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 소설가가 3년 만에 내놓은 단편소설, '간이역'으로 안내합니다.

"탕! 탕! 재판장의 망치 하나로 우리 사이를 가볍게 갈라놓았다. 그 순간 남남으로 갈라서기까지 최종 결정권은 그한테 없음을 알았다. 오로지 법정판결만이 유효했다. 우리 사이의 연은 이로써 뚝 끊어졌다. 갑자기 머릿속이 잘못된 것 마냥 윙~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묵직한 아픔이 찾아와서 숨이 막히는 듯 순간순간 호흡이 가빠졌다..."

-간이역 발췌-

김노 金奴(본명 김춘란). 중국 길림 〈도라지〉잡지 단편소설 ‘아버지’로 문단데뷔. 1990년 한국일보 〈여성생활수기공모〉 우수상, ‘나의 서울생활’ 1995년 농민신문 행복의 샘 〈창간6주년수기공모〉 최우수상, ‘나의 어머니’ 1998년 동아일보 〈신동아논픽션〉 최우수상, ‘길림댁은 등나무처럼 살고싶다  ’2000년 중국장백산 〈모드모아문학상〉,  ‘한심한세상’ 2000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문학부분 〈특별예술가상〉, 2016 재한동포문인협회 '제1회 디아스포라 작품상' 등 수상.  2016년 소설집 ‘중국여자 한국남자’ 신세림출판사에서 출판. 
김노 金奴(본명 김춘란). 중국 길림 〈도라지〉잡지 단편소설 ‘아버지’로 문단데뷔. 1990년 한국일보 〈여성생활수기공모〉 우수상, ‘나의 서울생활’ 1995년 농민신문 행복의 샘 〈창간6주년수기공모〉 최우수상, ‘나의 어머니’ 1998년 동아일보 〈신동아논픽션〉 최우수상,  ‘길림댁은 등나무처럼 살고싶다’ 2000년 중국장백산〈모드모아문학상〉,  ‘한심한세상’ 2000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문학부분〈특별예술가상〉, 2016 재한동포문인협회 '제1회 디아스포라 작품상' 등 수상.  2016년 소설집 ‘중국여자 한국남자’ 신세림출판사에서 출판. 

오늘로 우리 부부의 삶은 끝났다. 법적 이혼으로 끝낸 것이다. 장장 몇 달간을 나 혼자 미련스레 버텼으나 더는 무리였다. 안간힘을 다했지만, 나의 육중한 몸이 곧 쓰러지려고 했다. 진작부터 주제 파악을 못 한 건 아니지만. 나는 이별이 싫었다. 솔직히 이별이 두렵고 무서웠다.
   이제 나는 종전의 사별이 아닌 현재 남편과는 이별로서 아내의 자리에서 물러나 곧 이 집을 떠나야만 한다. 당장 어디로 갈 것인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마땅한 곳도 아직은 내겐 없다. 서울 하늘 아래 고립된 섬처럼 나는 지금부터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지지리도 복이 없다. 첫 남편은 죽음으로 나를 버렸고, 재혼한 남편은 내가 싫어져서 버리고. 그동안 무시와 냉대를 충분히 경험해서 이제 웬만한 슬픔엔 항체가 생길 법도 한데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느라 짐승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두 눈을 꼭 감아도 눈물이 넘쳐흘렀다. 인제 와서 후회의 눈물을 흘린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내게 속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밤새 뜬눈으로 보내면서 이미 거의 정리를 끝낸 상태여서 이제 그것들을 종이상자에 담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처리하면 된다. 즉 내다 버리면 그만이다.
   챙길 짐이라야 고작 그동안 걸쳤던 옷가지와 약간의 잡동사니들 그리고 철봉으로 된 옷걸이 하나뿐이다. 오늘따라 옷걸이에 걸려있던 옷가지들을 한데 모아놓으니 하나같이 넝마처럼 후줄근하게 보인다. 실제로 그것들은 거의 동대문의 청계천 시장에서 값을 흥정해서 아주 싸게 산 저렴한 옷들이어서 아닌 말로, 밖에 내다 버려도 누가 탐내지도 않을 그런 옷들이다.
  10여 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변변한 옷가지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남루하고 초라한 이 옷들이야말로 나의 그동안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꼴이다.
   나는 작은방의 책꽂이에서 내 몫의 책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애당초 요리 책자라 부피도 크고 너무 무거워 그냥 두고 갈 생각이었으나 굳이 남편이 몽땅 빼내 가져가라고 했다. 한국 음식, 토속 음식, 팔도요리, 국 찌개 전골, 한국의 밑반찬. 족히 서른 권은 되었다. 이전 같았으면 나와 부엌에서 함께 호흡하며 애지중지 다루었을 사랑스러운 나의 요리 책자들이다. 불과 보름 전에 산 잡지도 끼어 있었다. 모 여성 월간지인데 별책 부록 편에 식단과 반찬 365일이 소개돼 있어 충동적으로 사들였다.
  이제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 어쩌면 오늘날 이혼으로 이끌어 간 결정타가 아닐까. 그렇다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게 마땅하리라.
   나는 꺼낸 잡지들을 하나하나 펼쳐보다가 불쑥 책자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동안 자신을 위해 화장품이나 옷값은 극도로 아꼈으나 비싼 요리 책자는 기꺼이 샀다. 처음으로 산 한국 음식 책자는 누가 봐도 페이지마다 손때가 많이 묻었고 어떤 페이지는 그날 했던 요리과정을 숙지하느라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다.
