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동포작가협회(재한동포문인협회, 재한동포문학연구회 주관)에서는 본지와 협력하여 재한동포문인들이 발표한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정해서 발표하는 '自選대표작 프로젝트'를 실행 중에 있습니다. 매인, 시는 5-10수, 수필은 2-5편, 칼럼은 3편, 평론은 2ㅡ3편, 소설은 1-3편을 선정해 약력 및 사진과 함께 dong01118@naver.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배영춘 수필가의 自選 대표 수필입니다.

1. 둥지가 없다

 

알람이 울린다. 잠에서 덜 깬 둔탁한 몸을 일으켜 등에 베개를 받치고 벽을 기댔다. 늘 맞이하는 아침이지만 오늘은 피곤이 가시어 지지 않아 눈을 오래 감았다가 살며시 떴다.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은 아침마다 같은 생각이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아침공기가 기다렸듯이 달려드니 축 늘어져있던 세포들이 신선한 공기를 쭉쭉 빨아들이며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하다. 어둠을 뚫고 새벽을 깨우는 겨울의 쌀쌀한 찬바람에도, 땡볕이 쨍쨍 내리 쬐는 한 여름에도, 쉬지 않고 우는 매미처럼 건설 현장 어디든지 부지런히 달려갔다. 오늘도 설쳐대는 바람의 기세를 잠재운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몸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 경험이 싸이고 노하우와 기술이 늘어남에 따라 요령이 생겨 일하는 진도가 빠르다. 그만큼 피로도 쌓인다. 

오늘도 남보다 먼저 시스템 비계 위에 올랐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둘러봤지만 고요함 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해서 나는 다시 몇 발자국을 옮겼다. 푸드덕 발아래서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시스템 비계 위 모퉁이에 산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었다. 건설 현장 철근을 묶는 결속 선을 하나하나 물어다 이리 저리 차곡차곡 엮어 마치 철옹성 같은 둥지이었다. 산비둘기가 ‘철옹성’같은 둥지를 만들기까지는 한 달 이상 걸린다고 한다. 멀리 날아가지 않고 우우욱 우우욱 소리를 낸다. 나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 나와의 대화였다. 아마도 건드리지 말라는 암시인 것 같다.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상호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나 자신에게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고 인간과의 관계에도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날짐승이나 새끼 거두기는 마음은 매한가지다. 나는 동료들과 이야기해서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숲속의 생태계에서 사랑하고 품고 있던 알도 번식하고 하면은 좋으련만 잡아먹힐 수도 있는 아찔한 여기에 둥지를 틀었을까 망치 소리 톱날 돌아가는 소리 파이프 부닥치는 소리로 현장은 소란스럽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둘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알을 품고 있다. 나는 그동안 몸이 많이 지쳐오면서 나 자신에게 짜증으로 지내왔다. 그러나 왠지 둥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포근한 느낌이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둥지가 없어졌다. 부화가 시작된 알도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 순식간에 둥지와 알을 잃은 알거지 신세가 된 산비둘기가 어딘가에서 둥지 없이 날 샌다는 것이 맘에 걸렸다. ‘철옹성’이라 믿었던 둥지와 알을 잃은 산비둘기 한마리가 내 머리 위를 맴도는 것만 같다. 현장 관리인이 좋은 곳으로 옮겨줬으리라 믿고 싶을 뿐이다. 

햇볕이 따가워지기 시작한다. 간밤에 내렸던 빗물이 수증기가 되어 대기는 찜통 같은 느낌이다. 낡은 회색 조끼는 땀에 젖었다 말랐다 반복하며 소금 빛을 낸다. 나는 땅바닥 아무 데나 앉아 시원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잠깐 휴식을 취했다. 시멘트 실은 차가 매연과 먼지를 뿜으며 지나간다. 그러나 휴식은 달콤하다. 나의 맞은편에도 서너 사람이 정해진 장소에서 담배를 물고 있다. 쉴 곳이 따로 정해져 있지만 장소가 부족해 아무 데나 앉는 곳이 휴식처고 신발을 벗는 곳이 쉼터이다. 늘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열악한 환경은 불편함마저 무디게 느껴진다.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매끈하던 손이 어느새 겉늙고 쇠잔해졌다. 손등을 쓰다듬어 본다. 얇은 살갗 밑으로 정맥이 도드라져 여러 갈래의 강줄기처럼 뻗어져 있다. 허드렛일을 많이 처리했던 손바닥도 눈서리 맞은 겨울나무처럼 처연하다. 

