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작가협회 2022년도 계획출판도서선정 시집

 김화숙 시인은 재일본조선족문단의 대표시인이다. 이미 《아름다운 착각》(2015년), 《빛이 오는 방식》(2017년), 《날개는 꿈이 아니다》(2019년) 등 3권의 시집을 펴낸 조선족시단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중견시인이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10주년이 되는 때에, 인생에서 “육십갑자를 징검다리 건너듯이 한 바퀴 돌아” 새로운 시점에 선 이때 계절의 옷을 입고 세상에 나온 제4시집 《날개의 례의》는 그의 시와 인생의 한 단락의 총결이면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시발점이 되고 있다.

    김화숙의 시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은 물론이고 시의 효용성效用性의 하나인 카타르시스를 선물하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읽은 뒤의 깨달음과 마음의 정화를 느끼게 한다.

    《날개의 례의》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중국의 각 문학지에 발표된 121편의 시를 묶고 있다. 필자는 4계절에 물든 이 아름다운 시의 화랑을 둘러보며 눈길이 멈춰지는 곳에서 그 시의 깊은 뜻과 예술성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1.    사계절의 흐름에서 보는 봄

    김화숙 시인에게 있어서 사계절은 무엇인가? 그의 시 <하루의 봄, 아침>을 읽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계절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보니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내 안으로 걸어들어 옵니다

기승전결이 봄여름가을겨울이었고

아침 점심 저녁 밤

유년 청년 장년 노년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었습니다

꽃이든 인연이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리듬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계절을 스승으로 삼으니

탐욕과 집착은 서성일 뿐

뿌리를 내리지는 못합니다

무념무상이란 자연의 마음이요

계절의 흐름이었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계절 속의 점 하나에 불과합니다

지금 나는 가을의 몸으로

하루의 봄, 아침을 노래합니다.

 

-<하루의 봄, 아침>의 

 

    시적 화자는 ‘봄’을 말하기 위해서 먼저 ‘사계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의 흐름은 기승전결起承轉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의 시작인 ‘기起’는 ‘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점심 저녁 밤” 하루의 ‘아침’이 ‘봄’이 되는 것이고 “유년 청년 장년 노년”에서 ‘유년’, ‘소년’ 시절이 인생의 ‘봄’ 즉 그 사람의 인생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아침을 잘못 시작하면 그 하루 일정이 뒤틀릴 것이고 첫 시작에 문제가 있으면 인생 전반이 꼬이기 마련이다. 자연도 마찬가지이다. 봄에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는 가을에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면, 다시 말해서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래서 우주의 법칙이라는 큰 흐름으로 본다면 인간의 “탐욕과 집착”은 허무한 것이기에 시적 화자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서성일 뿐”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도 미미하여 “계절 속의 점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것을 깨닫고 얻게 되는 “무념무상” 역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리듬”을 타고 움직이니 본질적으로 “자연의 마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의 섭리인 계절의 흐름에서 볼 때 ‘나’의 하루는 곧 사계절이고 우주이다. 따라서 ‘점’ 하나에 불과한 ‘나’의 ‘아침’은 ‘봄’이고 우주 법칙의 일환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거대한 것이 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하루의 봄, 아침을 노래합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루의 봄”인 아침이 그 하루의 흐름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우주’와 ‘자연’, ‘나’가 하나로 통일된 시인의 세계관이 표현된 시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시인이 보고 있는 ‘자연의 봄’은 시인의 마음에서 내면화되어 시인의 삶의 경험과 동일화 되면서 새롭게 시로 태어나고 있다.

시인에게 이 봄은 아픔이었다. 화창한 봄날, “핏기 없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동생은 이 꽃의 꽃말을 묻는다”.(<자매의 봄날>) 아픈 동생은 꽃말에서 삶의 의의와 희망을 찾으려 한다. 그러면 “나는 시험문제를 풀어가듯 /골몰하며 기억을 끄집어낸다”. 꽃말로 삶의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언니에게는 그것이 ‘시험문제’같이 어렵고 힘들다. 어떻게 답하면 동생에게 살려는 욕망을 심어줄 수 있을지 언니는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몸이 아픈 동생과 /마음이 아픈 나는 /진실을 찾아 묻고 답하며 /또 한 번 봄날을 통과중이다.” 