   처음 약밥을 시도한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스테인리스 그릇에 약밥이 식을까 봐 보자기로 감싸서 품에 안고 달려가는 내 모습이 인제 와서 슬프게 아른거린다. 중국 사람이 무슨 약밥을 할 줄 알겠어? 그날 요리 책자 설명대로 찹쌀을 불려놓고 여러 가지 재료들을 준비하면서 차근차근 따라 했을 뿐인데 뜻밖으로 쉽게 성공하자 기쁜 마음에 보란 듯이 한달음에 근처에 사는 한 살 아래 시누네 집에 달려갔다. 그날 쩝쩝거리면서 맛보며 이건 한국 사람이 만든 것보다 더 맛있고 때깔도 보기 좋다며 까다로운 시누이로부터 아낌없는 칭찬을 듣게 되자 그동안 서운했던 기분을 일시에 다 날릴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 시누이와는 늘 음식을 나눠 먹으며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철렁거리는 눈물을 훔치고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내 두 눈빛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그동안 일부일처제 제도에서 아내의 자리 하나도 온전히 차지하지 못한 소박맞은 여자가 나라는 사실. 단지 하루라는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입술은 바짝 말라 윤기가 없었고 지독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내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능력이 아닐까.
   나는 꺼내놓은 책자들을 차곡차곡 포개어서 안아 들었다. 책이 생각보다 너무 무거워서 간신히 안고서 뒤뚱거리며 밖을 나갔다. 집 근처 대형 쓰레기통 옆에 있는 종이 재활용 더미에 나는 책자들을 곱게 내려놓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때였다. 어쩐 일로 책자들이 보란 듯이 한꺼번에 무너지며 내 발목을 내리쳤다. 어쩌면 책들의 반란일지도 몰랐다. 그 순간, 발목이 아픈 것보다 책을 버린다는 아픔이 더 커서 나는 흩어진 책들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때마침 쓰레기 버리려 나왔던 젊은 여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이 요리책들 다 버리는 거예요?” 나를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울긋불긋 화려한 빛깔의 표지판 책자들이 그녀의 눈에도 아깝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누가 봐도 아깝게 생각될 터였다. 책값에 들인 돈이 얼마인데... 그동안 쓰레기를 버리면서 요리 책자를 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필요하면 가져가세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여자는 횡재한 듯이 요리 책자를 하나 주워 들고 보며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한다. 아마, 나처럼 평소 요리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어차피 버리는 거니까 누군가 갖다 보면 좋지요.”
   젊은 여자는 페이지를 넘겨보다가 탁 소리 나게 접고서 재빠르게 움직였다. 책을 집어 드는 손동작이 날렵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내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젊은 여자는 내가 변심이라도 할까 봐서인지 책자들을 나처럼 한 아름 안고서 부리나케 걸어갔다.
   나는 돌아섰다. 그러나 얼마를 못 갔다. 갑자기 등 뒤로부터 어떤 아우성 같은 함성이 느껴져 뒤돌아보니 젊은 여자 품으로부터 책자들이 타다닥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마구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뛰어가 떨어진 책자들을 하나둘 주워 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당초와 달리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제가 할게요.”라고 짧게 말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내가 변심해서 책자들을 다시 가져갈 의사가 있었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책이 생각보다 무겁지요?”
   육중한 몸으로 뛰어 온 데다가 연신 책을 주워 올리다 보니 숨이 차 씩씩거리면서도 나는 책자들을 차곡차곡해서 다시 젊은 여자 품에 안겨 주었다.
   “고마워요. 너무 무거워서 그만.”
   그때서야 그녀는 웃는 얼굴이 되었다.
  나와의 이별이 싫어서일 거예요.” 나는 저도 모르게 이런 부질없는 말이 나갔다.
   “그런가 봐요. 이 요리책으로 맛있는 음식 많이 해 먹어야지. 고마워요.” 젊은 여자는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기 집 방향으로 걸어갔다.
   책자가 무거워 한쪽으로 기우뚱거리며 걷는 저 여자도 애초의 나처럼 몸이 몹시 가냘프다. 하지만 나처럼 열심히 요리에 빠지다 보면 어쩌면 몇 년이 안 가 오늘의 나처럼 비만해질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괜히, 그녀의 미래가 걱정스러워진다. 비만의 비극을 저 여자는 상상이라도 못 하겠지.
  문득 나는 요리책을 버림으로써 언젠가는 처음처럼 날씬한 몸매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그러자 돌연 기분이 좋아지면서 언젠가 그렇게 된다면 다시 남편 앞에서 보란 듯이 나타나야지. 그때 가서 어쩌면 남편이 다시 나와 재결합을 원하게 되지 않을까. 그건 모르겠다. 망상이다. 남편을 떠올리자 나는 다시 답답한 마음이 되어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젊은 여자는 그새 집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아파트 계단 입구로부터 앞집 여자가 모델처럼 걸어 나온다. 짙은 붉은색의 립스틱을 바르고 눈두덩에는 화장을 어떻게 하는 건지 언제나 매 맞은 눈처럼 시퍼런 그녀는 밖에서는 당당한 모습이지만 집안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남의 가정 내막이야 알 수는 없지만, 쩍 하면 싸움 소리가 크게 들렸다. 부부싸움이 잦았다. 무엇보다 싸울 때마다 듣기 민망할 정도로 서로가 쌍욕이 난무했고, 여자의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날 때쯤이면 와장창 뭔가 깨지는 소리로 사람을 놀라게 했다. 부부싸움이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때마다 가슴을 졸이며 그들이 이혼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되었다.
