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동포작가협회(재한동포문인협회, 재한동포문학연구회 주관)에서는 본지와 협력하여 재한동포문인들이 발표한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정해서 발표하는 '自選대표작 프로젝트'를 실행 중에 있습니다. 매인, 시는 5-10수, 수필은 2-5편, 칼럼은 3편, 평론은 2ㅡ3편, 소설은 1-3편을 선정해 약력 및 사진과 함께 dong01118@naver.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남태일 소설가의 自選수필 대표 작품입니다.

1.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

 

개나 고양이도 가족 구성이 되는 시대이다. 현재 반려동물을 키우며 함께 사는 인구, 즉 펫팸족은 한국이 천만 명이 넘어서고 중국이 1억 명이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친구가 2011년 부천시 심곡동에서 동물병원 개업할 때만 해도 주변에서는 처음이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은 동물병원이 8개 점으로 불어났고,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졌다고 한다.

오늘, 무엇 때문에 현시대에 와서 인간 세상에 펫팸족이 많아졌는가, 그 원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로, 그 원인은 현재 사회 전체적으로 소득이 늘어난 사실과 1인 가구의 급증 및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사회의 가구 구조변화가 생긴 것이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는 가구 형태 변화로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정서적인 결핍을 메우거나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는 사람들이, 그 대상을 인간으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반려동물로부터 찾으려는 것도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질수록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증가하는 경향도 펫팸족이 많아지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만족감을 얻는 동시에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주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반려동물들을 키우고 있다. 

사람들이 동물을 기르는 것은 선사시대 주거지나 무덤에서 발굴되는 그림과 조각품을 통해 보면 개는 구석기시대에 이미 가축화되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개는 역사상 인간과 제일 가깝게 지냈던 그 어떤 영장류보다도 인간을 더 잘 이해할뿐더러 영혼 교류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연구로 의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존재감을 요구한다. 물질이 고도로 발전하고 생활이 편리하게 만들어질수록 인간과 인간 간의 교류가 메말라가고 있다.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은 인간 심리상의 보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반려동물이라는 대체재를 통해 사람과 유사한 정서를 부여하여 메마른 관계에서 오는 고독감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인간이란 누군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일례로 노인들이 잔소리를 많이 하고 자꾸 무슨 일에 간섭하려는 것 역시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에게 표현하려는 행위다. 가족이나 이웃 그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지만, 함께 사는 동물만큼은 다르다. 

경쟁 사회 속에서 지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뒤, 아무도 없는 쓸쓸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반려견이 달려와 꼬리를 흔들며 순결한 눈으로 바라보고 반가워할 때면 하루 동안 받은 스트레스가 해소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여자는 외로움을 견디는 능력이 남자들 보다 약한 것일까?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반려동물을 더 많이 기른다는 것이 알려진다. 우리 이웃집 김 씨 아줌마도 반려견을 자식 이상으로 여긴다. 강아지는 10살이고 갑상샘에 병이 생겨 수술하는데 300만이 필요하다고 의사가 말하자, 한 달 월급이 160만밖에 안 되는 그녀는 서슴지 않고 반려견 수술하는데 사인을 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반려견에게 거액의 돈을 서슴지 않고 투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힘든 요즘 세상에서 반려동물이 인간에게 주는 존재감의 확인 정도와 애틋한 정을 가져다주는 정도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친구 매형이 거액의 돈을 들고 한 아가씨와 가출을 한 뒤, 마음의 상처가 컸던 친구 누님은 반려견과 암울한 5년이란 세월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5년 뒤, 그 반려견이 교통사고로 죽게 되자, 상실감과 현실부정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반려견 장례식을 치른다고 하였다. 친구는 반려견 장례식에 같이 참석하자고 했다. 친구 누님댁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매우 슬퍼했다. 반려견 ‘별이’가 같이 있어 주었기 때문에 그 아픈 5년을 견딜 수 있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자기 마음을 자꾸 숨기는 인간과는 다르게 반려견은 거짓이 없고 정직성과 충성심이 있으므로 변을 치우거나 사료를 주고 병 치료를 해주는 귀찮음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였다. 이를테면 그녀에게 영혼의 교감과 정서의 쾌감이라는 큰 선물을 주었던 존재가 바로 반려견 ‘별이’었다. 

