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경제학박사, 역사문화여행가, 전 파라과이 교육과학부 자문관)

1939년 7월 경춘선 개통과 함께 당시 역의 소재지인 춘천시 신남동의 이름을 딴 신남역이 업무를 시작하였다. 철도청은 춘천시가 경춘선 신남역의 명칭을  ‘김유정역’으로 변경해달라는 요청을 2004년 수용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사람 이름을 철도역 이름으로 삼은 첫 번째 사례이다.

신 김유정역. 2010년 준공되었음.
신 김유정역. 2010년 준공되었음.
구 김유정역. 
구 김유정역. 

외국에서는 사람을 이름을 딴 공항이 많이 있다. 미국 뉴욕 국제공항은 1948년 개항하였으나 1963년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1963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휴스턴 인터콘티넨털 공항은 1969년 개항하였다. 휴스턴을 정치 활동의 근거지로 활동했던 제41대 대통령 조지 부시의 이름을 기념하여 1997년에 명칭을 조지 부시 인터콘티넨털 국제공항으로 바꿨다. 1974년 개항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은 프랑스 전 대통령인 샤를 드골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서울 종로구 운니동(당시 진골)에서 아버지 김춘식씨와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 8남매의 7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님이 한분, 누이가 다섯분, 유정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있다. 운니동은 운현(雲峴)과 이동(泥洞)의 머리글자를 따서 합성한 동명이다. 운현은 비만 오면 땅이 몹시 질퍽거린다고 해서 ‘구름재’ 혹은 ‘운현’이라 했다. 한 포럼에서 조카(유정의 다섯째 누나 딸)는 유정의 셋 째 누님이 유정을 낳을 때 운니동에서 태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김유정 생가
김유정 생가

많은 사료에는 유정이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한 한다. 이 마을은 작은 산들로 에워싸인 게 마치 떡시루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 유정의 부모님은 “앞마당 한가운데가 쩍 갈라지더니 오색찬란한 용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용의 비늘 하나하나에 은방울이 달렸는데 절렁절렁 소리가 나면서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다가 그만 갑자기 땅에 떨어지며 땅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유정이 후에 유명하게 될 것이나 명이 짧을 것이라고...어린 유정의 건강을 항상 걱정하며 보살폈다.

유정은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현재 휘문고등학교)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또한 누나 집에 기거하면서 휘문고보에 입학하지만 폐결핵으로 8년만에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현재 연세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 본인은 자퇴라고 하지만 잦은 결석으로 제적당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김유정은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을 안고 1931년 4월 20일 23세에  다시 서울에 상경하여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그곳에서 퇴학당했다. 몸이 아픈 상태에서도 일본 동경 유학의 꿈을 가졌다고 한다. 향학열에 불탄 유정이었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김유정의 집안은 천석지기의 지주였고, 서울에도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집안을 관리하던 큰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 때 그는 마을의 주막집을 드나들며 집시와 같은 생활을 하고 들병이들과 어울린다. 이러한 경험은 김유정의 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김유정 동상 앞에서 
김유정 동상 앞에서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중에 나타난다. 그에게 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다.”라고 했다. 김유정은 생전에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남달랐다.  심지어 자신이 말하는 ‘그리움'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환상이었다고 훗날 고백할 정도였다. 매일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녹주이다. 

어머니에 대한 집요한 그리움과 숙명적 우울, 이러한 상태에서 김유정은 박녹주와 박봉자를 향해 일방적으로 사랑을 갈구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무한정 조르듯이... 하지만 그의 우울과 그리움은 여인과의 사랑에서도 보상받지 못한다. 김유정이 박녹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26년 휘문고보 4학년을 휴학할 즈음이었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박녹주의 모습을 보고 반하여 김유정은 연정을 품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상의 남편이 있는 여자였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녹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녹주가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김유정이 그렇게도 사랑하고 푼 박녹주는 1906년 2월 15일에 태어나 1979년 5월 26일 사망한, 판소리 명창이다. 

또 다른 사랑은 1936년 여름부터 시작된다. 박봉자이다. 그녀는(1909-1988) 이화여전 출신으로 무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시인 박용철의 동생이다. 잡지 <조광>에 ‘사랑의 편지’란 공동 제목으로 김유정과 나란히 글이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유정으로부터 30여 통의 편지를 받았으나 답장은 일절 없었다. 그후 김유정과도 알고 지내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하여 김유정을 또 한 번 좌절케 했다. 박봉자의 결혼생활은 8년으로 끝난다. 35세에 남편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그녀는 아들과 딸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향년 79세에 사망한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박녹주, 박봉자에 대한 사랑에 목말랐던 김유정,못 이룰 연상의 여인들을 사랑했던 김유정, 하루하루의 고통을 잊기 위해 처절하게 글을 썼을 그를  생각하면 슬픔이 엄습해 온다. “만약 날개가 생긴다면 무얼 할 테요?”라는 질문에 “하늘에서도 궐련을 필테야요”라고 답했던 순진한 김유정...

김유정 문학촌 뒤편의 금병산.
김유정 문학촌 뒤편의 금병산.