   그런데도 오늘까지 한집에서 살고 있으니 서로가 끌어당기는 강력한 자석 같은 게 있나 보다. 가소롭게도 그동안 내가 괜한 오지랖을 떤 것이다. 오늘도 어디 외출할 모양으로 매끈하게 차려입고 한 손에 자동차 키를 흔들며 나를 바라본다. 나를 보는 그 눈빛이 오늘따라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모호하게 느껴진다.
   이제 그녀에게 떠나간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어쩌나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혼했어요.’ ‘저 오늘 이 집에서 떠나가요.’ ‘.’
  그러나 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인사를 건넸을 뿐 맘속으로 생각한 말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혼이 무슨 자랑이라고 떠벌리나. 들어올 때처럼 그냥 조용히 떠나가면 그뿐이다. 언제 다시 만날까, 이웃을 다시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이 동네에 다시 올 일도 아마 없을 것 같다.
   저 멀리 등나무 쉼터가 보인다. 어느새 한여름의 무성한 잎들은 거의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쉼터를 지키고 있다. 처음 남편이 말없이 외도한 날, 나는 쉼터 등나무 밑에서 두 다리가 마비되도록 한없이 그를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온 날 차마 대놓고 물을 수 없어서 눈으로 물으니 그는 작심한 듯 침묵으로 외면했다.
   날씨가 제법 차다. 간간이 불어 닥치는 바람 때문에 앞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며 자꾸 흩날린다. 오늘따라 가을바람이 스산하다 못해 오싹하다. 비라도 내릴 조짐이다. 하늘빛이 아까보다 한결 더 어둡다. 나는 몸을 옹송그리며 이웃 누군가와 마주칠까 봐 얼른 계단 입구로 뛰어 집으로 들어갔다.
   남편, 아니다. 이제 남남이 되었으니 지금부터 "그"라고 부르겠다. 그가 그새 돌아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서는 내게 불쑥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 내 성의야!”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나는 잠자코 있다가 마지못해 받았다
   “새어봐. 은행에서 금방 찾아왔어. 하지만 돈은 부자지간이래도 세랬어.” 그가 신이 난 듯 재촉한다.
   그래, 부부도 아닌 남남인 마당에 마땅히 액수를 확인해야겠지.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봉투 속의 돈을 끄집어냈다. 그냥 봐도 200만 원이었다. 은행에서 지급된 일만 원권 지폐 묶음으로 2개였다. 아까 법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급히 어디론가 가더니 은행에 들렀던 모양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 그는 찔러도 피가 안 나오는 사람이라고 했다. 애초 결혼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동반 모임에서 그의 친구 부인으로부터 맨 처음 들은 말이 짠돌이였다. 무슨 말끝에 알뜰하다는 표현으로 칭찬한답시고 한 말이었다. 실제로 그동안 결혼생활에서 느낀 바가 그랬다. 그의 계산법에는 반올림이라는 것이 없다. 한마디로 소금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오늘 200만 원의 거금을 선뜻 내게 내밀었다. 나는 돈다발을 건성으로 훑고 나서 맞을 거예요.”라고 했다가 다시 맞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고맙다는 인사말을 덧붙였다.
   “사글셋방 하나 찾을 만큼의 돈은 내가 낼게.” 일방적으로 준비한 그의 합의 이혼서류에 내 도장을 찍던 날 그가 베푼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200만 원은 그가 내게 주는 소위 위자료 조의 돈일 테고 나로서는 이 집에서 10여 년간 살아온대가일 터였다. 결혼생활 유효기간이 고작 10년 남짓이었다니! 난 정말 잘살고 싶었는데, 그동안 모래성을 쌓고 살다가 한순간 무너진 꼴이다. 아마, 내가 물건이라면 그는 진작에 쓰레기통에 내던졌을지도 모른다.
   혹을 떼어내었다는 여유랄까. 그 여유가 내게 관대하고 그 자신을 너그럽게 만드는 아량이 된 걸까.
   “언제라도 좋으니 방 얻는 대로 나가. 급한 것 없어.” 그가 선심 쓰듯 다시 내게 말했다. 말투부터가 근래에 전혀 없던 친절이다. 신혼 시절의 그 온화한 목소리다.
   오후 2시쯤 그와 나는 가정법원 재판부에 나란히 서 있었다. 며칠 전에 이미 합의 이혼서류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고, 오늘 출두하는 날이라서 가슴 두근거리며 서 있었다. 재판장이 우리의 이름을 불렀고 바로 이혼 사유를 물었을 때 그는 나와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답했고, 나 역시 그가 사전에 지시한 대로 서로의 성격 차로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재판장이 다시 기계적인 말투로 일이 연도 아닌 십여 년을 함께 살지 않았느냐고 확인 차 물었을 때도 그와 나는 다시 사전에 약속한 대로 2차의 질문에 대비해서 미리 작성한 대사를 외웠다.
   “그동안 서로가 극복하려 노력했지만 현저한 성격 차이로 더 이상의 생활은 어렵습니다.”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탕! ! 재판장의 망치 하나로 우리 사이를 가볍게 갈라놓았다. 그 순간 남남으로 갈라서기까지 최종 결정권은 그한테 없음을 알았다. 오로지 법정판결만이 유효했다. 우리 사이의 연은 이로써 뚝 끊어졌다. 갑자기 머릿속이 잘못된 것 마냥 윙~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묵직한 아픔이 찾아와서 숨이 막히는 듯 순간순간 호흡이 가빠졌다.
