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星 장동석 詩人 代表作 모음
한편 두 편 詩를 쓰고 詩의 맛을 알고 보니
그것을 씹어 삼킬 줄도 알게 된 것이다
오래 묵으면 소중해지는 인삼과 같이 첫입에는 쓰고 거북하지만
내가 씹어낼수록 쌉쌀한 맛, 분분한 향기(香氣)도 오묘하기 짝이 없고
늦게 배운 도독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詩 짓는 맛을 알고 난 뒤부터
한밤중 불이 꺼지지 않는 의욕이 넘쳐날 때 그저 눈만 멀뚱멀뚱 고독을 씹어 모진 바람에 영혼까지 쏟아놓고 있구나
오랫동안 詩를 짓고 앉아 수많은 고뇌(苦惱)를 안은 채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나 홀로 이 풍상을 견뎌내면서 저 어둠의 미로 속에 헤매고 있는
한편 두 편 詩를 알고 영감의 밑을 핥고 보니
그 언어를 詩로 변용하는 법도 알게 된 것이다
- 詩人의 말 중에서
뜰 안에
내 뜰 안에 꽃이 피었다
한오라기 바람에도
스스럼없이 맺힌
수천방울 정갈한 눈물이
밤새도록
어둠을 삭여 놓았다
화사한 꿈의 빛깔로 휘장을 감고
붉게 터지는 꽃잎
청옥 빛으로 돋아나는 아침에
그리움을 보듬고
내 뜰 안에
영롱한 꽃이 피었다
가을날의 기도
떨고 있는 나를 아시나요
흔들리는 나를 아시나요
저기
깊고 깊은 어둠 속
낯설게 울고 있는 나를 아시나요
오 높으신
주님!
철쭉을 보며
꽃은
어질어질
낮술 취한 죄(罪)의 빛깔이다
전생의 일들이
모두 피 멍든 기억뿐인데
윤회(輪廻)의 고리를 끊지 못해
이 계절에 다시 찾아 왔구나
미친 듯
이 세상 그리움으로 만개하여
바람에 흔들릴 적마다
죄 하나 더 얹어 주는 인연
바람에 스친 자리마다
붉은 햇살 쏟아져 꽃들은 미쳐가고
절망(絶望)의 끝에 서서
저 세월 따라 파문을 일으킬 때
꽃은
해탈(解脫)보다도
눈시울 붉음으로 낙하한다
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 하나가 있습니다
꽃 빛 다져진
그대 하늘 정원에 걷히지 않는
찬란한 눈부심
하얗게 하얗게
꽃봉오리 접어 올린
늘 내 마음 가득 넘쳐 흐르는
사랑의 봇물
눈 감으면
그대 그리워서
상념의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저 하늘에서
가장 향기롭게 빛나는
별 하나가 있습니다
새들의 노래
그들은
노래만으로
숲을 푸르게 정복해간다
여름 햇살에 풋풋이 짙어가는
녹음을 가슴에 안은 채
나뭇가지 그늘에 앉아
아주 농익은 솜씨로 노래를 부르고
맑고 고운 노래를 위해
오랜 인고의 아픔을 견디면서
한동안 푸른 목청을 가다듬은 뒤에야
비로소 이 숲속을 찾아든다
낯익은 폭염이 사라지고
어둠 끝에 외로움이 엄습해오면
연정이 꽃필 때를 기다려
그리운 짝을 찾아 또 한가락 절창을 하고
그들은
별처럼 먼 그리움보다는
저 천지간에 드넓은 자유를 배워
오직 노래 하나로 여생을 걸고
온통 숲을 초록의 빛깔로 채워간다
오월 어느 날
오월 끝에 뻐꾸기 울고
붉게 생리하는 연산홍 꽃잎을
바람이 훔치고 있다
초록 잎 사이에서
햇살이 염탐하며
여인의 배란일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속살 깊숙이
벌건 대낮에도 엉겨붙어 벌이는
뜨거운 정사
붉은 황사 바람과 함께
또 그렇게 와서
진한 수액을 자궁에 다 쏟아놓을 때
만삭의 여인이 웃으며
속내 다 털어 넌지시 가까이 오면서
달콤한 향기를 건네주고
어느새 붉은 꽃잎이 만개하여
흐느적거리고
뻐꾸기 소리에 잠겨 촉촉이 젖어드는
속살 풍만한 오후
먼 강물만 출렁이고 있다
억새꽃
하얀 억새꽃이
긴 등뼈로 버티며