인간이란 많은 재산과 돈을 가지고 있어도 항상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늘 열등감 속에서 시달리며 산다. 그러한 열등감을 해소하고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법의 하나는, 간단한 것으로도 만족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반려동물을 통해 대리 해소하려는 심리 경향도 있다. 

나 역시도 ‘푸들’을 키우고 있는데 사회활동 중 마음의 상처를 입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웃음을 주는 재롱둥이 반려견과 교감하면 정서가 안정되며 마음속의 평화가 찾아들곤 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며 생활하는 사람들을 볼 때 반려견과 인간의 관계는 단점보다는 좋은 점이 우세하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반려동물에 대해 관리가 아직 소홀한 곳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우리 동네에도 유기견이 곳곳에 다니고 때로는 밤에 갑자기 사람들에게 덮치거나 놀라게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많은 유기견을 안락사할 때 대부분은 그의 주인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안락사되는 개는 한해에 2만 마리에 육박한다고 한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유기견을 발견 당시 주인을 찾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조속히 이루어진다면 많은 애완동물이 안락사를 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완동물과 인간의 더욱 양호한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하여 주인과 애완동물이 함께 교육을 받는 시스템을 구성해야 한다. 뉴질랜드 같은 경우 애완동물을 사육하면 반드시 동사무소, 애완동물 관리센터에 가서 내장등록을 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주인과 애완동물이 같이 훈련과 서로 교감하는 기술을 배운다. 

연구에 따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을 나누어 하루 동안 웃는 횟수와 이유를 기록해보았더니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하루 동안 애완동물로 의해 웃는 횟수가 2~3배 더 많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매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귀여운 반려견을 데리고 다니면 여자들의 관심을 받을 확률이 많이 높아진다고 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혼자서 찍는 사진 효과보다 애완동물과 함께 찍으면 더 생동한 정서가 부여되어 보다 만족하는 사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애완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금전으로 계산할 수 없는 서로 사랑과 애정을 나누는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역시 현실이다. 우리는 애완동물을 법적으로 관리하는 동시에 애완동물을 많이 사랑하고 보살펴 주면 애완동물도 인간에게 그만큼 환락과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2021년 <시와 창작> 특별 문학대상 수상

 

2. 종이가 없는 교과서

 

지금 거주하는 동네가 재개발하게 되자, 우리는 아들을 따라 큰 도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사하기 전에 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먼 옛날 아버지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대면 바로 이곳, 잎이 무성한 고목 나무 그늘 밑에서 짐을 잔뜩 실은 지게를 내려놓고 저 멀리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 군 했다. 마중을 나가 기다리던 나는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저렇게 골똘히 하고 계시나?’라며 이해할 수 없었다.

긴 세월이 흐른 요즘, 나도 아버지를 닮아 아파트 창문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차수가 많아졌다. 그때마다 나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옛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때, 아버지도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아버지는 평생 ‘가난’이란 직장에서 뼈 빠지게 일만 해왔고 ‘가난’이란 굴레를 벗어 버리려고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녹슨 운명은 아버지에게 행운을 주지 않았고 가족의 삶의 무게가 빼곡히 걸려 있는 지게를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딸 지영이가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딸 지영이는 물건이 조금만 낡아도 모두 버렸다. 버려진 물건 속에서 유난히 눈을 끄는 것이 있었다. 앞뒤가 뭉텅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구두이었다. 나는 그 구두를 품에 꼭 안으며 버럭 화를 냈다. 

“야, 지영아! 너 이 구두 왜 버렸어!” 