   “합의 이혼인 만큼 우리의 이혼은 너무나 간단했다. 자식이 없는데다가 마음을 돌리기로 하고 그의 합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준 후 이혼은 그의 뜻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제 마무리로 돈까지 건네받았다.
   법정에서 나는 남편의 부정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진실을 토해낸들 내겐 달라질 것이 사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빈 껍질과 사는 대가란 나 자신을 더 황폐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죽음의 길로 들어가게 될지도 사실 모를 일이다. 줄곧 이혼 압박에 시달린 나는 벽을 붙들고 현기증을 가누어야 할 만큼 그로부터 언젠가 죽을 수 있다는 잠재적 위협을 의식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와 사는 삶이 사막처럼 막막했고, 그러잖아도 충분히 비참한 몰골인데 더 늙고 힘들어질 때 버림받느니 차라리 지금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에게 받은 돈 봉투를 나는 내 작은 손가방 속에 비좁게 집어넣었다. 은행에서 수표로 찾지 않고 일부러 일만 원권 지폐를 찾아온 것은 부피가 많은 현금을 줌으로써 마지막이나마 자신의 넉넉함을 내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눈으로 볼 때도 수표 2장보다 현금 200장이 훨씬 더 많으니까. 어쩐지 10년 세월과 맞바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허무하고 슬펐다.
   결혼할 당시, 나는 오늘의 내 처지를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혼인신고 후 두 달도 안 되어 나의 한국에서의 법적 주민등록증이 나왔고 이로써 그의 말처럼 한국 국적을 취득했으니 나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 자신감으로 희망찬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으니 보이는 모든 것이 반짝거릴 정도였다. 전과 달리 날마다 마시는 공기도 신선했고 바람도 싱그러웠으며 햇빛도 더없이 따사로웠다.
   10년 전 식당 주방보조로 일하고 있을 당시 나는 주방 아줌마의 소개로 그를 만났다. 그즈음 그는 내가 일하는 식당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때 그는 상처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홀아비였고 나는 상부(喪夫)한 지 8년이나 된 해묵은 과부였지만 과부의 순정만큼은 지니고 있었다.
   키가 큰 편인 그는 눈썹이 유난히 짙었고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 잘생긴 인물이어서 내게는 처음부터 시선조차 건네기 벅찬 상대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속옷 선물을 내밀며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꿈인가 생시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술김에 그냥 해본 소리려니 생각했고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다짜고짜로 식당일을 그만두게 한 뒤 나를 이끌고 어떤 곳엘 갔었는데 그곳이 바로 소속 구청이었고 거기서 혼인신고를 했다.
   뒤늦게야 현실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고, 나는 돌아오는 길에 북받치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어 잠깐 그의 어깨에 기대어 울었던 기억이 부끄럽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무엇보다 그 무렵, 불법체류자에 대해 단속한다는 소문이 나돌 때여서 말하자면 그는 내게 불법체류의 구원자였다. 나는 결혼을 은혜로 받아들였고, 그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그를 위해 살리라 다짐하였고, 더불어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줄곧 그의 맘에 드는 말과 행동을 하려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로지 주인한테 충성하는 개처럼 나는 줄곧 집에만 있었으며, 그만 바라보았고, 그를 위해 꼬리를 흔들었다.
   그를 위한 우선 첫 번째가 먹는 음식이었다. 나는 매일 맛있는 반찬들을 만들기 위해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는 요리책이 필요했고, 그래서 용돈을 아껴가며 하나둘 요리에 관한 책자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동네 책방에 가면 전과 달리 요리책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요리책을 연구하듯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요리사라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점차 부엌에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어서 밥상에 차려 그가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게 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고기를 구워 먹는 날에는 그가 쌈을 싸 먹기 편하게 내가 수발을 들었다. 그가 내민 손바닥에 원하는 대로 상추 두 장을 올려주면 그가 밥을 크게 떠서 얹었고 내가 다시 알맞게 구워진 삼겹살 두 조각을 밥 위에 얹으면 그가 이어서 마늘과 청양고추를, 마지막에 내가 몇 가지 재료(양파, 청양고추, 고수, 대파, 호두, 땅콩)를 다져 손수 만든 쌈장 한 숟가락을 떠서 이미 수북해진 쌈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올리고 나면 그가 바로 입으로 가져가서 먹었다.
   처음에는 그 큰 쌈을 흘리지 않고 한입에 다 들어갈까 싶어 구경하듯 바라보니 그는 보란 듯이 그 큰 쌈을 두 손으로 감싸서 두 눈을 부릅뜨고 턱을 올려 크게 벌린 입안으로 볼이 미어지게 밀어 넣었다. 그리고 쌈밥을 씹어 먹느라 양 볼이 울룩불룩했고 그렇게 몇 쌈을 먹고 나면 그의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늘 그가 식사를 마칠 때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비싼 장어구이를 했을 때는 양이 많지 않아 그가 많이 먹도록 양보를 했고, 그가 맛있게 먹는 입모습을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그는 기분이 좋았던지 불끈 쥔 두 주먹을 흔들어대며 오늘 저녁 내 거시기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사용해!”라고 말해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그의 첫 생일을 맞이하여 나는 남편 몰래 감동을 주기 위해 평소 임금님이 받는다는 수라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칠첩반상쯤은 준비해야겠다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요리 책자를 펴놓고 모양과 빛깔에 신경 써서 가짓수를 맞춰 며칠 전부터 하나하나 장만해서 생일날 아침 미역국과 더불어 한 상 가득 차려냈다.