점심시간, 함바식당(현장식당)을 가득 메운 인부들은 너나없이 게 눈 감추듯 그릇을 싹싹 비운다. 먹는다는 것보다 퍼 넣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몇 분 몇 초라도 더 쉬기 위한 행동이다. 함바식당 바로 옆에는 근로자 휴게실이 있다. 한여름이지만 에어컨으로 근로자 간이 휴게소는 다소 시원하다. 의자까지 갖춰져 있어 편하게 누워 쉴 수 있다. 나는 밥을 빨리 먹는 편이나 건설 현장에 와서는 늦게 먹는 편에 속한다. 그만큼 주어진 한 시간의 점심시간을 활용해 쪽잠을 청한다. 휴게실 의자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땅바닥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있으면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해지고 여유로움에 잠이 밀려든다.

더위에 점점 숨이 막힌다. 나는 근로자 휴계실 안을 살폈다. 어째서인지 빈 의자가 하나 있었다. 나는 냉큼 의자에 몸을 맡기며 안락하게 누웠다. 삐그덕 고장난 의자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자리가 불편했다. 그러나 땡볕의 바깥보다는 편안하다. 건설 현장 안에는 컨테이너 사무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책상도 의자도 많지만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아니다. 내 눈앞에 둬 발자국 거리에 있는 빈 의자가 심리적으로는 한없이 멀다. 가끔 의자의 유혹에 흔들릴 때도 있지만, 주인은 따로 있다. 심리적인 거리 때문에 쪼그려 앉아있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의 존재를 확고해 하고 추억을 남기며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어서 그런지 산과 가깝고 하늘과 가까운 곳에 집을 찾는 이들이 많다. 몸이 아프거나 현장 일이 없는 날에는 유난히 더 힘든 날이다. 그럴 때면 내 집이 생각난다. 주인을 떠나보내고 적막감이 맴도는 내 집에 못 가는 게 나의 휴식처가 집이 그리울 때가 많다. 어쩌고 보면 가슴 한구석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집 없던 어렸을 때의 감성이 꾸벅꾸벅 현장에서 일하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인생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삶은 시작되고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한계를 살다가 이 세상 떠나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안락한 의자 없이 두 다리와 두 손으로 삶을 지탱한지 30여 년이 지났다. 이제는 해가 바뀔 때마다 몸도 고장 난 의자처럼 조금씩 기우는 걸 느낀다. 타국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하루하루를 이겨내며 생활의 삶의 여행에서 언제나 여유롭고 평화롭다. 오늘도 나는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며 높디높은 시스템 비계 위를 오르고 내린다.

 

2. 첫사랑의 양면성
 

어제 내린 비로 우수수 떨어진 은행나무잎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햇살을 품은 바람이 따뜻해 보여도 체감은 쌀쌀하다. 나는 옷깃을 세우고 은행나무 길을 한참 걸었다. 지나가는 이에게 낭만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은행나무 길이지만 나에겐 울긋불긋 아름다운 자태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여정으로만 보였다. 

조깅하는 사람만이 가끔 스쳐지나간다. 코로나 때문인지 일요일 오후인데도 유난히 한가롭다. 마주치는 사람은 없지만 마스크를 내릴 수 없다. 뭉개진 은행 열매가 내뿜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며 파고들어서다. 

감정 소모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마음에 공간이 없어 포용력이 좁아서일까? 입술도 메마르고 입안도 헐어 침을 넘기면 목이 따갑다. 지금, 그녀를 먼저 돌려보내고 홀로 걷고 있다. 날마다 보는 별들과 달, 길거리의 돌멩이들이 오늘따라 생소하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쉽게 만나고 어렵게 헤어질까? 한낱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을 돌려보내야만 하는 괴로움으로 울컥거리는 감정을 어렵게 소화하는 중이다. 처음 사랑했던 여인을 만나고 가슴은 꽉 막혀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공허했다. 서로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상황과 타이밍이 맞지 않아 뜻하지 않던 이별로 서로를 힘들게 했다. 그렇게 이십여 년 지나면서 우리는 잊은 듯 살았다. 

