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초 한국 민간평화단체 아세아평화넷은 이대수 대표의 기흭과 집행에 힘 입어 동유라시아 평화발전 기행 시리즈를 힘있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 첫 행선지로 일본을 선정,  인천공항을 출발해 니가타에서 도쿄, 교토와 오사카를 돌아보고 히로시마를 거쳐 고쿠라, 시모노세키, 나가사키, 후쿠오카까지 7박 8일 동안 주마간산식으로 10개 지역을 방문했다. 신칸센 7일권 JR패스가 있어서 가능했다. 일본의 절반을 방문한 셈이다.

 한일반핵평화기행 7박8일  도쿄 후쿠시마 히로시마 나카사키 등 여정에 이해를 돕기 위한 지도
 한일반핵평화기행 7박8일  도쿄 후쿠시마 히로시마 나카사키 등 여정에 이해를 돕기 위한 지도

방문지역마다 현지인들과의 교류회를 가졌다. COVID19로 인한 3년간의 공백을 메우고 대면으로 교류를 재개하고자 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신냉전,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강제한 미국 주도의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72년에 당면한 동유라시아의 위기 상황, 한일 양국 보수정권의 퇴행적 행태와 한국에서의 투쟁 소개, 원전 재가동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등 현안에 관하여 이야기 했다.
원전 카르텔(원전마피아) 문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원폭과 일본인 피해자 그리고 조선인(한인) 피폭자와 2세 후유증 문제 그리고 핵무기금지조약(TPN. 2021.1 발효)과 노벨평화상을 받은 반핵캠페인(ICAN) 등 관심 주제도 다양했다.

한일 양국 모두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과제에 당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일 시민들이 평화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한일 시민사회의 협력이 필요함을 확인하고 교류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하반기에 한국을 방문할 약속도 있었다. 강행군으로 발에 물집이 잡혀 힘들어하던 분들은 *발 물집 동맹*, *3만 보 동맹*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서로에게 미안함과 감사를 표시했다.

방일 평화 기행 1, 일본 진보 인사들과의 첫 평화간담회

2월 28일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모인 아평넷 회원 5명이 1진으로 9시 비행기로 출발해 나리타공항에 도착, 스카이라이나(쾌속 공항열차)를 타고 우에노역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이어 숨돌릴 사이 도이 신칸센으로 니이니가타로 했다. 니가타에서 마중마중 나온 타나베 위원장을 따라 오후 5시 반자반장이(万代) 시민회관의실에 모인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하였다.

동북아의 반핵 평화 화해를 위한 한중일 시민단체 지성인들의 교류가 이어지면서 기념사진 남겼다. 
동북아의 반핵 평화 화해를 위한 한중일 시민단체 지성인들의 교류가 이어지면서 기념사진 남겼다. 

아시아 평화 시민 넷과 니가타현 평화운동센터에서 사민당 니가타현 연합과의 교류회였다. 양측의 인사와 한국과 일본의 현상보고, 질의응답 의견교환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겸한 교류회는 2차로까지 이어지면서 친목을 다질 수 있었다. 사이또 에쯔오평화운동센터 의장과 아평넷 대표로 인사도 했다. 이어서  니가타 측에서는 일본의 기시다정권은 대군확대와 원전재가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평고를 했다. 그리고 경제대국의 지위에서 굴러떨어져 10위 근처로 추락해 자신감을 상실한 불안이 강한 일본이라는 환상을 만들고 있고 그래서 대군 확대(군사력강화)와 원전추진이라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지적하며 자자유 민권사상을 기초한 나까에 조민의 ‘소국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것이 남한과 북조선과 교류하고 아시아와 세계인이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대수 대표는 일본의 전임수상 하토야마의 탈대일본주의를 지지했고 일본이나 한국은 강대국이 아니라 중진국에 해당하므로 제국주의 수준의 대국이 아닌 중견국들의 연대가 필요하고 아세안과 유럽연합이 그 사례라고 응답했다. 단어는 달라도 비슷한 의미라고 했다. 한국의 검찰 정권의 퇴행을 한국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모임을 마치고 근처 터미널 호텔로 이동해 짐을 풀고 식당 2층으로 가니 일본 참석자들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겸한 교류회가 이어졌다. 맛있는 식사와 다양한 술을 마시며 서로 담소를 나누는 자리였다. 이어서 일부는 2차 술자리로 이동해 더 즐거운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니가타 식이다. 올해 가을 한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방일 평화 기행 2, 일본 서해안 대도시 니가타 탐방

