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동포작가협회(재한동포문인협회, 재한동포문학연구회 주관)에서는 본지와 협력하여 재한동포문인들이 발표한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정해서 발표하는 '自選대표작 프로젝트'를 실행 중에 있습니다. 매인, 시는 5-10수, 수필은 2-5편, 칼럼은 3편, 평론은 2ㅡ3편, 소설은 1-3편을 선정해 약력 및 사진과 함께 dong01118@naver.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박수산 시인의 自選시 대표 작품입니다.

첫차에 목숨을 걸다 
 


이른 새벽 무언가 등에 업은 그림자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데굴데굴 굴러 나온다.

수탉이 첫 홰를 치듯 지하철 벨소리가 어둠을 벗기자
1호선 열차는 쌩하고 차가운 공기를 가른다

굴러가던 그림자들
등에 업은 무언가가 출렁인다

쿵쿵 발 울림소리
지하철 역사가 흔들린다.

지하철 무인 검표구는
천천히 지나가라고 빽빽 소리친다

청렴한 법관처럼 기관사는
인정사정 안 보고 떠나버린다

아직 술이 덜 깬 사내는
떠나는 열차를 쳐다보며 혀를 찬다

다리 절룩거리던 아줌마는
입에 거품을 문다

지하철 전광판에는
다음 열차는 15분 후에 있다고, 뜬다

지하철 승강장 여기저기서
업고 달려 온 그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지하철에서 잠자는 아가씨


내 어찌 모르랴
잠을 업고 다니는 나이
달게 잠을 자야하는 이른 새벽
취직을 위해
더 좋은 대학을 위해
그리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몸도 쪼개 써야 하고
잠도 쪼개 자야 하는
가난한 젊은이들
묶어놓은 잠이 풀어져
내 어깨로 살며시 건너온다

얼마나 힘들고 지쳤으면
책을 보다 말고 낯선 어깨를 베개 삼아
쓰러지겠느냐

나도 오늘 건설현장에 가서 
숱한 건설자재를 이 어깨로 날라야 
하루 일당을 벌지만 
아저씨가 너에게 도움을 줄 것 이란 
이 어깨밖에 없구나  

아가씨야
한잠 푹 자거라
그리고 다시 일어나
이 세상에 너를 괴롭힌다고 굴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하여라

 

상처

 

둘이 다정히 앉아
웃음만 가득 채워 넣고 찍은 사진
날이 선 현실 앞에서 찢어져야만 했던 그때
흘러가는 세월만이 상처를 기웠다

끝도 없이 지나온 구불텅한 산길
방향 없이 떨어지는 낙석을 피하느라
언제 한번 숨을 고르게 쉬어본 적 있었던가?

어느 날 내 귀를 열고 들어온 전화 하나
묻어두어도 썩지 않는 그리움 때문에
나도 몰래 마음에다 자리하나 내주었다

눈물로 다리를 놓고 건너온 강
다시 건너가려면
또 다른 눈물들이 다리를 놓아줘야 하기에

나는 오늘도
가만히 전화번호의 문을 열고도
전화를 걸지도
전화번호를 버리지도 못해
벌어진 상처에다 소금을 뿌린다

 

다시 키를 줍다


고참이 앉았던 자리
자동차 키가 떨어져 있다

주워서 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슬쩍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괴롭히던 얼굴이 스쳐 가고,

쩔렁!
떨어지는 열쇠꾸러미
쌓였던 스트레스 확 풀리기도 전
먼저 걱정이 쌓인다.

나는 다시 쓰레기통을 뒤진다

 

 

끝이 뾰족한 못
박으면 쑥 들어가서 자리 하나 잡는다.

좋은 자릴 잡으려고
어릴 때부터 남의 나라말을 배워야 했고
통학버스에 실려 하루에 몇 개의 학원을 다녀야 했다

높은 곳에 희망을 묶어둔 숱한 못들
가방끈을 늘이느라 분주하다

오늘도 학원가의 문턱에는 단내가 나고
귀가하는 발걸음 소리가 혼탁하다.

또 몇 년을 고시원에 박혀
날을 세우고
어딘가 박힐 자리를 찾느라고 서성거린다
졸업증과 자격증으로
끝을 뾰족하게 다듬고 또 다듬었지만
어깨가 축 처져 면접장에서 되돌아 나오는 못들,

가방끈은 많이 길어졌지만
못을 박을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고향

 

오라는 이도 없는데
가서 무엇을 하나 말해도
가고 싶다

가서, 철없던 시절
머리채 잡아당기며 별명을 부르고
만날 때마다 울려놓았던 순이 찾아
그때는 미워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가서, 논밭 물 때문에
주먹으로 눌렀던 철이 찾아
그때는 너무 했다고 말하고 싶다

가서, 제사상 차려놓고
마지막 숨결도 지키지 못한
어머니 혼이라도 불러보고 싶다

가서, 무너진 집터라도 둘러보고 싶다.
가서, 사라지는 냄새라도 붙들고 싶다.
가서, 묶어놓는 설움을 확 풀어놓고 싶다

반겨주는 이도 없는데
가서 무엇을 하나 말해도
가고 싶다

가서, 풋옥수수 한 솥 삶아놓고
낯선 이들에게 나누어 드리며
그땐 우린 이렇게
소박하지만, 욕심 없이 세월을 엮었다고 말하고 싶다

가서, 풀피리 만들어 불고 또 불다
예쁜 아가씨 지나가면
그땐 우린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못 하고
그저 풀피리만 불고 또 불었다고 말하고 싶다

