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순 중국조선족시몽문학회장과의 대담

—인터뷰—

복합상징시 그 정체를 묻다

시간: 2023년 4월 26일 오후. 
장소: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실.

이동렬: 재한동포작가협회 대표(이하 <동>으로 약칭).
김현순: 중국조선족시몽문학회장/대표(이하 <현>으로 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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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현: 네, 수고 많습니다. 

동: 시인님은 복합상징시라는 시영역의 새로운 유파를 창시함으로써 조선족시단은 물로 한국을 비롯한 국제시단에서도 쟁점 화제가 되고있는지라 찾아뵙고 말씀 나누고 싶었습니다.

현: 네, 영광으로 간주합니다. 

동: 오늘 조련찮은 만남인데 복합상징시란 도대체 어떤 것이며 그 특징이 있는지? 아무튼 다른 유파보다 다른 점에 대하여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현: 네, 복합상징시, 그것의 출현은 우연이라 할 수가 없지요. 모든 학술적인 논술을 떠나 그냥 통속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합상징시란 말 그대로 상징들의 복합적인 구성으로써 화자의 경지를 펼쳐보이는 시의 유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 어느것이 복합구성을 이루지 않은 것이 있으며 어느 예술이 상징을 동반하지 않은 것이 있느냐는 질의를 받기 쉽상이겠지만, 복합상징시는 무질서한 이미지들 가운데서 영혼이 점지해주는 것들로 새로운 질서를 찾아 능동적 가시화로 다시 세상에 펼쳐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동: 아, 얼핏 듣기엔 좀 난삽한 듯 하온데, 그것은 현대시학에서 말하는 탈영토와 재영토의 논리와 같은 것 아닌지요?

현: 맞습니다. 상태론에 따르면 하나의 세계는 필경 그 자체에 대한 반역과 해탈, 초탈을 꾀하게 되며, 그런 특성들이 자유분방한 무의식의 신질서를 구축하려 되지요. 복합상징시는 바로 이런 특성에 입각하여 진행되는 예술적 작업이라 귀결할 수도 있겠지요.

인간은 현상태에 대한 반역, 해탈, 초탈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늘 그 존재를 세상에 과시하려고 하고 있지요.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개성표현으로 거듭나게 하지요. 그것이 예술로서의 시문학에서 보여지는 양상은 변형과 상징의 필연적 기술처리작업을 거치게 되지요.

동: 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 있는데요. 예술에서는 왜 상징과 변형이 필요한 것인지 말씀 해주시지요.

현: 네. 상징이란 인류 문명의 산생과 더불어 동조해왔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부끄러운 데를 가릴 줄 알게 되었다고 성경엔 적히어 있습니다. 아무튼 인간에게 문명이 인식되면서부터 인간은 더는 원시적인 직설의 표현을 하지 않고 될수록 에두르고 감추고 위장하는 등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은닉시켜 보여주는 기술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상징이라고 하지요. 

왜 인간은 이렇게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보다 자신을 멋스럽게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이지요. 중국 현대시인 서지마(徐志摩)는 “눈꽃”이라는 그의 시에서 한 여인에 대한 고백을 “난 널 사랑하노라” 라는 단도직입적인 직설을 회피하여 아래와 같이 보여주었답니다.

나는 한 송이 결백한 눈꽃
꽃이 되어 너의 품에로 훨훨 날아가
사르르 녹아버리고 싶다

자, 어떻습니까. 표현이 우아하지 않습니까. 시란 바로 이런 것이기에 한수의 시에는 반드시 상징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랍니다.

동: 그렇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이번엔 변형은 왜 필요한 것인지 마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현: 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인간이란 하나의 세계로부터 시간의 축적과 더불어 반역, 초탈, 해탈을 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인간의 집착과 향상심이 그 본성으로 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특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필연코 현상태에 대한 초탈을 도모하게 하지요.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변형이란 이 관적적인 고리를 거쳐야만 하지요. 