첫사랑, 말만 들어도 마음이 아리고 코끝이 찡하는 오묘한 단어다. 첫사랑은 양면성을 갖는다고 했다. 인생의 어느 때보다 설렘이 갖는 행복감과 마음속 깊숙이 파묻힌 아픔과 그리움이라는 양면성,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이루지 못할 아픔이 내장되어 있다. 그래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속설은 이미 하나의 공식으로 되었다. 사랑의 기술이 부족해서 해어질 헤어질 수도 있고 외부의 환경에 자의 반 타의 반 헤어져 영영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가끔 첫사랑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며 가끔 넋 놓을 때도 있다. 이미 먼발치가 되어버린 첫사랑, 가슴속에 사무친 첫사랑이 우연히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대해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첫사랑을 만났다면.......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마음과 마음은 더 만나고 싶고, 발전해 가고 있다. 두 생각이 마음속에는 대립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사회적 통념인 윤리 도덕과 인간 본연의 사랑 적 욕구와 그 속에서 해어져 나오지 못하는 나약함이 내 안에서 싸움이 일고 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아주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사랑했다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속에 간직해온 감정들이 폭발했고 원망과 원망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날 밤 도덕과 윤리적 통념을 뛰어넘어 원초적 본능에만 충실했다. 물론 그 순간까지도 마음의 갈등이 없는 건 아니지마는 뜨거운 본능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언젠간 헤어질 운명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랑 주고 감정 주며 마음 아파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일생에 단 한 번 이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사랑해” 그 한마디에 “우리 같이 살아볼까?”

서로 그렇게 말했건만 막상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현실은 아주 냉정하게 우리를 막고 있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심장 소리 귀가에 들릴 정도로 열정적인 사랑을 해보지 못하고 아무런 떨림 없이 일생을 살아간다면 그 또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평생 가슴 떨리게 한 것들이 어떤 것들이었을까? 

죄스럽다는 생각이 마음을 더 아프게도 한다. 소홀했음인가 아니면 너무 쉽게 접했던 것인가? 세상에 태어나 있을 것은 다 있고 우리 둘 다 가족의 풍족함을 느끼며 살고 있는데도 가슴 한구석이 시린 것은 소중함의 부족이 아닐까 싶다. 

살아가면서 가끔 시의 한 부분이 내 이야기인 양 가슴에 와닿을 때가 있다. 마음이 싸해지는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 이 나의 마음을 대표하는 것 같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 

꽃이 피는 자연 현상이 인간의 사랑도 삶도 시련과 고난을 통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마음을 흔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열리니 지금도 흔들거린다. 한동안 지나고 나면 조용할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만감이 교차한다. 몸과 마음이 같지 않기에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사랑과 사랑의 부닥침에 전혀 속수무책인 나를 보면서 내 욕망과 현실을 잘 아우도록 하는 게 최우선일 것 같다. 그녀에게도 난 필요한 사람이었을까? 지나간 시간표에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 너만 보겠다는 다짐,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고백, 달달한 시어들이 적혀있다. 그저 첫사랑과의 인연이 너무 우연스럽고 운명적으로 만났기에 고민이 될 뿐이다. 모든 것이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이다. 또다시 사랑을 떠나보내고 남겨둔 미련을 묻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색깔로 삶을 살아왔을까? 그녀에게 자문해 봤다. 온천지가 파랗게 변하는 봄을 마주할 때마다 밝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며 잘살아 갈 거라 생각하고, 자신은 삶 속에서 부딪히고 다치고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황혼의 노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다. 서로가 같은 생각이었다. 삶의 강한 햇살에 노랗게 바래져 깊은 슬픔, 절망, 상처, 고통, 스스로 삶의 무게를 느끼면서 그래도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기쁨과 편안함, 작은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어설프게 사랑했던 첫사랑을 말할 수 없는 암담함을,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픈 내 마음을 닫고 돌아서는 길이다. 아무튼,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사랑을 줄 줄 안다는 말이 있다. 나는 아직도 사랑이 어렵다. 아직 좀 더 성숙하고 현명하게 살아가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참 못났다.

