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왈 화백(가운데)과 그의 가족.
강기왈 화백(가운데)과 그의 가족.

“아버지는 유화화가고 퇴직 후 뇌경색으로 편찮으셨지만 병세가 완화되고 중풍후유증에 시달리던중에도 줄곧 그림을 그렸습니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분들과 그림을 사랑하는 분들께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삶에 더욱 충실한 것인가를 되새겨볼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렇게 아버지의 작품들을 내놓게 됐습니다.” 연변대학 미술학원 강종호(58세) 교수의 개막사다.

강기활 화백 
강기활 화백 

2019년 11월 8일, 연변의 사계절 풍경을 주제로 한 강기왈(85세) 노인의 유화작품전시회가 연변대학성 8층의 길림성황미술관에서 막을 올렸다.

작품 속 부드러운 색채와 힘있는 필촉에는 화가로서의 미술에 대한 애착이 고스란히 묻어나있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그린 그림을 통해 그의 내면세계가 드러난다고 한다. 한점 한점의 그림들을 보노라니 강기왈 로인은 어떤 삶을 영위해왔을지 궁금해졌다.

조선 함경북도 길주 태생인 그는 7살 때 가족을 따라 흑룡강성 목단강시 사도령자촌에 정착하게 됐고 17살 때 할빈시 춘화미술학교에서 주로 유화공부를 하며 기초를 튼튼히 닦았다. 3년간의 공부를 끝마치고 도문에서 미술공부를 계속하다가 연길미술연구소에서 일손을 거들게  된 가운데 연변예술학교 미술반 제1기생으로 입학하게 됐다. 그 후 왕청현 대흥구림업국 공회 미술창작실에서 퇴직할 때까지 미술 관련 직에 종사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낮에는 선전화와 목판화, 영화관의 대형 영화화보 등을 그렸으나 밤에는 남몰래 아끼고 아끼던 서양화 명화집을 펼쳐보군 했다. 선진일군 표창을 수차례 받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법이 없어도 살 양반”이라는 칭찬을 들어온 강기왈 노인이었다.

퇴직 후 연길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기타 살림도구는 버려도 유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낡디낡은 상자와 캔버스(画布)를 지탱해주는 이젤(画架)은 챙기고 떠났다. 개혁개방을 거쳐 생활형편이 나아졌지만 병석에 눕게 됐다. 후유증과 싸워가며 무거운 도구를 메고 5, 6년 동안 모아산, 태암촌, 동성촌, 영창촌, 인평촌 등 수많은 곳을 다니면서 200여점에 달하는 풍경화를 그려낸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며 취재에 앞서 쑥스러운 미소를 지은 시민 임씨는 “부드럽고 구속을 받지 않는, 일종의 자유로운 필법으로 자연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강기왈 로인이) 열린 마음을 지녔기 때문인지 그림의 색채가 맑아 음침하지 않고 깨끗하며 투명한 느낌을 받게 됐지요.”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아버지는 자연을 존중하면서도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과감히 개괄해 그림에 본인의 해석을 담아냈습니다. 도구의 제한에서 벗어나 붓과 나이프로 겸해 사용하여 화면의 분위기를 이끌어갔고 간결하게 마무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강종호 교수의 해설이다. 이어 그는 “고령에 병환을 이겨내면서 이처럼 분방한 필체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맑은 령혼이 풍경화의 언어로 승화된 것이지요.”라고 덧붙였다.

유연함과 강인함, 소박함과 분방함, 평범함과 비범함 등이 한데 어우러져 강기왈 로인의 <구름을 걷는 령혼>을 이루어내지 않았나 싶다.

한편 22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는 도합 126점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2019-11-11 연변일보) 


아버님 개인전 기념으로 작품집을 내면서

강종호 화백 

 

나는 화실에 아버님이 그려놓으신 근 200여점의 유화풍경 작품을 모셔놓고있다. 아버님의 작품을 볼때마다 가슴이 뭉클해난다. 아버님이 얼마나 작품을 하고싶었으면 중풍으로 병환의 몸을 견뎌가면서 이 많은 작품을하셨을까? 그것도 무거운 유화스케츼 도구들 지니고 야외풍경을 찿아 현장에서 작업하였으니 요지음 건강한 사람들도 직장 은퇴한후 편하게보내는 상황에서 심한 중풍 후유증으로 병환으로 앓고계셨던 아버님이 작품 창작에 대한 용망, 그리고 초인적인이 의지에  30여년간 작품을해온 저로서 탄복할수박에없었다.

