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회(문학평론가,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디카시의 자리와 존재 양식

김경애는 재한동포문인협회를 이끌며 많은 문학인을 격려하고 북돋우는 활동가다. 그 자신 또한 이렇게 디카시집을 상재 할 만큼 글쓰기의 현장에 있는 현역 문인이다. 그는 자신의 디카시집 제목에 ‘秀詩로 떠나는…’이라는 수사(修辭)를 붙였다. 한자어의 의미에 있어서 수발(秀拔)한 시로 시집을 채우겠다는 결의를 표방하는 것이다. 한편 그 음훈(音訓)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간편하게 떠날 수 있는 여행과 같은, 디카시의 순간성과 즉물성(卽物性)의 성격을 언표(言表)한 것으로 여겨진다. 시집의 부제로 내세운 ‘순간 포착의 사진과 시의 절묘한 만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디카시가 지향하는 예술형식으로서의 특성을 말한다. 거기에 디카시의 창작 방법과 존재 양식이 있는 까닭에서다.

1부에 실린 24편의 시에는 ‘위대한 유산’이란 소제목이 붙어 있다. 그 위대한 유산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김경애가 사물을 만나고 그 사물에 카메라 렌즈를 연동하며 산뜻한 시 한 편의 소출을 얻는 그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으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1부의 시든 희망을 말하고 어울림을 말하며 깨달음의 새로운 시각을 현시(顯示)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이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고 감각 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디카시의 소재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생무상이나 숙명과 같은 장중한 철학적 개념도, 그의 디카시와 함께하면 어느덧 일상적 삶의 한 모습으로 전화(轉化)된다. 그것은 디카시를 쓰는 이 시인의 기량이기도 하다.

매우 자유롭고 풍성하며, 마치 우주적 의미망의 분방(奔放)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찬찬히 다시 살펴보면 바위 아래 웅덩이에 고인 물과 그 물에 비친 나무 그리고 하늘이 천고(千古)의 반사경을 연출하는 느낌이다. 그 깊은 그림을 감싸고 단풍잎과 나뭇잎의 낙엽들이 저마다 분분한 자태를 펼쳐 놓았다. 요컨대 초점이 잘 잡힌 사진이다. 거기에 덧붙인 세 줄의 시 또한 만만치 않다. 낙엽과 우물의 조합으로 한 폭이 풍경이 되어가는 자리! 그것이 시인의 해설이다. 이렇게 보면 이 시인은 사물과 카메라의 만남, 사진과 시의 만남이 어떤 행로 위에 놓여 있어야 하는가를 명료하게 알아차리고 있다 할 것이다.

이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야간 조명을 받은 현수교의 철선이 붉고 푸른 빛을 반사하고 있으며 하늘에는 장난처럼 조각달 하나 떠 있다. 현수교는 강심(江心)이 깊을 때 그 깊은 곳의 다리 상판을 철선에 매달아서 가설하는 다리다. 시인은 이 그림에 ‘깨달을 오(悟)’라는 제목을 붙였다. 무엇을 깨달았단 말인가. 높이 솟은 교각의 연결선인 철선이 ‘몸통을 찌르던 크고 작은 가시들’이라고 보고 애초에는 불만을 가졌던 터다. 그러나 그것이 ‘비뚤어진 나를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보니, 이는 항차 다리 하나의 풍광만이 아니다. 우리 삶의 오해와 불만, 의지와 각성의 도식이 그 가운데 함께 놓였다. 「위대한 유산」의 달팽이나 「가을은」의 모과 열매가 모두 그렇게 읽힌다.

 

지금 여기의 삶과 그 의미망

이 시집의 2부는 ‘살아남기’라는 소제목으로 되어 있다. 이 살아남는다는 말은 길게 보면 시대와 역사 속에서 공동체적 삶의 형국을 말하는 것이 되는가 하면, 우리 개인의 구체적 삶에 있어서는 궁벽한 하루하루가 그 살아남기의 그물망에 걸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2부에는 모두 24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들의 주재론적 해명과 더불어, 시인 자신이 국경의 험준한 길을 넘어본 경험이 있는 연유로 만만찮은 생각을 더 해야 하는 형편이다. 그러기에 그 시들이 때로는 대립적 긴장감으로 읽히고, 또 때로는 상황의 여러 모양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삶이 어떤 가치를 갖는 것인가를 숙고하게 한다.