    아픈 봄에게는 촉촉히 내리는 봄비가 생명수이다. 봄비가 내리니 초목에 물이 오르고 싹이 튼다. “봄비의 포근한 손길에 /가로수 가지마다 /간지러워 웃음 터트린다”(<봄비>) 봄비 속에서 살아나는 나무의 모습을 의인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웃음 터뜨린다”같이 음성효과를 일으키는 표현은 아이의 밝은 웃음소리를 연상시키면서 ‘봄’의 생동감을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다음 “빗줄기 드리운 하늘”과 ‘마음 밭’을 포갬으로써 ‘하늘’에서는 ‘구름’을, ‘마음 밭’에서는 ‘마른 풀’을 걷어내는 일이 동시에 진행될 수 있게 하였다. 아픈 동생 때문에 시적 화자의 마음에는 ‘절망’, ‘원망’, ‘포기’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스며들려 서성이었을 것이나  ‘마른 풀’을 걷어내 듯 그것들을 걷어 냄으로써 “사랑과 생명의 언어 /행복과 꿈의 언어들을 /서둘러 파종”할 수 있게 되었다. 

    봄비 속에서 깨어나는 전야의 모습은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다. 시인은 나뭇가지에 맺힌 빗방울을 은유로 “잎을 채 달지 못한 가지는 /좁쌀만 한 은구슬을 촘촘히 받아 걸었다”고 그리고 있는데 여기에서 ‘은구슬’은 물방울이면서도 나무에 돋아나는 새 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게 봄비 속에서 나무가 움이 트듯이 시적 화자의 침잠沈潛하던 마음이 다시 깨어 ‘사랑’ ‘생명’ ‘행복’이 넘치는 시들을 써가려는 의지가 생기며 희망이 싹트게 된다.

〈봄〉은 비바람에 지지 않고 “맞받아 피어난” 벚꽃에 은유를 하여 힘든 상황을 맞서서 이겨 나가려는 시인의 심경을 표현한 시이다. 시인은 ‘벚꽃’은 ‘봄’으로, ‘봄’은 시적 자아로 이미지 전환을 시켰다. 이런 이미지 전환을 통하여 ‘봄’과 ‘시적 자아’가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고 “비바람을 이겨낸 봄이 /나무위에 앉아 웃고 있다.”라는 의인화와 은유가 결합된 형상화된 표현이 성립될 수 있었으며 낙관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봄 잔치〉에서는 봄이 왔는데도 아직 주저하며 “바깥이 천국인지도 모르고 /나무 안을 떠나면 죽을까봐 /의심하고 머뭇거리다 /떠밀려나온 잎”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실존에 대한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치환은유置換隱喩로 표현하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근원적인 불안 때문에 주저하게 되지만 시적 화자는 그래도 세상을 마주하는 선택을 한다. 그래서 “봄만 되면 열리는 잔치에는 /눈감고 초대에 응해도 좋다.”고 자신 있게 등을 떠밀고 있다.

