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월매(천진사범대학교)

아리랑 노랫소리는
화남에서 화북으로
널리 퍼졌고
우리의 발자취는
중국 각 전장에
남겨 있다네.

아리랑은 조선민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아리랑은 조선반도뿐만아니라 조선민족이 머무르는 곳마다에 뿌리를 내리고 널리 울러퍼졌다. 일제강점기 조선반도가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된후 조선인 항일투사들은 중국으로 건너왔다. 20년대 홍범도가 거느린 대한독립군에 의한 봉오동전투, 홍범도와 김좌진이 거느린 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이 주도한 청산리전투, 30년대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 1940년대 무정이 영도한 조선의용군의 화북과 화동지역에서의 팔로군과 신사군와의 항일무장투쟁… 이는 중국전장에서 벌어진 굵직굵직한 항일거사들이다.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 하에 들어간지 30년이 지난 1940년대, 민족해방투쟁이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박해로 말미암아 저조기, 침체기였던 40년대에 들어서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항일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한 것은 연안파로 알려져 온 조선독립동맹 휘하의 조선의용군밖에 없었다. 중경 임시정부 계통의 군대와 정부관원 및 조선인들이 시종 스스로 체계를 갖추어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데 비해 일본군 점령지역의 항일근거지에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은 적극적으로 정치군사생산로동을 하면서 팔로군 신사군과 연합하여 싸웠다. 그들의 숫자는 불과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항일제일선에서 끝까지 싸운 것은 이들이었다. 특수한 역사시기에 탄생하여 중국공산당의 영도아래 중국사회에 융합되어 항일전쟁의 최전방에서 싸운 조선의용군의 장려한 혈흔은 아아한 태항산맥이 말해주고 있다.

북경, 하북, 산서, 하남에 걸쳐있는 태항산맥은 굽이굽이 아득히 뻗어나간 험준하고  거대한 바위산맥과 웅장한 협곡으로 중국의 그랜드 캐년(大峡谷)이라 불리운다. 태항산맥 자락에 자리잡은 팔로군 총사령부를 찾아 1941년 1월 일부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태항산으로 갔다. 조선의용대는 약산 김원봉을 대장으로 1938년 10월 10일 무한 한구에서 설립된 단체로 취지는 “중국 항전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타도하고 조선혁명운동을 추진하자”이다. 의용군이 태항산에 갔을 때는 조선청년연합회가 팔로군 본부에 설립되어있어 그의 지도아래 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 7월에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명하고 1942년 7월에 조선의용군으로 확대개편하였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본부에 있다가 129사 사령부 주위로 옮겼으며 1943년 봄에 남장마을로 옮겼다. 100여명이던 대원이 그때는 300여명이 넘었다. 1943년 하반년에조선의용군 대부분은 연안으로 전이시키고 일부만 섭현 남장마을에 남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했을 때 조선에 가서 일본군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고 태항산을 떠나 동북으로 가서 해방군과 만났다. 1946년 3월 조선의용군은 중국해방군에 편입됨으로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였다. 

조선의용대는 태항산에서 선후로 요현(辽县, 현 左权县), 섭현(涉县) ,원씨현(元氏县)등지의 10여개 마을에 주둔하였는데 호가장(胡家莊), 남장(南庄)마을, 운두저(云头底)촌, 장자령(庄子岭), 십자령( 十字嶺), 석문촌(石门村), 여성(黎城), 황북평 등 지역은 현재 항일유적지로 남아 한중인민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여 싸운 애국주의 교육현장이 되었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4년 8개월정도 태항산에서 생활하면서 주로 무장투쟁, 반일홍보활동, 간부양성, 적후활동 등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에서 팔로군과 협력하여 일제와 벌인 항일무장투쟁에서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특히 유명한 장자령, 십자령, 호가장 전투에서 공로가 크지만 반면 많은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희생되었다.

1942년 5월 25일, 일제는 태항산 팔로군 총사령부에 대해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였다.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 장군과 의용대원들은 일제의 태항산 항일 근거지에 대한 악렬한 소탕전에서 중공중앙 북방국과 팔로군 본부 등 기관을 엄호하기 위하여 산서현 요현 마전 부근에서 포위망을 뚫고 이동중 남태항산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십자령에서 순국하였다. 

