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실 : 교사, 《길림신문》 수필 응모 신인상, 《길림신문》 인성교육수기 응모 금상, 《연변문학》 《료녕신문》에 시 발표, 재한동포문인협회  디카시분장, 한국디카시인모임 회원.
이준실 : 교사, 《길림신문》 수필 응모 신인상, 《길림신문》 인성교육수기 응모 금상, 《연변문학》 《료녕신문》에 시 발표, 재한동포문인협회 디카시분장, 한국디카시인모임 회원.

중국에서는 살기 좋은 작은 지역을 일컬어 ‘소강남(小江南)’이라고 부른다. 역사 이래 “강남”에 포괄되는 지역은 그 범위가 부단히 확장과 축소를 거듭해 왔다. 오늘에 와서는 통념상 장강(長江) 이남, 태호 유역을 중심으로 한 남경, 진강, 상주, 우시, 소주, 항주, 호주, 가흥, 소흥, 영파, 상해 등 지역을 ‘강남’이라고 일컫는다.  

장강 하류, 타이후(太湖)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 ‘북강남(北江南)’이라고 불리는 우시(無錫)는 내가 오래전부터 한번 다녀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관광단체를 따라 말 타고 꽃구경식이 아닌 제대로 된 강남행의 꿈은 하루이틀 사이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2018년 8월, 딸이 강소성 우시의 모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면서 오래 품어왔던 소원이 이뤄질 기미가 보였다. 1년쯤 지나니 딸은 우시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강남행이 곧 현실이 되는 듯싶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19 팬데믹의 불운이 덮쳐 강남행의 꿈은 잠시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삼년 넘게 묶였던 발이 드디어 풀렸다. 지난 4월 29일, 나는 마침내 심양-우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시(無錫)의 어머니강―고운하(古運河)    

4월 29일 오후, 우시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저녁밥을 먹고 딸의 안내에 따라 우시의 명소 중 하나인 고운하를 가보기로 하였다. 

우시시를 휘감아 안고 흐르는 고운하는 우시시 10대 풍경구 중 하나이다. 북으로는 양쯔강, 남으로는 태호를 연결하고 총길이는 4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데 우시시를 흐르는 구간은 11킬로미터나 된다. 최근 고운하는 5년간의 복구 건설을 거쳐 2010년 국경절 전야부터 개통 개방되었다. 

고운하의 역사는 춘추시대(기원전 495년) 오왕(吳王)이 백독하(伯瀆河) 즉 백독항(伯瀆港)을 건설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수조 시기 수양제가 본격적으로 대운하를 파기 시작하였고, 원조에 이르러 베이징과 항주를 잇는 경항대운하를 건설하였다. 강소성 경내에서는 고운하를 직접 이용하면서 우시시의 고운하는 경항대운하의 한 구간이 되었다. 고운하는 경항대운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준받는데 있어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역대 통치자들은 고운하를 이용해 낭만적인 순유(巡遊)를 즐겼는데 강희, 건륭은 강남 행차 때면 우시에 머무르기를 즐겼다. 또한 우시 고운하는 남송 시기 민족영웅 문천상(文天祥)과 관련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기원 1275년 봄, 문천상이 원군과 담판 도중에 억류되어 배로 압송될 때 우시를 경유하게 되었다. 침략군에 반항하여 문천상을 구출하려는 의군들을 대비하여 원군은 문천상을 사면이 물에 둘러싸인 고운하의 황부돈(黃埠墩)에 억류시켰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운하 양안의 백성들이 원군의 사정없는 채찍질에도 굴함이 없이 강변에 꿇어 엎드려 향을 피우고 눈물을 흘리며 영웅의 안녕을 빌었다는 고사로 인해 우시의 고운하는 더욱 유명해졌다. 이에 문천상은 감개무량하여 “금산염염파도우, 석수망망초목춘(金山冉冉波濤雨, 錫水茫茫草木春)”이라는 비장한 시구를 남겼다고 한다. 이 강은 역대 교통과 농업 관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강은 우시의 최초의 인공 강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초의 운하라고 할 수 있다.  