지영이는 벼락같은 호통 소리에 두 눈이 휘둥그레져 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왜 화를 내세요. 그 낡은 구두를 이삿짐에 싸려고요?” 

“그래, 이 구두만은 내가 죽을 때까지 버릴 수 없다.” 

나는 낡고 볼모양이 없는 구두를 으스스 가슴에 껴안았다. 지나간 쓰디쓴 추억과 사무치는 감회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50여 년 전, 시골에 살 때 일이다. 아버지는 장손인 형을 특별히 챙기셨다. 우리는 6남매이고 남자 형제는 나보다 두 살 위인 형뿐이었다. 설날이 다가오면 아버지께서는 형님에게 새 신발을 사주시고 나는 달랑 양발 한 켤레만 사주었다. 형님이 발이 커서 신발을 신을 수 없으면 내 차례가 되곤 했다. 그나마 형은 워낙 깔끔하여 나에게 돌아올 때도 늘 멀쩡했다. 새 신발을 한 번도 신어 보지 못한 나는 속으로 아버지를 몹시 원망하고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해에도 기대하던 설날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으레 형님에게 새 신발을 사주셨다. 그때 새 신발을 너무나 신고 싶었던 나는, 그 간절함이 가슴에 사무친 나무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꼭 새 신발을 신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형님의 새 신발을 몰래 가방에 넣고 옆집 영수네 집으로 갔다. 친구들 앞에서 나는 신나게 뽐내면서 자랑했다.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함 그 자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발을 우리 집 나뭇더미에 깊숙이 숨겨두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튿날 철없는 영수 동생이 불장난하다가 그 나뭇더미에 불이 붙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불길은 바람 따라 삽시간에 우리 집 나뭇더미로 옮겨붙었다. 아버지, 형님, 동네 사람들 모두가 소리치고 물 뿌리며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다급해진 나는 신발을 찾으러 그 불길 속에 뛰어들었지만, 신발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타버리고 난 뒤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내 바지를 걷어 올리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벌겋게 붓도록 후려쳤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우리 집 형편은 어려웠지만, 우등상을 놓치지 않는 나의 성적을 보고, 아버지는 형과 큰 누나의 학업을 중단시켰다. 형은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하고 큰 누나는 도시 친척 집에 기거하면서 빵집에서 일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나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한 형님과 누나께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보란 듯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간절히 바라던 큰 도시의 대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온 동네 사람들의 경사였다. 동네 사람들은 너도나도 우리 집에 와서 축하해주고, 아버지는 감격에 넘쳐 마을 잔치를 크게 벌였다. 아마도 아버지에게는 그때가 당신의 일생에서 제일 행복하신 날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버지는 그날 처음으로 나에게 구두 한 켤레를 사주셨다. 

“둘째야! 너 아버지 많이 원망했지? 아버지도 여태 새 신발을 신어 보지 못했다.” 

사실 나 역시도 그때까지 아버지의 신발에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무심결에 아버지의 신발을 내려다보니 다닥다닥 기운 신발은 바로 내가 신다가 버린 헌 운동화였다. 순간, 아버지 대한 미안한 마음이 폭풍같이 가슴을 쳤다. 동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애써 참으려 했지만 끝내 흘리고 말았다. 어느새 아버지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나의 얼굴에 떠겁게 떨어졌다. 

아버지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품속에 안겨보았다. 아버지의 품속은 젖 냄새나고 안온한 어머니 품과는 달랐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는 싱그러운 흙냄새와 곡식 낟알의 구수한 향, 그리고 빨갛게 익은 과수원의 달콤한 냄새였다.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아버지가 사주신 새 구두를 도저히 신고 다닐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앞뒤가 뭉텅하고 모양이 없는 구두는 너무 촌스러웠다. 철없는 나는 도시에 일하는 누님을 졸라 새 구두를 샀고, 학교 다닐 때는 누님이 사준 새 구두를 신고 방학 때 집에 갈 때만 아버지가 사준 구두를 신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어느 시골에 가서도 볼 수 없는 구두이어서, 그저 신발장 한쪽 구석에 보관해 놓은 것이 바로 이 구두이었다. 

