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화 프로필  
1978년 청산리 출생.
중단편소설 60여편, 수필 다수 발표.
연변일보해란강문학상, 도라지소설상, 민족문학 년도상, 연변문학 소설상 등 수상.
전국제8차청년작가창작회의 참가, 2019한중일청년작가회의 참가, 로신문학원 41기 중청년고급연수반 수료.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회원 . 
소설집 ‘적마, 여름 지나가다’
장편소설집 ‘눈부신 날들’ 출간, 

수필

1. 아버지의 하늘 



내 아버지는 내세울게 없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학교를 다닌적 없었고, 잘생김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수토로 인해 무릎관절이 튀여나와 걸음걸이가 평지에서 걸어도 언덕길을 오르듯 두 무릎에 바짝 힘을 주고 힘겹게 걸어야 했다. 

아버지의 별명은 자린고비였다.
얼마나 깍쟁이였냐면, 가령 밥이 쉰 것 같으면 기어이 찬물에 헹궈서 꾸역꾸역 잡수셨고, 전날저녁에 삶은 옥수수국수가 이튿날이 되어 면발이 토막토막 끊어지면 숟가락으로 국수를 미음처럼 떠서 잡숫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하나에 십전씩 하던 담배종이가 아까워 평생을 우리가 쓰던 학습장을 찢어 그걸로 엽초를 말아 피시던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한테서 용돈을 받아 쓴다는건 정말 오금이 저려오는 일이였다. 용돈을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우선 용도를 물어보고 노란 궤짝을 열고 두터운 모택동 선집을 착 꺼내셨다. 

그리고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신중하게 모택동선집을 펼치고는 장가가는 신랑이 입으려고 다려놓은 양복깃처럼 빳빳하게 주름 하나 없이 누워있는 돈중에서 가장 적절한 한 장을 고르셨다.
"돈이란게 얼마나 귀한건지 아냐? 이거 하나 벌기 위해서 아버지는..." 하고 시작되는 아버지의 그 돈 한 장이 오기까지의 험하고 어려운 과정을 듣는 일은 정말이지 지겨운 일이였다. 아버지 그 돈 안가질래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걸 꾹꾹 눌러가며 발에 쥐가 나도록 기다린 뒤에야 그 소중한 돈이 내 손에 쥐여질수 있었다. 
아버지는 멋있는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였다. 내가 그렇게 질색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노상 바지가랑이를 양말안에 착 넣고 양말목을 길게 잡아당겨 바지가랑이를 감싸듯이 하고 다니는 사람이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거울따위 와는 전혀 친하지 않는 사람이였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가 거울앞에서 옷맵시를 가다듬는걸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였다.
어느 해인가는 아버지가 시내에 무슨 일로 가면서 몇시쯤 되면 외양간에 있는 꼴단을 헤쳐서 소한테 주라고 했다. 네네 했는데 그만 엄마도 우리도 그걸 까먹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여태 아버지 혼자서 소를 먹이는 일을 도맡아 하다보니 전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 그만 잊어버리고 만것이였다. 오후가 되어 버스로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노해서 펄펄 뛰더니 창고에서 시퍼런 낫을 들고 나가 집 아래 자류지 콩밭의 콩을 마구 베여서 소한테 먹이는 것이였다. 
덕분에 소는 생각지 않던 고급음식으로 한끼 배불리 먹었고, 우리는 속이 조마조마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콩을 베는 아버지의 그 과격한 몸놀림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지켜 보아야 했다.
다행히 뒤끝은 없는 성격이라 두어시간쯤 지나 화가 사그러 들었고, 덕분에 저녁밥은 무사히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자기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였다.
우리 친구중에 머리가 정말 나빠서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구구단을 떼지 못한 남자애가 있었는데 갸네 아버지가 이 집 막내딸 우리 며느리로 삼기요. 하는 롱담에 대뜸, 어디서 그런 돌대가리를 남의 귀한 딸한테 갖다 붙이오. 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서 그만 두분이 얼굴을 붉힌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지나치게 자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운동대회를 하면 당신 자식들이 참가하는 경기만 응원했고, 당신 자식들이 일등을 하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고, 동네 집 애가 일등을 하면 대놓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공구량 바치러 가서도 꼭 우리 집 콩이 일등을 맞아야 기분이 좋아하고, 가령, 남의 집 콩이 일등을 맞고 우리 집 콩이 이등을 맞으면 대놓고 얼굴이 검으락 푸르락 해지면서 화를 내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당당하기도 했다.
나이 48살에 막내딸을 낳아 보는 사람마다 손녀냐, 딸이냐 하고 물었어도 언제 한번 게면쩍어 하지도 않고 당당히 내 딸이오. 했고, 자식벌되는 젊은 부모들한테 전혀 기죽지 않고 어깨를 쫙 펴고 학부모회의에 참석해서 우리 딸만큼 머리 좋은 애가 어디 있냐고 우쭐하기도 했다. 