 

3. 상흔(傷痕)


칼이 스윽 빗나가면서 순식간에 손을 베었다. 갈비를 작업하다가 힘의 강약 조절 실패로 칼이 너무 깊게 들어갔다. 왼손 식지에서는 피가 투두둑 떨어지며 순식간에 피투성이다. 나는 베인 손가락을 꽉 조여 쥐며 지혈을 했지만, 피가 멈추질 않았다. 동료가 밴드와 붕대를 챙겨왔으나 손을 떼면 피가 더 많이 흘러 결국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나의 작업대에는 여러 종류의 칼이 꽂혀있다. 뼈를 바르는 뾰족한 칼과 기름을 제거하는 고기 칼, 그리고 푸주 칼과 중국 식칼이 꽂혀있다. 야채를 썰 때는 중국 식칼을 쓰고 약 냉동고기를 썰 때는 푸주 칼을, 갈비를 작업할 때는 뼈칼과 고기 칼을 쓴다. 이 고기 칼에 아차 하는 순간에 당한 것이다. 아주 조심스레 작업한다고는 했지만 얇실한 칼은 사정없이 나의 힘줄까지 베어 버렸다. 

정형외과 병원에는 환자가 많아 리셉션에 접수하고 20분 넘게 기다려서야 의사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힘줄이 끊어져 상처 부위를 더 째서 힘줄을 이은 수술을 하고 깁스를 했다. 수술 중에 지혈하느라 꽁꽁 묶은 왼쪽 팔뚝은 피멍이 들었다. 마음이 좀 진정되면서 온 사방에 흘린 피를 보고서야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이 약하면 마음도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지면 누군가에 기대하고 싶은 마음이다. 외면적이나 내면적으로 사소한 것으로 인해 쉽게 상처를 받는 것을 보면 나란 참 나약한 존재구나 싶다. 나는 회복실 침대에 잠간 몸을 맡겼다. 

첫 등교의 설렘, 첫사랑의 아련함, 누구에게나 처음의 기억은 특별하다. 내가 어릴 적 첫 기억은 상처인 것 같다. 8살 때쯤, 방과 후 같은 반 아이들과 공을 차기도 하고 맨손으로 주고받기도 하면서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상대방이 찬 공이 나의 키를 넘겨 나뭇가리 속에 박혔다. 나는 뛰어가 엎드려 공을 꺼내려고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뾰족하게 나온 나뭇가지를 보지 못하고 턱이 푹 찔렸다. 순식간에 피가 줄줄 흘렀다. 피를 보는 순간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까무러치게 울었던 생각이 난다. 어린 나이에도 빨간 피에 대한 두려움과 위험하다는 걸 알았는지 나는 턱을 부여잡고 애처로운 도움의 눈길을 날렸다. 애들도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피가 뚝뚝 흐르는 턱을 부여잡고 마을 앞줄에 있는 위생소로 뛰어갔다. 애들이 나의 부모님에게 알렸는지 처치 중에 오셔서 부산을 떨며 나를 나무람 하던 생각이 난다. 그때의 흉터가 아직도 나의 턱밑에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도 친구들은 내가 밥 먹다가 흘리면 턱밑에 구멍이 나서 그런다고 장난을 친다. 

그 후부터 나는 사고 없이 잘 커왔다. 그런데 아주 소소한 종이에 손을 베인 적 있다. 보던 책을 접고는 일어서서 책장에 꽂으려다가 옆의 책이 흘러내리는 것을 붙잡으려고 나간 손이 그만 책꽂이의 한 책장에 손을 베었다. 식지의 둘째 마디에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다. 얇은 종이가 이렇게 위험하리라고 왜 생각 못 했을까? 활자의 유혹에 넘어가도록 자신의 날카로움을 숨기고 나를 안심시켰을까? 종이? 혹시 이 종이처럼 백색의 우아함을 나타내면서 때로는 가차 없이 냉정하게 베어버리는 사람도 있을까? 나는 종이에 손가락 베이듯 나 자신의 실수로 마음에 상처를 남긴 적 있다. 그해 5.1절, 목단강에는 참 많은 눈이 내렸다. 눈비 속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다시 오지 말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뒤돌아선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상처를 줬다고 생각했다. 손의 상처가 덧나듯이 쉽게 낫지가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상대방과의 의견 차이로 주고받은 대화 속에 오해와 불신이 쌓여 상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오해를 푸는데 시간이 3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인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연이 그기까지 인걸...... 

칼로 낸 상처는 한두 달이면 완치가 되지만, 잘못된 언행과 잘못된 글 한 줄이 상대방에 주는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한 작은 상처들이 쌓이면서 아주 커다란 상처 못지않게 가슴 한구석에,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쌓여간다. 그렇게 상처는 소리 없이 다가온다.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이 정도에 기분 나쁘겠어?”생각하지만, 서로 사랑한다는 맹신에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잃을 수 있다. 