이른바 변형이란 형태와 질적변화를 통털어 아우르는 대명사라고 봐야겠지요. 인간은 도식화되거나 관습화 되어버린 삶의 질서에서 벗어나, 보다 자극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지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극적인가 하는 의문도 있을 법 하지만, 자극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이미지의 변형된 표현을 촉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능동적 가시화 즉 움직이는 통감의 기법을 필수로 하고 있지요. 모든 생명체는 움직이는 것이므로 “能動性”에 그 생명존재의 가치가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또 “可視化”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 감각화된 형상으로 보여줌에 직관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변형을 통하여 펼쳐진 이미지는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지요. 세상에 아름다움을 던져줄 때라야 만이 이미지변형은 예술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동: 네, 잘 알겠습니다. 이런 상식적 인식은 모든 시문학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기초적 상식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현: 네, 그러나 딱 이 점이 오늘날 적지 않은 조선족시인들에게는 결여한 허점으로 나타나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동: 그렇네요. 그런 일면도 적잖은 비중을 차자한다는 점에 동감입니다. 하옵시면 변형과 상징의 이미지들 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복합조합이 시에서 일으키는 준칙 같은 없는지요?

현: 네, 복합상징시에서의 이미지조합의 낯선 자극을 위해서는 우선 기성 질서에 대한 해체작업이 필요합니다. 즉 관습회된 상식이거나 윤리, 도덕, 철학 같은 것에 대한  반발과 철저한 파괴가 필요한 것이지요. 이것은 다다이즘과 포스터모더니즘과 같은 경향의 이치라고 할 수도 있지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 피에르 펠릭스 가타리(1930~1992)가 「천개의 고원」에서 수목 이분법으로 주장하는 이좀의 원칙⑴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세상 모든 것은 독립적인 존재이며 인간들이 그것을 자신의 필수에 따라 한데 묶어놓고 거기에 부여함으로써 점차 질서로 굳혀가게 되지요. 오늘날 인간은 그 질서이전의 독립적 존재상태의 세계에로의 환원을 꿈꾸며 그 환원세계에서의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냄으로써 이차원(異次元)의 경지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런 특성이 복합상징시로 하여금 변형이미지들의 낯선 조합을 이룩해가는 동력으로 되고 있는 것이랍니다. 

형태론 각도에서 보면 모든 상관물의 형태는 그 상황의 변모에 따라 각이한 뜻과 내함이 흘러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룰을 벗어난 언어의 자유로운 조합은 새로운 이미지 생성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의 조합은 자연스러운 조합으로 거듭나야 하지요. 억지조합내지 지나친 강압조합은 세상과 공감대를 이룩하기 어려우므로 이럴 때엔 언어와 언어를 이어주는 점착제 같은 표현의 힘을 입어야 하지요. 

이를테면 <모래>와 <토마토>를 강압적으로 붙여놓으면 <모래토마토>가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붙여놓고 새로운 이미지 창출이라 한다면 이는 세상과 공감대가 이룩되기 어렵지요. 이럴 땐 이 두 개 이미지의 원활한 결합을 위해서 <점착제>같은 표현의 낯선 결합을 동반시켜야 할 것입니다. 

모래에 묻힌 토마토의 숨결
모래로 부서지는 토마토의 색상
토마토의 어제는 모래로 부서져 내리고
... ... ...

이와 같이 표현하면 그 조합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낯설게 세상과 공감대를 형상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런 표현이 낯설게 되는 것은 그 표현히 지극히 환각적이라는 것에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환각의 특성은 생각, 상상, 련상, 환상과 같이 인위적인 것이 아닌, 무의식 흐름속 산물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즉 무아경속의 무질서한, 무방비상태에서 출범하는 연혼의 이미지현상이라고 볼수 있지요.

동: 네, 영혼까지 등장하네요.

현: 물론이지요. 시란 결국 인간의 마음이나 정서의 세계를 이미지로 펼쳐보이는것인데, 그 마음이나 정서는 인간의 육신에 부착해있는 영혼의 가르침에 의하여 각이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지요. 