점잖고 멋있고 교양 넘치는 교과서적인 아버지를 꿈꾸며 성장기의 나는 아버지의 그 솔직함과 당당함을 창피해하고 심지어는 경멸했었다. 아버지의 인생은 지극히 소시민적이고, 참으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나이 마흔살,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버지는 나이 아홉 살에 엄마를 여의고, 13살에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시집오고, 할아버지 환갑나이에 두분이 아들 하나를 더 낳다보니 사형제의 맏이가 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는 할머니가 데리고 온 여동생 둘과 스무살이 안된 삼촌을 기꺼이 끌어 안으셨다. 여동생 둘을 시집보내고 삼촌을 공부시켜 장가를 보내고 집까지 마련해주어 아버지가 못 다한 역할을 온전하게 해냈다.
아픈데가 많은 안해였지만 언제 한번 얼굴을 찡그린적도 없이 좋다는 약은 다 사먹이면서 보듬었고 자식 넷을 키워내셨다.

아버지의 어깨우에 놓여졌던 그 고단한 삶의 무게를 생각해 보는것만으로 다리가 휘청해난다. 

힘들다는 넉두리 한번 하지 않고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마주하고 그 삶에 최선을 다한 내 아버지. 

아버지는 새벽같이 깨여서 여름이면 풀 좋은 들판을 찾아 소를 매고, 먼지가 끼여 거뭇거뭇한 얼음이 녹아내리는 초봄이면 속새풀을 수레가 안보이게 베여다가 소를 먹이고 아침밥을 먹기전에 서너이랑쯤은 밭기음을 매던 사람이였다. 

남들이 다 노는 농한기에도 돈이 될만한걸 기웃거려 광주리도 틀어서 팔고 낫자루도 해서 팔던 부지런한 사람이였다. 
학교는 못다녔지만 어깨너머로 깨친 글씨로 한어로 된 농약설명서도 알아보았다. 세상에 다시 없을 구두쇠였지만 공구량 바치러 시내로 가서는 당신은 식당에 가서 푸짐하게 한번 잡숫는 일 없이 시장통에서 순대 한그릇 사드시는걸로 대만족하시고, 온집식구가 같이 먹을 돼지고기 한토막, 애들이 좋아할 사탕 한근, 과자 두어근 사고, 책을 좋아하는 막내딸한테 골라골라 책두껑이 그럴사한 동화책을 사다주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쯤 되어서는 당신이 죽으면 화장하고 골회를 그냥 날려버려라. 번거롭게 골회함 만들지 말고, 그리고 할아버지 묘는 내가 살아있을때까지만 제사를 지낼테니 내가 죽으면 그것도 하지 말아라 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하는 아버지가 너무도 목소리도 크고 멀쩡해 보였음으로 흘려 들었었다. 헌데 정말로 며칠후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지셨고, 영영 일어나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평소에 혈압이 높았냐, 아픈지 오래 된거 아니냐 하는 쟁론들이 있었다.
평소에 자신은 돌도 소화시킬 정도로 위장이 튼튼하고 머리도 맑고 차돌처럼 건강하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던 아버지의 말을 곧이 듣고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 한번 시켜드리지 못했던 자식들은 그저 망연할 뿐이였다.
닮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어쩔수 없이 당신의 고지식함을 닮은 당신 자식들은 당신의 유언대로 골회함도 만들지 못하고 아버지의 골회를 흐르는 강물에 그냥 날렸다. 할아버지의 묘지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20여년이 흘렀으니 아마 지금쯤은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풀을 베고 가토를 해가면서 아버지가 정성들여 가꾸던 할아버지 묘지가 이젠 평지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아버지와 함께 찾아갔던 기억을 되살려 할아버지 묘지를 한번 찾아가볼 생각이다. 평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할아버지 묘소에 술 한잔 붓고 큰절 한번 올려야겠다. 

