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어머니가 1974년 3월 돌아가셨으니 49년, 거의 반세기가 지났다. 필자는 요즈음 신문 칼럼을 주로 글로벌 시대와 다문화와 관련한 주제들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 역사 관련 책을 여러 권 집필했다. 예전부터 부모님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지만 자료수집 한계의 어려움이 있어 미루어 왔다. 따라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적 주위에서 들었던 이야기에 의존해서 쓸 수밖에 없다.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은 강한 동기부여는 어릴적 아버지는 “뿌리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필자에게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뿌리’는 ‘외갓집’이다. 외갓집은 더 오래도록 우리들 마음에 남는 따뜻함을 품고 있다. 외갓집이란 말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어린 시절 외갓집은 친가보다 자주 찾아가고 외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반겨주는 곳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 외갓집과 관련한 모든 일들이 일반적으로 소원해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외갓집과 관련된 선조들의 이야기를 한다. 조산시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18년을 보낸 것은 일신의 불행이었지만, 유배지가 자신이 흠모하는 외갓집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행운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정약용은 집에 있는 모든 책을 통독하고 나서 외갓집인 해남윤씨 집에서 책을 한가득 빌려 황소에 짐을 지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광경을 조선의 대학자 이서구(李書九)가 목전에서 보았는데 3일이 지나 다시금 황소 등에 잔뜩 책을 싣고 외갓집으로 가는 정약용을 만났다고 한다. 이서구는 “너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나르기만 하는구나.”라고 물었다. 정약용은 외갓집에서 빌려온 책을 모두 읽고 다시금 돌려드리려 가는 길입니다. 믿지 못하시겠거든 제가 읽은 책에 대하여 질문을 구했다 한다. 그 자리에서 이서구가 여러 권의 책을 꺼내 내용을 물으니 정약용은 질문에 대한 답을 막힘없이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이서구는 조선후기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이다. 1758년(영조 34) 이서구의 나이 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외할머니 옆에서 자랐으며 외숙(外叔)으로부터 ‘당시’(唐詩) · ‘사기’ · ‘통감’(通鑑) 등을 배웠다. 외갓집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숙종 1)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경전(經典)을 읽기 시작했다.   

작은 형님 결혼식에서 아버지와(1967년), 을지예식장에서.
작은 형님 결혼식에서 아버지와(1967년), 을지예식장에서.

이이(李珥)는 중종 31년(1536) 12월 26일에 강릉 북평촌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자라면서 어머니에게 글을 배웠고, 외할머니와의 관계도 매우 돈독하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영리하고 뛰어나서 말을 배우면서 바로 글을 알았다고 한다. 8세 때 화석정(花石亭)에 올라가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내고(山吐孤輪月),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江含萬里風)’ 라는 시를 지어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었다고 한다. 이이는 유독 외가의 가족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외할아버지인 신명화에 대한 행장(行狀)을 남겼고, 외할머니인 이씨 부인에 대해서는 묘지명(墓誌銘)을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행장을 남겼다. 그것은 이이가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의 행장 내용에도 어머니가 자신의 고향인 강릉을 그리워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필자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정읍시(당시 정읍군 이평면 두전리 창전 부락 494번지)에서 태어나 두 살 지나 서울로 올라와 서울 중구 신당동(당시 성동구 신당동)에서 살았다. 지금 신당동 중앙시장과 성동기계공고가 있는 근방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고향 정읍으로 갔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 필자는 어머니와 헤어져 지낸 것이다. 좀 더 성장해서 아버지께서 필자에게 이야기해준 기억에 의하면 우리가 살던 1960년대 초의 신당동 일대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집이라고 해 봤자 판잣집으로 지붕은 검은 기름종이로 뒤집어씌운 집이었다. 아버지의 표현대로라면 “하꼬방”(판잣집을 속되게 이르는 말. 어원은 상자를 뜻하는 일본어 はこ(하꼬) + 방)이었다. 집 근처의 청계천은 똥물이 흘렀지만 필자는 그 곳에 가서 냇가라고 즐겁게 놀곤 했다고 한다. 서울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으로 매년 50~70만 명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어 도시 빈민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시기 판잣집들은 판자와 블록 등으로 벽과 담을 만들고 초가와 루핑(Roofing)으로 지붕을 이어 만들었다. 1970년대 이후 새마을운동과 도시재개발 사업으로 지붕은 기와와 슬레이트, 벽과 담은 시멘트로 보수·개량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식구들은 성동구 신당동에서 영등포구 구로동(九老洞) 으로 이사를 했다. 필자는 너무 어려 어떤 연유로 이사를 했는지 모른다. 구로동은 신당동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이 정부 이주정책으로 강제 이주 당한 곳이다. 그 당시 구로동 일대는 똥차들이 공중 화장실에 다니면서 똥을 수거하러 다녔으며, 집집마다 수도가 없어 많은 주민들이 공동우물을 이용하였다. 비가 조금만 오면 집 앞이 물바다가 되어 어머니와 누나들이 부엌으로 들어온 물을 작은 용기로 퍼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또한 한강 물이 넘쳐 영등포역과 로터리 근방이 물바다가 되었다고 어른들이 이야기하였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구로동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의 노인(老人) 아홉 사람이 오래 동안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50대와 1960대 초반에는 가리봉 지역은 농촌이었고, 구로동은 간이 주택지이었으며 철거 이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시작했다. 1961~1962년은 서울시가 청계천 복계공사와 도시정비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철거민들을 이곳 지역으로 이주시킬 때 우리 어머니도 신당동에서 이곳 구로동으로 오셨다. 구로공단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과 함께 착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단지이자, 수출 산업의 메카가 되었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험을 보러 서울에 왔을 때 구로동에 잠시 살다 재수생이었을 때 신당동으로 1973년 이사했다. 지금 신당동 로터리와 성동고등학교 근방에 살았다. 어른들의 결정이기에 이곳으로 집을 다시 옮겼는지 모른다.  

