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이남철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다양성, 삶과 문화에 대한 열정, 뜨거운 심장과 살아 숨 쉬는 문화의 용광로, 자유와 정열로 가치가 표출되는 스페인. 스페인은 기본적으로 다민족사회이며 지역주의가 강한 것이 특징이다. 역사적으로 로마, 아랍 지배 등을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고 발전시켜온 독특한 문화전통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 인종차별이 적고 이민 문제에도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특히 711년부터 1492년간 아랍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다수 존재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유적지만 무려 48개로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나라이다.

지난 40년 간 스페인 관광산업은 세계 2위 규모로 성장했다.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스페인도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인해 외국인 관광객 유입이 2019년 8,400만 명에서 2020년 1,900만 명으로 급감했다. 스페인 정부는 2021년 여름 휴가시즌부터 백신여권 등을 도입하는 등 외국인 입국 기준을 완화했다. 2021년 1~9월 중에만 1,97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스페인을 방문하였다. 

세계관광기구(UNWTO) 발표에 따르면 스페인 관광수입은 2018년 817억 달러(98조400백억 원), 2019년 797억 달러(95조6,400억 원)이며 연도별 관광 수지 흑자는 각각 553억 달러(66조3,600억 원), 518억 달러(62조1,600억 원)를 기록하였다. 2023년도 우리나라 예산 총지출 규모가638.7조원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관광수입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스페인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 63만 명에 달해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중국·일본에 버금갈 정도로 많았다. 특히 이 가운데 산티아고길 방문자 수는 유럽을 제외하면 한국이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스페인은 유럽 대륙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이베리아 반도의 84퍼센트를 차지한다. 전체 면적은 50만5,370km2이며 그중 5,240km2는 호수 등이다. 수도는 마드리드(320만 명)이며 국토는 한반도의 약 2.3배이다. 4,670만 명(2021년 기준) 인구와 94퍼센트 가톨릭 신자를 보유 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민은 4,500여 명 정도이다. 외교관계 수립은 1950년 3월 17일, 주스페인대사관은 1970년 4월, 주한스페인대사관은 1973년 10월 개설하였다. 스페인은 지정학적 위치상 북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 중 하나로, 스페인 유입 불법이민자가 많다. 2019년 1월 기준 스페인의 외국인 이주자는 484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1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 국내 정치 상황 악화로 베네수엘라 국민의 스페인 유입이 급증하고 있다.

마드리드 시내에는 많은 기마병 동상과 오래된 건물들이 장관임
마드리드 시내에는 많은 기마병 동상과 오래된 건물들이 장관임

필자는 수도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미국학회에 참석,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스페인을 찾았다. 인천을 출발해서 핀란드 헬싱키를 경유, 스페인 마드리드 가는 여정은 힘들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이 무척 설레였다. 본연의 일이 끝난 후 필자는 문화탐방을 위해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마드리드 시내 구경은 미국 교수들과 함께 스페인 황금시대에 창조 된 수많은 걸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프라도 박물관(Prado Museum), 18세기 왕실 궁전(Royal Palace), 마요르 광장을 구경하였다. 더위에 유별나게 약한 필자는 40도 가까운 정말 무더운 날씨이지만 평생 다시 찾기 쉽지 않은 스페인이기에 론다(Ronda) 여행을 강행하였다.

마드리드에서 안달루시아 주(州)도인 세비야(스페인어: Sevilla)까지 철도를 이용하여 약 2시간30분 정도 걸려 도착, 환승 후 세비야에서 130km 떨어진 론다까지 3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론다 역에서 필자. 역과 버스터미널은 200미터 거리에 있음.
 론다 역에서 필자. 역과 버스터미널은 200미터 거리에 있음.

론다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인 말라가주의 도시로 인구는 3만6,827명, 면적은 481.31km2이다. 로마와 이슬람 지배를 거쳐 나폴레옹의 침공과 스페인 내전을 겪은 고난의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이다. 론다 산맥에 자리한 해발 780m 고지대로 협곡과 절벽을 끼고 앉은 도시이다. 절벽과 협곡은 과달레빈 강(Río Guadalevín)이 천연으로 빚은 천혜의 절경이다. 이 절경은 론다를 낭만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지게 할 충분한 조건이다. 