수만 평에 걸쳐 광활하게 퍼졌다
초원이 구름을 휘감아
파노라마를 이루듯
가도가도 온통 억새밭으로
키가 크면서도 오밀조밀한 무희들처럼
무한의 자유(自由)가 절대인 양
종일 빽 댄스를 추고
꽃은 꼭 원색으로
화려해야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아프게 손 사래질 치며
바람이라도 불면 파도치듯 휩쓸려서는
긴 등뼈를 겸손하게 뉘였다가
다시 일어서는 순수(純粹)
하얀 억새꽃은
안개처럼 은은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영혼이 격에 넘쳤다
새 한 마리의 고뇌
-나의 詩 作法
저녁 숲속에서
고뇌(苦惱)의 새 한 마리가
마음을 비운 채
어두운 둥지에서 씨앗을 쪼아댄다
시인(詩人)이란 갈등으로
언제나 그늘이 져
저 찬란한 태양이 있는 밤이
왠지 모르게 그립고
그리워서
깊은 고독을 하나 둘 헤아리고
한갖 시어(詩語)란 존재 앞에
진부한 가슴 내어줘도
소리 없는 빈 메아리만 맴돌 뿐
새 한 마리의 뾰족한 부리가
움직이고
움직일 때마다
이 세상 수많은 언어(言語)들이
온몸을 던져 쪼이고
쪼여서는
오직 한 알 씨앗으로만
싹이 트고
나머진 고뇌의 쭉정이로 날아간다
목련 가시내
아직은 시린
우수 경칩도 남았는데
잎도 피지 않고 그 알몸 가리기도 전에
꽃잎 화사하게 피었네
너무 조숙해서
천방지축 대는 꼭 가시내 닮았구나
시샘한 가시 바람도
텅 빈 가지마다 요염하게 웃고 있는
해맑은 윙크 짓
초경도 않은 게 유혹할 놈이라도 있는지
천부적인 화냥기로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알몸 하나로 온 천지를 밝히고 있네
아담과 이브도
잎새 하나로 거기는 꼭 가렸었는데
나무의 찬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나무는 새들이 남기고 간 긴 숨결로
끝없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나뭇가지마다
다정히 속삭인 언어가 잎과 꽃들을 피워
가슴마다 열매로 볼 붉힌 것은
먼 하늘 그리움에 발돋움하듯
두 마음이 어울린 사랑일 것이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나뭇잎이 단풍이 들어 감탄할 때
나무는 아픈 고뇌에 잠기고
누군가 빈 가지가 너무 허전하다고 하면
그들은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가
이제는 춥다고 하는
두툼한 옷을 껴입는 혹한의 문턱에서
그들은 훌훌 아낌없이 옷을 벗고
칼바람에 흰 속살 비비며
새 봄날 거듭나려는 단장을 하는 것이다
허공에 팔 벌리고 서서는
나무는 은밀한 노래를 불러대고
황홀하게 손을 흔들고 있다
찔레꽃
등치가 작다고
함부로 까불고 얕보지 말라고
온몸에 가시를 달았다
들길 옆에 마실 물만 있으면
한 여름 내내
질 줄 모르는 작은 웃음
행여나 꽃이 크면
싱거울까 봐
쪼그맣게 아주 쪼그맣게
사방에 가시 줄기를 늘어놓고
그리움 무더기져 피는
별꽃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퍼도 하며
계절의 생리를 앓는 복통으로
꽃은 아픔을 수혈한다
인생은 마라톤
인생은
매일같이 달리는 마라톤이다
처음 한 약속같이
어김없이 펼쳐져 있는 고독한 길을
맨몸으로 달리기도 하고
언제나처럼
꽃향기 만발한 아스팔트길이 있지만
모진 세월 긴 풍파
돌부리에 차이고 밟히면서도
힘차게 달려가야 하는 비포장도로도 있다
그 언제인지
절정의 날을 기다리며
험난한 자갈밭 사이 쭉 뻗은 고통의 길을
맨발로 질주해 가는
인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려가 닿고 싶은 곳이 있어