  그날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평생 처음 이런 화려한 생일상을 받아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생일날 너무 과식한 탓에 잦은 트림은 물론 수시로 빵빵 터뜨리는 방귀 소리로 자신의 생일축하 팡파르를 날렸다.
   결혼 초에 그는 늘 먹는 얘기만 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월사금 낼 돈이 없어서 책가방 대신 아이스께끼를 팔면서도 그것 하나 맘대로 먹지 못했다고 했고, 맛있는 음식을 바라기는커녕 끼니를 굶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했다. 군 시절에도 배가 너무 고파 군부대 짬밥을 몰래 훔쳐 먹다가 상관한테 죽도록 매 맞았다고 했으며, 짜장면을 먹은 그날이 곧 그의 생일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 당시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머릿속에 온통 배가 고픈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생뚱맞게 저녁 밥상을 받아놓고 다소 진지한 모습으로,
  “마누라가 아프고 병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 3년이란 시간에 내가 뭘 먹었는지 알아?” 그 순간 나는 상식적으로 먹으면 안 될 음식을 먹었나 싶어 갑자기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었는데
  “그냥 배고프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었어. 맛이 뭐야, 그냥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었으면 됐었지.”
   그날은 내가 술안주 별미로 길쭉하게 자른 햄과 게맛살, 채소로는 당근, 홍색과 노란색의 파프리카, 대파 등 야채를 무지개 색깔로 맞춰 무지개 꼬치를 만든 날이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이 떠올라서인지 잠시 먹는 걸 멈추고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음식 잘하는 여자가 늘 부러웠어. 솔직히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죽은 마누라가 음식 솜씨는 없었어. 뭘 해도 맛이 별로였지. 막내로 자란 데다 장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배운 게 없는 탓이지. 마침 당신이 내가 원하는 그런 여자야. 이것도 나의 복이지.”
   그런 그에게 나는 그가 원하는 음식뿐만이 아니라 그가 원하게 될지도 모르는 음식까지도 생각해서 앞질러 만들기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나는 날마다 한 가지씩은 별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세가 있었던 것도 같다.
  어느 날은 경동시장에서 사 온 치자를 삶아 그 물로 연근을 노랗게 물들이고 거기다가 찹쌀가루를 입혀 프라이팬에 바싹하게 구워서 차려냈고, 어느 날은 비싼 송이버섯을 세 개 사다가 반쯤 으깬 찹쌀로 송이버섯 죽도 끓였다. 죽을 먹은 그날, 그는 온종일 소나무 숲 속에 앉아있는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나는 끼니마다 걸신이 든 것처럼 그가 맛있게 먹어주니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고, 그게 곧 나의 행복이라 여겼다.
   그의 입맛은 알고 보면 의외로 간단하기도 했다. 무릇, 모든 반찬은 짜고 매워야 했다. 거기다가 강렬한 맛과 독특한 향을 첨가하면 되었다. 이를테면, 고추는 반드시 청양고추라야 했고, 겨자·후추·생강·마늘·산초·팔각향 등은 필수 양념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향채(香菜)라는 채소도 한국에서는 고수라고 부르는데 처음에는 그 냄새를 엄청나게 싫어했고, 내가 추억으로 먹는 것조차도 불허해서 어쩔 수 없이 끊었는데 어느 날 TV프로에서 향채(香菜)라는 채소가 실은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애용하는 허브라고 소개하자 바로 그 이튿날 사 오게 해서 맛보기 시작하더니 독특한 향에 중독된다며 이후 빠지지 않고 활용했다.
  무엇보다 결혼한 그 이듬해 특별히 그가 좋아하는 청양고추로만 고추장을 담았는데 그날 고추장을 맛보다가 혀가 얼얼한 나머지 잠시 혼이 빠져나가는 줄 알았다.
   요리 책자를 보면서 찌개나 탕을 끓일 때는 내가 매워서 못 먹더라도 그를 위해 매운 고춧가루와 청양고추를 듬뿍 썰어 넣었다. 가끔가다 별미를 만든답시고 나름의 아이디어를 짜서 한국 음식과 중국 음식을 섞은 새로운 퓨전 음식을 만들기도 했었는데 그가 간혹 맛이 이상하다며 거부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다시 요리책에 매달려 연구하느라 밤잠까지 설쳤으며, 그런 날이면 해물탕이나 버섯전골들이 꿈속에까지 보글보글 끓었다.
   내가 그동안 음식을 만드는 즐거움으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다가 친정 여동생과 통화를 할 때도
   “언니는 형부 얘기, 음식 얘기, 부엌 얘기 빼면 할 말이 그렇게도 없나 봐.”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통화 때마다 나도 모르게 늘 간단한 안부 정도쯤 묻고는 바로 음식 얘기나 부엌 얘기로 옮겨갔던 모양이다. 사실 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도 나는 대부분이 부엌에 있을 때였으니 음식 얘기는 당연했다. 부엌이 아닌 밖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동생이 어디야?” 물으면
   “, 나 지금 마트에 와있어. 너 형부가 잡채가 먹고 싶다고 해서 재료 사러 나왔어. 혼자 살면서 잡채를 못 먹었나 봐. 한번 해줬더니 맛있다고 또 해달라고 하네.” 그랬었고
   언제 한 번은
  “나 지금 경동시장에 와 있어. 여기 단호박이 너무 좋다. 크기도 안성맞춤이고, 오늘은 단호박 영양찜을 해 먹으려고 이미 찹쌀을 불려놓고 나왔다. 찹쌀은 충분히 불려야 맛있거든. 단호박은 일단 꼭지 쪽을 뚜껑용으로 잘라놓고 호박 속을 말끔히 파내고 거기다가 불린 찹쌀, 대추, , 완두콩, 은행, 호두, , 건포도 등 재료를 모두 섞어 후춧가루 뿌려 넣듯이 소금을 아주 조금 넣고 올리고당으로 잘 버무려서 호박 속을 채워 넣으면 된다. 그리고 찜통에 약 20분간 쪄내면 훌륭한 별미가 되지. 여기 시장에 싱싱한 것들이 너무나 많아 둘러보다가 이것저것 좀 샀더니 벌써 배낭이 꽉 차서 어깨가 무거워 죽을 지경이다. 집에 갈 일이 태산이다.”