몇 년 간 아버님의 작품창작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아버님의 마음속에는 항상 화가로서  연변 풍경에대한 사랑을 확폭에 담아 세상에  남겨 놓고저한 강한 의지가 있었음을 알게되였다.

저의 아버님 강기왈(姜基曰)은 조선 함경북도 길주 에서 살다가 일곱살때 다섯살난여동생 그리고 할머니와함께 중국으로 건너와 흑룡강성 목단강 사도렁즈 마을에 먼저 정착한 할아버지와 합류하여 그곳에서 밭을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한다. 당시 아버님의 두형이 모두 조선에 있었던탓에 아버지는 어렸을적부터 부모님의 농사를 돕느라 못해본 일이없다고한다 같이 고생하는 아들을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가 17세되던해에 그동안 일하느라 고생 많이 했으니 이제부터 하고싶은거 하면서 살라고 허락해 주었는데, 아버지가 흑룡강성할빈시에가서 그림공부를 하고 싶다고 요구하여 미술공부를 할수있도록 허락하였단다. 

아버지가 다니던 당시 흑룡강성 할빈시 춘화미술학교  선생님이 로씨야 유화를 배운 분이어서, 당시 유화위주로 미술공부를했는데 아버님이 예전에 그린 스케츼나 수채화를 보면 보통 솜씨가아닌 걸로 보아 그당시미술 기초를 잘 닦았던 같았다. 할빈에서 그림을배우고 도문으로 돌아온후 미술공부를 이어가시다 연길에 있은 미술연구소에일하다가 참여하여 일하시다 연변예술학교 제1기생 미술반 입학시험에 합겨되여 미술공부를 계속하게되었다, 재학시절인 아버지가 그린 <목재운수>라는 유화가 <연변일보>에 실릴 정도로 재학생중 아버지 그림실력이 뛰어난것으로본다. 하지만 일년 반 뒤 피치 못한 사정으로 학교를 어쩔수 없이 그만두게 되면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그후 3남 1녀둔 가장으로 가족을 위해 길림성왕청현 대흥구림업국의 전직 미술인으로서 열심히 살아오셧다 아버님은 은퇴할때까지 줄곳 대흥구 림업국공회에서 전직 미술인으로서 일해왔다.

저가 어릴적에 기억으로는 아버님이 미술창작실에서  림장의 공인들이 벌목현장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택동 주석 어록을 학습하는 장면을 그린 대단히큰화면의 유화작품이 인상에 깊이남고있다 이 창작을 하고저 큰 종이에다 소묘 창작고를 여러개 해놓고 창작에 임하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않는다.

당시 문화대혁명이라는 시대상황때문에 아버지가 몸담고있던 림업국 공회미술창작실에서는 선전화와 목판화를 많이그렸는데 아버지는 선전화를 잘 그려서 림업국 선전란 그리고 영화관의 대형포스터를 도맡아서 꾸리셧다. 저기억에는 아버지는 2미터정도되는 큰판널 7-8개에다 하나 하나에다 풀로 종이를한벌 한벌붙여서 그우에 선전화나 영화 포스터를 그리고  몇달후 그린그림은 떼어내고 다시종이를붙여서 새그림을 그리곤 했었다. 

아버님은 은퇴하기전까지 조직에서 맡기는  일이라면 조건없이  최선을 다하여완성하여  여러번  선진일군 표창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저의 아버님을  “법이 없서도 살 양반”이라 칭찬을 받을 정도로  마음이 고으셨으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오셨다고 생각한다 .

제가 알기로 아버지가 계속 그리고 싶어했던것은 유화였다고 생각한다. 직장은퇴후 아버지는 많은 살림사리 도구를 버리고 연길에 올라 오셨지만  낡고 낡은 유화를 그리는 상자와  캐버스를 지탱해주는 이젤은 가지고오셨다 .