대학 시절 어머니는 지병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그 충격이 컸는지 앙상한 몸매는 더욱 작아지고 그나마 드문드문 남아 있던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갔다. 세월은 늙고 지쳐가는 아버지의 육체 속에서 용해되어 아픔과 병밖에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다.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어느 날 시골 형님으로부터 아버지의 건강이 위급하여 병원에 입원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차가운 바람이 부는 늦가을이었다. 세월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나뭇잎들이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한때는 그렇게 푸르고 반짝이던 잎들도 빨갛게 말라서 길 양쪽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노라니 삶에 대해 허무하고 쓸쓸함만 더해갔고, 일평생 고생만 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치솟는 감회와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병원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햇볕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아버지는 몹시 야위셨고 몸체도 한결 작아 보였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버지는 눈을 번쩍 뜨셨다. 오래 기다림이 담겨있는 절절한 눈빛이었다. 

“둘째, 왔나? 너 공부 안 하고 뭐로 왔노?”

마비된 얼굴 근육은 무표정하였지만, 눈가에서는 벌써 이슬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베개가 적시였다.

그날 밤, 아버지는 힘겹게 지고 오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으셨다. 고되고 힘겨운 여로를 마감한 아버지의 얼굴은 그래도 안온한 편이었고, 야윈 얼굴이었지만 약간 벌어진 입가에는 흐뭇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고된 일로 닳고 닳아 나무껍질같이 갈라지고, 돌같이 굳어진 손등의 굳은살 깊숙한 곳에 검은 흙이 그대로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천국으로 가실 때 지참할 이력서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의 일생은 고생과 끝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다만 아버지는 두메산골에서 나를 도시 대학교로 보낸 것이 가문의 영광으로, 당신의 고생 보람으로 생각하고 그 속에서 안위와 행복감을 찾았다.

미워도 했고 두려워도 했던 우리 아버지! 지금도 때로는 꿈에 아버지의 그 나무껍질같이 갈라지고 돌같이 굳어진 손등 속에 있는 검은 흙이 보인다. 아버지! 평생 자식을 위해 모든 거를 바친 우리 아버지, 하늘아래서 편안히 쉬세요. 불효의 아들은 언제던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기억이 그대로 묻어 있는 구두를 물티슈로 잘 닦은 후 햇빛에 말린 다음 깨끗한 종이로 싸서 내가 항상 즐겨보는 책과 함께 이삿짐을 쌌다. 낡고 모양 없는 구두는 “종이가 없는 책”이었다. 아니 나에게는 “종이가 없는 교과서”였다.

<한반도문학> 수필 신인상 작품 


3. 어머니, 나의 어머님

 

많은 사람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차 잊게 되고, 또 그 잊음이 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이 돌아가셨는지도 십여 년, 이제는 잊을 때도 되었지만 왜 그렇게 못 잊을까? 

제사가 돌아오거나, 세상살이에 지치고 외롭고 쓸쓸할 때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 대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가슴속 뭔가가 치솟아 목이 메게 한다. 그때마다 누렇게 빛바랜 옛날 사진 같은 어머니 영상이 자꾸 떠오른다. 