필자는 어머니와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같이 생활한 전체 기간이 겨우 8년 정도이다. 5살 때까지 같이 지내다 헤어졌다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고등학교 시험 보러 와서 부터이니! 어릴 적 어머니와 이렇게 떨어져 살게 된 이유를 필자는 전혀 모른다. 1972년 말부터 1974년 3월까지 어머니는 가난하게 작은 형님 내외와 함께 사셨다. 두 형님과 누나들의 생활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전체 사회현상이지만 이 당시에는 모두들 어렵게 생활하였다.  

1970년대 초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86달러로 당시 전 세계 160개국 중 100위에 였다. 1970년에는 코트디부아르와 동일한 소득을 가진 가난한 나라였다. 북한은 384달러로 우리보다 잘 살았고 이것은 1975년 즈음을 기점으로 역전되게 되었다.  

아버지에 의하면 어머니는 빨치산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어머니는 그들로부터 실신되도록 매를 맞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고 했지만 어머니가 끝까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지리산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말한다. 지리산과 내장산이 가까운 정읍지역에 빨치산들의 활동이 극성이었다고 한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자행된 살육과 약탈에서 보면, 빨치산이든 국군·경찰이든 모두 피해자였다. 지리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빨치산은 무고한 주민들이 입은 인적·물적 피해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1974년 3월초, 아침에 어머니는 필자에게 큰 누나가 “어머니 좋아하시는 음식을 해 놓았으니 오라고 해서” 간다고 필자에게 말씀하셨다. 이게 어머니와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이야! 어머니는 누나가 살고있는 금호동에 가셨는데 미끄러져 뇌진탕을 당했다. 바로 가까운 한양대학교 병원에 입원 조치하였으나 생존할 수 있는 가망이 없다고 의사가 판명하여 바로 고향 정읍으로 모시고 내려가셨다. 내려가신지 이틀 만에 세상과 이별을 하신 것이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데 담임선생님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주셨다. 그때 필자의 심정과 행동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 16살 때이다. 필자는 그때 임종을 보지 못했다. 임종을 지켜 본 식구들에 의하면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막내아들 ‘남철’이 이름만을 부르셨다고 한다. 모든 자식들을 결혼을 하여 각자 자기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나이 어린 막내아들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시다. 항상 이 생각을 하면 어머님의 사랑과 애처로움이 가득하심을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는 달성 서씨로 어릴 적 전라북도 부안에 사셨다. 장녀로 두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필자는 외갓집 식구들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어릴적 아버지, 누나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사진을 본 것이 외갓집 식구들의 기억 전부이다. 작은 외삼촌은 재무부에 근무하시다 외숙모, 작은아들과 이모와 함께 1968년 7월 경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이민 가기 전과 후 한 번도 소식을 교류한 적이 없다. 큰 외삼촌과 그의 식구, 이모 가족들에 대해서는 아는게 전혀 없다. 

필자는 1990년 미국 유학 중 텍사스 오스틴과 오클라호마 노만에 거의 7년을 살았다. 방학 때 여행 중 가는 곳마다 숙소 전화번호를 뒤지면서 외갓집 식구들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이름만 가지고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공부하느라 여유가 없었지만 학위를 마치고도 미국에 갈 때마다 외갓집 식구들을 찾는 노력을 했지만 희망이 실현되지 않았다. 

1968년 7월, 김포공항에서 어머니는 자기 동생들과 영원한 이별을 했다. 이억 만리 미국에 한번 가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 동생들을 보내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슬프고 마음이 아팠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필자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말 수가 적었던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통곡하셨을 것이다. 그 당시에 미국 간다는 것은 일반인들은 꿈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어머니는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처갓집에, 어머니가 자기 동생들과 어떠한 관계인지 깊은 내막과 사실을 알 수없이 필자는 피상적으로 생각만할 뿐이다. 어머니가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면 서로 연락도 할만도 한데! 이제 모든 분들이 돌아가셨을 연세이다.  

지금은 필자 주변에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고, 글로 남겨 놓으신 것이 없으니 아쉬움이 클 뿐이다. 어머니는 빨치산 놈들에게 매 맞은 후유증과 많은 자식(3남 5녀, 1명 어릴 때 사망)을 낳으면서 산후 후유증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가끔 겨울밤에 어머니는 필자에게 막걸리 한 되를 사오라고 하시면서 40원을 앞 호주머니에서 꺼내 주셨다. 막걸리를 사오면 연탄불에 데워서 마셨다. 김치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무슨 깊은 생각을 하시는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공부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던 모습이 선하다.  

1974년 3월 초,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큰누나가 준비한 음식을 먹고 오시겠다면서 뒷짐 지고 신당동 골목길을 걷던 어머니 모습이 무척 그립다. 49년 전 일들이 어제와 같이 느껴진다. 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하셨던 “뿌리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을 생각하면 할수록 어머니와 외갓집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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