고운하의 야경을 구경할 수 있는 남장거리(南長街)에 도착하니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뤄 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우리는 인파를 따라 서서히 운하 강변을 거닐었다. 
운하가 건설된 다음 우시가 생겼고, 우시 사람들은 운하와 함께 생존해 왔다고 현지 사람들은 말한다. 고운하는 우시의 어머니강이다. 창문을 열고 물을 마주하는 아침, 참방참방 노 젓는 소리를 들으며 노긋해지는 밤, 앞문을 열고 장터에 나서고 뒷문으로 강가에 이르러 씻고 빨래하고…강변을 거니노라니 강남 수향(水鄕)의 옛 모습이 아렴풋이 떠올랐다. 고건물은 낡고 파손된 흔적이 역력했으나 양안에 가로 걸린 궁형다리와 밤바람에 흐느적이는 오색영롱한 등롱이 자못 황홀했다. 운하 수를 논밭 관개와 생활 용수로 사용하여 온 우시 사람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게 하고 세세대대 전해 내려온 고풍스럽고 순박한 풍속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멀리 우뚝 솟은 고층 건물들은 현대 문명 속에서 나날이 변모하는 우시의 오늘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변의 고건물들은 복구되어 관광 기념품 상점, 맛집, 찻집, 커피숍 등으로 변모되었다. 가게는 관광객들로 붐비었고 왕훙(網紅)의 생방송으로 유명세를 탄 가게 앞은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운하에는 유람선이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출항지에서는 관광객들이 줄지어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객들 중에는 중국 전통 한복(漢服)차림 혹은 만화 속 주인공을 코스프레 한 처녀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고대와 현대, 현실과 가상이 공존하는 인파에 섞여 걷노라니 마치 몽환 속을 거니는 듯 하였다. 옛 거리 군데군데 만발한 장미꽃 향기를 머금은 밤공기와 운하 양안의 불빛이 어우러져 고운하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남장거리 끝에 이른 우리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름다운 태호 

“우시에 가면 태호를 봐야 하고 태호를 보려면 원두저(黿頭渚)에 가봐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원두저는 우시시 태호 서북연안에서 호수 안쪽으로 뻗어 들어간 반도이다. ‘원두(鼋頭)’는 반도의 끝자락이 자라가 머리를 쳐든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고 ‘저(渚)’란 ‘물가’란 뜻이다. 

4월 30일, 늦게 아침밥을 먹고 태호에 도착하니 풍경구는 벌써부터 관광객들로 붐비었다. 

태호는 중국 5대 담수호 중 3위를 차지한다. 첫눈에 안겨오는 태호는 호수의 일각에 불과했지만 맑은 날씨였음에도 멀리 물과 산이 잇닿은 곳이 분명치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태호를 구경하려고 작심한 젊은이들이 간간이 보였다. 태호의 크기를 가늠하게 하는 정경이었다. 

우리는 풍경구를 순환하는 셔틀 유개전동차를 타고 태호를 구경하기로 하였다. 차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원두저풍경구를 소개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원두저풍경구는 1916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새중국이 창립되면서 ‘원두저공원’이라 명명하였고 2012년 가장 먼저 5A급 풍경구로 인준받은 풍경구이다.  5A급이면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급 풍경구라고 이해하면 된다. 

풍경구에는 원두저와 태호의 자연경관에 근거해 이름 지은 충산은수(充山隱水), 원저춘도(黿渚春濤), 만랑권설(萬浪卷雪)등 볼거리가 허다할 뿐만 아니라 자고로 서하객(徐霞客)을 비롯해 태호를 유람한 시인이나 풍류객들의 동상, 그들이 남긴 시구로 명명한 암자, 누각, 별장, 석비가 녹음 속 곳곳에 들쑥날쑥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어 눈이 닿는 곳마다 운치 넘치는 풍경이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봄날의 벚꽃, 여름의 연꽃,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또한 절경이라고 한다. 