    봄 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잉크빛 하늘을 기다리며>이다. 시적 화자는 꽃을 찍으러 갔지만 카메라를 들고 “목련과 벚꽃의 배경이 되어줄 /잉크빛 하늘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꽃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자기의 리듬대로 피고 질뿐이고 /하늘도 자신의 기분대로 흐를 뿐이다”. 자연의 법칙대로 피는 꽃은 자기의 시간에 따라서 피고 자연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하늘 역시 자기의 흐름대로 변하고 있기에 꽃이 활짝 핀 순간과 하늘이 ‘잉크색’으로 맑아지는 순간이 마주치는 찰나를 포착한다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꽃의 절정과 하늘의 절정 /그 찰나를 맞추는 일은 나의 몫”이라고 한다. 시적 자아의 주체성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슬리지는 않지만 인내심과 노력으로 자기에게 내려지는 기회를 포착하는 것, 즉 자기의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인생관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준비로 /잉크빛 하늘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서 김화숙 시인은 일반적으로 흔히 쓰는 개념인 ‘파란 하늘’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잉크빛 하늘’이라는 제한적인 독특한 표현을 쓰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범위가 협소해 지고 희소성이 강조되면서 “꽃의 절정과 하늘의 절정 /그 찰나를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임팩트 있게 전할 수 있었다.  

    봄은 새싹이 땅을 뚫고 나무 껍질을 뚫고 나오는 아픔의 계절이다. 하지만 그런 아픔을 이겨냈기 때문에 새잎이 살아나고 꽃이 피는 것이고 그래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또한 봄은 모든 생명이 새롭게 첫걸음을 떼는 계절이며 사계절의 법칙대로 왕성한 여름을 향하여 나아가는 계절이다. 김화숙의 봄 시는 바로 이런 우주의 법칙, 자연의 섭리, 인생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1. 2.    확장의 계절 여름

    여름의 색깔은 짙은 녹색이다. 봄날에 싹튼 연한 녹색의 잎새들이 뜨겁고 강렬한 여름 햇살을 맞으며 나날이 푸르러지고 마음껏 자라는 계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을 표현할 때 녹음방초綠陰芳草라는 말을 많이 쓴다. 여름은 확장의 계절이다.

    시인 김화숙의 ‘여름’은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가?

  1. 1)    자연으로의 확장

    김화숙 시인은 자연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한 몸이 되어 그 자연을 느끼고 있다. 때문에 자연과 시적 자아는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주체가 되고 있다.

 

무수한 나뭇잎이

무수한 혀가 되어

빗물을 받아먹고 있다

나무는 수액으로 출렁인다

날갯짓을 멈춘 채

허공을 나는 새처럼

미동도 없이

명상하는 자세로

나무도 허공을 잡는다

수액이 내 몸속을 

관통하는 소리

나무와 하나가 된다.

―〈몰아일체〉 전문

 

    비속에서 오롯이 빗물을 맞으며 서있는 한 그루 나무의 모습이다. 그런데 시적 자아가 그 나무 자신이 되는 순간 “무수한 나뭇잎이 /무수한 혀가 되어 /빗물을 받아먹고 있다”. 원래는 나뭇잎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인데 시적 자아가 ‘나무’가 되니 빗물을 받아먹는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빗물은 나무의 수액으로 변하고 수액은 나무―시적 자아의 생명을 이어주는 ‘혈액’이 되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빗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인 김화숙에게 있어서 그것은 지식일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많은 책을 읽었고 그래서 많은 지식을 축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이 고전을 읽고 다양한 장르의 책들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지식의 범위와 깊이를 늘이고 있다. 그러니 나무가 “수액으로 출렁’이듯이 그 자신도 지식이 풍부해 짐에 따라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새는 스타트할 때 날개를 파닥이지만 하늘에 날아오른 뒤에는 “날갯짓을 멈춘 채” 기류를 타고 유유히 날아 옌다. 이미 궤도에 올랐기 때문이다. 나무도 수액이 넘치니 “미동이 없이 /명상하는 자세로” 서있다. 생명의 힘이 넘치니 의연해질 수 있는 것이다. 시적 자아도 쌓인 지식이 기반이 되니 삶에 흔들림이 없게 되었고 혜안慧眼이 생기어 인생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명상하며 성찰하게 된다. 그런 명상을 거쳐 ‘나무’와 ‘시적 자아’는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1. 2)    가족으로의 확장