그리고, 아버지께 말해주고 싶다.
아버지, 당신은 내세울게 많은 분이라고.

2018. 5.20 

 

수필

2. 삶의 흔적
 


출입문쪽에 하나둘 쌓인 짐이 끝내 다섯 개를 채운다. 큰 가방 두 개에 작은 가방 두 개, 거기에 만만치 않은 크기의 박스 하나, 덩치가 제법 크다. 이제 휑뎅그레해진 기숙사안을 둘러보고 다시 켜켜이 쌓인 짐을 둘러본다. 언제 어떻게 저 많은 물건들이 내게로 왔단 말인가. 내것이 되었단 말인가. 이 좁은 기숙사안 어디에 저것들은 숨죽이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이렇게 커다란 덩치로 저기 버티고 있는걸가. 저 안에 들어있을 수많은것들이 다 내것이 맞긴 맞는걸가. 다 필요하긴 한걸가. 나는 저토록 많은 물건들을 소유해야만 비로소 생존이 가능한 인간인가.
후. 저도 몰래 한숨이 나온다. 이제 저 다섯 개의 짐짝을 어떻게 움직여 새로운 거처로 이동하지 하는 생각에 벌써 막막해난다. 왜 나는 이런 날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저 많은걸 욕심부려 내것으로 만든건가 싶어 슬며시 자신을 원망도 해본다. 주섬주섬 다가가 혹시 짐 하나라도 덜수 있을가싶어 이 가방 저 가방 열어보고 맨 밑까지 손을 넣어 일일이 확인해본다. 한참만에 나는 이마에 비지땀을 닦으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헉헉 숨을 몰아쉰다. 말짱 헛수고다. 아무리 뒤지고 꺼내봐도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없다. 버리면 또 당장 돈들여서 사야 할 필수품들만 있다. 하긴 집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부터 될수록 필요한것들을 줄이며 살기에 애썼으니 그럴법도 하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지 않았고 과감히 불필요한것들을 버리고 그렇게 적게 소유하느라 무진장 애를 썼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녀야 하는 불안정한 삶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렇게 모지름을 썼음에도 이렇게 내가 망연해질 정도로 물건들이 많이 불어나있다니 살짝 허망한 기분마저 스친다. 매번 일자리를 옮기거나 거처를 옮겨야 할때마다 번번히 지금처럼 나를 막막하게 했던 내 물건들. 그때마다 이제 정말 다 버리고 트렁크 하나 정도의 물건만 남겨야지 하고 윽윽 별렀었다. 벼르면서 버리지는 못하고 온갖 힘을 다해 짐을 끌고 다니느라 기진맥진해질 정도로 지쳤었다. 새로운 거처에 가서는 또 어떠했는가. 하나 둘 짐을 정리하다보면 정작 버려야지 했던것들이 얼마나 필요한것인지를 새삼 느끼면서 다시 사용했다. 버려야지 윽윽 별렀던 마음은 어느새 안버린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마음으로 바뀌여있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매번 막연해하고 매번 힘들게 끌고다니고 그러면서도 버리지는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건 바보만 하는짓이라는데 그렇게 따진다면 나는 분명 바보가 틀림없다.
저 수많은 물건들, 내 몸을 감싸주고 추위를 막아주고 편히 자고 생활할수 있도록 해주었던 물건들. 여기저기 흩어져 조용히 제자리에 숨어있을때는 그 존재조차 기억하지 않았다. 내가 필요할 때 찾아보면 항상 그 자리에 있어줄때도 소중한줄 몰랐다. 생각해보면 정말 고마운것들인데 지금 나는 한곳에 모아놓고 부담스러워만 하고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처럼 간사한것인가. 이것들은 내 살아온 흔적이고 내 삶이 스쳐간 증거일텐데. 