많은 관광객들에게 론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소는 아마도 누에보 다리(Puente Nuevo)일 것이다. 누에보(Nuevo)라는 뜻은 영어로 ‘New’ 라는 의미로 ‘새로운 다리’라는 것이다. 원래 이곳에 이미 다른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는 론다 구시가지(La Ciudad)와 신시가지(Mercadillo)를 있고 있는 세 개의 다리 중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다리이다. 타호 협곡으로부터 돌을 가져와 축조하였다. 과달레빈 강을 따라 형성된 120m 높이의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 건축은 1735년 필립V(Felipe)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8개월 만에 35m 높이의 아치형 다리로 만들어졌으나 1741년 다리 전체가 무너져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759년에 새로이 착공되어 1793년 다리 완공까지 34년 걸렸다. 이 다리는 좁은 도로였지만 다리 입구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타호(El Tajo Gorge) 협곡의 아찔한 높이를 보면 그제야 이 도시가 ‘하늘 정원’임을 실감하게 된다. 필자는 이 다리를 보면서 론다 사람들은 절벽위의 도시에서 바위를 지붕삼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놓치기 쉬운 중앙 아치 위에는 방이 있다. 1936년~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중 양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타호 협곡 바닥에 있는 바위로 던져 죽였다고 한다. 이곳은 한때 경비실이었던 사각형 건물을 통해 들어간다. 지금은 다리의 역사와 건설 과정을 설명하는 전시장이 있다. 스페인 내전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전선에서만 약 백만 명이 전사하였고, 민간인을 포함하여 쌍방에서 약 20만 명이 살해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감동을 주는 누에보 다리가 필자는 이렇게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상념에 젖는다. 슬픔을 뒤로하고 세계적인 문호들의 누에보 다리에 대해 극찬을 생각하면서 필자는 스스로 위안을 갖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오스트리아 출신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20세기 최고의 독일어권 시인 중 한 명이다. 릴케는 그가 머물렀던 레이나 빅토리아 호텔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꿈의 도시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을 론다에서 찾았다.”그는 풍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직접 가보지 않고 릴케의 묘사만 보아도 절경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곡괭이로 산산조각으로 쪼개지고 좁고 깊은 강 협곡으로 분리된 두 개의 바위 덩어리 위에 앉아 있는 이 도시의 광경은 꿈에서 드러난 그 도시의 모습과 매우 같다. 이 도시의 풍경은 형언할 수 없으며 그 주변에는 경작 토지, 호랑가시나무, 올리브 과수원이 있는 넓은 계곡이 있다. 그리고 저 멀리에는 모든 힘을 회복한 듯 순수한 산들이 솟아올라 한 줄 한 줄 가장 멋진 배경을 이룬다.”

세계적인 대 문호 헤밍웨이(1899~1961)는“론다는 신혼여행이나 여자 친구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가야할 곳이다. 도시 전체와 그 주변은 낭만적인 곳이다.… 멋진 산책로, 좋은 와인, 훌륭한 음식, 할 일이 없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헤밍웨이의 스페인과 론다 사랑은 특별하다. 37세 때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 의용군 기자로 참전한 것도 그렇거니와, 종전 후 거처한 미국 플로리다 주의 키웨스트로 집 대부분을 스페인 가구로 장식했다는 것에서도 짐작이 간다. 그의 소설 중 가장 인기 있고 그에게 노벨상을 안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으로 삼은 곳도 또 집필을 시작한 곳도 론다이다. 영화‘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촬영지 일부이기도 하다. 어쨌든 론다는 헤밍웨이를 빌어 이야기될 때 가장 론다다울 것이라는 필자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헤밍웨인 동상이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인 론다 투우장(Plaza de Toros de Ronda) 앞에  있는지 궁금증을 갖고 있다. 스페인을 사랑하고 론다를 사랑하고 론다가 자랑스러워하는 헤밍웨이의 동상을 본 후 다음과 생각을 가진다. 헤밍웨이의 스페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투우로부터 시작되었다. 1925년에 발표한 그의 첫 장편 소설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배경도 투우다. 

투우장 앞 헤밍웨이 동상
투우장 앞 헤밍웨이 동상

헤밍웨이는 ‘스페인에서 본 것, 그곳의 소리, 냄새 등 모든 것을 언어로 채색하고 싶었다. 그 중 어떤 것이라도 진실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스페인의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나온 작품이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이다. 헤밍웨이는 이 책에서 “전쟁이 끝난 뒤인지라 삶과 죽음, 즉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투우장뿐이었고, 나는 그것을 잘 살필 수 있는 스페인에 몹시 가고 싶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헤밍웨이는 글 쓰는 것이 예술이듯 투우도 예술이라고 믿었다. 투우야말로 진정한 남성의 용기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다.

론다는 근대 투우의 발상지이다. 특히 1784년에 건설된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투우장인 론다 투우장은 스페인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투우장 가운데 한 곳으로 여겨진다. 론다 투우장에서는 지금도 가끔씩 투우 경기가 열린다고 한다. 필자는 여행 중 이 투우장을 찾았지만 늦은 시간이라 투우 경기를 볼 수 없어 무척 아쉬웠다. 투우는 최근 동물 보호 논란과 경기 자체의 위험성 등으로 인해 인기가 예전보다 퇴색되는 분위기다. 

필자는 헤밍웨이의 다음 메모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살던 데서 머물고 떠나고… 신뢰를 하고 불신을 하고…더 이상 믿지를 않고 또 다시 믿고…계절이 바뀌는 것을 주시하고…빗소리를 듣고…그리고 어디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 “여행의 끝이 있는 것도 좋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여행이다.” 라고 헤밍웨이는 토로한다. 필자도 전적으로 헤밍웨이의 말에 동감한다. 헤밍웨이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의 첫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가 만들어졌을까. 헤밍웨이가 쿠바 아바나 근처에 살지 않았다면, 코히마르 항구에 가보지 않았다면 '노인과 바다' 역시 만들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론다에 살지 않았다면‘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없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기회도 그에게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귀한 명언에 깊은 감동과 인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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