-안방에서 괴팍한 할머니가 곰방대를 길게 빼물고 끝없는 잔소리와 담배 연기를 함께 내뿜을 때면 어머니는 침침한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눈물 훔치던 모습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그 비참한 모습이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당연하며 ‘모든 여자의 삶은 원래 저렇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열여덟 살에 아버지와 결혼했다고 했다. 작은 키에 말수가 적은 착한 시골 처녀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여자들은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그곳이 꽃밭이든, 자갈밭이든 모든 것을 운명이라 생각하며 살아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세상을 조금씩 알아갈 때 우리 집은 할머니, 삼촌, 고모, 누님 모두 열 식구였다.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 놓고 괴팍한 할머니와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도 모자라 나의 심부름까지 하다 보면 식구들과 함께 편안히 앉아 밥을 먹을 때가 거의 없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식구들은 방아쇠 당긴 총알같이 튀어 나가 각각 흩어지고 밥상에 남은 것은 밥풀 묻은 빈 사발과 아무렇게나 내던진 수저뿐이었다. 밥그릇은 모두 텅 비어 있고 당신의 몫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밥을 챙기는 사람도 없고 말 한마디로라도 미안함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 자신도 이런 현실을 숙명인 듯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갈 때 책을 집에 놔두고 갔다. 부랴부랴 집에 들어서니, 침침한 부엌에서 무언가를 먹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던 사람처럼 황급히 손에 쥔 것을 감췄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맛있는 거를 혼자 드시는 줄 알았다. 뭘 맛있게 먹느냐면서 다가서자, 어머니의 기름기 없는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손을 밀치고 보는 순간, 나는 두 눈을 의심했고 놀라움이 몽둥이같이 나의 머리를 때렸다. 어머니는 음침한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 아침에 집 식구가 먹고 난 생선 뼈를 핥아 먹고 계셨다. 옆에는 아침에 내가 국에 말아 먹다 남은 퉁퉁 불은 밥이 조금 있었다. 그때, 밥상에 놓인 하얗고 날카로운 생선 뼈가 비수처럼 날아와서 가슴에 꽃이 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이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어머니의 품속에 꼭 안겨 얼굴을 비비대며, “엄마! 엄마는 왜 이래? 엄마는 생선이 비린내 나서 못 먹는다고 했잖아요.”라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는 왜 날마다 혼자 부엌에서 밥을 먹어야 하나요? 불쌍한 우리 엄마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요? 나는 눈물이 가득 고인 두 눈으로 헌 옷을 걸친, 영양부족으로 파리하게 된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니, 가슴이 그대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도 어머니가 초라한 모습으로 음침한 부엌에 옹크리고 앉아 혼자 밥 먹는 모습과, 하얀 생선 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지체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지금 같으면 생선을 한 트럭이라도 사서 대접할 수 있으련만.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학교에서 학부모 회의에 어머니를 초대했다. 내가 졸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냈기 때문이다. 회의에 참여한 어머니는 옷차림은 너무 촌스러웠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어머니는 주눅 든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어색한 발언까지 몇 마디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머니를 나무라며 다른 어머니들처럼 옷차림에 신경을 쓰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면서, 자기는 시집가서 잘사는 누이랑 나만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며 도리어 나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때 나는 의아한 눈길로 어머니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어머니에게도 ‘행복’이란 두 글자가 마음속에 있었던가요? 

시시때때로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모든 고통을 삼켜 왔던, ‘남존여비’의 철저한 희생자인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고, 오직 자식들을 위하여 살아오신 어머니,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인습에 순종하며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였던 어머니가 행복하다니. 아! 어머니 목이 메게 고맙고, 이 못난 아들이 너무 몰랐습니다. 불쌍한 어머니, 정말, 정말 미안합니다.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갔다. 할머니가 중풍으로 오래 누워 계시다 임종할 때 어머니를 불러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자, 어머니도 눈물이 비 오듯 하며 소리 내며 울었다. 마지막 이별 앞에서 두 여인은 뜨거운 눈물로, 지나간 갈등과 괴로움을 모두 씻고 서로 눈빛으로 양해와 용서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식음 전폐하면서 슬프게 울었다. 그것은 단지 할머니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마음속에 평생 싸인 울분을 토하는 처절한 절규이고, 흘러간 세월 속에서 고부간 쌓인 고운 정 미운 정의 징표였다. 