누구나 평생을 달리는 마라톤이다
백자 앞에서
목이 긴 두루미를 닮은
순백색 지조(志操) 깊은 여인의 기품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
꽃향기 풀풀 나는 매화 자태를 닮았다
밤하늘 별빛이 그리운지
고운 각선미 쭉 뻗은 여신처럼 변장하고
천도의 열기로 온몸을 달궈
투명한 칠보 옷자락을 걸친 채
속고쟁이로 속내를 감추고 있구나
이 세상 허물을 벗어내고
오직 아름답고 날렵한 품위를 뽐내듯
소박하고도 우아한 영혼은
눈부시게 빛나는 비상을 꿈꾸다가
그리움의 불꽃이 튀어 백자로 굳었는가
목이 긴 두루미를 닮은
순백색 정조(貞操) 깊은 여인의 몸매에
유유히 떠 있는 조각배를 그려 놓고
힘차게 승천하는 용의 기상을 품었다
가을 장례식
저토록 푸른 웃을 입고
바람에 살랑대며 위세를 떨더니만
붉게 탄 낙엽의 영혼 앞에
한 나라가 온통 국민장을 치르는구나
거칠 것 없는 찬바람에
철새들 귀향을 서두르고
한잎 두잎 검붉게 물들어버린 채
생을 마감하는 장례절차에 따라
온갖 수의를 걸친 모습이 왠지 처량하다
한 뼘 남은 해도 저물고
한 생애 남긴 업적도 훈장감인데
저리 붉은 옷을 갈아입고는
허공에 타오르는 정적을 달래지만
노을처럼 빛바랜 세월이 야속하구나
이제 마지막 떠나가는
울긋불긋 낙엽의 화려한 장례식에
이산 저산 명산마다 문상객으로
온 세상이 난리난 듯 북새통을 이룬다
종착역
내 곁을
늘 떠나는 사람이 있다
떠난 뒤
갈피갈피 그리움이 남지만
떠날 때는 또 기다림을 헤아리게 된다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하는 인생
나의 마지막 종착역은 어딘지 몰라도
언젠가 다가올
결별(訣別)을 생각하면서
슬퍼도 울지 않고 그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별을 연습한다
아아
아직은 떠난다는 의미(意味)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산다는 것은
한 자락 바람 같구나
장동석 시인 약력
충남 예산 출생
월간 「한국시」시 부문 및 「좋은문학」 수필부문 신인상수상 등단
올해의 좋은문학 작가상 수상, 한국예술문화단체 공로상 수상
세계시문학상 대상 수상, 구로구민상 문화예술부문수상, 자랑스런 공무원상
서울시장상 3회 수상, 구로문학상 수상, 정부모범공무원 국무총리 포상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대통령) 수훈
前 (사)한국문인협회 구로지부 12, 13대 회장 역임(現 명예회장)
現 (사)한국문인협회 문학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
現 (사)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원
現 (사)대한민국 산림문학 회원
現 (사)국민건강보험 구로지사 자문위원
現 (사)한국예총 서울특별시연합회 구로구지회장
시 집 : 「그대영상이 보이는 창에」「구로동 수채화」
「그리움이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빈 공간을 채우는 영혼」
「외로움으로 사는 게 사람이다」「가장 아름다운 퇴장」
「내 삶의 길목에서」「바다의 악보」「쇠똥구리 같은 세상」
「물 위에 쓰는 詩」「낙엽이 가는 길」「허수아비의 찬가」등
전 12권
수필집 : 「태양이 있는 밤에」外「공자 왈 맹자 왈」市民日報에 칼럼을 34 회에 걸쳐 연재하는 등 각종 공동저서 多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