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민족과 나라를 넘어서서 '동북아시아인'으로

 

天生我才必有用이라는 중국의 속담이 있다. 즉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꼭 쓸모가 있다 라는것이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나의 정체성과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 나의 쓸모는 무엇인가? 즉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독자 여러분들도 나와 같거나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다고 본다. 해외에 나와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어디서 왔는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있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되는데 그렇다고 우리는 중국사람(한족)과 문화면에서 좀 다르다. 중국의 조선족이라고 하면 예전에는 외국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 조선족청년이 미국에 갔는데 입국심사 할 때 너는 어디서 왔느냐? 고 물으니 그청년은 서투른 영어로 I’m a Korean Chinese라고 대답했더니 Are you a Korean? Or a Chinese? 하고 질문 받아 어리둥절해서 고생했다고 한다. 일본에 와서도 처음엔 똑같은 상황에 부딪칠 때가 있었다. 지금은 많은 일본인들도 ‘조선족’하면 곧 알았다고 하며  자기 친구도 지인도 조선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1995년에 한번은 우리 부부가 교토와 나고야에 여행 하러 갔다. 나고야에는 친구의 여동생부부가 살고 있는데 남편은 규슈대학에서 박사를 졸업하고 토요타 관련 아이신세이키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사업하고 있어서 방문갔다. 북경에서 서로 아는 사이라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부인은 “여기서는 조선말을 쓰면 안된다”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재일조선인들은 여기서 차별 받기에 자기들은 ‘중국사람’ 이라고 주위에 알려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에 이해를 표시하고 중국말로 대회를 나누었다. 그외에도 일본에서 ‘중국사람’으로 자처하는 분들이 있다는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은 도쿄에서 살면서 당당하게 중국의 조선족이라고 숨기지 않고 살아 왔는데 같은 조선족이라도 생각이 다르다는것을 알았다. 2001년12월에는 도쿄에 있는 조선족 단체들을 조직하여 조선족국제심포지엄을 메지로대학교에서 개최 하였는데 거기에는 일본의 유명한 학자인 도쿄대학교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님도 초청하여 기조강연을 하였다. 일본의 신문매체와 일본의 중국인 매체가 취재하여 신문보도를 하였다. 일본국제교류재단에서도 지원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여러차례 대규모의 심포지엄을 개최 하였는데 2009년에 개최된 동 심포지엄에는 한국과 중국 북경, 연변 등의 학술 단체와 기업인들 300여명이 참가 하였는데 일본의 아사히신문사 기자가 전문 취재를 하여 나중에 신문의 1면에 기사를 게재하였다. 조선족들의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일본에서는 ‘조선족’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시민권’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본땅에서도 조선족으로서 자신감과 긍지감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었다.(물론 그렇지 않는 지역과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도쿄신문 2008년 2월 10일
도쿄신문 2008년 2월 10일

조선족으로 자리 매김 하는데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즉 자기 자식들과의 정체정 문제이다. 나의 아들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공부하고 성장 하였는데 그런 아들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가족으로서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아들이 소학교 다닐 때 이러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왜 나는 성씨가 ‘리’자 하나인가요? 나도 친구들처럼 두 자의 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별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아들에게 우리는 조선족이고 중국 사람이라고 이야기해도 이해가 안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부모로서 “우리는 중국사람이다” 아니면 “조선 사람이다.”고 교육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일본에 있는 수많은 조선족들은 똑 같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일본에 사는 조선족 자녀들은 ‘조선족’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하지만 성장하여 사회활동을 하게 되면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일본국적을 가지고 일본이름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 성년이 된 후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일본문화의 세례를 받았으니 당연히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허나 네가 앞으로 세계를 무대로 삼고 멋지게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일본어와 영어도 잘해야 하겠지만 너는 너의 부모나 조상이 물려준 디엔에이(DNA)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살리면 인생을 살아가는 경쟁 능력이 더욱더 높아지고 더 멋지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공동으로 ‘아시아인’, ‘동북아시아인’, ‘지구인’으로 살아가면 될 것이라고 한 내 말이 귀에 들어갔는지 대학에 들어가서 한국어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국제교류 서클에 참가해서 전세계에서 유학온 학생들을 친구로 사귀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아들은 연세대학교와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 교환유학하여 국적을 넘어서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다. 현재는 토론토대학에서 만난 인도친구와 일본에서 만난 의학박사 친구와 셋이서 3년전에 벤처기업을 창설해 운영하고 있다,