차가 움직이는 동안 눈에 안겨오는 풍경이 얼마나 절경인지 형용할 말이나 글이 빈약하게 느껴졌다. 아무렴 곽말약 선생도 “태호의 절경은 원두저에 있네(太湖佳絕處 畢竟在黿頭)”라고 하였을까.

전동차는 한참을 달려 첫 역으로 풍경구의 가장 높은 곳인 녹정산(鹿頂山)에 세워진 서천각(舒天閣)에 이르렀다. ‘서천각’이란 명칭은 모택동 주석이 지은 시구 ‘극목초천서(極目楚天舒)’에서 따온 것이다. 태호의 전경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누각 꼭대기까지 단숨에 오른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서북쪽으로는 녹음 우거진 크고 작은 섬을 떠이고 출렁이는 태호 물결 넘어, 고층 건물이 수림처럼 일떠선 우시시가 안겨왔다. 계속 오른쪽으로 움직이니 원두저의 아기자기한 명소들이 안겨왔다. 서서히 움직이면서 눈길을 동남방향으로 옮기니 태호가 바다와 잇닿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녹정산에서 아침 햇살을 맞는다는 ‘녹정영휘(鹿頂迎暉)’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아득히 트인 시야, 체감에 안성맞춤인 햇볕, 맑은 공기, 상쾌한 바람…비록 이른 아침은 아니었지만 상서로운 기운이 몸에 스미면서 전신이 청정해 지는 듯하였다. 좀 더 움직이니 태호 주변의 산과 물이 어우러진 정경이 안겨왔다. 태호는 70개의 산에 둘러 싸여 있다고 한다.

다시 한번 절경을 눈에 담을 욕심으로 몸을 한바퀴 움직이는데 문정명(文征明)이 태호를 읊은 시가 떠올랐다.

그 뉘 가슴속에 삼만경을 담으랴(誰能胸貯三萬頃)
칠십 봉우리를 한껏 노닐고 싶어라(我欲身遊七十峰)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다음 명소를 보기 위해 부득이 서천각을 내려와 전동차에 탑승하여 태호선도(太湖仙島)로 들어가려고 부두에 이르렀다. 헌데 5.1연휴 기간이라 관광객이 너무 많아 근 두시간을 기다려서야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태호선도에도 볼거리가 많았지만 섬을 나오는 마지막 배 시간이 다가와 잠깐 머물렀다가 총망히 배에 올랐다. 

아쉬운 심정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갈매기가 머리 위에서 순회하며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태호에 두둥실 뜬 돛배들이 몸체를 살랑거리며 작별인사를 보냈다. 

공원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우시시 시가(市歌)  ‘태호는 아름다워(太湖美)’ 노래가 들려온다.

태호는 아름다워 태호는 아름다워(太湖美啊 太湖美)
태호의 아름다움은 물에 있다네 (美就美在太湖水)
물 위엔 돛배 물 아래는 마름(水上有白帆哪 啊水下有紅菱哪)
뭍엔 갈잎 푸르고 (啊水邊蘆葦青)
물속엔 물고기와 새우가 자라네 (水底魚蝦肥)
호수 물 논밭에 흘러들어 (湖水織出灌溉網)
오곡백과 향기 호수를 감도네(稻香果香繞湖飛)
……                  

 

아쉬움을 혜산고진(惠山古鎮)에 

혜산고진(惠山古鎮)풍경구는 우시시에 위치한 또 하나의 5A급 풍경구이다.
강희 황제가 일곱 차례, 건륭 황제가 여덟 차례 강남행 중에 들렸다는 혜산고진이다. 건륭 황제는 혜산고진에 위치한 기창원(寄暢園)을 어찌나 좋아했던지 기창원을 두고 100여 수의 시를 지었고 북경 의화원에 기창원을 모방하여 해취원(諧趣園)을 건축할 정도였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혜산고진은 미웨(羋月)의 첫사랑 황헐(黃歇)과 관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국시기 우시는 초공자(楚公子) 춘신군(春申君) 황헐의 봉지였다. 그는 늘 혜산 산간에서 말을 방목하고 말에게 계곡물을 먹였다고 한다. 고진에 춘신간(春申澗)이라 명명한 계곡이 있다.