3월 1일 아침에 일어나 호텔 식당에서 와타나베 위원장과 작별 인사를 했다. 도쿄로 가야 한다며 먼저 일어났고 우리는 니가타 탐방을 시작했다. 반장이 대교를 지나 길을 가다 보니 니가타 일보 빌딩이 보여 반가워서 시호 기자와 잠시 통화도 했다. 수변공원을 따라 걷다가 국제컨벤션센터에 들어가 보니 각종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입구에는 전통결혼식과 술 홍보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신입사원 응모 접수에 정장을 한 청년들이 줄을 서 있다. 한결같이 검정 양복과 양장 정장이다. 전망대에 올라 니가타 시내와 주변을 보기도 했고 건물 로비에 요즘 문제로 드러나고 있는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현수막도 보인다. 점심을 먹고 니가타역으로 이동해 도쿄로 향했다. 아직 눈이 남아있는 산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우에노역에 도착해 걸어서 아사쿠사의 숙소에 도착했다. 최승구 선생이 도착하셨고 이어서 야기누마 NNAA이사가 도착하셨다. 최선생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고 질의도 마치고 근처 식당으로 이동해 3년만의 회포를 풀었다. 호텔 옥상전망대에 올라 야경을 즐겨본다.

방일 평화기행 3, 관동대지진시 조선인 피살자자 묘비 참배

아침 일찍 지하철로 ‘관동대지진 재해 조선인 순난자 추도비’를 방문했다. 아라카와를 가로지른 철도역 근처 강변 후미진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23년 9월 발생한 간토대지진 당시 ‘군대. 경찰. 유언비어에 현혹된 민중에 의해 살해당한’ 한국·조선인 희생자를 추도하고 양국 국민의 화해를 도모하자는 비문이 그룹 봉선화에 의해 2009년 9월 세워졌다.

 1923년 관동대진재 조선인순난자추도비 참배 장면
 1923년 관동대진재 조선인순난자추도비 참배 장면

다시 숙소로 돌아와 함께 오래된 사찰 센소지를 돌아보는데 바로 옆에 동명의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사찰과 신사의 경계도 없다. 지하철로 다시 우에노 공원을 방문했다. 오래된 공원이자 이런저런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도심에 이런 공원이 부러웠다. 또 다른 공원에는 공자 신사까지 있다니 어찌 보면 일본의 포용력이기도 하다.
쇼와 관을 방문했다. 전쟁을 주도했던 쇼와 덴노(일왕)시기의 역사관인데 당시의 생활상을 소개하고 있다. 두 번째 방문인데 전쟁책임은 찾을 수 없고 전쟁으로 인해 고생 많이 했고 미군의 공습으로 피해가 컸다는 점을 강조하는 식이다. 그리고 덴노가 성스러운 결단을 내려 종전선언을 했다는 당시의 신문보도가 전시장 벽을 메우고 있다. 전쟁책임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한글 번역도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열심히 필기하면서 공부하는 모습이라 걱정이 된다. 이어서 잠시 야스쿠니신사까지 방문했다. 지피지기해야 한다. 시간 부족이라 우슈관은 방문하지 못하고 숙소로 귀가했다. 한일반핵 평화연대 팀 4명이 도착해 최승구 선생과 하 가상 그리고 와타나베 상까지 다시 방문해 왔기에 대화하다가 주변 중화식당으로 이동해 식사하며 대화하고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방일 평화 기행 4, 그 젯날의 일본 수도 교토답사