어머니는 자기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고된 시집살이와 수모, 폭력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자기는 여자라는 이유로 이렇게 살았던 것이 모두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자연계에서 천적이 무너지면 자기 자신도 쇠약해지는 것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생활력이 강하던 어머니도 나약해지고 깻잎같이 좁은 얼굴은 주름투성이로 되었으며 허리는 90도로 굽었다. 그렇게 혹독한 세파가 스치고 지나간 얼굴에서도 손자들과 손잡고 놀 때면 웃음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졸업 때 학습 성적이 전 학년에서 1등을 했다. 내색을 잘 하지 않는 어머니는 깊이 숨겨 둔 천에 싸고 또 싼 돈을 꺼내 손자가 제일 잘 먹는 것을 잔뜩 사 들고 왔다. 손자를 꼭 껴안고 머리를 자꾸 쓰다듬으시며 주름살 깊은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평생 고생하면서 소망하던 것을 무언으로 표현한 방식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지나친 흥분으로 뇌출혈로 쓰러져 여덟 시간 후에 돌아가셨다. 임종 때 얼굴에 회한도 슬픔도 없는 조용한 표정이었고 주름이 많은 눈 귀에는 웃음이 보이는 듯했다.

어머니의 일생에서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었고, 그 어떤 남자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본 적은 더욱 없었다. 한 번이라도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집에 시집와서 식구들 밥해주고 빨래하고, 진통으로 출산하고, 애들 키우며, 때로는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왔다. 어머니는 유람 관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비행기 한 번 못 타보고 살아왔다. 그렇다고 불평불만을 표시한 적도 없었다. 어머니의 일생은 마치 깊은 산속 바윗돌 밑의 자라던 한 포기의 풀처럼 조용히 자라났다가, 아주 조용히, 조용히 이슬처럼 살아졌다. 

그러나 어머니도 세상의 어머니들처럼 모진 고생을 하였지만, 당신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찾는 그런 비법이 있었다. 나를 진통으로 분만하시고 진한 젖으로 키운 어머니, 나의 어머님!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하늘 아래서 부디 행복하소서. 

어머니 유해를 화장하여 살던 시골에 모시고 돌아오면서 논길을 지날 때이었다. 문뜩 나의 두 눈에, 논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토종우렁이가 보이었다. 토종우렁이는 새끼를 치면 그 새끼는 어미 속을 파먹고 성장한다. 껍질만 남은 토종우렁이 어미는 논물 위에 둥둥 떠 있다가 맑은 물과 함께 저 멀리 하늘 아래로 조용히 흘러갔다.

 2016년 <문예감성>에서 최우수상

 

4. 선택과 직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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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가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자유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사르트르도)

많은 분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팔자가 정해졌다고 한다. 팔자는 하늘이 준 것인가? 아니다. 사람 팔자는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고유의 본바탕인, 성질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즉, 어떤 성질을 소유하면 어떤 팔자로 정해진다.

성질의 형성은 다방면이지만, 순간순간 내리는 선택은 성질의 형성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아기가 세 살 때부터 어머니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말을 안 듣는다는 거는 아기가 이미 어머니의 선택을 거부하고 자기의 선택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순간순간 내린 선택은 쇠사슬처럼 이어지고 그 이어진 쇠사슬은 성질로 형성된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선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이 세상에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회는 개인에게 어떤 형태로든 끝없이 선택을 요구한다. 따라서 개인도 생존을 위해서는 좋은 것, 나쁜 거 상관없이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는 거에 따라 매 개인이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순간의 선택이 1년, 혹은 10년을 결정할 수도 있고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

10년 전 일이다. 무역하는 친구가 북경에 살고 있다. 친구가 한국에 일 보러 와서 식사 중에, 자기 친구가 외국에 30년 체류하다 중국에 돌아와 치솟은 부동산 가격을 보고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던 얘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북경 친구의 무심결에 한 이야기에서 남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 이야기를 인터넷에서도 본 것 같다.