삶이란 저 가방안에 수북히 들어찬 물건들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쳐도 어느새 기다랗게 남겨지는 흔적같은것인가. 흔히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중요한건 현재이고 미래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 상대에게 보내는 영혼없는 위안 혹은 위로가 아닐가 싶다. 과거가 어찌 중요하지 않을수 있을가. 한 사람의 과거는 결국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고 역설적으로 그 흔적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것일터이다. 내게 아니라고 해도 이건 네거다 하고 지문이라도 찍혀있을것 같은 어쩔수 없는 내것일것이다. 그런 그것이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것이 될수 있을가. 내것이 아닐수 있을가. 내 과거란 좋은것이던 나쁜것이던 버리고싶어도 버려지지 않는 물건과도 같다고 해야겠다. 혹여 버린다 해도 내 머릿속에 기억은 남아 문득문득 아 그것, 하고 생각나게 만드는것들. 문득 떠올려지고 문득 아쉬운 손때묻은 미련으로 가슴 한켠이 아릿한 영원한 내것이 아닐가 싶다. 아름다운 과거, 유쾌한 흔적은 떠올려보면 기분좋고 나를 알거나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기억해줬으면 좋겠고 불쾌하고 안좋은 과거라던지 흔적은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꿈결처럼 아무도 모르게 없던 일이 되고 내 그 찝찝한 과거 혹은 흔적을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단체로 망각증이라도 걸렸으면 싶은게 인간의 요상한 마음일것이다. 하지만 삶은 외려 지나치게 공평하다싶을 정도로 좋고 나쁜 과거나 흔적 모두를 오롯이 내가 걸어간 길에 화인처럼 새겨놓는다. 들여다보면 지금의 내 모습이 오롯이 비치는 거울처럼 내 지난 과거와 내 지나온 삶의 흔적은 지난날의 나를 숨김없이 새겨놓는다. 내 과거가 좀 덜 민망했으면 좋겠다. 내 흔적이 좀 덜 추하고 좀 더 내 마음에 드는것이였으면 좋겠다. 그럼 난 현재의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내 삶의 자세도 막연하게 알수 있을것 같다. 
다시 짐을 바라본다. 여전히 막막하다. 저 덩치 큰 녀석들같으니라구. 하지만 늘 그래왔듯 난 저것들을 버리지 않을것임은 분명하다. 아니, 버리고싶어도 버릴수 없을것임이 틀림없다. 어떤식으로든 힘들게 낑낑 끌고 당기면서 새로운 거처로 데려갈것이다. 새로운 곳에 내 몸과 함께 저 내 과거이며 흔적인것들을 풀어 여기저기 뉘여놓을것이다. 내 몸이 새로운곳에 적응하고 내 마음이 새로운 환경과 더불어 생겨난 낯선 주변의 변화들을 받아들이는동안, 저 분신같은 내 물건들 또한 새로운 곳에서 한 몸 뉘일 자리를 잡아가겠지. 그런 시간들속에 이리저리 부대끼면서 난 내 삶이라고 생각되는것을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갈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모든 지금의 과정들을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진하지 않은 커피 한잔 앞에 놓고 혼자 떠올려보며 그래 그랬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여볼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길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저 버릴수도 버려지지도 않는 애증어린 내 분신들을 데리고 새로운 거처로 떠나야겠다.


 수필                 

3. 감자골 사람들

 


나는 청산이라는 곳에서 태여나서 자랐다. 청산은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으로 막혀있는 동북의 한 평범한 산간벽촌이다. 수전은 없고 한전농사만 하는 곳이였는 데 산비탈 밭이 반이상이고 무상기가 짧다보니 소출이 시원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을이면 메돼지가 내려와서 다 된 곡식을 절단내는 일도 례사라서 청산사람들에게 농사는 별로 기댈것이 못되였다. 그나마 산을 끼고 살아서 산부업이 있으니 망정이지 농사만 해서는 죽도 못먹을 판이였다. 