장자령은 하북성 섭현 편성진 대암촌 경내에 위치해있는데 산세가 가파롭다. 1942년 5월 28일, 좌권장군이 순국한지 사흘 뒤에 팔로군 야전정치부 신화일보사(화북지역), 로신예술학원, 조선의용군 등이 장자령으로 이동할 때 재차 일제와 격전이 벌어졌다. 조선의용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를 상대하며 용감하게 적을 무찔렀는데 전투 중에 조선의용군 지도자인 석정 윤세주(1901-1942)와 진광화(1911-1942) 등이 순국하였다. 조선의용군은 그외에도 호북회전(湖北會戰), 곤륜관(昆侖關)쟁탈전, 중조산(中條山) 반소탕 작전에 참여하여 공헌을 세웠고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연안의 <해방일보>는 1942년 9월 17일에 애청의 <추도사-조선독립동맹을 위하여 순국한 조선열사들을 위한 헌시>를 실었고 1942년 9월 20일에 팔로군 주덕 총사령관의 “자유를 위해 순국했으니 영생불멸하리라”와 엽검영 참모장의 “순국한 조선의용군 동지들을 추모하며”란 추도사를 실었다. 중공중앙북방국 기관보 <신화일보><화북지역)은 추도문에서 “중조 민족의 영령들은 생전에 손을 맞잡고 전투하였고 순국후 함께 릉원에 잠들었다”고 하였다. 

그해 10월 10일, 진기로예 항일변방지역정부의 주관하에 진기로예 항일순국열사 묘소가 섭현 석문촌 연화산에 세워졌고 동시에 팔로군 좌권 장군과 석정, 진광화 등 조선의용대 혁명열사들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중국공산당 중앙북방국 대표 이대장, 팔로군 부참모장 등대원, 팔로군 야전정치국 주임 나서경, 129사단장 유백승, 정치위원 등소평 진기로예 변구정부 주석 양수봉, 조선의용군 대표 최창익을 비롯한 5천여명 군민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열사묘 앞에서 “중한 양국민은 긴밀히 연합하여 공동의 원수를 타도하자!”라고 선서하였고 양수봉은 열사들이 편히 쉴수 있는 곳으로 태항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을 조성하자고 호소하였다. 장례식을 치른 뒤 “열사전을 편찬하고 각급 학교 교과서로 사용하며 각 기관의 전통적 교재로 사용하며 각 기관의 전통적 교육재료로 삼을 것”을 결정했다. 1950년 10월에 좌권과 진광화의 묘소는 한단의 진기로예 열사능원으로 이장되었다. 

석정 윤세주는 고향이 경북 밀양이다. 그는  1941년 조선의용군 군대를 거느리고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들어가 팔로군과 공동으로 항일하였다. 석정은 1982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공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2020년 9월, 중국의 제3차 유명항일열사 명부에 올랐다. 진광화는 원명이 김창화이고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군이다. 그는 1938년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으며 진기로예 당교 부교장,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지도원을 담당했다. 1993년 그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호가장은 하북성 원씨현에 위치하고 있는데 석가장 시내에서 승용차로 1시간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1941년 12월 12일 새벽 조선의용군 제2대 김세광 대장이 이끄는 29명 열혈전사들이 서안사변 5주년 기념대회를 위해 호가장 마을 한 민가에 머물던 중 일제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팔로군 도움없이 500명 되는 일본군 한개 대대의 포위 습격에 둘러싸인 마을사람들의 피신을 엄호해냈는데 이 전투에서 분대장 손일봉(1912-1941), 대원 최철호(1915-1941), 박철동(1914-1941), 이정순(1918-1941, 왕현순) 등은 나어린 생명을 바쳤다. 중상자 2명중 김세암 외에 적탄에 다리중상을 입고 일본 나카사키 형무소로 압송되어 10년형을 받고 1945년 광복후 석방되어 문학 창작에 전념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자 중국 조선족 문단의 거목이었던 김학철(1916-2001, 홍성걸)이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학철은 보성고보 재학중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38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였다. 1940년 가을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하였다. 김학철은 자전적인 작품 <균열>, <무명소졸>,『최후의 분대장』,『항전별곡』『격정시대』등을 통하여 자신의 혁명적인 삶과 역정, 인생철학을 표현하였다. 

김학철 외에도 호가장 전투를 문학작품으로 다룬 이가 있으니 태항산에 머물렀던 유명한 작가 김사량(金史良, 1914-1950)이다. 그의 본명은 김시창,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김사량은 1945년 학도병으로 끌려간 위문단에서 탈출하여 태항산을 거쳐 연안으로 갔다. 그는 조선의용군에 가입하여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반제국주의 국제주의를 지향했던 그는 조선의용군의 영웅적인 투쟁을 소개한 장편기행 <노마만리>, 태항산 지역에서의 생활과 호가장 전투를 그린 시나리오 <호접>을 창작하였다. 
호가장에는 2005년 8월에 원씨현인민정부와 연변작가협회가 공동으로 세운 <김학철 항일문학 기념비>와 <김사량 항일문학 기념비>가 있다. 두 항일기념비 사이의 한복판에는 정부의 단독명의로 세운 높다란 <호가장보위전 항일열사비>가 있다. 당지 주민들의 제안에 따라 2021년 10월 조선의용대원들이 일제의 공격을 받았던 민가에  <김학철 문학관>을 설립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지속적으로 조직역량을 강화하고 군사자질과 정치자질을 갖춘 조선인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1941년 7월 8일, 화북조선연합회 연안 회의에서는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8월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팔로군 본부인 산서동욕(山西桐峪)에 조선의용대 간부양성반을 꾸려 무장항일투쟁의 군사간부를 양성했다. 교장은 무정이고 부교장은 진극화, 위원은 최창익, 석정, 박무, 왕지연 등이었다. 