    인간의 사랑은 가족애로부터 시작한다. 자아의 확장은 먼저 가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시인의 이런 자아의 확장은 “엄마의 문자”를 계기로 각성이 이루어진다.  “용돈만 넉넉하게 드리면 /효도를 다한 양 /목소리 높여 /인생을 미화하는 동안 /진통제로 버텨오던 /엄마의 뼈들은 /점점 벌집이 되어버렸고 /작은 기침에도 마른가지처럼 부러진다” 시적 화자는 가족 간에도 각박한 이 세상에서 ‘엄마’가 생활에 부족함이 없이 지내도록 경제적 도움을 준 자신은 자식으로서 ‘효도’를 한 것이라고 떳떳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런데 ‘나’가 “목소리 높여 /인생을 미화하는 동안” 어머니의 건강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머니는 “나는 이만하면 잘 살았다 /남겨질 집이 걱정이다”고 당신이 돌아간 뒤의 남을 ‘집’을 걱정하고 있다. 아플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자식에게 원망 한마디 없는 어머니,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 것같은 그 문자에 시적 화자는 “순간 발밑이 흔들려 /간신히 멈춰서야 했다.” 자신의 ‘효도’에 무엇인가 빠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충격은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엄마의 욕실을 고치며〉에는 이런 자아의 각성이 보여지고 있다. ‘엄마’는 “매주 한 번 /사우나 다녀오는 일이 /큰 기쁨이었”는데 “이미 자식 동반 없이는 /출입금지 나이가 되었다”. 자식들이 모두 외국에 있어서 홀로 고향집을 지키는 엄마는 더는 사우나에 갈 수 없다. 거기에다가 욕실이 고장 나서 집에서도 목욕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서 외면 받는 일이 /하나 둘 늘어간다”는 엄마의 현실이 안타까운 시적 화자는 사람을 불러 엄마의 욕실을 수리하면서 “내 안에는 욕실이 아닌 /세상을 들여놓는다.” 이제는 딸의 마음이 엄마의 ‘세상’이 될 것이다. 딸과 엄마의 마음이 하나의 ‘세상’이 되면서 시인의 자아는 가족으로, 더 나아가서는 세상으로 확장된다.

  1. 3)    세상으로의 확장

    자아가 세상으로 확장되려면 마음이 움직여야 할 것이다. 고인 마음은 결국 썩기 마련이기에 시적 화자는 “쉴 새 없이 철썩이”는 ‘바다’를 마음에 들여앉힌다. “일출과 일몰의 웅장함에서  /좁쌀만 한 풀꽃의 떨림에서 /만개한 모란의 황홀함에서 /하룻밤 새 통째로 무너져 내린 /동백꽃을 가슴에 대고서 /그들만의 삶의 기록을 /내 안 가득 채워” 마음이 “썩지 않도록 출렁이는 /바다를 내 안에 들여앉혔다”.(< 걸어다니는 바다>) 여기에서 ‘일출과 일몰’, ‘풀꽃’, ‘모란’, ‘동백꽃’은 ‘세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걸어다니는 바다가 되어 /세상 속으로 스며드니 /나의 몸에서 향기가 난다”. 세상과의 동일화를 거쳐 시적 자아는 단절이 아니라 소통을 하게 되었고 세상과의 화합을 이루게 되었다. 더욱이 ‘걸어다니는 바다’라는 생소한 표현을 씀으로써 ‘나’를 바다에 융화시켜 ‘바다’가 된다는 일반적인 관념을 깨뜨리고 “바다를 내 안에 들여앉혔다”. ‘세상’을 동일화 하면서도 시적 자아의 주체성은 잃지 않았다. ‘나’를 ‘바다’(세상)에 들여보내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바다’(세상)를 ‘내 안’에 들여앉힌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마음이 얼마나 크면 ‘바다’(세상)를 포용하겠는가.