주방 생활 20년 넘게 해오면서 손도 많이 베어봤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 상처에 아픔을 느꼈을 뿐, 마음의 동요는 느껴본 적은 없었다. 칼을 쥐기 전 나의 손에는 볼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글이 쓰면서 중지 첫마디에 굳은살 베기는 것을 자랑스레 여겼다. 볼펜을 쥐고 있으면 나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마음의 안정제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 귀한 재산인 볼펜과 원고지가 글로 변해갈 때의 희열은 지금도 변함없다. 한국에 온 후부터는 볼펜 대신 생전 쥐어보지도 못했던 무거운 중국 칼을 쥐고는 주방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능수능란하게 각종 칼을 다룬다. 왕초보인 나도 그들을 흉내 내다가 칼끝에 손을 살짝 베인 후부터 겁이 생겼다. 그렇다고 칼잡이가 나의 밥줄이어서 중도 포기할 수 없었다. 속도를 늦추며 볼펜을 다루듯 칼질을 연습했다. 펜의 단련에 중지에 굳은살 들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칼질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전체의 손바닥에 굳은살이 쫙 퍼지면서 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깁스한 손이라 힘을 쓰거나 물건을 들어 올리는 일에는 왼손 자체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출근은 물 건너갔고 일상이 마비 상태와 다름없었다. 세수는 물론이고 집에서 밥해 먹는 것까지 고역이었다. 보름 넘게 깁스하고 다니다가 풀었다. 상처도 거의 아물었으나 손가락이 굳어져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봉합한 힘줄이 완치되지 않아 칼 놀림이 서먹해지며 예전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어설픈 칼 놀림에 조심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을수록 기름 제거에 살코기가 떨어져 나가는 실수 연발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니 다시 칼들을 과신하기 시작했다. 중국식칼로 야채를 썰 때는 칼 자체의 무게감에 반대로 힘이 덜 들어가고 몸의 율동과 함께 아주 정연하게 잘려나간다. 푸주 칼 손잡이를 잡고 약 냉동된 고기를 자를 때 사라락 소리 내며 잘려나가는 것을 볼 때도 칼은 언제나 상냥하게 온몸을 내게 맡기는 친근함을 느꼈다. 오늘도 나는 칼을 들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4. 삶의 무게
 

“이 밤중에 누가 전화를....” 현장 일에 녹초가 되어 달콤한 잠에 빠진 나는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친구 전화번호다. 받을까 말까 잠깐의 고민 끝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인마 전화했음 말을 해야지. 새벽부터 노망났나?”“방금전에 영일이가(가명) 세상을 떠났다.” “뭐 뭐라고? 영일이가 죽었다고?!”순식간에 안면 근육이 일그러지면서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건강한 친구인데, 몇 시간 전까지 통화하며 잘 자고 내일 만나자는 약속까지 한터였다. “심근경색인 것 같은데 지금 구로 대학병원에 와 있다. 걔네 집에서 12시까지 술 마시고 같이 잤는데 화장실에 갔다가 넘어져서 ....”울먹이던 친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았어 금방 갈게 ”나는 더 이상 물어볼 새도 없이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 

2년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자타공인 ‘나 혼자 산다’를 무난하게 실현해가던 중이다.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친구는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술 약속을 잡는다. 흔히 남자들은 쌓인 술병의 숫자와 우정의 깊이를 비례한다고 말한다. 좋은 술자리는 마음을 넉넉하게 하고 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막걸릿잔 수가 늘어갈수록 판은 커져 여기저기 친구들이 모여든다. 그렇다고 술만 좋아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친구는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해서 옳고 그름을 조언해주는 친구다. 

젊었을 때 한국 와서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아내의 병원비에 다 까먹고 지금은 월세방살이지만 누구나 아무 때나 연락하면 만나주곤 하던 친구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부부 동반으로 만나거나 여행을 가면 친구는 지갑 속의 가족사진을 보이면서 자기도 아내하고 같이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행 좋아하는 아내하고 제주도는 물론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많이 돌아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사줬을 텐데... 제일 마음 아픈 건 아내가 죽기 며칠 전에 중국에 돌아가 딸애랑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형편에 어떻게 중국 가나 했더니 그럼 지금 사는 집에라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날 밤, 친구 아내는 그렇게 친구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50대, 60대가 겪는 감정의 변화 중 하나가 덜컥 홀로 남겨진다는 두려움이라고 한다. 그러나 친구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못했다. 건강한 생존을 위해 든든한 몸만들기와 운동, 인간 관계망의 활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친구는 술을 마시면서 요즘 자기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끼고 더 할 수 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말한 생각이 난다. 변화무쌍한 현실 생활 속에 신뢰의 관계를 깨지 않고 지금까지 왔고 미래도 기꺼이 함께해줄 선하고 착하고 의리의 친구들이라서 믿음이 간다는 것이다.