이렇듯 척박하고 농사도 안되는 고장이 다행스럽게 감자농사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되였다. 산비탈의 쑥이나 싸리나무를 걷어내고 가랑잎이 썩어 내려앉은 검은 부식토를 뚜져서 감자를 심으면 그야말로 아이들 머리통만한 감자들이 땅밑으로 길게 뻗어나가며 주렁주렁 열리군 했다. 산짐승피해만 막아내면 감자농사는 웃음이 나올만했다.  

감자농사가 잘돼서 청산은 감자골이라고도 불렸다. 청산사람들은 감자를 많이 심었고 그러다보니 감자를 이용해서 해먹는 음식도 참으로 다양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쪄먹는 거였고 겨울이면 노상 재불에 감자를 묻어서 구워 먹으며 긴긴 밤을 아무 때건 벌컥 하고 내 집처럼 뛰여드는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보내군 했다. 구운 감자는 반으로 자르면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터지군 했는데 먹는 동안 입가에 가루가 허옇게 묻고 손에도 부실부실 감자가루가 묻어나서 자주 손을 비벼 가루를 털어내야 했다.  

내가 열서너살 되던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청산사람들은 집집마다 먹을 쌀이 빠듯했다. 그래서 감자를 납작하게 저며서 가마에 펴고 한번 부르르 끓어오르면 거기에 입쌀이나 조쌀을 앉혀 밥을 했다. 큰 소래에 밥을 담아 중간에 놓고 먹던 때였는 데 새로 지은 밥에 놓은 감자는 그나마 먹을만 했지만 점심때가 되면 감자가 식어버려 아릿한 냄새와 이상한 군내가 나서 도로 뱉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맛이 없었다. 아이들은 자연히 감자를 한쪽으로 밀어내며 쌀을 골라 숟가락질을 했는데 부모들한테 혼나기가 일수였다.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건 감자가마치였다. 마흔두살에 나를 낳은 늙은 엄마는 밥을 먹고 나면 늘 가마에서 잘 마른 가마치를 가마훝개로 벅벅 긁어서는 양푼에 담아서 가마목에 던져놓군 했다. 얇고 바삭하고 고소한 감자가마치는 언제 먹어도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다.

배고프던 그 시절에 청산사람들에게 있어서 감자는 참으로 효자같은 존재였다. 6월말쯤 되어 감자꽃이 피였다 지고 작은 록색의 열매가 맺힐때쯤이면 엄마는 이제 먹을만한게 있을거라고 하면서 광주리를 들고 감자밭으로 갔다. 엄마가 땅이 갈라진 곳을 호미로 살살 뚜지면 신기하게도 닭알만큼한 크기의 뽀얀 햇감자가 나오군 했다. 그렇게 캐온 햇감자는 고추를 섞어 볶아 먹기도 했고 장국을 끓여 먹기도 했고 풋옥수수와 함께 삶아 저녁 한끼는 그걸로 때우기도 했다. 

가을이면 청산사람들은 집집마다 감자를 몇십마대씩 수확했다. 감자는 크기에 따라 몇등급으로 분류했는데 크기도 적당하고 속도 가지 않은 일등감자는 청산학교를 사이둔 림장마을의 사람들한테 팔아서 돈을 만들었다. 그 외의 감자는 장국을 해먹거나 볶아먹거나 간장에 졸여서 반찬으로 먹었고 더러는 갈아서 전분을 냈는 데 내가 어릴때는 손으로 한사람이 하루에 몇마대씩 감자를 갈았다니 농촌아줌마들의 고달픔을 알수 있다. 그나마 내가 열살쯤 되던 때인 80년대 후반부터는 감자를 씻어서 쏟아넣으면 절로 갈아지는 기계가 있었다. 가을이면 강옆에 기계를 설치해놓고 집집마다 기계에 감자를 갈아서는 큰 채에 건더기를 퍼담고 앙금을 걸러냈다. 앙금이 바닥에 가라앉으면 물을 찌워내고 새로 물을 붓고 다시 앙금을 밥주걱으로 뜯어내서 가라앉히는 작업을 했다. 반복해서 우려내다보면 벌건 감자물이 점차 말갛게 되고 밑에 가라앉는 앙금도 점차 하얘졌다. 그걸 말려서 채로 치면 고운 전분가루가 얻어지는 것인데 누구네 집 감자전분이 더 희고 곱냐를 두고 아줌마들사이에서 은근한 경쟁이 일기도 했다. 