    〈자연의 손〉에서는 “3프로의 소금”물이라는 데에 초점을 두고 “오물들을 절이고 씻어서 /깨끗한 얼굴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는” 일련의 소독과정, 정화과정을 눈앞에 보이는듯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의식이 없는 자연에 ‘절이고’ ‘씻고’ 하는 인간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이같이 정화를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는 바다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품어 안고 포용함으로써 세상과 함께 살아가려는 시적 화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꿈꾸는 사람>에서도 “제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제 몸을 불살라 길을 밝”히는 사람, “멈춰 있는 배를 힘껏 /바다로 밀어내는 사람”,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걷는 사람”, 그렇게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사람들과 함께하는 ‘꿈꾸는 사람’을 그리고 있다. 세상으로의 확장이 이루어지었다.

  1. 4)    내면으로의 확장

    위에 언급한 시들이 자연, 가족, 세상과 동일화 됨으로써 이루어진 외면으로의 확장을 보여주었다면 시인의 자아의 완성은 내면으로의 확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지리산 시인>은 그런 시인의 내면으로의 확장을 스크린의 동영상같이 형상화하여 보여주었다. 

 

산을 탈줄 모르는 나는

지리산 시인의 시집을 읽고

내 안에 지리산을 들여앉혔다

세상으로 향한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있으면

내 안으로의 눈이 열린다

-<지리산 시인>의 서두

 

    “산을 탈줄 모르는” 시적 화자는 지리산에 직접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지리산 시인의 시집을 읽고 /내 안에 지리산을 들여앉혔다”. 시에 그려진 2차원의 지리산의 모습이 명상을 통하여 시인의 마음속에 3차원으로 입체적으로 재생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안으로의 눈이 열린다”.

그곳에서는 우윳빛 물안개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이름 모를 새들의 인사가

아침을 불러오고

풀들이 몸을 뉘어 만들어진

산길을 붙잡고 올라가면 

띄엄띄엄 묘지들이 보이고

계곡물 흐르는 소리도

간간히 들려오고

산신령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길

-<지리산 시인>의 일부

 

    ‘물안개’ 피어오르고 ‘새’가 지저귀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띄엄띄엄 묘지들이 보이고 /계곡물 흐르는 소리도 /간간히 들려오고” 두터워졌다가 얕아졌다가 하는 안개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산은 “산신령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듯 신비로운 모습으로 명상을 통하여 마음 안에서 풍경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다가 시적 자아마저 그 마음 안의 세상에 들어가 있다. “걷는 나는 보이지 않고 안개가 된 사람 하나 /숲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덜컥 맑은 햇살을 만나면 /증발하듯 사라진다”. ‘나’ 자신이 ‘안개’가 되어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한다. 지리산에나 있을 법한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선경仙境이 시적 화자의 마음속에서 영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지리산’이 시적 화자의 마음에 들어있고 시적 자아는 그 마음 안의 풍경 속에 들어가 있다. 그야말로 ‘지리산’이 ‘나’인지 ‘나’가 ‘지리산’인지 구별이 안 가는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장자》의 〈제물론편(齊物論篇)〉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과 비슷하지만 이 시는 인생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우주 속에 ‘나’가 있고 ‘나’속에 우주가 있는 우주와 시적 자아의 합일을 통해서 이루어진 내면으로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시인이 말하고 있는 ‘지리산’은 상상 속의 세계가 아니라 상징의 수법으로 보여준 ‘우주’이다. 이 시속의 ‘지리산’은 실체이면서도 추상성을 띠기 때문에 그 자리에는 세상의 만물을 다 대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내면으로의 확장은 시인의 인성의 정화를 가져온다. “흙탕 속에서 기는 삶이라도 /썩은 물에 뿌리박고 /농담처럼 피어있는 연꽃같이 /향기 나는 꽃 한 송이 피워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일”(<연꽃처럼>)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었고 “누군가 인생을 얘기할 때 /바로 튕겨내지 않고 /내 안에 받아놨다가 /천천히 곱게 비울 줄 아는 /오목한 그릇”(<인격의 향기>)같은 인격을 소유하는 것이 삶의 모토가 되었고  “땅으로 삶으로 가족으로 /뿌리내려 비상을 꿈꿔야 한다”(<뿌리의 주소>)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신조가 되었다. 그러므로 “불안하고 나약한 자 /끝없이 세상 변두리로 /떠밀리는 삶”(<나의 글 높이>)을 사는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춘 그런 글을 쓰는 시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1. 3.    깨달음의 계절 가을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 한 해 농사의 결과물을 걷어들이는 계절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 김화숙에게 있어서 가을은 ‘혁명의 계절’이었다.