가서, 진달래꽃 출렁이는 산에 올라
고사리도 꺾고 더덕도 캐며
지워지는 향기를 머리에 꽉 담고 싶다

가서, 새 친구들을 사귀고
고추장 바른 건 두부에 대파를 말아
배갈 한잔 카- 하고
잊어버린 맛을 되찾고 싶다

아는 이도 없는데
가서 무엇을 하나 말해도
가고 싶다

가서, 막걸리 몇 동이 빚어
낯선 이들에게 권하며
내 그림자도 여기에 묻혀있다고
말하고 싶다

가서 산에 올라 
구덩이를 파서 묘목을  넣고 
살같은 흙을 공꽁 밟아주고 싶다

가서, 만년을 보낼 수 있게
깨끗한 공기를 남겨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넥타이

 

양복을 입고
행사장에 갈 차비를 하다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잡노라니
손이 떨린다

합법으로 살고 싶어 고향 갈 때
무거운 선물함에
무게 있는 아버지의 양복도 담았다

마을 어귀까지 나와
기다리는 아버지
80이 훨씬 넘으셨어도
갓 돌 지난 아들처럼 웃으며 걸어오신다

내가 입던 구식 양복 벗겨버리고
새 양복 입혀드리니
넥타이에 손을 때지 못한다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모시고 나가려고
아버지 방에 갔는데
언제 혼자 양복을 꺼내 입었을까?

새 양복에 뒤짐까지 받쳐 방안은 환한데
비뚤게 얽혀 맨 넥타이가 눈을 흐린다.
풀고 다시 맬 때 손이 떨려
끝내 아내가 고쳐 맸다

먼 길을 가신 아버지
오늘도 넥타이를 혼자 맬 수 있을까?
돈 냄새에 코를 박고
타향에서 넥타이를 바로 잡노라니
손이 떨린다

 

오렌지 먹기

 

껍질 벗기기가 귀찮아
통째로는 먹지 못할까 엉뚱하게 생각하다
손톱으로 뜯고 또 뜯어 겨우 껍질을 벗겼다

하얀 혈관으로 피를 주고받으며 붙어 있는 알맹이들
맨살은 물렁하다
입에다 넣고 단물을 넘기는데
갑자기 산 뱀이 목구멍에서 넘어가는 느낌이다

우린 서로 너무 많이 껍질을 벗겼다
항상 쪽으로 가르는데 열중했던 과거가 목구멍에서 꿈틀거린다
원래 하나였는데 두부처럼 여러모로 가르고
같이 숨을 쉬는 땅인데 공기조차 골라 숨을 쉬고
한끝을 쥐고 종점까지 당겨야 하는데 한 줄을 놓고 서로 양쪽에서 당겼다
가르다 못해 제 핏줄도 대담하게 남의 족보에 버젓이 올려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사방에서 통 것들이 입맛을 다신다

 

중국동포


차라리 한글을 몰랐으면 좋겠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중국이란 글자만 나오면 떼를 지어 댓글들이 발동을 건다

어느새 한 군단이 되어 싹 쓸어버리 듯 줄 화살을 날리고 있다
언제부터 이랬을까
남들은 하고 싶어도 감히 못 하는 일 예사롭게 하고 있다.
제 핏줄을 다른 족보에 버젓이 올려놓고 화살에 독을 가득 묻혀 전멸시키지 못해서 아우성인다.

한 그루의 나무 위에서잎과 가지가 나란히 풍경을 만들어온 세상에 찬탄의 목소리 높이련만 지금은 잎 하나라도, 가지 하나라도 더 끊어 버리려고 광란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생각해보면 싸움시켜놓고 제 몸에 수혈하는 썩어가는 가지들. 지금 어느 곳에 엎드려좋아서 낄낄댈 거다.
그것도 모르고제일 아끼고 사랑해야 할 잎과 가지인데 뇌사에 걸렸을까 제 보루에다 화살을 마구 날리고 있다.

차라리 한글을 몰랐으면 좋겠다. 죽어가는 잎과 가지들을 안 보았으면 좋겠다.

 

지렁이


평생 익혀온 드릴공법으로는 콘크리트 길만은 뚫지 못하나 보다.

길 위로 상륙한 저것 바깥이 땅속보다 더 딴딴하다는 걸 이젠 알았나 보다.
코 뀐 소처럼 원만 그린다.

키워온 비만이 속도를 먹어 버렸나 보다. 사력을 다해 몸으로 노를 저었지만 차바퀴의 사정권에 벗어날 수 있을까

너무 어두워서시각이 필요 없다고 후각과 감각만 고집해 온 저것 땅속에서 드릴 공법으로만 살아온 저것 끝내 콘크리트 길 위에서 제 몸을 다시 조립하나 보다.
머리와 꼬리가 가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나무의 이사

 

아파트 출구
몇 달 전에 심은 몇 그루의 침엽수
살았는지 죽었는지
큰 병 앓고 있는 사람처럼 누르끄레하다

그 옆
아예 말라죽은 향나무 한 그루
뿌리째 뽑아버리고
측백나무를 심는 조경원
이번에는 죽지 말고 잘 살라고
웅덩이에 물을 붓고
거름까지 준 것도 부족해
영양주사를 꽂는다.

출구 맞은편
싸움소리 잦던 102동 철이네
오늘 철이 엄마는
어린 아들을 남편한테 넘겨주고
여행용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집을 나선다

헤어짐이 또 다른 삶의 출구라면
떠나면서 가슴에 심어지는 것은
뿌리를 꺾는 아픔일 것이다

어딘가에 심어질 여자 하나
가방을 들고 지나간다.

박수산 프로필 :

중국 서란시 출생 
2012년 '지필문학'에 '첫차에 목숨을 걸다' 등 시로 등단
재한중국동포문인협회 이사.
동포문학 시부문 대상 수상. 
시낭송 지도사 1급, 스피치 지도사 1급. 
메일: psao20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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