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를 앞두고 윤일춘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ㅁㅁ대학문학원의 교수였다. 올여름 그는 폭염을 무릅쓰고 무모한 답사길에 나섰다. 토피가 지글지글 타끓는 삼복철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였다. 그래도 그는 탈수직전의 고통을 감내하며 작심했던 답사코스를 각단지게 마무리했다.  

9월중순의 어느날 윤일춘의 저택으로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윤교수님, 답사 잘 다녀오셨어요? 그동안 학수고대했습니다. 혹시 시간이 허락되시면 교수님의 특강을 청취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박희준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왔다. 그는 “백두문필회”의 회장이며 매서운 문필로 문단에서 각광받고 있었다. 윤일춘은 3년전부터 “백두문필회”와 접촉했다. 시초에 그는 “백두문필회”가 애숭이 문학도들이 모인 어설픈 “문학단체”(文学团体)라는 막연한 편견을 소지했다. 그러나 거듭거듭 접촉하며 마침내 마음의 탕개를 풀었다. 지난 3년간 그는 “백두문필회”의 요청에 응해 수차례의 문학특강을 했다. 그사이 박희준과때깔이 묻어 어느덧 돈독한 문우로 되였다. 

토요일 저녘 윤일춘은 약속된 시간에 “백두문필회”에 당도했다. 콩나물시루같이 빼곡히 죽쳐 앉은 멤버들이 열광적인 박수갈채로 맞아주었다. 윤일춘은 고개를 숙여 깎듯이 답례하고 서서히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귀중한 자리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여 반갑네요. 만물이 숙성해가는 계절에 얼굴을 마주하니 참으로 감명깊네요. 오늘 특강의 화두(话头)는 <문학의 울타리>입니다.

이번 답사길에 저는 상해에서 문학대가 장애령(张爱玲)의 흔적을 추적헀어요. 상해는 다년간의 도시신축개발을 거쳐 이미뉴욕의 맨하탄을 방불케 하는 모던의 도회지로 변모했어요. 하지만 정안사(静安寺) 번화가의 후미진 곳에는 당지인들이 “스크먼”(石库门)으로 호칭하는 “상덕아파트”(常德公寓)가 세월의 이끼를 들쓰고 조용히 자리잡고 있어요. 지난 20세기 40년대 장애령은 이곳에 거처하며 탁월한 문학재질을 선보였어요.

장애령은 1920년 상해의 공공조계지에서 몰락한 청조귀족가문의 딸로 태여났어요. 이같은 운명은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과 매우 흡사하지요. 유년시절에 장애령은 천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928년에 다시 상해로 돌아왔어요. 그후 1952년 홍콩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줄곧 상해에서 생활하였어요. 1939년 19세의 문학소녀 장애령은 월간지 “서풍”(西风)에 처녀작 “천재몽”(天才梦)으로 문단에 데비했어요. 그후 그녀는 10년간 문학창작의 전성기를 맞이했어요. 이시기 그녀는 “경성지련”(倾城之恋), “금쇄기”(金锁记), “붉은장미와 흰장미”(红玫瑰与白玫瑰), “화려한 인연”(华丽缘) 등 주옥같은 소설과 “녀인을 말하다”(谈女人), “창작을 론함”(论写作)등 섬세한 필치의 산문을 집필했어요. 천재적인 문학기재(文学奇才) 장애령은 중국현대문학사에서 로신, 심충문, 전종서 등 굴지의 작가들과 어깨를 견주는 문학대가의 자리를 굳쳤어요.

장애령은 문학수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여직것 창가의 커튼을 당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눈을 뜨면 곧바로 창밖의 하늘을 바라볼수 있다. 설사 이날에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이렇게 당당히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 제법 사랑스럽다.'(我向来喜欢不把窗帘拉上,一睁眼就可以看见白天,即使明知道这一天不会有什么事发生,但这堂堂的开头也可爱)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이 있어요. 장애령은 창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문학세계의 금자탑을 쌓았어요.그녀는 이런 글귀를 남겼어요. “인생은 가장 흥미로운 책으로써평생을 읽어도 다 못 읽는다.”(人生是最有趣的书,一生一世看不完), “비장함은 일종의 완성이고 처량함은 일종의 계시이다.”(悲壮是一种完成,苍凉是一种启示), “나는 사람은 확신하지만 인성은 확신하지 않는다.”(我相信人,但我不相信人性),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일생의 유감이지만 사랑은 도리여 일생의 시달림이다' (不爱是一生的遗憾,爱是一生的磨难), '녀자는 한평생 남자를 담론하고 남자를 사념하며 또 원망하는 것도 역시 남자이다. (女人一辈子讲的是男人, 念的是男人, 怨的也是男人)

