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경제학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가방의 고마움과 어머니 우리들은 가끔 가방끈이 길다 거나 가방끈이 짧아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들고 다니는 가방의 끈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교육수준이 높은지, 또는 낮은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가방은 일본어 카반(Kaban), 네덜란드어 카바스(Kabas)에서 와전되었다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영어의 백(bag)은 ‘자루’를 의미하는 스칸디나비아어인 배기(Baggi)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가방에 대한 정설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방은 가죽이나 헝겊, 비닐 등으로 만들어 물건을 넣어 들고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도구이다. 가방은 용도에 따라 트렁크, 슈트케이스, 브리프케이스, 학생용가방, 배낭, 손잡이가방, 어깨걸이가방, 손가방 외에 카메라나 화장품 등을 넣는 가방 등이 있다. 여성가방은 토트백, 숄더백, 클러치백, 이브닝백, 드로스트링백, 더블백, 쇼펴백, 보스턴백 등 다양하며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필자가 가방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항상 국내외 이동시 등에 메고 다니는 ‘백팩’의 고마움 때문이다. 보통 무게가 7~8킬로 정도인 ‘백팩’ 안에는 노트북과 관련된 부속 부품, 책과 노트, 간단한 다과가 들어있다. 이 가방은 코로나 이전에 파라과이 근무를 떠나면서 지인 추천으로 구매했다.  

이 가방은 인천-브라질 상파울루(18,333km)-파라과이 아순시온 (1,345km), 인천-세네갈 다카르(Dakar)(12,962km), 인천-우즈베키스탄 (5,254km), 인천-방글라데시 다카(Dhaka)(7,594km, 2번), 인천-아제르바이잔(6,636km), 인천-뉴욕(11,047km)-콜롬비아(11,042km)-볼리비아 (2,601km), 인천-캄보디아(3,507km), 총 왕복 16만,642km(8만321km 왕복)를 필자와 동행했다. 지구의 반지름이 6,400km이므로 원주는 2πr =2×3.14×6,400=4만2,000km이다. 사람들이 이동하기 어려운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이 가방은 짧은 기간에 지구를 4바퀴 돌면서 먼 거리를 아무 사고 없이 주인과 함께 했다.  

 해외여행 중 귀중한 가방 보관·관리 경험은 10년 전 미국학회를 멕시코 칸쿤(Cancún)에서 주관했던 미국 워싱톤대학교 교수가 겪었던 일이다. 학회장인 이 노교수는 학회 참석자에게 개회식에 나누어 줄 귀중한 자료가 들어 있는 가방이 늦게 도착되어 곤욕을 치룬 광경을 목격했다. 필자는 뉴욕에서 칸쿤으로 가는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해외여행 중 적기에 활용해야할 가방은 기내로 가져가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언제 어떤 가방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명확하지 않다. 1881년(고종 18)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갔던 개화파 정객들이 양복을 처음 입었다. 1883년에는 민영익을 대사로 하여 11명이 미국에 다녀올 때 가방이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성의 양장은 1895년 단발령 이후 엄비가 양장을 하였고‚ 1900년에는 양장을 한 여성이 간혹 있었으므로 손가방이 양장과 함께 들어왔으리라고 예상된다. 

필자는 처음 가방 사용은 1960년대 말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서울에서 에 어머니가 사온 중학교 입학선물인 하얀 책가방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인 필자는 그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고 그 당시 어느 누구도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니지 않아 집에 놓아두었다. 중학교 입학하면 가지고 다니겠다고 생각했지만 학교에서 하얀 책가방은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정해주는 색깔과 규격 가방만 허용되었다. 그 이후 어머니가 서울에서 사가지고 온 그 가방 행방에 대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커다란 보자기를 이용해서 책가방 대신 사용했다. 책가방 대신 책을 싸는 보자기란 뜻으로 ‘책보’라는 말로 통용되었다. 책보 역시 천이 귀한 시절이어서 대부분 옷을 만들고 남은 천을 커다란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라서 교과서, 필통, 도시락 등을 보자기에 놓고 둘둘 말아서 책보를 이용했다. 

책을 책보에 싸는 방법은 책을 바닥에 잘 펴놓은 다음 크기가 가장 큰 책이나 공책부터 맨 밑에 대각선으로 놓은 다음 그 위에 필통이나 도시락을 올려놓는다. 그 후 펴놓은 보자기를 둘둘 말아 놓은 다음 맨 마지막에는 책보가 풀어지지 않게 옷핀으로 단단히 고정시켜 놓는다. 학생들은 등하교시 남학생들은 어깨에 대각선으로 꽁꽁 동여 메었고 여학생들은 남자와 달리 책보를 허리에 동여 메고 다녔다.          

 장난기가 심한 학생들은 책보를 어깨에 메고 3km되는 산길을 그냥 얌전하게 걸어 다니지 않았다. 학교를 오가면서 친구들과 책보를 가지고 장난을 칠 때가 많았으며 지각하지 않기 위해 뛰어가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이때 책보가 풀어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했다.     

힘껏 뛰어갈 때마다 등에 있는 책보에서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날 수밖에 없었다. 깡통으로 만든 필통 속에 넣어 둔 연필, 삼각자와 지우개 등이 필통에 부딪쳐서 연필심이 모두 부러져 버리거나 멍든 경우가 많았다. 이뿐인가. 직사각형 모양으로 된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은 한쪽 끝에 반찬을 넣어두는 작은 그릇이 따로 있었다. 지금처럼 별개 반찬통이 없었다. 도시락 반찬으로는 대부분 ‘배추김치’, ‘무우김치’, ‘무말랭이 무친 것’, ‘고추장’, ‘볶은고추’ 등을 싸 가지고 다녔다. 고추장이나 김치 등은 오랜 시간 등에서 흔들리다가 보니 김칫국물이 벌겋게 흘러나와 밥과 반찬이 서로 섞여 엉망이 되기도 하였다. 더 심할 때는 국물이 새어 나와 입은 옷까지 벌겋게 김칫국물이 물들기 일쑤였다. 냄새는 얼마나 심하였던가. 초등학교 고학년은 남녀 공학이 아니었다. 남학생만 한반에 보통 70명 이상인 학급에서 이러한 반찬 냄새를 풍기는 학생이 적지 않았으니 교실 공기는 신선하지 않았다.     

이런 책보와 이별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때부터 사용한 책가방이었다. 책가방은 두 개의 끈이 달린 가방이었다. 이 가방은 끈이 고정되어 있어 늘리거나 주릴 수가 없는 가방끈이 모두 같은 책가방이었다. 요즈음 고학력 소지자, 소위 말하는 ‘가방끈이 길다’는 취업준비생들은 취업이 어려운 답답함이 큰 것이 현실이다. 그에 반해 패션 업계에서는 가방의 부속품 정도로 생각하던 가방끈이 가방보다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방끈 길이를 무시할 수 없다. 시중에 판매되는 가방끈은 사람의 평균 키와 팔 길이를 고려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하나에 몇 천 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자신의 취향에 맞는 실용적인 가방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다.  

책보에서 책가방으로 바꾸어 지금까지 주인과 함께 전 세계를 다니는 책가방에 대한 고마운 생각을 다시 한 번하게 된다. 무엇보다 가방이 귀했던 시절 막내아들은 어머니가 사준 그 하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일을 부끄러워했던 아련한 추억과 함께 53년 전 일이지만 새 가방 포장을 열면서 환히 웃던 어머니 모습이 그립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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