일본의 국보 도쿄중심에 우뚝 솟은 5층목조탑
일본의 국보 도쿄중심에 우뚝 솟은 5층목조탑

3월 3일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도교 역으로 이동해 오사카행 열차를 탔다. 2시간여만에 교토역에 하차해 짐을 보관시키고 전차로 우토로 마을로 가려는데 시간이 빡빡해 중간에 포기하고 여우가 상징 동물로 모셔지는 이시리나리 신사만 돌아보고 왔다. 유명관광지가 되었다. 다시 교토역에서 짐을 찾아 신오사카로 이동해 숙소에 짐을 풀고 가와가와구치 교회에착했다. 유시경 신부가 반겨주신다. 일본 개항 초기의 150년 된 성공회교회 역사가 느껴지는 건물이다. 유신부는 교회와 활동에 관해 소개하고 전전기호 목사와 번갈아 가며기타반주에 노래도 불러주는 교류회였다. 근처 식당으로 이동해 개간호복지사아아사 유 이유 리에 씨가합류했다. 한국을 좋아해서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담소하고 2시간 마음껏 마시는 방식이라 나름 즐거웠다.  어렵게 통화가 연결된 엄창준 선생이 숙소로 찾아와 잠시 이야기 나눴다. 4월부터 코리아국제학교 교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다니 청소년 교류도 가능해 질 것 같다.  아쉬운 사람들은 근처 24시간 영업하는 곳으로 2차 뒤풀이를 했다.

방일 평화 기행 5, 지구상 첫 원자탄 피폭지 히로시마 현장

나가사키 원폭시 버섯구름
나가사키 원폭시 버섯구름

3월 4일 아침에 오사카성으로 이동해 성 주변을 돌아보면서 병영으로 쓰였던 건물의 설명자료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게시판도 소개해 주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 동상을 보면서 일본에서 서민에서 최고 위치에 오르고 전국 통일을 실현한 인물이라 인기가 높다는 설명도 보탰다. 코리안타운으로도 불리는 쯔루하시도 잠시 방문했는데 한국음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고 교류가 있었던 지역이라고 설명하는 신사도 잠시 들러 보았다. 숙소로 돌아와 시간에 쫓겨 도시락을 들고 전차를 타고 신오사카역에서 신칸센에 올랐다. 2시간 만에 도착한 히로시마역에 내려 마중 나온 평화교육연구이승훈 선생을선생을 오랜만에 반갑게 만났다. 노면전차를 타고 원폭 돔으로 이동해 설명을 듣고 평화공원에 있는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에 참배를 하고 설명도 들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히로시마역으로 돌아와 신칸센으로 고쿠라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경전철을 타고 길을 찾자니 어리버어리바리하다. 쿠라고쿠라 교회에 도착하지 주문홍 목사가 반겨주신다. 앞치마에 상의를 입은 모습이 반갑다. 사모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신다. 교회 1층 식당에서 간단한 교류 인사를 나누고 KCC센터 숙소에 자리 잡았다.

방일 평화 기행 6, 재일 우리 동포의 발상지 시모노세키

3월 5일 이승무 대표는 일찍 하카타로 출발해 황남 덕 목사를 만나고 귀국하셨다. 20분 만에 시모노세키역에 도착해 잠시 부둣가를 돌아보다 구와노야수오 선생(일본 코리아회)을 만나 준비된 렌트카로 야마구치 초중급학교를 방문했다. 재일동포의 발상지 시모노세키라는 프린트물 자료를 준비해 오셨다. 일요일이라 학교 관계자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학교 게시판을 통해 짐작할 수는 있었고 야수로 선생께서 학교의 역사를 설명해 주셨다. 1946년 학교 부지 마련에서부터 학교 건물까지 모두 조선사람과 일본 시민들의 협력으로 마련했다고 했다.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으로 부산을 오갔고 항구에서 기차로 연결되었기에 당시 조선사람들이 일본에 첫발을 내딛는 곳이었고 언덕에는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었고 종전 후 귀국길에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인 사찰 광명사에는 평화의 대범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쿠 호 탄광에 있던 한국사가 1948년 귀국할 때 절을 옮겨 유족불명의 유골을 이곳에 맡긴 것이 계기가 되어 설립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관몬터널건설 희생자비는 접근이 어려운 터널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TK BASE 뱀부(대나무)라는 숙소겸 카페에서 일하는 재일재일 동포태최태순 님이련해준 도시도시락(벤또)으로사하면서 담소와 휴식도 취했다. 그리고 191904~1943년,1천 두의선의 소를 일본으로 수입해온 후쿠후쿠우라 부두 터와역소를 방문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그린 조선 소 이입 관련 그림이 게시되어 있어 쉽게 이해되었다.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아버지가 1925년경 부산에서 관부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셨기에 잠깐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일청강화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해안부두가에 마련된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도 보았다. 한일회담을 주도했던 김종필의 필체로 새겨진 글씨가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졌다. 서구에 의해 개항 당시 전투가 있었던 관몬 해협의 역사에 관해 설명듣고 해저터널을 걸어서 혼슈쪽으로 출구에 도착했다. 모지코역으로 이동해 모지항 수변구역을 돌아보다 맥주 한잔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다시 고쿠라로 돌아왔다. 주목사님께서 도시락을 준비해 두셨고 교류하는 술도 한잔 나누며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방일 평화 기행 7, 조선인 중국인 강제노역 기념관