장애령의 문학세계는 시종일관하게 '문학은 인간학'(文学是人学)이라는 집념을 투철하게 고수했어요. '반생연분'(半生缘), '경성지련'(倾城之恋), '붉은장미와 흰장미'(红玫瑰与白玫瑰), “작은 모임”(小团圆), “녀인의 원망”(怨女)등 소설은 그녀의 대표작이였어요. 그녀는 방황하는 인간들의 본성과 욕망, 생존의 곤경을 탈피하려는 인간들의 불우한 운명을 굴곡적인 필묵으로 박진감 있게 부각했어요. 

“경성지련”(倾城之恋)에는 이런 문구가 있어요. “그는 청나라에 충절을 지키는 젊은이였다. 돈이 많을 때면 집에서 자식을낳았지만 돈이 없을 때는 밖에서 자식을 낳았다.(他是满清遗少, 有钱的时候他在家里生孩子, 没钱的时候他在外边生孩子) 스적스적 필이 가는 대로 몇글자 적은듯 하지만 실상은 추풍락옆같이 몰락한 청왕조 말단귀족의 운명을 그림같은 생동한 형상으로 묘사했어요. 

1939년 장애령은 런던대학(伦敦大学)에 합격했어요. 그러나당시 살벌한 전쟁난으로 그녀는 부득불 홍콩대학문학부에 입문했어요. 그후 그는 잔혹한 태평양전쟁을 목격했고 1942년에 홍콩대학이 페교하자 다시 상해로 돌아왔어요. 

1940년대 전반 중국의 주류문단은 사실상 항일구국의 “전쟁문학”이였어요. 그러나 이시기 장애령의 문학세계는 참혹한 전쟁문학과는 수화상극한 이질적인 “문학의 울타리”를 구축했어요. 그녀는 창작의 지필묵을 전쟁과는 별로 상관없는 “혼인, 애정, 가정”등 인정세태에 돌렸어요. 특히 그녀는 “남권주의”(男权主义)에 억눌려 비참한 좌절과 타락과 죽음에 이르는 녀성세계의 생활상을 깊숙히 파고들었어요. 그러므로 그의 “문학의 울타리”는 “녀성주의문학””(女性主义文学)의 경향성을 드팀없이 고수하였어요.

1950년 장애령은 당시 상해시문화국국장으로 부임된 작가 하연(夏衍)의 요청으로 “상해시문예계좌담회”에 참석했어요. 이날 모임참가자들은 일색으로 “레닌복”(列宁服)을 착용했어요. 그러나 유독 그녀만은 특이한 “치포”(旗袍)차림이여서 군계지학(群鸡之鹤)으로 이목을 끌었어요. 

작가 하연은 새중국의 문예일군은 마땅히 “혁명영웅주의문학”과 “혁명투쟁주의문학”에 주목하라고 호소했어요. 그러나 장애령은 도리여 “문인의 탈출”(文人的出走)을 선택했어요. 1952년 그녀는 홍콩으로 이주했고 1955년에는 태평양을 너머 미국으로 이주했어요. 그후 1995년 9월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의 허름한 아빠트에서 75세로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어요. 장장 40여년간 그녀는 해외에서 문학수업에 정진했어요. 그러나 생명의 불씨가 꺼지는 그날까지 그녀는 끝내 대륙으로 발길을 돌리지 못했어요. 

장애령의 자화상으로 간주되는 “작은 모임”(小团圆)에서 그녀는 이렇게 적었어요.
“내가 <작은 모임>을 집필한 것은 결코 불만을 토설하려는것이 아니였다. 나는 여직것 창작의 가종 좋은 소재는 자신이 가장 익숙한 생활상이라고 인정했다. <작은 모임>은 자유분방한사랑이야기였다. 나는 풍운변화의 사랑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설사 만회할수 없는 환멸적인 사랑이라도 그어떤 간절한 바람이나 기대가 있을 것이다.”(我写《小团圆》并不是为了发泄出气,我一直认为最好的材料是你最深知的材料。这是一个热情故事,我想表达爱情的万转千回,完全幻灭了之后还有什么东西在). 
“작은 모임”은 작가 장애령이 한평생 기치선명하게 지켜온 외길인생의 “문학의 울타리”였어요.

