 추모관 한쪽에는 많은 인종 학살에 대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르완다 대학살은 그 규모나 잔혹성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후 최악의 인종 학살로 꼽힌다. 나치가 193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유대인 600만 명을 살해했고, 캄보디아에서는 1975년부터 크메르 루즈의 폴 포트 정권에 의해 200만 명이 숨졌다. 유럽판 킬링필드라 불리는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 세르비아계 극우 민족주의자와 정교회신자들에 의해 20여만 명의 보스니아 내 이슬람계 및 크로아티아계가 학살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7년 3월20일 바티칸 사도궁에서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을 만나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진 대학살 때 “가톨릭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죄와 결점”에 대해 다시 신의 용서를 구했다. 대량학살 이후 오랫동안 깊은 분열을 겪고 있는 르완다를 치유하기 위한 정부와 교회의 노력에 동참하는 중요한 진전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일요일 키갈리 소재 묵고 있는 호텔에서 혼자서 20분정도 택시를 타고 키갈리 인종말살 추모관(Kigali Genocide Memorial)에 갔다. 우리나라 현충원과 같은 곳이다. 1994년 인종학살 당시의 현장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키갈리 추모관으로 가는 언덕길은 잘 포장된 도로였다. 추모관 가는 양쪽 도로 옆은 푸른 나무들이 이 나라의 녹색성장 정책을 홍보라도 하는 듯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가난한 르완다 이지만 국가 정책으로 녹색성장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필자는 짧은 시간이지만 운전기사에게 개인적인 이야기와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도 한국에 대한 많은 관심과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었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르완다는 우리나라와 1963년, 북한과는 1972년 국교를 수교한 국가이다. 낯설지만 잔뜩 흥분과 호기심을 가지고 추모관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추모관 입구에 들어서니 완전 무장한 경찰 두 명 중 한명이 내 소지품을 검사하고 들어가라고 하였다.

일요일 아침 9시 조금 지나 방문해서 그런지 추모관 내부 작은 사무실과 추모관은 열러 있었지만 방문객은 아무도 없어 필자는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추모관 안내지도를 살펴보았다. 눈에 띄는 것은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2008년 7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2014년 4월),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2018년 7월),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2018년 7월),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2021년 5월), 탄자니아 사미아 술루후 하산 대통령(2021년 8월) 등이 이 추모관을 방문하였다. 홀로 추모관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관리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필자 앞에서 두리번 거렸다. 그는 필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의 2시간 정도 내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외국인 2명이 막 들어와 눈인사를 했다. 외모와 말투로 봐서 유럽에서 온 사람 같았다. 관리인은 친절하게 필자에게 2층으로 가면 다른 관람 장소가 있다고 말하면서 사진은 찍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추모관 내부 사진을 전부 촬영한 상태였다. 2층 전시관에는 1994년 인종학살 사건 당시 무참하게 죽은 아이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사진 설명에는 아이들의 나이, 출신지역, 좋아하는 것, 장래 희망 등이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대량학살에 희생된 아이들은 생후 6개월부터 10살 정도 아이들이었다. 이런 어린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무참하게 총과 무기로 죽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슬픈 마음이 필자의 가슴을 엄습해왔다. 

사진 찍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사실을 기록에 남기고 싶어 여기에서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 기약이 없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많은 대량 인종학살 장면 중 정말로 있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을 발견하였다. 성당 앞 쪽 건물 사진은 더욱 참혹한 현장을 증언하고 있었다. 시골 작은마을의 교회가 바로 대학살의 현장이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작고 조용한 성당에서 2,000여 명이 죽어갔다는 사실이! 사실인즉  신부가 교회 건물을 불도저로 질주하도록 명령했을 때 교회를 피난처로 여기고 온 주민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그의 많은 신자들을 살해했다. 마지막 생명의 피난처를 갈구했던 교회 신도들을 구원하지는 못할망정! 당시의 아비규환, 필자의 귓전을 때리는 것 같았다. 

필자는 이 모습을 보고 일제가 3·1운동 당시 저지른 ‘제암리 학살사건’과  캄보디아 ‘킬링필드’ 현장 모습이 떠올났다. 일제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역이라는 이유로 1919년 4월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마을주민들을 제암리 교회로 몰아넣은 뒤 학살하였다. 이때 죽은 사람이 30여명이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만행을 숨기기 위해 방화까지 저질렀다. 최근 당시 일본군 조선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 대장의 일기를 통해 “사실을 인정할 경우 일본에 불리한 만큼 저항 때문에 사살한 것으로 꾸미기로 했다”며 조작·왜곡한 사실이 드러나 우리를 더 분노케 하였다. 

아무런 죄가 없는 무고한 주민들을 교회라는 신성한 종교시설에서 학살한 뒤 이를 숨기기 위해 방화까지 한 악랄한 수법이 르완다 신부와 너무나 닮았다.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제국주의적 인종차별이 르완다에서는 다수족인 후투족이 소수족 투치족에 대한 인종차별로 나타났을 뿐이다. 르완다 대학살에 버금가는 참상이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중심가 툴슬렝(Tuol Sleng) 수용소와 영화 ‘킬링필드’의 배경이 된 교외의 초응엑(Coeung Ek) 학살 추모기념관에서 이유 없이 숨져간 해골들이 통곡하고 있는 비참한 모습을 필자는 몇 년 전 방문해 보았다. 킬링필드는 인종차별이 아니라 잘못된 극단적 사고가 불러온 냉전시대 막바지의 이념적 비극이었다. 