우리는 늘 영감이 떠올라야 글짓기 쉽다고들 하지요. 영감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영혼의 감각을 뜻하는 말인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영혼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기에 인간은 이 세상에 왔다 가면서 시종 영혼의 가르침을 터득해가는 것을 그 사명으로, 숙명으로 간주하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그 영혼의 가르침은 어떤 것으로 시인 앞에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화자의 무아경속의 무질서한 환각의 흐름으로 질서 없이 펼쳐지고 있는데, 화자는 그 환각의 세계에서 자신의 영혼이 점지해주는 것들만 골라서 한데 묶어놓게 되지요. 
이것이 복합상징시를 쓰기 위한 첫단계의 작업이지요. 하기에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연혼의 감각을 받아 적는 기계적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랍니다. 

그다음 작업부터는 영혼의 감각에 따라 받아 적은 확각적 이미지조합작업인데, 여기에서도 각이한 이미지들 사이의 조합이 느낌이 가는대로 붙여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묶어놓은 조합이 세상의 공감대를 울릴수 있느냐 없느냐는 화자 영혼의 미학관과 세계관, 철학관, 인생관과 직접 연관이 되겠지요. 이는 또한 화자의 내공수련의 깊이와 높이와 너비과 직접 관련되는 것이라고도 할수 있겠지요. 

하기에 인간은 시종 영혼이 이끄는 대로 이미지의 변형조합을 환각의 장면흐름으로 재조합함으로써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가는 것이라 할수 있지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시인은 시를 쓸 때 이념의 주관입지에서 출발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시종 영혼의 계시에 따라 그 경지를 그려내고 그것에 대한 해법을 새로운 질서로 터득해간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질서란 무엇일까요? 상징으로 펼쳐 보이는 새로운 질서란 <딱 무엇이다>라고 하기보담은 그냥 어떤 환각적 변형장면의 흐름으로 세상에 각이한 느낌을 던져주면서, 그 속에서 그 내함의 진지한 의미를 가려내게 하는 것이랍니다. 

이것이 복합상징시의 주특성과 창작에서의 이미지조합의 원리와 법칙이라 할수 있지요. 

동: 네, 비록 장황스럽기는 하지만 솔깃한 말씀들이기에 감수가 새로웠습니다. 복합상징시는 그 외 작시법에서의 독특한 점은 따로 없는지요?

현: 물론 아무리 듣기 좋는 노래도 두 번 다시 들으면 따분하다는 말이 있지요. 복합상징시는 표현기법을 위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목에서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 같은 시어의 중복 사용을 절대 금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 형용사, 상태부사, 규정어, 수식, 설명 같은 것도 될수록 극력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치는 공백과 여백의 미학을 실행함으로서 세상에 상상의 깊이와 너비, 높이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 습작학에서의 기초상식들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할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조선족시단에서는 아직도 이런 병페가 무성하기에 특히 강조하는 바입니다.
물론 시행과 연의 조직은 고정된 틀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호흡의 자단과 정감의 폭에 따라 구성되는 보편적이지만 낯설 자극의 생성을 위해서는 이것마저도 파격적 시도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동: 그렇군요. 그러시다면 금후 복합상징시의 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현: 네, 복합상징시는 중국 연변이란 시골에서 생성되었지만 오늘날 조선족시단, 한국시단을 뛰어넘어 국제 시문학 영역에 영향 미치는 신형 류파의 시라고 할수 있지요. 하지만 대중문화로서의 리얼리즘시와는 달리 초현실주의 상징시의 한 갈래인 복합상징시는 광범한 독자군을 수용하기 힘들게 됩니다. 이는 숟가락, 젓가락 같은 일상용품과 가격이 엄청난 꽃병의 구별과 같다고 할수 있지요. 
복합상징시는 대중적 이해와 인식을 떠나서 지성적인 삶을 지향하는 형이상시문학 계열에 속하므로 금후에도 극히 협소한 독자군만 소유하게 될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술적 높이와 사명은 부인할 수 없는 존재로 문학사에 당당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입니다. 

동: 아, 시인님, 감사합니다. 요즘 쟁점화제로 부상되고 있는 복합상징시에 대한 이해를 다소나마 가질 수 있도록 좋은 말슴 들려주셔 감사합니다. 금후 복합상징시의 폭 빠른 번영과 발전을 기대하겠습니다.

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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