혜산고진의 역사는 최초 남북조시기 건립한 혜산사(惠山寺)로부터 시작된다. 당조와 명조에 이르러 혜산사 부근에 원림과 사당(祠堂)이 건설되면서 혜산고진이 형성되었다. 2017년 원래의 석혜공원(錫惠公園)과 혜산고진을 합병하여 혜산고진풍경구를 건립하였다. 풍경구는 문물고적구역, 석혜명승구, 역사문화거리, 산림보호구역으로 구성되어 볼거리가 풍부한 명소이다. 

우시에서 묵은 지 나흘째 되던 날, 중요한 점심 약속이 있었지만 혜산고진 몇 곳만이라도 중점적으로 보기로 하였다. 

역사문화거리에는 사당이 즐비했다. 강남은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 사대부들은 혜산사 부근에 자리를 잡아 사당을 지어 선조들을 공양하였다고 한다. 복구가 잘 된 사당 몇 곳을 들렸는데 하나같이 문턱이 세 뼘 높이는 족히 되었다. ‘높은 문턱(高門檻)’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사당 안에는 한 가문의 역사와 그 가문에서 나온 큰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었고 족보 등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후손들의 종친 모임도 소개되어 있었다.

사당을 나와 거니는데 중국 전통복 차림의 행렬이 지나가기에 눈여겨보니 ‘홍루몽’ 중 인물들이었다. ‘12금채(十二金釵)’도 화창한 날을 선택해 풍경 좋은 고진에 ‘나들이’를 나왔나 보다. 기창원에서 오후에 그들의 공연이 있다고 했지만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기창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우시시가 낳은 민간 음악가 화언균(華彥鈞) 즉 아병(阿炳)으로 분장한 사람이 얼후곡(二胡曲) ‘이천영월(二泉映月)’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천영월’은 화언균의 대표작이며 ‘이천(二泉)’으로 불리는 혜산천(惠山泉)은 바로 혜산공원에 위치하여 있었다. 서예가 조맹부가 ‘천하제이천(天下第二泉)’라고 쓴 친필 서체를 옮겨 새긴 다섯 글자가 샘터 옆 벽에서 금빛을 뿌리고 있었다. 

풍경구 200여 곳이나 되는 볼거리 중 빙산의 일각도 못 되는 몇 곳을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강희 황제와 건륭 황제가 혜산고진 내왕시 배를 타고 경유했다는, 경항대운하와 이어진 용두하(龍頭河) 강변을 따라 출구를 향했다. 강변에서는 관광객들이 실외 탁자에 앉아서 차를 음미하며 ‘어하(禦河)’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여유작작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저 돌아보지 못한 곳을 생각하면서 출구를 나서는 마음은 저윽이 미안했다. 

말 타고 꽃구경이 아닌 제대로 된 강남행을 소망했지만 여건이 안되어 이번 우시행은 “유노파가 대관원에 들어간(劉姥姥進了大觀園)”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천혜의 명승지와 유서 깊은 땅에 불손을 저지른 것 같아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지상에는 소항(蘇杭, 광의적 의미의 강남)이 있다”는 말의 참뜻을 가슴으로 느낀 강남행이었음은 분명하다.

강남지구는 자고로 물산이 풍부한 어미지향이다. 오늘날 현대 국제 도시 상해의 복사적 영향으로 태호 주변 우시, 소주, 상주, 호주, 가흥 등 다섯개 도시로 이루어진 환태호경제발달구역이 형성되었다. 

우시시와 한국 울산시가 자매도시란 걸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우시시에 있는 중국회사 핵심 부서에 한국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번 걸음에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조선족 혹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을 이용하면서 우시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혀는 그 느낌에 가장 예민하다.

건륭황제의 御笔이다. 

짧은 우시행을 마친 나는 강남은 훗날에도 살기 좋은 고장의 대명사로 영원할 것임을 확신하며, 또 두 번째 강남행을 꿈꾸면서 아쉬운 발길을 돌려 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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