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 '위챗판장백산'문학지 발표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차장. 수필/수기 등 수 십편 발표, 수상 다수.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차장. 수필/수기 등 수 십편 발표, 수상 다수.

일상이 단조롭다. 새벽에 일어나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무휴일에 가깝게 일을 하는 반복된 일상에서 가끔 마음속에 불어오는 공허함은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존재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한국에 정착한지도 어언 20여 년, 그동안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여행이랑은 담을 쌓고 살아왔다. 잘 사는 삶이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일까에 고민도 없었고 오로지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삶의 질은 높아졌을까? 사막같이 메말라버린 내 감수성, 살기 위해서의 아등바등은 고달픈 육신에 여기저기 병만 남겨주었다. 난 왜 이렇게만 살아야만 하는 걸까? 공허한 욕심? 많은 욕구를 버릴 수 없어서? 수많은 의문이 계절의 한나절을 뜨겁게 달구던 무더운 여름 열대야 밤처럼 설치게 한다. 이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살아갈 순 없는지? 아직 나의 삶이 처참하게 붕괴하지 않는 한 의지의 차원일 것이다. 이제 와서 삶의 질을 높인다고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도 많다. 어쨌든 간 그런 마음이 생기니 그렇게 살아보고픈 욕심이 커졌다. 김유진 작가님의 ‘지금은 나만의 시간입니다’에서 나답게 산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 줬고 일에 얽매이지 않고 정신적으로 여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줬다. 그러니 잘 멈추고 적절히 쉬며 나만의 시간이 나를 살리는 행복의 지름길이 아닌가 싶다.

가을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줄지어 선 가로수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걷다 보면 천지사방 둘러봐도 단풍잎은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느끼게 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의 수런거림은 변화의 계절을 읽게 된다. 우린 태어나서 나이가 들면서 삶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을에는 사람들이 단풍잎처럼 삶에 그리움과 희망을 노래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사람이나 나뭇잎이나 가을이면 알 수 없는 목적지를 찾아 떠난다.

나는 처음으로 아내와 여행을 한 달 전부터 계획을 짰다. 목표는 내장산이었다. 내장산은 정읍의 대표적인 명산이다. 내장산은 소백산에서 이어지는 노령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산이다. 한국의 8경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내장산 단풍 구경을 위해 저녁노을 뒤로한 채 전주에 도착했다. 11월 초여서 해도 짧아져 땅거미는 이미 선 너머로 내려앉고, 내온 등이 즐비한 한옥마을엔 소박하면서도 정겹다. 우선 맛집부터 검색해봤다. 전주 하면은 비빔밥이니 원조의 맛을 보고 싶었다. 예약도 없이 나선 길이라 ‘성미당’식당에는 손님들로 북적이었다. 서울보다도 비쌌다. 맛도 일품이지만 맛깔스레 보이는 화려한 색감이 핵심이 아닌가 싶다. 나는 아내와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주말이라 가족을 동반한 여행객들이 제법 눈에 띈다. 전망 좋은 호텔이나 모텔은 이미 만실이었다. 화려한 불빛 아래 개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며 눈길을 끌어당긴다. 새로 지은 건물이니 깨끗하겠다며 모텔 내부를 둘러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치렁치렁한 가림막이 쳐진 주차장은 자동차 번호판조차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둑하다.

지나다니는 행인에게 보여서는 안 될 은밀한 장소라는 걸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 앞에 잠깐 주차 중인데도 행인들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불륜의 당사자가 된 듯 묘한 기분이다. 허겁지겁 들어서서 문의했으나 여기도 객실이 없단다. 주위를 몇 바퀴 돌아봤으나 헛수고였다. 우리는 전주의 한옥마을의 야경도 뒤로하고 내장산하고 더 가까운 정읍으로 향했다. 9시 무렵 정읍에 도착해 호텔부터 찾아봤으나 모두 만실이었다. 정읍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한 모텔 옥탑방에 숙박을 할 수 있었다. 건물은 오래되어 낡고 누추했다. 그러나 이부자리는 정갈해서 마음에 들었다.

대충 짐을 푼 우리는 산책을 나섰다. 다소 쌀쌀한 날씨지만 네온이 반짝이는 포장마차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움츠리고 걷는 우리의 발길을 부른다. 따뜻하고 푸근하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파전에 동동주 한 주전자를 주문했다. 옆 테이블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술 한 잔으로 가장들이 허심탄회하게 세상을 쏟아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높은 언성에 호탕한 웃음, 가끔 긴 한숨이 인생 여정을 말하는 듯하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도 작은 포장마차에서는 하루의 피곤을 푸는 하소연 장인 것 같다. 가끔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도 같은 모습이다.

새벽녘에 남들보다 일찍 내장산을 찾았다. 우리뿐만 아니었다. 고요하던 시내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모두가 단풍의 물결로 아름다운 장관을 구경하러 앞서고 뒤서며 긴 행렬이 이루어졌다. 어스름이 밝아오는 새벽이지만 내장산에 다가갈수록 인산인해를 이룬다. 내장산이 유명한 이유는 단풍나무가 많기 때문이다. 내장산 단풍은 내장 단풍, 아기단풍, 털 참 단풍 등 다양한 단풍나무가 자생하는 데다 일조 시간이 길어 빛깔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 초록 나뭇잎이다. 활활 타오르는 단풍과 늘 차디찬 푸른 비자나무는 환상적인 조화로움을 자아내어 내장산의 가을을 돋보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숲길과 계곡, 절벽으로 눈길을 돌리면 바람과 물 공기의 흐름에서도 내장산의 진면모에 고이 간직했던 탄성이 나온다.

여행은 언제나 마음을 힐링하게 한다. 젊음이나 늙음을 떠나서 모든 삶이 단순하고 명쾌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나는 매사에 부정과 긍정 사이의 모순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가끔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도 부정적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한동안 지나면 또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마음을 다잡는다. 남자도 갱년기 있다? 모르겠다. 나는 아직 없다고 생각하는데 오락가락하는 감정을 피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 감정을 마주하고 해소해줘야 아팠던 감정이 나를 괴롭히지 않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삶이라는 힘든 길을 묵묵히 동행하는 부부라는 길동무, 어쩌다 사나운 감정에 휘말리더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아끼며 챙겨주는 것이 진정한 부부라 생각한다.

우리는 태어나 나이가 들면서 삶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이제라도 내 기준과 관점을 내려놓고 후회가 적은 삶을 살고 싶다.

2023년 1월 '위챗판장백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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