섭현 남장마을에는 마을 안쪽에 조선의용군 본부,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가 남아있다. 조선의용군이 1943년 4월 섭현 남장촌으로 이전해 주둔하면서 1944년 9월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교육장으로는 유명한 작곡가 정율성(鄭律成, 1914-1976)이 담당했다. 일본이 투항하는 1945년 8월까지 2년남짓 이곳에서는 300여명의 조선항일독립운동을 위한 핵심인물들을 길러냈다. 

정율성은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1933년 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연안에 가서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교사, 노신 예술학원에서 성악교사로 활동하였다. 1942년 8월에 태항산 팔로군 본부에서 일하였으며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장을 역임하다가 1944년 1월 다시 연안으로 갔다. 1938년 4월, 정율성이 창작한 <연안송>은 연안에서 전 중국으로 널리 퍼졌으며 1939년 그가 공목(公木)과 함께 창작한 <팔로군 대합창>중의 <팔로군 진행곡>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되었다. 이는 그 이후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1988년 7월 25일 중공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채택되었다. 정율성이 태항산에서 사용했던 우물은 유적지로 남아있다. 

조선의용군 대부분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3개 국어에 능통하여 항일홍보활동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이러한 활약은 팔로군의 중시를 받았는바 팔로군 129사 유백승 참모장과 등소평 정치위원의 수차례의 접견을 받았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의용군은 중국 6개 전장과  13개성을 전전하며 항일전선에서 홍보책자 5만부, 전단 51만장 배포, 표어 40여만개를 썼다. 조선의용대는 <의용보> 신문과 <중국전장에서의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 총서>, <전고(戰鼓)>, <조선의용대 통신> 등의 간행물을 출간하였다. 

태항산 여러 지역에서 대일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하던 조선의용군은 산서성 요현(현 좌권현) 운두저마을에 주둔하면서 많은 항일 표어를 썼다. 현재 운두저마을 남문 누각에 남겨있는 한글 항일 표어는 조선의용군 항전 역사를 기리는 상징적 문화재로 남아있다. 표어내용은 “조선말을 자유롭게 쓰도록 요구하자!”, “왜놈의 상관놈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강제병에 끌려나온 동포들, 팔로군이 있는 곳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하늘로 향하여 총을 쏘시오!” 이러한 표어들은 70여년간의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현지 정부와 수많은 마을 주민들, 그리고 한중 각계 벗들의 관심하에 지속적인 보수와 복원을 거쳐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1992년 9월, 좌권현 정부로부터 현급문물 보호단위로 지정받았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에서 중국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많은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조선의용군이 머물렀던 남장마을 근처에는 오지산이 있었다. 그들은 오지산의 황무지를 개황하여 밭을 만들어 곡식과 채소를 심었다. 무정은 팔로군이 무엇을 먹으면 우리도 무엇을 먹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상점, 이발소, 의료소를 열었다. 그들이 개간한 황무지는 무려 800 무에 달했는데 태항산을 떠나면서 정부와 열사가족에게 주었다. 그들은 떠나고 없지만 그들이 개간한 땅에서는 해해년년 곡식이 무르익고 열매가 맺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을 떠나면서 “한단은 우리의 제2고향이요”라는 말을 남겼다.

수백리의 태항산 자락에 자리잡은 <조선의용군열사 기념관>은 2004년 개관식을 가졌다. 이는 조선의용군을 기념하는 유일무일한 전문기념관이다. 중국학자 상영생(尙榮生)이 수없이 발로 뛰어다니면서 어렵사리 정부의 승인을 받아 개관한 것이다. 기념관에는 그가 평소에 수집한 하나하나의 소중한 자료들이 사진그림으로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해마다 많은 이들이 태항산을 방문하여 조선의용군의 항일유적지를 참관하고 있다. 

조선의용군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중국 전장에서 맹활약한 항일무장부대이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항일과 조선반도 독립을 위해 싸운 중요한 정치군사대오였고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들의 영웅적 기개와 발자취는 중한양국이 혈맹으로 연합항전한 국제적 거사일뿐만아니라 오늘날 중한 인민이 우의를 도모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산이다.  이는 포화가 자욱했던 지난날, 중한 젊은이들이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어깨겯고 피흘려 싸웠던, 그리고 장렬하게 희생된 곳, 태항산이 증명해주고 있다.    

저자 전월매 

천진사범대학교 교수, 동북아신문 상무이사, 연변작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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