   “언니 인생은 없어? 한국에서 결혼까지 했으면 좀 남들처럼 돈도 벌고 한국 여자들처럼 얼굴 몸매도 예쁘게 가꾸고 그렇게 살면 안 돼? 아무리 바빠도 거울 좀 보고 살아! 맨날 어리석게 식모살이만 하지 말고, 자신을 한번 돌아보란 말이야!”
  동생은 전과 달리 화난 목소리를 남기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쩐지 잠잠하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나 혼자 신이 나서 지껄인 꼴이었다.
   그날 동생으로부터 한 소리 듣고 집으로 가는 동안 기분이 좀 좋지 않았지만 영양밥을 매우 맛있게 먹는 그의 얼굴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말하자면, 나는 음식으로 그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착한 아내란 줄곧 부엌 음식과 일치시켰다. 그래서 자꾸만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불쑥 요즘 한국 여자들 하나같이 게을러서 음식 만드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쩍 하면 외식을 나간다.’라며 아주 못 마땅해했다. 역설적으로 나를 칭찬한답시고 한 말인 듯해서 나도 맞장구쳤다. 가족을 위해 그 좋은, 잘 꾸며진 첨단 주방에서 음식 만들기 싫어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고. 내가 일해 봐서 잘 알지만, 식당이라는 데가 다 청결하지도 않고 게다가 음식 재료도 썩 좋지도 않다고.
   사실, 그동안 우리가 외식했을 때는 모임이 있거나 외출했을 때뿐이었다. 그렇게 날마다 하루 세끼 음식을 만들고 밥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고 설거지하다 보면 하루해가 잘도 지나갔다. 짧게 느껴지는 날도 많았다. 특히, 만두라도 빚는 날이면 하루해가 부족해 야근하듯이 밤늦도록 부엌에 머물러야 했다.
   찐만두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어서 일단 발효시킬 효모를 넣어 밀가루 반죽부터 해놓고 정육점에 가서 갈아온 고기와 시장에서 장을 봐온 여러 채소를 다져 만두소를 만들어서 일일이 하나하나 어른 주먹 크기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시댁 식구들이 내가 만든 고기를 많이 넣은 찐만두를 유별히 좋아했기 때문에 한 번 만들면 200개 정도 만들어서 채반에 보자기를 깔고 한 솥씩 쪄냈다. 그리고 식힌 만두를 비닐봉지에 15개씩 담아서 냉동고에 얼려놓고 먹고 싶을 때마다 꺼내 찜통에 데워서 먹었다.
   사골을 끓이는 날에는 종일 냄비에서 김을 뿜어냈다. 그렇게 우려낸 진한 육수를 식혔다가 냉장고에 넣어두면 기름 걷어내기가 쉬웠다. 이처럼 줄곧 음식을 만들랴 맛을 보랴, 그러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이 불어갔던 것이리라. 처음에는 여윈 몸에 살집이 좀 붙으니까 그가 좋아했다.
   “몸이 부쩍 좋아졌어. 피부가 탱탱하니 윤기가 도네. 남편 밥이 최고지.”
   스스로 거울을 봐도 내가 전보다 많이 예뻐진 것 같아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점차 그게 아니었다.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 면적이 점점 넓어지는 것 같았고, 실제로 몸 크기도 따라서 불어만 갔다. 옛날 입었던 옷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맞지 않았고 한 해 한해 크기가 더 큰 옷이 내 몸에 맞고 편했다.
  그래도 나는 먹어서 살이 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그저 행복한 마음에 나이 먹어감에 따라 살이 찔 때가 되어서 찌나 보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밥상에서 그가 그만 좀 먹어! 미련스럽긴.” 핀잔을 줄 때도 비만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나는 그가 먹고 남긴 음식만 먹었으며 먹는 양도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많이 먹는 편이어서 살이 찐다면 내가 아닌 그가 비만이어야 했다.
  그는 정식으로 삼시 세끼 외에도 간식이랍시고 주전부리가 심했다. 하지만 어쩐 일로 그는 비만이 안 되었고 안성맞춤으로 보기가 좋았으며 이전보다 더 건강해진 모습이었고 나만 뚱뚱해졌다.
   그동안 음식에 들인 시간과 정성은 차치하더라도 상하지도 않은 음식을, 물론 상하게 해서도 절대 안 되지만 어떻게 남은 음식을 버릴 수가 있겠는가! 단 한 번도 버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남은 음식들은 어떻게든 내가 다 먹어 치웠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해물 매운탕.
   “중국 냄새가 전혀 없어. 이건 완전 우리식이고 신토불이 우리 맛이야. 옛날 어머님이 만든 바로 그 솜씨야.”