이 사진의 건물이 어디에 있는 어느 교회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빈 하늘의 넓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대형 십자가가 분명하니 교회가 아니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그 건물의 옥상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다. 아마도 청소하거나 수리를 하는 중이지 싶다.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는 교회, 그 높고 위험한 곳에서 알하고 있는 사람! ‘오 마이갓’이다. 시인은 이렇게 시를 덧붙인다. 용서와 죄, 참회와 기도문, 이 모든 종교적 함의를 넘어 ‘두서없이 흘리는 고해성사’라는 것이다. 원수와 사랑의 문제도, 이 사진이 이토록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지경에 있기에 정동적(情動的)인 설득력을 얻는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 종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어떤 힘을 갖는가.

‘네트워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중한 자산이다. 다수의 컴퓨터를 유선이나 무선의 통신 매체로 연결하여 서로 자료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한 통신 체계를 말하는가 하면,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방송국들이 동시에 같은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시스템을 말하기도 한다. 온갖 인간관계와 업무에도 이 어휘가 동원된다. 시인은 아주 넓게 포착된 거미줄을 매설하고 그 너머로 여유롭게 걷고 있는 사람들을 담았다. 그리고 혼자이자 혼자가 아닌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숙명을 은유적 함의로 이끌어냈다. 「왕따」나 「동행」 같은 시도, 동물이나 사물의 묘사이지만 그 내면의 보이지 않는 곳에는 인간의 삶과 그것이 형성한 의미 체계가 잠복해 있다.

 

일상의 풍경을 넘어선 배면

3부에 수록된 시 27편을 통할하여 ‘사랑은 미친(味亲) 짓이다’라는 소제목이 주어져 있다. 여기에서의 味亲은 정신에 이상이 있거나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는 뜻의 ‘미친’을 한자 또는 중국어로 표현했다. 이 이중적 표기법은 3부의 시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일반적인 규준(規準)을 넘어서는 광경, 그렇게 유다른 광경들을 추적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계란 후라이를 두고 「막장 드리마」 같은 작품을, 그리고 고무 슬리퍼에서 「큰 죄」나 「짝짓기」 같은 작품을 수득(收得)한 것이 이를 말한다. 「소확행」에서는 새끼 세 마리를 업고 있는 장난감 돼지 모형에서 종교적 가르침을, 그리고 「내 안의 너」에서는 둥글게 구획된 건물의 천장 위에 하늘을 담고 그 집중에 대해 말한다.

가을이 깊은 산자락의 그림이다. 키가 훌쩍 큰 교목의 몸체를 따라 담장이 넝쿨이 높이 이르렀다. 주변의 다른 나무나 물들어가는 단풍잎들이 이 두 식물의 연합을 축하라도 하듯 에워싸고 있다. 시인이 여기에 ‘연분’이란 이름을 붙였으니, 이 만남의 그림을 두고 서로를 위한 공생(共生)이라 본 것 같다. 이들은 서로 무엇을 주고받았을까. 기어오르는 것을 타박하지 않고 몸이 비뚤어지거나 넘어져도 ‘함께 가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시인의 인식이 거기에 있다. 어찌 이들 식물만의 정황이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와 같은 것이라면, 풀 한 포기나 바람 한 점에도 배울 일이 넉넉한 터이다.

산속의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개울물이다. 그 중간 어름에 거북이 같기도 하고 개구리 같기도 한 넓은 바위가 앉아 있다. 그 머리를 물을 향해 두고 있으니 여러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수월하다. 자연의 풍광! 그것도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광이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것을 형용하고 있다면, 세월을 지나오면서 그에 부합하는 설화(說話)들을 생산하기 마련이다. 이토록 흔연한 양서류의 형태를 가졌으니, 그는 불현듯 숨겨진 사연을 가진 옛 귀인(貴人)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냉정하다. 착각하지 말지니, 그냥 돌이라는 것이다. 이 강력한 부정은 상대적으로 그냥 돌이 아니었던 전설적인 옛날을 은연중에 상징하고 소환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시다.

 

강함을 이기는 부드러운 힘

이 시집의 4부에는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 소제목 아래 27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소제목의 레토릭(Rhetoric)은 기실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이유제강(以柔制强)의 처세 논리이기도 하고, 이솝우화에서는 해와 바람의 ‘나그네 옷 벗기기’ 내기와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범박한 가르침을 일상의 경물(景物)에 적용하여, 다채로운 모습의 사진과 시를 제시한다. 예컨대 「소문」에서는 몸체가 아주 긴 나팔 두 개를 엇갈리게 놓고, 한쪽의 작은 소리가 다른 쪽의 큰 소리로 증폭되는 증거를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소문’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작은 말을 신중하게 하는 미덕이 그 대척점에 있음을 암시한다. 「유턴」에서는 여러 형상의 방향 표시판을 제시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 곧 바쁜 시간 가운데서의 여유로운 마음을 환기한다.