제가 어릴 적에 인상깊었던 에피소드 하나가 있었는데 ”문화대혁명”기간 당시 금서였던 두꺼운 서양명화집2권이 우리 집에 있었던겄이다 아버지는 항상 이책을 높은 곳에 올려놓은 농짝안에  넣어 자물쇠를 채워놓고 저녁이되면 가만히 농짝을 열어 그책을 꺼내보고 다시넣어놓군 했다. 그당시 무슨책인지 궁금해서 어느하루 제가 그책을 가만히 꺼내보았는데, 당시 아직 어렸던탓인지 파란눈의 서양인 초상화를보니 무서운 마음이들어 손가락에 침을뭍혀 그귀한 책중에 명화 초상화눈에 죄다 구멍을내어버렸다. 다른일에선 자식한테 화를내지않는 성격인데 이릴로 아버님께 호되게 꾸중을 들어야했다. 당시 다른  서양화책이 조직에 바치지안호 간직했다 발각되면 “황색”으로 규정되어 분명히 자본주의자로고 몰려 투쟁을 받을 대상이 될수있는 상황이였는데 심성이 착한 아버지가 그 책을 조직에 바치지않고 간직하고있어으니 아버지가 서양화명화집을 얼마나아꼈는지 유화에대한 애착이 얼마나컸는지 후에와서 알게된다. 개혁개방이후 저의 가족생활이 부단히 좋아지고 아버님이 좀 편하게 보낼시기에 였는데 아버지는 뇌경색에걸려 연변병원에 주원하여 크게 앓으셨다 몇년간 중풍휴유증으로 누워 앓으셨지만  꾸준한 치료끝에 다행이 병환이 좀 나으셨을때 아버님은 중픙 후유증과 싸워 나가면서 무거운 유화스케츼 도구 지니고  배낭에는 도시락과 물병을메고 공공버스로 연길시내 주변인 모아산, 소화룡촌, 태암, 촌 동성촌 영창촌 인평촌 인화촌 등 수업이 많은 곳곳을 다니면서 200여점의 유화 풍경화 작품을 현장에서 그려낸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을하면서 자연과 벗하며 살아와서인지 림업국에서 오래  산림과 같이한 시간이 오랜탓인지 아버님은 자연풍경을 특히 그리기 좋아했다 사계절을 그린 아버지의 풍경화는 보면 소박하면서 속되지않고 고향의정다운 느낌이살아있다. 

아버님의 작품들을 보면 나이프와 붓으로 화면의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면서 간결하게 마무리한 작품들이 다수인데 감히 이러하게 작품을 마무리 하셨던점은 아버님이 지닌 천성적인 색채에 대한 감수능력 그리고 물건을 만드는 조형능력과 개괄능력이 뛰어났음 보여준다고본다. 

아버님이 그린 풍경화의 특징은 자연을 존중하지만 자연에 너무 얽매이지않고 자연에대한 본인의 해석을 담아 내였다 동년배의 많은 화가분들이 자연형상을 그대로 모사하려고 애쓰는 것과다르게 자연 형상을  과감이 개괄하고 형상을 풀어서 그렸고  색채 또한 유화의 색채멋인 농호함을 잘 드러난다 작품의 분이기를 최대한도로 표현하기위하여 그림도구의 제한을 벗어 붓과 나이프를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다양한 필법과 유화물감의 두터운 마티에르 효과로 화면의 분이기를 잘 만들어 가셨다 
고령의년세에 이처럼 분방한 필체를 그림을 그렸다는것은 감탄 할 수박에 없다.

선비의 심성으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않으며 살아온 삶의  과정처럼 아버님의  작품의 전반 분위기도 밝고 따스한 분이기를 보여주신다 이 200여점의 풍경화 작품에서는 분명히 아버님의   맑은 영혼이 풍경화의 언어로 승화되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보여주었다.

저의 아버님이 고령과 병환을 이겨내면서 작품을 열심히 하신과정은 저하테 앞으로 한 미술인으로 어떻게 미술창작에 임해야겠다는 점을 다시 가리켜주셨다 .

저의가족과 친구 지인 그리고 그림을 사랑하는 여러분들한테  아버지의 풍경화를 내놓아 함께 감상하며 한 화가로서 한사람을로서 어떻게 살아가면 자기의 삶이 더 충실하고  진지 해지겠는가 하는 생각을 또 한번 되새겨보는 게기다 되였으면하는 마음으로 본 작품전과 작품집을 묶었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