다음은 당대중국문단의 중견작가 가평요(贾平凹)에 대해 설명드리겠어요.
지난 1993년 가평요선생은 45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 “페도”(废都)를 집필했어요. “페도”는 단일한 문학작품으로 50여 만부가 매진되는 기적을 쌓았어요. 그러나 그뒤 “페도”는 장장 16년간 출판금지령의 불운을 당했어요. 그리고 뒤늦게 2009년에 “작가출판사”를 통해 재출판이 허락되였어요.

가평요선생은 “페도”를 집필한후 이른바 “류망작가”(流氓作家)라는 감투를 쓰고 집필묵을 박탈당하는 극단적인 곤경에 처했어요.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어요. “이 몇년래 나에게는 재난이 갑절도 덮쳐다. 시초에 불치병인 B형간염(乙肝)에 걸려 1년이 넘도록 옥살이와 같은 투병생활을 하였다. --- 그후 모친이 중병으로 수술을 받았고 다음은부친이 암병으로 타계했다. --- 그후 한차례 송사가 나를 끝모르게 괴롭혔다. 그리고 또 타인을 위해 직장에서 시시비비에 말려들어 갖은 굴욕을 당했다. 결국은 도처에서 나에 대한 류언비어가 란무하는 무시무시한 곤경에 처했다. --- 지난 몇십년간 분투하며 영위했던 모든 것이 물먹은 모래탑처럼 허망하게 무너졌다. 남은 것은 단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독에 찌들린 나와 나의 이름자 석자뿐이였다.”(这些年里,灾难接踵而来,先是我患乙肝不愈,度过了变相牢狱的一年多医院生活,……再是母亲染病动手术;再是父亲得癌症又亡故……再是一场官司没完没了地纠缠我;再是为了他人而卷入单位的是是非非中受尽屈辱,直至又陷入到另一种更可怕的困境里,流言飞语铺天盖地而来……几十年奋斗营造的一切稀里哗啦都打碎了,只剩下了肉体上精神上都有病毒的我和我的三个字的姓名). 

당시 좌파진영은 “페도”를 사회주의주류문학에 대립된 “진부한 문학”이라고 매도했어요. 그러나 가평요선생은 악착스런 세상을 원망도, 탄식도, 질타도 하지 않았어요. 과묵하고 내성적이고 어리숙한 그는 도리여 “문인의 탈출”(文人的出走)을 선택했어요. 인간의 발길이 끊긴 진령산맥(秦岭山脉)의 치벽한 산간벽촌에서 밤을 패가며 고독하고 쓸쓸하고 처량하게 문학수업에 정진했어요.

당시 가평요선생은 이런 글귀를 남겼어요. “이때로부터 나는 세상과 담을 쌓고 오로지 문학창작에만 골몰했다.”(从此, 我每天度过与世隔绝的生活, 一头扎进文学创作). 

1970년초 가평요선생은 우연히 대학에 추천되는 행운을 맞이했어요. 그날 무일푼의 시골청년 가평요는 키넘게 묶은 땔나무를 등에 지고 10여리 산길을 걸었어요. 그리고 생산대당위서기에게 땔나무를 상납하고 “서북대학”으로 진학하는 “붉은도장”을 허락받았어요.

“서북대학”시절에 학우들이 롱구장에서 신나게 뛰놀 때면 작달막한 가평요는 부러운 눈길로 친구들을 응시했어요. 그러나그의 내심세계는 결코 위축되지 않았어요. 그는 작가 특유의 예리한 안목으로 인간세태를 랭철하게 독파(读破)하는 문학수업에착수했어요. 

가평요선생은 1980년대에 장편소설 “부조”(浮躁)을 펴냈어요. 그후 “백랑”(白朗), “천구”(天狗) “진강”(秦腔)등 10여부의장편소설과 중단편소설집, 산문집 등 대량의 문학작품을 집필해 다산작가로 정평을 받았어요. 그의 문학세계는 새중국이 건립된이래 반세기에 달하는 력사를 소급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가평요선생의 “문학의 울타리”는 투철한 력사의식으로 관통되였어요.그는 문학수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흘러간 력사속에서 완벽한 스토리를 찾는 작업이 바로 문학이다.”(在过去的历史当中,要寻找完整的故事,这就是文学)