  자주 하던 이런 칭찬의 말도 어느 날부터인가 사라졌다. 그때부터인 듯하다. 반찬값을 절반밖에 얘기 안 했는데도 그는 화를 냈다. 반찬값이 너무 많이 든다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동안 식당에서 번 돈을 비상금으로 갖고 있다가 시장 갈 때마다 야금야금 꺼내 썼고 반찬값에 아낌없이 다 보탰는데. 게다가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할 때는 언제고 뒤늦게 느닷없이 반찬이 짜니 싱거우니 하며 트집 잡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나와의 식사를 교묘히 피하는 것 같았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무렵부터 어쩌다 있는 부부동반 모임에도 내게 알리지 않고 그 혼자만 갔으며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등산도 그는 말없이 혼자 다녔다. 무엇보다 같이 하던 잠자리마저 어느 날부터인가 그 횟수가 줄었고 언제부터인가 이상하리만치 뚝 끊겼다. 없었던 외박을 한두 번 하더니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집에서 밥 한 끼 안 먹는 날도 많았으며 아예 며칠씩 들어오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런 날, 나는 뭐 했던가!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깨끗한 냉장고를 다시 정리하고 거실 유리를 닳도록 닦았으며, 구석구석 걸레질로 내 마음을 다독거렸었다.
  돌이켜보면, 그와의 삶은 살아갈수록 익숙하고 편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힘들고 낯설기만 했다.
  뒤늦게나마 소모적인 삶을 포기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가 누구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였다. 그동안 애인이 생겼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와 친하게 지내고 있고 소문난 여자는 나와 같은 중국교포로서 나보다 2년 늦게 입국한 현재 불법체류자로 서울의 한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숙자이다. 나이가 나보다 오 년 어리지만, 중국에 있을 때 가까운 이웃이어서 왕래가 좀 있었다.
  3년 전쯤 중국친정으로부터 내 연락처를 알아내 내게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여느 고향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한 동네에서 같이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그 후 송금이나 일자리 등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그의 허락을 받고 적당히 도와주곤 했다. 그때마다 숙자는 정말 고맙다며 쉬는 날을 약속 잡아 그가 좋아하는 술과 안주를 사서 어김없이 내 집으로 찾아오곤 했다.
   애당초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숙자가 경우 바르고 인사성이 좋다고만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그가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어서 내심 다행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고향 사람들이 종종 찾아와서 내 도움을 청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가 싫어하는 내색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불행의 씨앗은 그때부터 싹트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원수 같고 미운 그녀지만 숙자는 나보다 훨씬 예쁘고 거기에다 젊기까지 하다. 예쁘지도 않은 내가 뚱뚱하기까지 하니 상대적으로 그가 나를 좋아할 리 만무했다. 모든 남자는 얼굴이 예쁘고 날씬한 여자를 좋아할 것이었다. 특히, 자본주의 세상인 이곳에서는 늘 듣는 게 남자는 정력이고 여자는 예쁜 얼굴과 몸매에 관한 얘기였다.
   요리 책자를 꺼낼 때 딸려 나온 가계부에 그날그날 간단히 적어놓은 메모들이 있는데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숙자가 두 번째로 술을 사 온 그날부터 이상하게도 앞으로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있었다. 눈에 거슬리는 뚜렷한 그 무엇은 없었지만 좋은 안주에 술잔을 몇 번 기울고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의 눈길이 숙자에게 자주 머무는 것을 보았고, 숙자 또한 그한테 잘 보이려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술잔을 건네며은근히유혹하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 애초부터 간과해선 안 될 일이었다.
  숙자가 돌아가고 나서 그날 밤 이상하게도 그의 옆에 누워있음에도 나는 조금 외로웠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오늘의 나를 조금이나마 예감하지 않았나 싶다. 그 무렵, 막연히 나를 외롭고 불안하게 한 실체가 뒤늦게 숙자였다는 사실이 그동안 남편의 행동으로 하나하나 모두 드러낸 꼴인데, 떠올리기 싫지만 생각해 보면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
  어느 하루 저녁 술상을 안방에 차려놓고 부엌에서 뭘 좀 챙기느라 늦게 방에 들어갔는데 그가 숙자에게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다가 내가 들어서자 하던 말을 멈추고 웃었다.
  이런 날도 있었다. 그가 갑자기 맥주가 생각난다고 했고, 나는 당장 근처 마트에 가서 사 오기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딱 내가 문밖을 나섰을 때 친구가 화사한 모습으로 도착했다. 온다는 연락도 없이 왔다. 그 무렵 내가 외롭고 혼자 슬픔을 삭일 때 숙자는 뻔뻔스럽게 그가 좋아하는 고량주를 면세점에서 사 왔다며 내 집을 들락거렸다.
  내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설거지를 하는 틈틈이 그들만의 사랑을 속삭였나 보다. 외모에 대한 그의 불만이 숙자의 들락거림으로 인해 더 부채질한 꼴이 아닐까? 싶어 잊고 있었던 그날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기억마다 슬프고 아픔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재빠르게 은밀한 눈길과 미소를 주고받는 걸 보았다. 그것이 그들의 은어였던가. 뒤늦게 분노가 일렁거린다.