 

무성하게 위로만 치닫던

두려움 없이 하늘로 오르던

에너지의 길을 확 꺾어버리고

허공을 부여잡고 있던

그 많은 파란 손바닥들을 

일제히 잘라버리는 계절

열정과 욕망의 발걸음에

그물을 씌워버리는 계절

원하지 않아도 

비우고 내려놓아야하는 계절

성찰과 수렴의 계절

가을은 혁명의 계절이다

중년을 통과하고 있는

나의 계절도

성취가 아닌 침잠의 계절

혁명의 계절이다.

-<혁명의 계절>의 전문

    시인에게 있어서 가을은 ‘에너지’를 “확 꺾어버리고” 파란 손바닥(잎)을 “일제히 잘라버리는”, ‘열정’과 ‘욕망’에 “그물을 씌워버리는” 냉정한 계절이다.  “원하지 않아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하는 계절 /성찰과 수렴의 계절”이며 “성취가 아닌 침잠의 계절”이며 ‘혁명의 계절’이었다. 거둔 ‘성취’에 만족하고 자축하는 계절이 아니라 확장되던 모든 것을 잘라버리고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방향을 세우는 변곡점에 이른 시기이다. 때문에 가을은 ‘혁명의 계절’이며 “중년을 통과하고 있는 /나의 계절도 /성취가 아닌 침잠의 계절 /혁명의 계절이다”. 시인은 병치은유倂置隱喩의 수법으로 ‘가을’이라는 계절의 여러가지 현상들을 열거하여 시인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혁명’같은 변화를 강력하게 임팩트 있게  보여주었다.

    혁명의 계절은 성찰을 동반한다. “11. 1 /써놓고 보니 창살 같다 /살아온 세월 /좋게 말하면 절제였지만 /뒤돌아보니 창살이었다 /스스로 정한 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살려니 /팍팍하고 단조롭다”.(<11월 1일>) 자기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니 그것은 자신을 속박하고 억제해온 매인 삶이었다. 그래서 “뒤돌아보면 길은 없다”. 성찰을 거쳐서 시적 화자는 “나의 창살이 /밖에서 들여다보는 이에게도 /창살일 수도 있겠구나”하고 깨닫는다. ‘나’가 ‘선’안에만 있으니 밖의 사람들도 내가 그은 ‘선’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러니 ‘나’의 ‘창살’은 곧 타인의 ‘창살’이 되며 거기에는 단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11월 1일 창살부터 풀자.”하고 새롭게 변할 것을 다진다. 숫자의 모양에서 단절을 의미하는 ‘창살’을 연상하고 그로부터 시적 주체의 실존의 양상을 형상화하였다.

    ‘창살’을 풀어버리니 가을 정서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고독’도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고독은 꽉 찬 것이다〉 이 시에서는 ‘고독’이라는 시상을 여러가지 복합적인 심상을 통해서 전개하고 있다. 고독孤獨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없이 홀로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외로움은 이러한 고독 상태로부터 느끼는 쓸쓸한 ‘감정’이다. 그래서 시인은 “외로움은 누군가로 해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고독은 무색무향으로 /타인이 배제된 체질적 선택이다”고 쓰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고독’은 “타인이 배제된 체질적 선택”이기 때문에 가볍지 않고 ‘위엄’이 있고 ‘중력’ 즉 무게가 있으며 움직이지 않는 ‘강바닥’ 같다. 시인은 ‘고독’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은유를 통하여 형상화된 심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다른 시각으로 부각된 ‘고독’의 이미지이다. 강물은 흘러가고 말지만 ‘강바닥’ 같은 ‘고독’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흘러가버리면 허무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끄덕 없이 그대로 있기에 고독은 ‘충만’한 것이고 ‘인간성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가벼움과 천박함으로 /인생을 포장하기 위해 /고독을 논하지 말라”고 질호하고 있다. 