일전에 장편소설 “산본”(山本)이 작가출판사를 통해 독자들과 대면했어요. 가평요선생은 “산본”의 집필후기에서 이렇게 적었어요.
“진령은 등줄기와 같은 룡맥(龙脉)으로 중국땅을 동서로 찔러나갔다. 진령은 황하와 장강을 한품에 않았고 북방과 남방을 일거에 통솔하였다. 진령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산이고 중국특색이 가장 짙은 산이기에 손색이 없다. 나는 진령에서 태여나 진령에서 성장했다. 그러므로 금생에 필연코 <산본>과 같은 작품을 집필하게 되였다.”(秦岭是一道龙脉,横旦在那里,提携着黄河长,统领了北方南方,它是中国最伟大的一座山,当然它更是最中国的一座山。我就是秦岭里的人,生在那里,长在那里,今生也必然写《山本》这样的书了)

“산본”은 1920~30년대 진령산맥의 산간벽지에서 발생한 기이한 이야기들를 완벽한 력사스토리로 다듬은 또 한부의 거창한 장편소설이였어요. “산본”은 진령산맥의 력사속에 숨어 있던인간들의 거친 숨결과 다재다난한 운명을 돈후질박하고 박진감 넘치는 필묵으로 담아냈어요. “산본”은 가평요선생이 자유자재한 문필을 완숙하게 무르익힌 또 하나의 빛나는 열매였어요."

“시간이 퍼그나 흘렀네요. 잠깐 숨을 돌릴까요?”
방안 가득히 초롱초롱 빛나는 눈길을 감지하며 윤일춘은 마이크를 내렸다. 
“윤교수님, 지금 한창 열띤 분위기라 특강 계속 이어가면 안 될까요?

박희준이 선뜻이 청들었다. 뒤미처 방안에 우뢰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윤일춘은 따스한 커피로 마른 목을 추킨후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1992년 등소평의 “남순강화”(南巡讲话)가 있었어요. 그후 “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내들고 중국은 천지개벽을 맞이했어요. 당시 북중국에서 남중국까지 연해주에서 내륙지역까지 온나라가 악착스레 돈벌이에 집착했어요. “하해조”(下海潮)란 신조어가 중국땅을 쓰나미같이 휩쓸었어요. 그시기 “하해조”가 9억의 중국인을 거치른 돈벌이에 내몰았어요. 그리고 남은 1억의 중국인도 호시탐탐 일확천금을 노렸어요. “시간은 곧 돈이다.”(时间就是金钱) “일체는 돈벌이를 위하여”(一切向钱看) 그시기 중국의 남녀로소는 너도나도 황금노다지를 캐려고 남중국으로 구름떼같이 몰려들었어요.

그러나 그당시 삭막한 세상에 등을 돌리고 한사코 북중국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가 바로 “생전에는 적막한 작가였지만 사후에는 빛나는 광환을 쓴” 황소파(王小波)였어요.

1991년초 왕소파가 집필한 중편소설 “황금시대”(黄金时代)가 제13회 “대만련합보”(台湾联合报)의 중편소설대상을 수여받았어요. 당시 그는 중국인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듬해에교원직을 사직하고 “자유기고인”(自由撰稿人)으로 되였어요. 건국이후 다수 작가들은 “전직작가”(专职作家)신분으로 봉록을 받으며 창작에 정진했어요. 그러나 유독 작가 왕소파만은 “혁명과애정”이란 홀로서기의 “문학울타리”를 고수하고저 단연히 공직을 버렸어요. 이같은 선택은 당시 중국문단에서 대뜸 “이단의 작가”(异端作家)로 눈도장을 찍혔어요. 

1952년 왕소파는 북경의 고급지식분자가정에서 태여났어요. 유년시절에 그의 부친은 “계급이류분자”(阶级异类分子)로 몰려 공직을 잃는 재난을 당했어요. 소년시절에 그는 “대약진”, “인민공사”, “전민강철제련”, “대기근”등 격변시대를 목겪했어요.그리고 중학시절에는 “문화대혁명”의 무서운 진통을 겪었어요. 그후 그는 운남성의 치벽한 시골로 이주했어요. 그곳에서 그는 3천만의 “지식청년”들과 더불어 하늘땅과 억척스레 싸우며 피끓는 청춘을 불태웠어요.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의 눈부신 빛발아래 “유토피아리상사회”(乌托邦理想社会)건설의 “광명대로”(光明大道)를 향해 줄기차게 일로매진했어요. 