지금의 시대는 글로벌화 시대고 지역화의 시대이다. 예전에는 어디에서 사나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자는 것이 중요한 인생 가치관이였었다면 지금의 시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자기가 태어난 루츠(고향, 나라,  민족, 문화 등)는 너무나도 중요하여 자기 인생의 불가결한 부분이며 인생가치의 일부분이다. 허나 그것을 넘어서는 초 민족적 초 국가적 가치관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민족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족, 세계에서 사랑받고 존중받는 민족을 지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민족의 울타리에서 싸구려를 부르면 영원히 진보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유대인은 전세계에서 주목받고 존중받는가. 우리도 깊이 사고하고 세상을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40대에 들어서서였다. 진짜 인생을 알게 된것이 이때였다고 생각한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공자의 말에 40에 불혹(四十而不惑) 이라 했으니, 공자같은 성인(聖人)도 40대에 자기의 위치를 혼동하지 않고 알았다고 했으니 그리 늦은 것도 아닌가 싶다.

31년전인 1991년 5월에 북경에서 대학 교원직을 사직하고  일본 도쿄에 와서 유학을 시작했으나 자기가 갈길을 찾지못하여 헤매며 살아 왔다. 나는 목표가 있어서 유학을 한 것이 아니다. 또한 북경에서 살기 힘들어서 떠난 것도 아니다. 시골의 가난한  농민때부터 꿈에 그리던 인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던 수도 북경에서 인생의 중요한 청춘시기를 보낸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훌륭한 일이며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기분이 드는 일이다. 

6년간의 중앙민족학원(대학교)과 공산당북경시당교에서 대학원 생활을 즐거이 그리고 보람차게 보냈으니 얼마나 벅찬 일인가? 시골말로 말하면 정말 든든히 출세를 한 것이다. 공부도 재미있게 열심히 해왔고 중국말(한어)도 본격적으로 배우고 중국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았었다. 중국어 수준을 높이려고 고대한어도 열심히 배우고 당시송사 300수를 암기내고 또한 영어도 인생 처음 배웠고 일어도 완전히 일본인과 대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배웠다. 공산당대학원에서는 공산당건설(집정)에 관한 연구를 하게되니 당시 공산당의 시조인 소련에 대해 관심을 갖고 러시아어 책을 사서 자습을 시작하였다. 즉 6년간에 자기전공 공부외에도 5개국어를 배운셈이다.  

공부만 한 것이 아니다. 반급에서는 반장을 맡았고 여러가지 학생 활동을 조직해야 했으며 대학교 2학년 때는 전 학급에서 공산당에 입당한 첫 사람이었다. 그후 내가 양성한 대학생당원은 20여명이나 된다. 즉 나는 공산당 리더의 싹인 것이었다. 그래서 졸업할 때는 공산당 정치가를 지향하여 당교의 대학원에 시험 보고 입학했던 것이다.

 만약 당시에 정치적 풍파가 없었더라면 나는 중국 중앙의 통일전선부나 규율 검사 위원회에 사업배치를 받았을 것이다. 당시 1987년1월에 공산당 총서기인 호요방이 정치적 문제로 인해서 실각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중국국민 특히 젊은 인테리들은 총서기를 존경하고 숭배까지 했는데 하루아침에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을 보고 너무나 실망했으며 정치가라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직업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해6월 졸업 분배 때는 대학교교원이 되어 학자가 되겠다고 대학원 당국에 요망(要望)했더니 중화전국총공회(노동조합총회) 산하의 대학인 중국공운학원 (현재는 ‘노동관계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했음, 전국의 각 성시자치구나 국유대기업의 노동조합 간부들을 재교육 시키는 대학)에 배치(취직) 받아 4년간 대학 강사로 철학이나 노동운동사 등 강의를 하였다. 그때는 조선족이라는 의식보다 중국인이라는 의식이 더 강했던것 같다.

 물론 북경에도 조선족 친구가 많고 조선족운동대회 등 민족 활동이 있었으나 중국사회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가는것이 인생의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또한 중국인 사회에서는 별로 차별없이 능력이 있는 자는 잘 써주었다. 심지어 소수민족의 우수한 사람은 출세하기 더 쉬웠다. 왜냐하면 우수한 민족간부들이 있어야 다민족 국가를 더 잘 다스릴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한 반급에는 학생이 50명인데 23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한족은 1명도 없었다. 그러니 대학생활 중에서 다문화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중에서 공산당원이 20명이나 배양 되었고 그 동창들은 그후 현재 소수민족 간부로 출세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지금도 중국에 출장가면 어디로 가나 ‘리(나) 반장’을 존대하고 반겨주니 너무나 기쁘다.  