박녹주, 박봉자 등과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김유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고향집 언덕배기에 움막을 파고 한때 자기네 마름(지주로부터 소작지의 관리를 위임 받은 관리인)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한 때 유정은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 휴양 차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갔으나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게 되어 결국 건강만 더 망친 상태로 서너 달 만에 다시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광업소에 있던 경험을 살린 작품으로 ‘금’이 있다.

금병산을 비롯한 이산 저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김유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고향에서도 김유정은 나이 많은 들병이(남편이 있는 여인이 주막을 돌아다니며 술을 파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며,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했다.
 
김유정의 대표작 ‘동백꽃’에는 갈등과 모순의 관계였던 마름과 소작농의 관계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여느 소설과 달리 작품 안에는 심각한 관계가 없다. 오히려 사춘기 남녀를 대상으로 하여 한편의 청춘 로맨스를 보는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동백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에 빠진 점순이와 점순이의 마음을 잘 받아주지 못하는 우직한 ‘나’의 이야기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의 모습 또한 깊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있는 한 잊히지 않을 것이다.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 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을 괴롭혔다. 1936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김유정은 형수가 사는 단칸 셋방에 함께 살며 폐결핵이 더욱 악화되어 고생하였다. 경기도 광주(현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매형 유세준(다섯째 누나인 김유흥의 남편)의 집으로 내려갔다. 김유정은 죽기 11일 전인  3월 18일에 방안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글을 썼다.

 휘문고보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 안회남(필승은 안회남의 본명, 이후 월북)에게 편지 쓰기(필승前. 3.18)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양력)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이 출간되었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렬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채리지 않으면 이 몸을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라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둬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허거든 네가 적극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김유정은 작가 안회남, 시인 이상, 소설가 겸 극작가 채만식, 시인 정지용, 시인 김기림, 소설가 이태준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상(1910~1937)은 1936년 김유정과 만나 서로의 천재성을 확인하고 가깝게 지냈다. 김유정과 같은 병인 폐결핵과 싸우다가 갱생할 뜻으로 도쿄행을 결행하기 전 이상은 김유정에게 같이 죽자고 하였으나 김유정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상은 일본으로 건너가 김유정이 죽은 지 보름 만에 병사하였다.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김유정은 폐결핵으로 만 29세에 요절했다. 요절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요절한 김유정은 아내도 자식도 없다. 원래 평균 수명의 절반을 못 산 경우까지를 요절이라 봐서, 과거에는 보통 30세 이전에 죽는 경우를 요절이라고 했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 등으로 점차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게 되면서, 넓게는 40대 초중반에 죽는 경우도 요절이라고 한다.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시인 이상은 27세, 김소월은 32세, 소설가 나도향은 25세 요절하였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 지금과 비교해서 나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1930년대 우리나라 남성과 여성의 평균 수명이 각각 32세, 33.5세이다. 2022년 평균 수명은 남성과 여성 각각  80.6세, 86.6세이다. 

김유정의 작품 세계는 작가 자신의 실제 생활 내지 주변 인물들의 생활상과 고향을 배경으로 쓰여 졌다. 가난에 쪼들리는 자기의 처지를 그린 ‘형, ’연기‘, ’따라지‘, 금광에 손댔다가 실패한 경험과 관련된 ’금‘, ’금 따는 콩밭‘, 시골 들병이들과의 어지러운 생활을 그린 ’솥‘, ’총각과 맹꽁이‘, ’산골 나그네‘, ’아내‘ 등에서 김유정의 자화상을 본다. 특히 김유정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나기’, ‘동백꽃’, ‘봄․봄 등은 향토성이 짙은 작가의 체취이다. 

유정은 다섯째 누나가 광주군 산골(山谷)로 시집가서 살았다. 처음 누님을 뵈러 온 유정이 새참(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에 먹는 음식)을 이고 들로 가는 것을 보고 울고 갔다고 한다. 참으로 정이 많은 유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성별·체중·신장·유전형질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선천적인 건강을 갖고 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나 학교·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사회적·경제적·환경적 요인에 의해 건강 상태가 각기 다른 영향을 받아 장수와 단명이 구분된다. 필자는 유정이 여성에 대한 사랑과 실연이 술을 탐닉하게 만들었고, 치질(1929년, 21세), 늑막염(1930년, 22세)발병은 폐결핵(1933년, 25세)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는 실레마을을 떠나면서 지역에서 자기 고향 출신의 유명 문인과 그의 작품 콘텐츠를 지역 관광 상품에 접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단순 비교에 다소 무리가 있지만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2022년 기준 15만7천 명 정도로 우리나라 전라북도 정읍시 인구 정도이다. 게트라이데 거리에 있는 모차르트 생가와 그가 청년 시절을 보낸 마카르트 광장의 집,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으로 유명한 미라벨 궁전 옆 장미 정원은 세계인의 관장지이다. 잘츠부르크 주 관광청 자료에 따르면 2019년 한해만 잘츠부르크를 찾은 관광객은 400만 명 이상을 기록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끝)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