감자전분은 더러 시내 장마당에 가서 팔기도 하고 익반죽해서 얇게 밀어서는 투명하고 파뜰거리는 " 감분밴새 "를 하기도 했지만 주로 하는 음식은 일명 " 감분국수 " 라고 불리는 감자전분으로 누른 국수였다. 백반을 넣고 익반죽을 해서 국수틀에 넣고 국수를 눌렀는 데 익반죽이 잘돼야 국수가 질기고 생전분냄새도 안나고 맛있게 되는거라서 아줌마들은 익반죽이 설지 않게 잘 하느라 손바닥이 델 지경이였다. " 감분국수"는 귀한 손님이 오거나 군일때면 빠질수 없는 음식중 하나였다. 내가 아홉 살즈음 한 동네에 사는 외사촌오빠가 겨울에 결혼식을 했는 데 버들로 엮은 커다란 광주리에 흰 " 감분국수 " 를 몇광주리나 눌러서는 강에 가지고 나가서 얼음물에 헹궈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앙금을 우려내다보면 마지막 부분은 찌꺼기가 많아서 우려낸 전분이 거무스레하고 손으로 만져도 뽀득거리지 않고 푸실푸실했다. 밴새나 국수를 하기에는 빛깔이 안 좋은터라 그런 전분은 콩기름을 달이다가 볶아서 먹었는 데 꼭 마치 파뜰거리는 회색의 묵 같았다. " 감분범벅 "이라고 부른는 음식이였는 데 양념간장을 해서 먹으면 참 맛있었다. 앙금을 뺀 건더기는 손으로 잡아보면 푸석푸석했는 데 둥글넙적하게 빚어서 돼지우리우에 올려놓고 말렸다가 겨울내내 돼지죽가마에 한덩이씩 넣어 끓여서 돼지를 먹였다. 

감자를 강판에 갈아서 지짐도 많이 해먹었는 데 지금은 모양이 잘 잡히라고 감자를 간것에 밀가루를  섞고 달착지근한 맛을 내느라고 양파를 갈아넣기도 하지만 그때의 감자지짐은 순 감자를 간 것을 커다란 국자로 떠서 쇠가마나 평가마에 기름을 두르고 어른 손바닥보다도 더 큼지막하게 부쳐냈었다. 엄마는 감자지짐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고 애들 넷을 가마주위에 앉혀놓고 연신 구워내서 접시가 빌세라 놔주군 했다. 따끈한 감자지짐이 맛있다고 호호 불며 엄마가 부쳐주는 지짐이 접시에 놓이게 바쁘게 굽을 내던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크고 진한 엄마의 자식사랑인지를 미처 몰랐었다. 