아사히신문 2010년 2월 12일
아사히신문 2010년 2월 12일
아사히신문 2010년 2월 12일
아사히신문 2010년 2월 12일

일본에 와서 10년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유학생활을 했는데 그 과정에 관해서는 나중에 상세하게 이야기 하려고 한다.

위에서 이야기 한 바가 있는데 일본에 살면서 하나의 큰 고민거리가 자기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었다. 중국 사람이냐 아니면 조선(족)사람이냐. 그 해답은 뒤 늦게야 찾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자리 매김을 ‘동북아시아인’으로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나의 출생지는 중국이고 국적도 중국이지만 나의 선조는 조선반도 출신의 조선인(한인)이고 조선민족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때부터 중국인으로서 중국어와 중국문화의 세례를 받아왔다. 일본에 와서는 일본문화와 세계문화의 세례를 받았으니 나는 ‘세계인’이나 ‘지구시민’을 지향하였다. 하지만 나의 인생문화관에서 핵심적인 것은 동북아시아(예전에는 동아시아)  3 국이므로 동북아시아의 발전과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나의 인생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되고 나의 인생 목표로 되고 있다. 

60여년의 인생에 지금도 나는 언제나  Only one을 나의 인생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나의 삶의 가치이며 자부심이다. 사회적으로 나는 동북아시아 지역연구와 각종 실무활동에 참가하는데 여기서도 나는  Only one을 나의 인생 가치로 생각하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리강철의 역할이 라고 생각한다. 

2005년12월에 내가 소속한 일본정부의 국책연구소인 종함연구개발기구(NIRA)의 출장으로 오스트리아의 빈(Vienna)에 가서 연합국공업개발기구 (UNIDO)의 두만강지역개발에 관한 전문가 국제워크셥에 참가하여 보고를 한적이 있다. 나의 보고 차례가 되자 나는 자기소개에서 ‘나는 동북아인입니다= I am a Northeast Asian’라고 소개하고 서투른 영어로 나의 프레젠테이션(보고)을 시작했다. 그 회의에는 연합국관원들과 중국, 한국, 조선, 러시아, 몽골, 일본 등 6개국의 관계 전문가들과 정부관원들이 참석했는데 나는 일본의 유일한 대표로 참가했다. 그런데 나는 일본인이 아니었고 또 중국인이라고 말하자고 하니 그것도 어불성설 이였다. 국적은 중국이나 일본측을 대표 하였으니 말이다. 거기에다가 나는 또 조선(한)민족의 피를 가지고 있으니 어느 하나로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코리안의 속성 중국인의 속성 그리고 일본인의 속성을 겸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것을 표현하는 아이덴티티(정체성,自我认同)로 나에게는 ‘동북아인’(東北亜人)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는 일본에 유학한 후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연구 테마는 <두만강 지역국제개발과 동북아시아 지역협력> 이었기에 나의 생애의 연구과제와 활동과제는 언제나 동북아시아 지역이며 이 지역의 평화와 발전이 있어야 나의 인생도 보람찬 인생으로 될수 있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의 인생 가치는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60여년 인생 속에서 우연하게 자연스럽게 나는 일본에서 유학 하면서 두만강 개발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구축 하려는 꿈을 가지고 30여년간 부지런이 나 자신을 가꾸어 왔다. 

나는 또 우연하게 연변이라는 곳에서 태여나 조선말(한글)을 배우고 조선족 문화속에서 성장하여 또 우연하게 중국 땅에서 태어나 중국국민이기에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배우게 된 것이다. 또 우연하게 북경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대학에서 교수직을 찾았으니 표준 중국어를 사용하고 중국문화 속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대학에 가려고 촌에서 자습할 때 외국어 시험을 보아야 한다고 하니 당시 길림대학교 일어계 학생이었던 형이 보내준 일본어교과서 한권을 들고 우연히 우리 마을에 살고 있었던 일본인에게 가서 가나의 읽기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분은 나의 동창친구의 어머니였는데 아버지는 조선족의 유명한 화가이고 연변예술학교 교수인 석희만 선생님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지식인, 간부들이 대거 시골로 하향하던 때에  일본과 관계 있는 지식분자이라  우리 마을에 하향 와서 10여년 거주했다. 그분을 찾아가 “아이우에오”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그후에는 일하면서 자습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공북경시당교의 연구생으로 들어 갔는데 전공이 우연히 <당의 건설> 이였으니 세상에 공산당 국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련(현 러시아)이 맏형이니 당연히 러시아어를 공부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책 한권을 사가지고 러시아어 자습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동북아시아 지역 연구에 도움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러시아에 가서도 러시아어 절반 영어 절반 하면 통역이 필요없이 거리에 나가 다닐수 있다. 