    이 시는 ‘고독’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심상을 통해서 ‘고독’의 본질을 보여주면서 ‘고독’을 “인간성의 완성”에로 전개하였고 마지막에는 “신이 내리는 축복”까지 끌어올렸다. 의식을 해방한 시인에게 있어서 고독은 “신이 내리는 축복”이었다.

    깊은 성찰 속에서 시적 자아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어지럼증이 도졌다”(<존재의 힘>)  ‘어지럼증’, ‘존재’ 하면 니체가 떠오른다. “별과 별 사이 /별과 나 사이 /나와 너, 너와 꽃 사이 /그 비어있는 공간 /늘 거기에 변함없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은 존재의 힘”은 니체의 더 높은 것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하는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연상하게 하지만 시적 화자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판단이 정지된 고요”를 말하고 있다.  소용돌이치던 생각이 가라앉으며 “그 고요가 내 안에도 실존하며 /점점 넓어져가고 있었다.”

    성찰을 거쳐 마음을 정화한 뒤에는 선택이 뒤따르게 된다. <리셋>은 그런 선택에 관한 시이다. “새로운 계절로 건너오며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사물을 데리고 왔습니다”. 시적 화자는 그렇게 선택을 하고 둘러보니 “누군가에게 선택 받아 나도 /그의 세상에 속해 있었”다. 결국 ‘나’는 선택하는 자이면서도 선택 받는 자이기도 했다. 이같이 인간은 선택을 거쳐서 실존에 이른다. “선택하고 선택 받는 /삶의 초기화에 경이로워하며 /계절을 새롭게 시작하듯 /새로운 밴드와 어울려 /새로운 인생을 맞이합니다.” 인생이 리셋 되고 있다.

  1. 4.    치유의 계절 겨울

    겨울은 태양 광선의 양이 가장 적은 계절이면서 가장 짧게 쬐는 계절이다. 이 때문에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 사계절의 리듬으로 볼 때 ‘밤’은 ‘겨울’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밤’과 ‘겨울’은 하나의 이미지로 통할 수 있다.

 

또 하루가 사라져 갔다

고통스런 하루였다 해도

살아있음은 여전히 축제다

어둠은 지우개가 되어

심신의 우울함과 피곤함을

대가없이 닦아준다

깨끗해진 영혼 위로

하얀 잠이 새처럼 찾아온다

잠들고 깨어나는 사이

흙속에서 새싹 돋듯

칠흑 속에서 새 희망 돋고

기적의 손에 이끌려

하루의 여정에 승차한다.

-<하루의 시작은 밤이다>의 전문

 

    시적 화자는 밤의 “어둠은 지우개가 되어” “고통스런 하루”를 지워준다고, “심신의 우울함과 피곤함을 /대가없이 닦아준다”고 말하고 있다. 밤이 되면 만물은 잠에 든다. 자면서 몸과 마음의 아픔을, 상처를 치유한다. 그래서 영혼이 깨끗해지고 몸이 회복되면서 “흙속에서 새싹 돋듯 /칠흑 속에서 새 희망 돋고”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이같이 ‘밤’이 치유를 의미한다면 같은 리듬의 ‘겨울’ 역시 치유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겨울’이 치유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눈’ 때문일 것이다. ‘눈’의 하얀 이미지는 깨끗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봄 여름 가을 만물을 키우느라 기름을 빼앗기고 비옥함을 잃어 척박하여 지고 상처받은 대지의 휴식을 지켜주는 ‘이불’이라는 이미지가 더 크다고 본다. ‘눈 이불’ 밑에서 대지도 씨앗도 조용히 잠을 자며 회복되어 가는 것이다.

