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역에서, 왼쪽으로부터 고향련 작가, 박은희이사,  김화숙  부회장, 엄정자 회장, 최정실 작가,  조련화 작가.
 교토역에서, 왼쪽으로부터 고향련 작가, 박은희이사,  김화숙  부회장, 엄정자 회장, 최정실 작가,  조련화 작가.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는 4월 1일 “윤동주를 찾아서” 교토에 문학기행을 갔다. 도시샤대학교(同志社大学)의 윤동주 시비, 교토예술대학교(旧名称-京都造形芸術大学)의 「윤동주유혼지비」 (尹東柱留魂之碑), 그리고 우지강 핫코교(白虹橋) 다릿목에 세워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를 찾아갔다. 

도시사대학교 윤동주 시비 앞에서
도시사대학교 윤동주 시비 앞에서

 

윤동주의 고향 연변에서 시집 《날개의 례의》가 출간된 소식을 회보하는 김화숙 시인
윤동주의 고향 연변에서 시집 《날개의 례의》가 출간된 소식을 회보하는 김화숙 시인

윤동주는1942년에 일본에 건너왔는데 4월에 릿쿄대학교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했고 그해 9월 교토로 옮긴 뒤 10월 1일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교토의 도시샤대학교(同志社大学)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적인 시 「서시」가 한글과 일본어(伊吹郷이부키 고 번역 )로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와세다대학교의 오무라 마스오(大村正雄) 교수가 쓴 윤동주의 소개문이 새겨져 있다.  

 

정지용 시비
정지용 시비

도시샤대학교는 윤동주가 좋아하는 정지용 시인이 다녔던 학교이기에 윤동주 시비의 옆에 정지용의 시비도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문학기행단 일행은 한사람 한 사람 씩 윤동주 시비와 정지용 시비에 꽃을 드리고 애도와 경의를 표하였으며 “(사) 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윤동주를 찾아서’ 교토문학기행” 현수막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윤동주가 식사를 했던 대학교식당(寒梅館)에서 학식을 먹으며 그의 도시샤대학교에서의 생활을 떠올려 보았다.  

 

교토예술대학교(旧名称-京都造形芸術大学)의 「윤동주유혼지비」 (尹東柱留魂之碑) 앞에서
교토예술대학교(旧名称-京都造形芸術大学)의 「윤동주유혼지비」 (尹東柱留魂之碑) 앞에서

다음 문학기행단은 도시샤대학교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윤동주가 살았던 다케다(武田)아파트의 유적지(현교토예술대학)를 찾아갔다. 1943년 7월 14일,윤동주는 그 다케다(武田)아파트에서 일본의 정책을 비난하고 조선인들에게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조선어 시를 써서 민족운동을 선동했다고 하여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그 자리에 「尹東柱留魂之碑」가 세워져 있었고 그 왼쪽에 윤동주의 「서시」가 윤동주의 친필 필체로 새겨져 있는 시비가 서있었다. 시비에는 이부키 고(伊吹郷)가 번역한 일본어 시가, 그리고 일본어와 한글로 쓰여진 설명문이 있었다. 작가들은 다케다 아파트에서 도시샤대학교까지 카모대교(加茂大橋)를 건너서 학교에 다니던 윤동주의 모습을 그리며 헌화를 하고 인사를 올렸다.

 

우지강 핫코교(「白虹橋)) 다릿목에 세워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 앞에서
우지강 핫코교(「白虹橋)) 다릿목에 세워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 앞에서

세번째로 우지강(宇治川) 핫코교(白虹橋) 다릿목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를 찾아갔다. 1943년의 초여름, 도시샤대학교 영어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일본군의 징병을 회피하려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학우들은 그런 윤동주를 위해서 우지강가에서 야외 송별회를 열었는데 그날을 기념하여 세워진 시비였다. 

시비는 높이 2 미터, 넓이 약 1.4 미터의 두 장의 화강암 판석이 원주를 받쳐 든 형상인데 판석은 윤동주와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과 한국 두 나라 사람들을 상징하고 원주는 윤동주를 상징한다. 두 판석 전면에는 윤동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새로운 길」을 각기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 넣었다. 그 아래 토대석(土臺石)에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라고 일본어로 쓰여있다.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던 아마가세현수교(天ケ瀬つり橋)위에서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던 아마가세현수교(天ケ瀬つり橋)위에서

재일본조선족작가들은 윤동주의 시비를 마주하고 경건한 심정으로 윤동주가 우지강가에서 불렀던 <아리랑>을 합창하고 윤동주의 시를 낭송하였다. 그리고 시비에서 약 3백 미터 떨어진 상류에 있는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던 아마가세현수교(天ケ瀬つり橋)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만개된 벚꽃 앞에서 
만개된 벚꽃 앞에서 

 

문학기행을 마치고  비파호에서 
문학기행을 마치고  비파호에서 

윤동주가 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와서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福岡)형무소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기에까지, 그가 삶의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곳인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일본조선족작가들에게 있어서 윤동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윤동주는 자기의 삶과 시로 이국 타향에서 우리글로 문학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작가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작가의식과 작품의 무게에 대해서 사색해 볼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의 “윤동주를 찾아서” 교토문학기행은 재일본조선족문학의 정립과 발전에 중요한 변곡점이 되며 재일본조선족작가들의 문학 창작에 박차를 가해줄  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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