일본에 유학하여 경제학 전공 대학원을 들어 가려고 하니 영어시험을 쳐야 했다. 나의 영어라면 대학에 들어가서 A,B,C에서 시작하여 2년밖에 배운 것 뿐이다. 이정도 가지고는 당연히 대학원 시험에 참가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에 와서는 일어 공부와 아르바이트의 틈을 타서 영어 자습을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석사와 박사 시험을 무사이 넘겨 합격되었다. 나중에는 연합국UNIDO 국제회의에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까지 할 수 있었고 영어로 논문까지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2005년 가을에 처음으로 몽골의 울란바트르에 출장 갔는데 공항에 도착해서 간판을 보니 모두가 러시아어문자(키릴문자)로 되여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 놀랐고 기뻤다. 나중에 알아보니 몽골은 근대의 몇 십년 간에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소련의 선진적인 과학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1941년부터 키릴문자를 도입하여 지금까지도 그것이 국어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몽골국과 중국의 내몽골은 같은 민족이고 같은 말을 쓰나 문자가 서로 다르기에 문화교류에 큰 장애가 생기게 되였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민족은 남북이 갈라지고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자라났지만 말과 문자가 잘 통하니 행복하다. 그래서 나중에 몽골정부 외교부의 친구들과 식사할때 이제부터 나는 몽골어를 배우겠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물로 친구들은 네가 몽골어까지 배우면 진짜 ‘동북아인’이 된다면서 기꺼이 배워주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에 돌아와서 곧 몽골어책과CD를 사서 자습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고 우연하게 말이다. 그러던 중  2006년에 도쿄의 시나가와 프린스호텔에서 아사쇼류 (朝青竜)  요코즈나(横綱)의 스모(相撲) 9연승 축하 파티에 몽골 주일대사 후렐바탈 선생 (2000년8월 대만에서 타이페이에서 개최된 동북아국제회의에서 인연을 맺고 지금까지도 내가 설립한 연구소의 최고고문으로 있음) 에게서  초대장을 받고 참가하게 되였는데 나는 아사쇼류의 가까이 가서 [사엔바노] 하고 몽골어로 인사를 나누니 그는 아주 기뻐하며 몽골어로 대답해주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돌이켜보니 나는 동북아의 6종 언어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 구사할수있는 소질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였다. 러시아어와 몽골어는 아직도 초급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친구를 만드는데는 많이 도움이 된다. 또 연구 분야도 동북아시아 지역협력이니 나야 말로 세상에서Only one의 이(리)강철이라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그후에서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동북아 연구분야의 전문가들은 나를 보고 ‘동북아인’이라고 불러주고 있으며 동북아 각국에 친구들이 있다. 2020년10월에는 일본에서 동북아미래구상연구소를 사단법인으로 설립했는데 동북아시아 6개국(대만을 넣어서 7개) 출신의 연구자와 전문가 및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모인 유일한 연구소로 되였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나의 아이덴티티이며 나의 인생 가치관인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나’ 라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언급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이라는 노래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다음기 제4화 [기아와 가난의 시대에서의 생존분투] 

 

저자 이강철
저자 이강철

저자 약력

이강철 李 鋼哲 .

1959년 길림성연길현출생. 1985년 중앙민족대학 철학전공 졸업, 1987년  중국 북경시위당교 연구생 졸업. 1987-1991년 중화전국총공회 중국공운학원 강사.

1991년일본유학, 립교대학원 경제학연구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2001- 2006년 일본도쿄재단 연구원,내각부정책연구소 연구원, 2006년부텨 호쿠리쿠대학교 교수 , 일본조선족연구학회 회장 역임(현재 명예회장).

2020년 일반사단법인 동북아미래구상연구소 설립하고 소장을 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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