1978년 왕소파는 중국인민대학에 진학해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를 맞았어요. 그후 1986년 미국 피즈버그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수여받았고 1988년에 귀국한후 북경대학, 중국인민대학을전전하며 교편을 잡았어요. 그리고1992년부터 자유기고인으로 활약하다가 1997년 병환으로 북경에서 45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어요. 
1978년 이전시기의 왕소파는 “절대적인 진리의 광환”(光环)에 가리워 “자유와 인격”을 소실당했어요. 그리고 1992년까지 그는 잃어버린 “자유와 인격”을 되찾고저 동분서주했어요. 그후1997년까지 짧디짧은 5년간 그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부르짖는 철저한 “인본주의”(人本主义) 작가의 사명을 완벽하게실천했어요. 

왕소파의 3부작 “황금시대”(黄金时代). “백은시대”(白银时代)“흑철시대”(黑铁时代)는 일매지게 “혁명+련애”(革命+恋爱)라는특유한 창작경향성을 구현했어요. 대표작 “혁명시대의 애정”(革命时期的爱情)은 “혁명집체도적주의”(革命集体道德主义)의 빛발에 묵살된 인성의 은페(遮蔽)와 추락을 한치의 거짓도 없이 까밝혔어요. 잡문집 “나의 정신적인 가원”(我的精神家园)과 수필집“대다수의 침묵”(沉默的大多数)에서 그는 “리성주의사상”을 확고부동하게 고수했어요. 

왕소파는 이렇게 말했어요. “중국의 지식분자는 사상의 엘리트로 되는 것이 도덕의 엘리트로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对于中国的知识分子来说,成为思维的精英,比成为道德的精英更为重要). “현재 중국지식분자의 최대 죄악은 자신을 가두는 사상감옥을 구축하는 것이다.”(在现在,中国知识分子最大的罪恶是建造关押自己的思想监狱) 왕소파가 선서(仙逝)한후 그의 미망인 리은하(李银河)선생은“랑만기사, 행음시인,자유사상자 소파를 추모하여”(浪漫骑士 行吟诗人 自由思想者 - 悼小波)란 글을 작성했어요. 그녀는 “침묵하는 대다수”에게 인격의 독립과 사상의 자유를 갈망했던 왕소
파의 송죽같은 절개를 높이 기리였어요. 이것이 작가 왕소파가 확고부동하게 지켜왔던 “문학의 울타리”였어요.

이번 답사길에 저는 상해에서 문화사학자 여추우(余秋雨)선생과 유쾌한 담소를 나누었어요. 그의 대표작 “문화고려”(文化苦旅). “천년일탄”(千年一叹). “산거수기”(山居笔记) 등 수필집은당대중국문단에서 “문화대산문”이란 새로운 테마를 개척했어요.    여추우선생은 이렇게 말했어요. “언어의 전승계보를 보면 중국어는 일관성, 이집트어는 중단형, 페르시야어는 분장형이라고 말할수 있다.”(纵观语言承传系谱, 中国语称为《一贯型》, 埃及语称为《中断型》,波斯语称为《化妆型)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한후 중국은 일매지게 줄곧 “한자”(汉字)만을 사용했기에 “일관성”으로 전승되였어요. 그러나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고대이집트문명의 소실과 함께 완전히 단절되였기에 이미 문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했어요. 반면에 페르시야는 로마제국의 강압적인 통치하에 부득불 로마문자를 채용하였지만 문헌기록에는 여전히 페르시야어를 가첨해 사용했기에 현재까지 숨겨진 형태로 보존되였어요.

인도문명에 대해 여추우선생은 이렇게 개탄했어요.
“불교는 일종의 지적문명이고 인도교는 일종의 토속문명이며 이스람교는 일종의 외래문명이다. 그러나 현재 이 3자간의 최종순위는 토속문명이 첫순위, 외래문명이 다음순위, 지적문명이 말단순위로 밀렸다. 이같은 순위는 깊은 사색을 자아낸다.”
(佛教是一种智者文明,印度教是一种土著文明,伊斯兰教是一种外来文明,然而三者的最终顺序是:土著文明第一,外来文明第二,智者文明第三,这个顺序令人深思)
“먼길을 가는 사람들”(远行的人们)에서 여추우선생은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고대 중국에서 먼길을 가는 사람은 네개 부류였다. 첫부류는 상인, 둘째부류는 군인, 셋째부류는 승려, 네째부류는 시인이였다. 그중에서 가장 먼길을 간 사람은 승려였다. 그것은 승려들이 명확한 문화적 의도를 소지했기때문이다.”(古代中国走得比较远的有四种人,一是商人,二是军人,三是僧人,四是诗人。其中走的最远的是僧人,因为僧人具有明确的文化意图).