   결혼 후, 처음으로 반신욕을 함께 하던 날 그의 팔뚝에 새겨진 낯선 문신을 보게 되었다. 보통 건달이나 깡패 같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 온 나로서는 솔직히 좀 무서웠다. 그런 나를 바로 눈치채고 그가 웃으며 이 문신은 나를 위한 한마음이라고 했다. 결혼 전부터 있었던 문신인데 무슨 말씀이냐고 내가 반문하자, 당신과 사는 지금부터 당신을 위한 일심(一心)이 아니냐고 당장 확인하라며 나의 얼굴에다 팔뚝을 쑥 내밀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잘 나가는 아는 형의 권유로 문신을 하게 되었는데 일심이란 한결같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기도 했다. 그 일심이 언제부터 나를 외면하고 떠나갔나! 이제 나 자신을 위해 형벌 같은 삶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지옥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살면서 하루하루 고통을 느끼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가 나를 보며 언뜻 웃었다. 나의 불행이 곧 그의 행복인가 보다. 불변의 진리인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며, 이혼서류를 작성할 때 그가 내뱉은 말인데 말투가 전처와 사별하기까지 했는데 이혼이 뭐 대수냐는 듯, 뻔뻔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리고 자기와의 결혼으로 국적취득을 쉽게 했으니 면죄부라도 되는 양 이혼에 대해 가볍게 언급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는지 줄곧 내 앞에서 신나고 즐거운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이 시점에서그는 행복한 마음을 숨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그의 참모습이었던가. 마치 도금이 벗겨져 드러난 쇠붙이처럼 애초의 황금 같은 휘황찬란함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못생긴 여자랑은 살아도 뚱뚱한 여자와는 못 산다는 말이 왜 이제야 생각날까. 내가 나가면 바로 숙자가 내 자리를 대신하겠지. 예감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인 직감이다. 그러잖아도 중국의 많은 젊은 과부들이 다 한국 국적을 얻고 싶어 안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도 틀리지 않았다.
  결혼하고 4년 만에 중국에 들어갔을 때 동네 고향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한국 사윗감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해왔고, 심지어 이혼하고 혼자 사는 과부들까지도 내게 서슴없이 한국 홀아비를 소개해달라고 간청하듯 부탁했다. 그 일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나를 초대한 집이 한두 집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한국 남자와 결혼하려는 여성들이 줄지어 있었다. 수요가 많다 보니 한국 남자의 주가가 단기간에 훌쩍 뛰었다. 그도 덩달아 우쭐했고 가끔 생색을 내기도 했다.
   그는 이제 숙자와 함께할 행복한 삶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는 듯했다. 그녀와 애인 사이로 지낸다면 모를까 함께 산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분노보다 웃음이 나왔다.
  옛날 한여름에 숙자네 집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주방이 엄청 더러웠다. 음식 그릇 밑굽마다 때가 껴 있었고 반찬을 먹다가 모래를 씹기도 했다. 벌레도 발견했다.
  숙자가 나를 대체할 수 있을까? 곧 그녀의 실체가 드러나겠지! 환상도 더불어 깨어지겠지!
  나는 다시 한 번 정든 거실 베란다를 바라보았다. 저녁 불빛을 받은 항아리들이 오늘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쳤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항아리들이 예술품처럼 하나하나 입체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복잡한 기분이 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슬픔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항아리 속에는 손수 만든 된장, 고추장 그리고 각종 장아찌가 들어있다. 마늘쫑, 방풍나물, 곰취, 오이, 통마늘, 매실, 깻잎등 철 따라 만든 장아찌들은 나의 시간과 숨결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정리한 짐들을 혼자 하나하나 현관문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이 집에 들어올 때는 달랑 보따리 하나뿐이었는데 이제 나갈 때는 다섯 개나 되었다. 택시가 곧 도착할 것이다.
   “당신이 굳이 오늘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내가 금방 택시 불러놨어.”
  그가 다시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한 마당에 하루빨리 그로부터 떠나가는 게 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일일 테지만 고맙게도 그가 마지막 배려로 빨리도 택시를 불러주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재혼은 미친 짓이었다.
  결혼생활 유효기간이 고작 10년 남짓이라는 세월이었다. 10년 전 그의 집이 내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인 줄 알고 맘 놓고 따라 내렸는데 결과적으로 이 집은 간이역이었다.

! 나의 종착역은 과연 어디일까.
   오늘 비록 내가 이 집을 영원히 떠나가겠지만 어쩌면 억울한 나머지 내 영혼이라도 남아 이 집안 곳곳을 헤매고 다니면서 나의 존재를 드러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제아무리 나를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나의 흔적이 너무나 깊고 넓어서 어떤 힘으로든 닦아낼 수도 밀어낼 수가 없을 것이다.
   싱크대선반에 반짝거리는 냄비들, 수납장에 가지런한 그릇들. 부엌은 나의 열정적인 삶을 쭉 지켜보았을 것이다. 부엌뿐만 아니라 서랍 속에 하나하나 돌돌 말린 뽀얀 수건과 행주들. 아무리 바빠도 면으로 된 흰색은 무조건 삶아 빨았다. 이 모든 것들이 그동안 나의 수고를 소리 없이 대변해 줄 것이다.
   드디어 이 집을 떠나갈 때가 됐다. 문밖에 부르릉거리는 소리가 난다. 택시가 도착한 모양이다 . 또다시 이 세상에 혼자가 된 것 같은 슬픔이 밀려든다. 울음을 참느라 나는 심호흡을 하며 안간힘을 쓴다. 솔직히 첫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 혼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곁에 늘 친정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드디어 현관문이 열렸다.
   “잘 가!”
   그가 내게 마지막 인사말을 던진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데 그게 자칫 괴성일까 봐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입을 꽉 다문다.
   나는 희망찬 발걸음으로 들어온 10년 전과 달리 절망스러운 기분이 되어 휘청거리며, 그러나 빠르게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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