오그랑죽 하면 대개는 입쌀과 차입쌀가루를 섞어서 가루 낸 반죽으로 빚은 새알심을 떠올리겠지만 청산에서는 오그랑죽에 들어가는 " 오그래 "도 감자를 갈아서 빚었다. 감자를 갈아서 전분을 내듯이 물이 잘 빠지는 면주머니에 넣고 물을 추가해가며 여러번 짜면 앙금이 빠져나가고 주머니에 건더기만 남게 된다. 다라이에 앙금이 씻겨나간 물을 가라앉히면 앙금이 밑에 내려앉게 되는 데 그러면 조심스레 물을 찌워던지고 그 앙금에 주머니의 건더기를 섞어서 반죽해서 " 오그래 " 를 빚었다. 감자 " 오그래 " 는 동그랗게 빚은 뒤 한번 살짝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었는 데 이는 괜히 멋모르고 꽉 씹었다가 뜨거운 감자 " 오그래 " 에 입천장이 델가봐 그렇게 하는 거라고 했다. 팥을 삶아 으깨고 걸러낸 물에  입쌀을 조금 넣고 끓이다가 감자 " 오그래 " 를 떼넣고 만들었는 데 엄마는 거기에 넣는 입쌀마저 아껴서 조금 넣으려고 하고 나는 더 넣으라고 떼를 썼다. 나는 오그랑죽이 구미에 맞아서 오그랑죽만 하면 한사발을 다 굽내군 했다. 엄마는 내가 오그랑죽을 잘 먹는 다고 번거로움도 마다하고 사나흘이 멀다하게 감자를 갈아 죽을 쑤군 했다. 

감자는 또 떡을 쳐먹기도 했다. 감자를 삶아서 매우매우 으깬 뒤에 떡메로 쳐주면 탄력이 생겨서 쫄깃하니 맛있었다. 그 떡을 수제비를 뜨듯이 조금씩 떼서 또 감자를 볶은 감자국에 넣어서 끓여먹기도 했는 데 별미였다. 겨울이 되여 한가해지면 사람들은 감자밭에 가서 가을에 흘린 감자가 언 것을 주어오기도 했고 알이 잘아서 깍아먹기가 힘든 감자는 일부러 얼려서 언감자를 만들기도 했다. 꽁꽁 언 감자는 집에 들여다가 물에 담가서 녹인 뒤에 껍질을 벗겨서 감분물을 입힌뒤 쪄먹기도 했고 말려서 가루를 내기도 했다. 언감자가루는 반죽해서 소를 넣고 " 언감자밴새 "를 해먹기도 했고 납작한 모양으로 빚어서 콩을 박은뒤 쪄먹기도 했다. 

근 3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 흘렀다. 감자골의 아이들은 오로지 땅에 의지해 살던 부모세대와는 달리 지구촌 여러곳에 뿔뿔이 흩어져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나도 고향을 떠난지가 20년이 훌쩍 넘었다. 몇년전, 친구들과 함께 청산에 갔었다. 20여년만에 찾아갔지만 청산의 산과 강은 시간이 정지된 듯 기억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감개무량하게 고향산천을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감자에 대한 추억을 들춰냈다. 지금이라도 저 산자락의 묵은 덤불을 걷어내고 감자를 심는다면 틀림없이 어릴적 먹었던 그 흰가루가 푸슬푸슬 날리던 감자가 수북히 열릴거라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이제 청산에 남아있는 고향사람들도 생활이 유족해져 쌀걱정을 안하는 건 물론이고 랭장고에 고기도 넣어놓고 있다. 그러니 굳이 감자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드느라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고 우리도 추억일뿐  고향의 산자락에 감자를 심어 음식을 해먹을 일은 없을것이다. 

살면서 유난히 힘이 들고 축축 처질때가 있다. 그런 날들에 나는 척박한 땅을 뚜지고 감자를 심고 가꾸며 굵은 땀방울을 흘리던 아버지들과 뜨거운 감자에 데여 늘 손바닥이 벌겋던 청산의 엄마들을 떠올려 본다. 그러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것들이 별것 아닌것처럼 느껴지군 한다. 

현실은 고단하고 많은 것들은 우리의 힘으로 바꿀수 없다. 감자 하나외에는 잘되는 게 없던 고장에서 환경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감자농사를 짓고 감자를 활용하여 각종 먹거리를 만들어 먹으며 살아가던 청산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어진 내 삶의 테두리안에서 옥을 발견할줄 아는 사람들이였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 외에는 다 별것 아니라고 늘 버릇처럼 말하며 크고 작은 곡절들을 겪고 나서도 언제나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힘을 내서 의연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삶이 고달픈 시간들이 오면 나는 그 씩씩한 사람들을 떠올리군 한다. 그러면 내 앞에 밝은 빛 하나가 보이는 듯 하고 나는 다시 일어설수 있는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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