아내가 옆에서 챙겨줬더라면 이렇게 급급히 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 소중하지 않은 삶은 하나도 없다. 영유아기를 거쳐 청, 중, 노년기까지 하루하루가 희로애락으로 한 편의 드라마를 찍어 가는 중이다. 누구나 드라마의 엔딩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모두가 내 맘대로 되면 좋으련만 다 제 갈 길 있고 제 복은 타고났다고 했으니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태어날 때는 축복으로 왔으나 돌아갈 때는 혼자였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곁에만 있었더라도 이처럼 외롭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핸드폰 사진첩을 열어 쭉 훑어보았다. 친구들과 좋았던 그 순간들을, 언젠가는 나도 기억을 잃어버리겠지만 그 일어버릴 때를 최대한 늦추어보기 위해 찰나들을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는 조각들을 모아둔다. 사진 속에 활짝 웃고 있는 친구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순간은 사진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과거의 한순간을 기억함으로 이를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가슴 한편에 묻어둔다. 해변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 하나를 골라서 영정사진으로 만들었다. 코로나로 조문객도 많지 않았고 식단도 단출하게 차려졌다. 중국에 사는 딸에게도 연락했으나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혀 어쩔 수 없는 기막힌 노릇이다. 

입관식은 말 그대로 망자를 관에 넣는 작업이다. 정말 중요한 과정이다. 입관식이 끝나면 더는 망자의 얼굴을 볼 수 없기에 평생을 기억하게 될, 가는 이의 마지막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슬픔에 잠긴다. 입관을 지켜보면서 우리 친구들은 누군가 통곡하고 누군가 닭똥 같은 눈물을 떨궈 형용할 수 없는 만큼 슬프다. 관속에 반듯이 누운 얼굴이 평화롭다. 아내의 옆으로 간다고 생각해서인지 지금껏 보아온 중 가장 편안한 얼굴이다. 곧 친구는 떠나간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사람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다는 것은 언제나 슬픈 일이다. 시간 여행길에 친구는 사랑하는 아내가 맞이해 줄 거라 믿는다. 

소리는 무겁고 가벼운 것이 없이 마르지도 젖지도 않아 흔들리다 사라진다고 어느 소설가가 말했다. 죽음의 소리도 그러할까, 귀청에서는 친구의 환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손에 들려진 상여는 조금씩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퇴로가 없는 50대 초반, 중년의 슬픔과 외로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가장(家長)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어깨에 짊어지고 현장 일을 하면서 떳떳하게 살아왔다. 매미 소리마저 정적에 숨죽이는 삼복더위에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뙤약볕 아래 망치를 휘두른다. 

나는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나이 들어가는데 서럽지 않았냐고? 행복이란 단어를 잊지는 않았느냐고?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켠 친구는 아내가 그립고 딸이 보고 싶단다. 딸이 아홉 살적에 처가에 맡겨놓고 한국에 나와서 미안한 마음뿐이란다. 정말로 사랑하는 딸인데, 아빠로서 사랑 표현이 부족해 지금도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이었다. 남들 못지않게 돈을 보내주고 딸아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엿한대학생이 된 딸아이가 돈보다도 가족이 그립고 부모 사랑이 그립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내면의 슬픔을 감추고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사랑하는 딸아이가 오해하지 않도록 노력중이였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드러내지 않는 상처가 무서운 법이다. 어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고통이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친구도 분명 자신이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을 거다. 그러나 가장이라는 심리적인 억압 때문에 남들 앞에서 든든하게, 강철 로봇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준비 안 된 건강한 사람의 부고를 받았을 때 다가오는 충격의 여파는 진하게 오래간다. 잘 가시게 친구, 고통 없는 저세상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그동안 못다 한 사랑 쭈욱 이어 가시게나.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부회장, 사무국 부국장.  수필/수기 , 시 등 수 십 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다수.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부회장, 사무국 부국장.  수필/수기 , 시 등 수 십 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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