3월 6일 아침 신칸센으로 갈아타면서 나가사키에 도착해 기무라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오카마사하루 기념관을 방문했다. 월요일 휴관임에도 사키야마노보로 이사장께서 나와 주셨고 기무라 선생께서 기본적인 설명을 해 주셨다. 원폭과 강제 동원에 초점을 맞춰 설명해 주셨는데 한국 피폭자들의 처절한 투쟁 과정을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강제노역 피해자들에 관한 전시도 볼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예정된 자치노조 나가사키현 본부회관에서 교류회로 만났다. 기무라 선생께서 한국에 다녀오면서 현수막까지 준비하셨다.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에 전시된 "중국인학살사건" 자료의 일부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에 전시된 "중국인학살사건" 자료의 일부

사상 두 번째 원자탄 피폭지 나가사키 탐방

시키어야 마 이사장의 인사말에 이어 방문단에서도 소개를 겸한 인사를 했다. 전체 교류일정표도 복사해 공유했다. 이사장은 원폭 2세이다. 그래서 원폭 문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핵무기금지조약(TPN)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시키어야 마 이사장은 일본에서 참가했었다고 하면서 올겨울(11.27-12.2)에도 개최된다고 했다.

교류회를 마치고 기무라 선생의 인도로 원폭 자료관을 방문해 설명을 들었는데 후반부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ICAN과 핵무기 금지 조약 TPN에 관한 설명 슬라이드 PT 자료를 볼 수 있었다. 평화자료관 근처 조선인 피폭자 추도비(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인권을 지키는 모임)와 한국인피폭자추모비(민단 설치)를 비교하면서 보았다. 평화공원에서는 근육질의 평화상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폭심지 공원 지역을 돌아보고 중화요리 집에서 나가사끼짬뽕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신칸센으로 고쿠라로 돌아왔다.

방일 평화 기행 8, 이번 평화여행종착역 히다카시

3월 7일 주 목사님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7일권 JR패스가 끝난 다섯명은 고쿠라 역에서 기차표를 구입해 하카타로 이동했다. 황남덕목사가 마중을 나와 주었고 우리는 코인락커에 가방을 넣고 전철 대신 버스로 죠난교회에 도착했다. 몇 년 전 방문한 적이 있고 사와 목사가 목회 중이다.

고이치 목사는 건망증이 심해져서 모임을 잊고 있다고 급히 달려와 주셨다. 참가자 소개하고 이번 방문 취지, 그리고 도쿄에서 만나 이야기했던 점도 설명해 주었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동안 했던 활동도 소개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 방문하고 돌아온 고이치 목사의 이야기도 들었다.

 히로시마에 보존된 원폭현장건축물
 히로시마에 보존된 원폭현장건축물

8월 초 합천 방문은 일본에서 5-10명이 참가할 수 있을 것이고 도쿄 측의 의견을 존중하고 최승구 선생과 의논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동안 원폭 피해자 활동을 소개하고 경기도를 포함한 서울을 방문하는 일정을 포함해 달라고 요청했다. 젊은 세대를 참가시키는 것이 절실하다는 황 목사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청년장학금을 만들어서라도 다음 세대를 육성해야 한다고 했다.

준비된 도시락으로 식사하고 후쿠오카 시내에서 잠시 쇼핑도 하고 시차를 두고 세 명은 먼저 공항으로 떠나고 남은 다섯 명은 하카타역에서 짐을 찾아 공항으로 이동했다. 공항이 시내라 편했지만, 규모는 작아 무척 붐벼 보였다. 1시간 반 만에 도착한 인천공항 입국 절차 자가 무척 많아 시간이 지체되었다. 출입국 모두 붐볐던 것을 보니 코로나 이전으로 회복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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