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길 위의 식사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 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계간시안』2011. 겨울)
(2012년 제2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무화과

 

술안주로 무화과를 먹다가
까닭 없이 울컥, 눈에
물이 고였다
꽃 없이 열매 맺는 무화과
이 세상에는 꽃 시절도 없이
어른을 살아온 이들이 많다


「즐거운 소란」천년의시작,2022.1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주)실천문학, 2014, 11쪽.


 

제부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시집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 
  화남출판사  ,2007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고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위대한 식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시집 『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밥알        


갓 지었을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 구나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정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 보는 것이다

 

 
봄의 직공들

                            

파업 끝낸 나무와 풀들
녹색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줄기와 가지 속 발동기 돌려 수액 퍼 올리랴
잎 틔우랴 초록 지피랴 꽃불 피우랴
여념이 없는 그들의 노동으로 푸르게 살찌는 산야
이상하게도 그들은 일할수록
얼굴빛 환해진다고 한다

 

뒤적이다                   
                                                                                               
 
망각에 익숙해진 나이
뒤적이는 일이 자주 생긴다
책을 읽어가다가 지나온 페이지를 뒤적이고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거듭 동선을 뒤적이고
외출복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뒤적인다
바람이 풀잎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햇살이 이파리를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달빛이 강물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
뒤적인다는 것은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
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
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다

이재무 약력


충남 부여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과 석사 수료.
1983년  '삶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섣달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저녁 6시', '경쾌한 유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슬픔은 어깨로 운다', '데스밸리에서 죽다', '즐거운 소란'

시선집 '얼굴' , '길 위의 식사', '오래된 농담' 

산문집 '생의 변방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 '집착으로부터의 도피', '쉼표처럼 살고 싶다' 시평집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가 있음.

수상경력: 윤동주문학대상, 소월시문학상,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풀꽃문학상, 송수권문학상, 유심문학상, 이육사 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대 대학원, 서울디지털대학에서 시 창작 강의/ (주) '천년의 시작'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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