천사의 날개와 악마의 날개를 병치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 작품을 만든 설치미술가는 그러한 구상을 한 것이며, 어떻게 이 시인은 여기서 오만가지 생각의 무의식 공간 비행이라는 주제를 얻었을까. 성경의 악마 루시퍼(Lucifer)는 사탄의 우두머리이지만, 원래 천사였다가 그 교만으로 인하여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다. 그런데 천사와 악마, 이 두 존재의 양 날개를 한 몸에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두고 모순이라 하기에 전혀 어색함이 없다. 그 날개가 누구의 것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이 양자가 함께 숨어있다면, 이를 분별하는 힘 또한 우리가 반드시 습득해야 할 세상살이의 과제에 해당한다.

집이 지어진 형태와 마당에 서 있는 높은 크기의 조형물을 보면, 아마도 공공시설인 듯하다. 그런데 그 조형물의 측면으로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금이 가 있다. 위험한 상태일까. 시인은 단호히 ‘오두방정 떨지 마라’라고 단언한다. 금이 갔다고 다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눈에 보이는 흠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 상황에 따라 대책을 세울 수도 있고 대피할 수도 있다.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게 금이 가는 사태다. 왜 건강이 약한 이가 그 병약(病弱)을 돌보면서 오히려 장수하지 않던가. 약하고 부족한 것, 이기지 못하고 지는 것이 궁극에서는 강한 지구력으로 이김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더 나은 디카시를 향한 여정

5부의 시 22편에는 ‘헷갈리는 법’이란 소제목이 주어져 있다. 헷갈리는 법이라니? ‘어떻게 헷갈리느냐’ 아니면 ‘헷갈리는 방법’ 중 어느 쪽을 말할까. 법(法)은 원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 규범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시적 일탈의 허용 또는 변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우리의 삶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헷갈려서 온전한 판단과 선택이 어려운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가려진 진실」에서처럼 보이지 않아도 다 보이고, 보여도 다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정황이 삶의 부면 곳곳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창」이란 시에서는 타원형 외관의 키 큰 빌딩과 그 창들을 보여주고, 주름살 하나에 꿈 하나씩이라고 산정(算定)한다. 그리고 「통일로」에서는 헤어진 길이 결국은 다시 만난다는 심오한(?) 규범을 내세운다.

얼핏 방송 촬영 스튜디오로 보인다. 정면의 촬영 대상자가 앉을 소파에는 몇 가지 소품이 놓여 있고 아직 사람은 없다. 반대편의 스탭들은 촬영 준비에 분주하다. 이 사진의 방점은 천정에 빼곡하게 매달린 조명 장치들에 있다. 여기에 시인은 이러한 언사를 덧붙인다. “전부 켜지는 않는다.” 다음 줄의 설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다 밝힌다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언사다. 사진 한 장에 짧은 시적 언술이지만, 거기에는 참 많은 배울 점이 숨어있다. 있는 것 다 내놓고 시작하는 자는 대체로 실패한다. 그래서 힘 있는 자는 그 힘을 다 보여주지 않고, 많이 가진 자는 그 부요(富饒)를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 대목의 시인은 속 깊은 철학자다.

도심을 비끼어 흐르는 강 건너편에 햇무리가 보이고 고층의 아파트 건물들이 반듯하게 서 있다. 눈앞의 작은 강에는 질서정연하게 징검다리가 정렬한 풍경이다. 그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있어, 이 고요하고 적막한 그림에 엑센트를 남긴다. 시인은 이 징검다리를 하나의 경계로 보고 윗물과 아랫물을 구분한다. 그리고 ‘그 물이 그 물’인데, 무슨 맑고 탁함을 논하느냐고 질문한다. 이것은 김경애 디카시의 발화 방식이기도 하다. 작고 소박한 사진을 얻고, 사진의 배면에 숨은 뜻과 그 값을 도출하는 입체적인 시각! 그와 같은 시 쓰기의 패턴을 익히고 그것을 자신의 디카시 창작에 응용해 온 과정이 있기에, 김경애론에서는 이렇게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그가 써 온 시들이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인 마당이니, 앞으로 더욱 그의 시 세계가 승급(昇級)하고 확장되기를 기대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일찍이 윌리엄 블레이크가 자신의 글 「순수의 전조」에서 이렇게 썼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안에 무한을 쥐고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김경애의 디카시를 살펴보는 자리에 이 고색창연한 옛말을 소환한 것은, 이 시인이 보여준 순간 포착의 영상과 촌철살인의 언어가 그 선험적 표현과 많이 닮아 있는 연유에서다. 그것은 또한 앞으로 그의 디카시를 더 큰 기대와 함께 지켜볼 수 있으리라는 미더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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