    김화숙 시인의 〈겨울비〉가 그런 치유를 그리고 있는 시이다. 이 시는 제목이 <겨울비>지만 기실은 비가 아니라 ‘눈’을 쓰고 있다. 시인은 눈을 직접 쓰지 않고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불’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썼다. 그런데 ‘이불’만으로는 눈의 심상이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눈’의 상관물인 ‘눈사람’이란 힌트를 주었다. 아이들이 “이불을 찢”는 행위로 하얀 이불같이 티 없이 펼쳐진 눈밭 위를 눈뭉치를 굴리면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이어서 “귀찮은 듯 /이불을 걷어차기도” 하는 행위로 어른들의 눈을 걷어차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이같이 아이들의 행위도 어른들의 행위도 ‘이불’이라는 상관물을 통해서 묘사하면서 계속 ‘눈’에 따뜻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포근함’이란 촉각적 심상을 이끌어냈고 “이 포근함 덕분에 /땅속에선 뭇 생명들이 /세상모른 채 잠들어 있다”. 치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차가운 것이 /가장 따뜻함 일 수 있”는 것은 차가운 겨울이 상처받은 대지를 치유해 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봄이 되면 ‘뭇 생명’들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사이클이 이어지고 있다.

 

땅 밑 흙속

뿌리는 그곳에서 묵묵히

펌프질을 한다

사람의 심장이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듯

실가지 끝까지 수맥을 밀어 올려

잎 티우고 꽃 피운다

꽃의 영광이 끝난 자리에

열매 들어앉아 무르익고

열매가 지면

그 속 씨앗이 다시

땅 밑 흙속으로 파고들어

싹 티우고 뿌리가 되는 것은

나무의 삶이며

모두의 삶이기도 하다.

-<환귀본처>의 전문

 

계절은 자연의 생명사이클이다. 〈환귀본처〉는 이런 생명사이클을 은유적으로 잘 표현한 시이다. 뿌리가 “실가지 끝까지 수맥을 밀어 올려 /잎 티우고 꽃 피”우면 “꽃의 영광이 끝난 자리에”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지면 /그 속 씨앗이 다시 /땅 밑 흙속으로 파고들어 /싹 티우고 뿌리가 되는” ‘나무의 삶’을 통하여 만물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 삶의 사이클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었다.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고 열매가 씨앗이 되어 다시 나무가 되듯이 인간도 태어나서 자기의 삶을 살다가 죽어서 땅으로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하여 생명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유전자는 후손들에 의하여 이어질 것이고 그렇게 삶과 죽음의 연쇄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회귀의 사이클이 영원히 이어지기 때문에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맺는 말

    김화숙 시인은 문학전공이 아니라 철학전공 출신이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그의 시의 가장 뛰어난 점은 깊은 성찰을 거쳐 통찰의 경지에서 시적 내면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번 제 4시집《날개의 례의》의 시들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우주의 법칙을 내면화하여 시로 승화시킨 결과물이라고 본다.

이같이 자연이나 일상을 통해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내면적 가치를 발견하고, 존재의 시공간을 사유하는 것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김화숙 의 삶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삶을 경험하고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주체성이 있는 명확한 정체성을 얻을 수 있으며 따라서 그만이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적 발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생각, 상상, 감정이 없는 인간은 자기자신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영원한 삶은 세상 삶의 단순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질을 획득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인생을 성찰하고 시적 상상을 통해서 자기의 감정, 깨달음을 시로 만들어가는 김화숙 시인이 조선족문단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이 될 그날이 기대가 된다.    

 

평론가 엄정자 약력: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원,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 동북아신문일본지사 대표.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회장. 연변작가협회 이사,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 평론집『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 제9회 『도라지』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제10호 『동포문학』 평론부문 대상. 제40회『연변문학』 평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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