 “불국기”(佛国记)는 동진시기(东晋时期)의 고승 법현스님(法显)이 집필했어요. 기재에 따르면 법현스님은 67세 로구로 생명의 금구였던 타크라마칸대사막과 파미르고원을 경유해 기원402년에 “나로다국”(键陀罗国)에 당도했어요. 그후 법현스님의 발길은 지금의 스리랑카에까지 미쳤고 연후에 해로를 통해 인도네시아로의 원정을 달성했어요. 그리고 다시 바다길을 따라 중국으로 귀국하였을 때는 이미 79세 고령의 선인(仙人)으로 되였어요. 그후 80세에 재차 분발해 장편수기 “불국기”를 완성하였고  86세에 드디여 불생불멸의 열반 (涅槃)에 드셨어요. 그뒤 당나라 고승 현장(玄奘)스님이 또 한번 나로다국(键陀罗国) 대원정을 실현해 후세에 “대당서역기”(大唐西域记)를 남겼어요. 

1991년 여추우선생은 상해희극학원의 총장직을 사직하고 중국문화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답사길에 나섰어요. 
당시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피력했어요. “백년의 혈류를 뚫고 천년의 휘황을 찾는다.”(穿越百年血泪,寻找千年辉煌). 

1999년 여추우선생은 아프리가와 중동, 동아시아지역의 고대문명을 답사하는 대장정을 주행했어요. 생사를 넘나든 원정길에서 그는 마침내 장편수기 “천년일탄”의 집필을 마무리졌어요. 당시 홍콩의 김용(金庸)선생은 “천년일탄”를 이렇게 평가했어요. “지금 북경의 젊은이들은 절강사람들은 문장을 지을줄 모른다고 조롱한다. 설사 절강출신인 내가 문장을 지을줄 모른다고 해도 절강에는 로신과 여추우같은 문장대가들이 있다.”

대만작가 여광중(余光中)선생은 이렇게 말했어요. “중국산문은 주자청(朱自清)과 전종서(钱钟书)의 산문 다음으로 여추우의 산문을 꼽아야 한다.”

여추우선생은 지고한 사명감을 지니고 “독만권서, 행만리길”(读万卷书,行万里路)을 실천한 문화사학자였어요. 법현스님, 현장스님이후 여추우선생은 “백년의 혈류를 뚫고 천년의 휘황”을 찾아 “문화대산문”이란 “문학의 울타리”를 완벽하게 개척한 산문대가(散文大师)였어요.

윤일춘은 방안에 걸려있는 전자시계에 눈길을 돌렸다. 시침이 22시를 넘겼다. 
“밤이 이렇게 깊어진줄도 몰랐네요.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 지을가요?”
“윤교수님, 이번 답사길에 봉황고성에 다녀오셨지요. 작가 심종문(沈从文)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멤버들이 이구동성으로 웨쳤다. 윤일춘은 간절한 눈길을 한몸에 느꼈다. 
“그럼 작가 심종문에 대해 잠간 언급하겠어요.” 

윤일춘은 다시 특강을 이어나갔다.
서한시기(西汉时期)의 사학자 사마천(司马迁)이 저술한 “사기”(史记)는 이미 “중국력사의 절창”(中国历史之绝唱)으로 되였어요. 민국시기 대문호 로신(鲁迅)이 창작한 “아큐정전”(阿Q正传)은 이미 “중국문학의 절창”(中国文学之绝唱)으로 되였어요. 그리고 현대문학의 거장 심종문(沈从文)이 집필한 “변성”(边城)은 이미 “중국향토문학의 절창”(中国乡土文学之绝唱)으로 되였어요. 

소설 “변성”은 상서(湘西)지역에 위치한 변성소읍(边城小镇)차동(茶峒)을 배경으로 하였어요. 소설은 나루배소녀 취취(翠翠)의 순결무구한 사랑이야기를 서술했어요. 작가 심종문은 향토적인 언어로 서정적인 필묵으로 차동의 돈후질박한 민심과 풍속, 인성의 선량함과 아름다움을 극찬했어요. 소설 “변성”은 초록빛이 짛게 물든 차동의 나루터를 한폭의 랑만적인 동화세계로 펼쳐주었어요. 소설 “변성”은 향토문학의 탁월한 매력으로 20세기중국100부 소설계렬에서 로신의 “납함”(呐喊) 다음으로 두번째
자리를 점했어요. 