르완다 인종학살의 참상을 보고 나오는 입구에는 장미 정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아름다웠다. 비극적인 참상을 구경한 관람객들에게 마음의 안정과 위로를 주기위해서 이렇게 넓은 마당에 화려한 꽃을 가꾸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도 해 봤다. 그 당시 산자와 죽은 자를 생각하면서 필자는 큰 슬픔을 느끼면서 정문을 나오는데 정문 안쪽에 여자경찰이 앉아있었고 정문 밖에는 무장한 남자 경찰이 2명이 있었다. 그들은 필자가 방문 기념으로 남기려고 정문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을 본 것이다. 이 행동만 아니었어도 순간의 두려움이 없었을 텐데. 분위기 파악을 잘못한 것이 잠시나마 극도의 불안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키는 아마 190cm 정도, 얼굴은 검정 구두약을 잔뜩 바른 잘 생긴 경찰이 다가와 사진 찍은 것을 것 전부 지우라고 했다. 정문에서 찍은 것만 보여주면서 삭제 후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러자 경찰은 자꾸 필자의 휴대폰을 달라고 했지만 의도적으로 계속 찍은 사진을 지웠다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그러자 자기 상사인 듯한 여자 경찰에게 검열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여자 경찰에게 사진 지운 것을 남자 경찰이 확인했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전체 사진 찍을 것을 보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남자 경찰이 확인했다는 말만 계속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자 경찰과 여자 경찰은 서로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나라 그 추모관에서 각자 경찰 직무분담 상황을 이해 못해서 그럴 것이다. 아마 명확한 업무 분담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하였다.

키갈리 추모관을 관람하면서 거의 모든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런데 이 사진들을 모두 지워야할 처지에 당면해 겁이 났지만 필자의 차분한 마음으로 순간 대응과 천운 같은 택시 운전자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모면하였다.  아! 이런 것이 행운인가! 정말 운이 있구나. 추모관 정문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필자는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기념관 관련 규정을 어기고 사진을 찍어 아찔한 순간이었다. 고생해서 구하기 힘든 사진을 찍었으나 모두 날려버려야 하나! 혹시 벌금이라도 물어야 되나! 더 하면 교도소에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계속 이런 갈등과 두려운 상황이 지속되는 사이 필자가 예약한 택시가 그 순간에 기념관 정문에 도착했다. 무조건 택시를 타려고 하자 남자 경찰이 계속 여자 경찰에게 다시 또 사진 찍은것 확인을 받으라고 이야기를 하자 필자는 겁이 났다. 

추모관 내 아름다운 붉은 꽃들의 향기와 함께.추모관 내 아름다운 붉은 꽃들의 향기와 함께.
추모관 내 아름다운 붉은 꽃들의 향기와 함께.추모관 내 아름다운 붉은 꽃들의 향기와 함께.

하늘이 도움을! 택시 운전사와 여자 경찰이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택시 운전사가 차에서 내려 여자 경찰과 서로 악수를 하고  포옹도 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열심히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호텔에서 기념관으로 갈 때 택시 운전사에게 필자가 한국에서 르완다 국가 추진사업을 자문하기 위해 왔다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여자 경찰 표정을 보니 추모관에서 사진 문제로 옥신각신한 문제를 택시기사에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택시 운전사와 대화를 마친 여자 경찰은 필자에게 더 이상 사진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가라고 하면서 인사까지 정중하게 하였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독일 외신기자와 평범한 택시기사의 시선으로 본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움
영화 ‘택시운전사’는 독일 외신기자와 평범한 택시기사의 시선으로 본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움

필자는 이틈을 타서 택시 운전사에게 빨리 가자고 말하자 택시 운전사는 재빨리 필자를 태우고 쏜살같이 추모관 정문을 빠져 나왔다. ‘택시운전사’! 이 영화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했던 서독 제1공영방송 북부독일방송(ARD-NDR) 영상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1937~2016)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영화 한 장면 중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독일기자를 데리고 광주를 빠져나오는 택시기사 송광호의 모습 같았다. 기념관 내에서 사진을 찍지 못한다는 사실을 필자는 사실 처음에 몰랐다. 또한 정문 배경 사진을 찍지만 않았더라도 조마조마한 마음이 없었을 텐데. 좋은 무지로부터 두려움과 심적 고통이 있었지만 반대급부로 귀한 사진을 보관하고 인종갈등과 화해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어서 마음에 위로를 해 본다.

르완다는 국제축구연맹(FIFA) 211개 회원국 중 136위 수준 국가지만 국민들의 축구에 대한 큰 열망인지 정치적인 영향인지 모르지만 2023년 3월, FIFA 회장 선거가 수도 키갈리에서 열린다. 필자는 한국정부가 제시한 ‘국가협력 전략’이 충실하게 추진되고 교황의 인종학살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실책 인정을 통해 르완다와 화해를 회복하는 강력한 기반으로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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