장편소설 “장하”(长河)는 또 한부의 매력적인 향토문학작품이였어요. 소설 “장하”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요.
 “이곳에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모던>(现代)이 도래했다. 성립사범학당에 진학한 대가집 도련님이 여름휴가철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던의 멋이 물씬 풍기는 흰색 제복을 착용했고 엽꾸리에는 도서와 잡지를 한꾸러미 끼고 돌아 왔다. 집안의 남녀로소는 공경스런 눈길로 우러러 본다. 모친은 끼니마다 계란을 대접해 원기를 보강해준다. 부친은 괜스레 주눅이 들어 감히 말도 건네지 못한다. 참으로 의미심장(耐人寻味)하다. 루루천년 <불변의 진리>(天经地义)로 답습되던 부권(父权)이 일거에 말살되였다. 현대교육을 받은 아들이 학교문을 나와 현성에서 교편을 잡으면 곧 <점잖은 품위>(斯文的身份)를 갖게 된다.그리고 혹시 관료티(官气)까지 가첨되면 곧바로 지방유지(当地名人)로 행세한다. 

지방유지는 당연히 혁명에 열중한다. 그러나 결과는 두가지뿐이다. 신식녀성과 자유련애, 자유결혼을 하면 이는 가정혁명이다. 학회를 꾸리고 신문을 인쇄해 시국을 론하면 이는 사회개조혁명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면 대개는 민중의 타매가 두려워 도주하거나 아니면 혁명을 거역하는 당국에잡혀 목숨을 잃는다.”
1930년대 상서지역은 급격한 도시붐이 닥쳤어요. 농촌을 떠난 실향민들이 노도같이 도시로 몰려들었어요. 그리고 비적들이 도처에서 란무했어요. 게다가 참혹한 전쟁의 재난까지 겹으로 덮쳤어요. 모든것이 일순간에 변모했어요. 전통적인 부권사회질서(父权社会秩序)가 무너졌어요. 돈후질박한 민풍이 살아졌어요. 근검하고 평화롭고 정직하던 시골민심이 자취를 감추었어요.소설 “장하”가 서술한 진하(辰河) 나루터 려가평(吕家坪)은 “모던”에 물젖어 상서지역 특유의 초록빛을 잃어버렸어요. 

작가 심종문의 다수의 작품들은 1948년 이전에 출간되였어요. 새중국이 건립된후 그는 한때 맹렬한 “정치탄압”을 당했어요. 그후 줄곧 중국력사박물관과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에 근무했어요. 1981년에 그는 “중국고대복장연구”(中国古代服饰研究)를 출간했어요.

작가 심충문은 고색이 찬연한 “봉황고성”(凤凰古城)에서 태여나 산전수전을 겪으며 기구한 운명과 맞서 싸웠어요. 가난에 쪼들려 겨우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문학기재”(文学奇才)의 탁월한 필력으로 세인의 감탄을 자아내는 동화같은 “향토문학의 세계”를 개척했어요. 소설 “변성”, “장하”(长河)와 에세이집 “충문자서전”(从文自传), “상서”(湘西)등 작품은 자연에서 출발해 자연으로 회기하는 작가 심충문의 짛은 묵향을 발산해 중국향토문학의 거창한 산맥을 이루었어요. 이것이 작가 심충문이 지켜온 “문학의 울타리”였어요.
“오늘 여러분들과 귀중한 시간을 함께 해 참으로 감명깊네요. 아쉽지만 오늘 특강은 여기서 갈무리짖겠습니다. 여직것 열심이 청취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멤버들의 열띤 박수갈채가 긴- 긴- 여운을 남기며 고요한 밤정적을 깨쳤다. 

그후 윤일춘의 문학특강은 인터넷위채(微信)를 통해 신속하게 확산되였다. 이곳저곳에서 문학특강을 초청하는 문의전화가 줄줄히 걸려왔다. 그러나 윤일춘은 새학기의 수업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조광연(曹光延)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다년간 연변텔례비죤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2005년 미국에 체류. 현재 자유기고인으로 활약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발표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