80년대 북경의 사는 친구 K가, 四合院을 자기와 한 직장에 같이 다니던 친구 C에게 人民幣 30만 위안을 받고 팔았다. K는 집 팔은 돈을 브로커에게 주고 유럽에 돈 벌러 갔다. 당시 주위 사람들은 K의 선택이 옳았다고 했고, 그 길을 잘 선택했다고 칭찬했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K도 해외로 가는 것을 선택했을 때 다른 거를 포기해야 했다. 포기한 것이 모두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이 사람에게는 맞지 않아 포기했지만, 저 사람에게는 보배같이 귀중하게 여길 수도 있다. C는 K가 포기한 거를 자기에게 좋은 기회라고 선택하였다.

K는 해외에서 낮에는 비가 오나 눈이 내려도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외국어를 배웠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음식과 습관도 맞지 않으니 고생이란 말도 할 수 없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머리에 흰서리가 하얗게 내렸을 때, K는 유로 100만원을 들고(人民幣로 768만 위안) 귀국하였다. 30년 동안 외국에서 고생하다, 이제는 이 돈으로 고향에 가서 편안하게 여생을 즐기려 했다. K는 귀국하자마자 왠지 자꾸 원래 자기가 살던 四合院, 옛날 주택에 가고 싶고 또 자기 주택을 산 C 친구도 보고 싶었다.

C는 한 달 전에 주택을 팔고 이사를 했다고 한다. 지금의 집주인에게 원래 집주인 C는 어디로 이사 갔냐고 물었다. C는 돈을 많이 벌어서 주택을 팔고 왕푸징으로 이사했다고 했다.

K는 이 주택을 얼마 주고 샀는가, 물었다. 8,000만 위안을 주고 샀다고 했다. 30만 위안짜리 주택이 8,000만 위안으로 올랐다는 말을 듣자, K는 온몸에 피가 한꺼번에 머리로 오르는 것 같고 두 눈이 캄캄해지며 밑동 잘린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고 한다.

부동산이란 추측하기 힘든 괴물이다. 때로는 부동산을 사 놓고 부채질하며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정부와 주위 사람들이 알아서 장구 치고 북 치며 가격을 올려 준다. C는 K가 포기한 부동산으로 가만히 앉아서, K가 30년 동안 고생해서 번 돈의 10배 이상 더 벌었으니, 혼절하지 않으면 이상한 노릇이다. 이것이 곧 현실은 과거 나의 선택 결과이다.

사실, K가 해외 돈 벌러 가는 결정도 잘못된 선택이 아니고, C가 친구의 집을 산 결정도 최고의 선택도 아니다. 그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한 선택과 결정뿐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명한 어록이 있다. “집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집 옆에 궁전이 들어서면 그 집이 오두막으로 변해버린다.” 우리는 중요한 대목에 세밀하게 따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 결정한 최고의 선택이라 해도, 환경의 급작스러운 변화로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이래서 종교가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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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가 K의 주택을 구매한, 한참 뒤에 누군가 C에게 어떻게 주택을 사게 된 계기를 물었다고 했다. K가 농담으로 내 주택을 살래? 라고 C에게 묻는 순간, 머리에서 섬광이 번쩍이며 내면에서 울려 나온, 주택을 꼭 사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듣고 나면 엄청, 과장된 얘기지만 사실 그 섬광과 내면의 목소리가 바로 우리가 자주 얘기하던 직관력이다.

직관은 섬광처럼 머리에 떠올라 미래를 예지하고 창조적인 아이디를 제시한다. 우리가 쓰는 詩도 흔히 직관의 산물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직관을 통해 전혀 생각지 못했던 해답을 얻게 되고 중대한 결정의 순간에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직관은 딱히 논리적으로 증거를 댈 수 없지만, 확실히 뭔가를 감지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직관력이 하늘에서 보낸 신비로운 육감이 아니고, 아무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도 획기적인 선택을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직관력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다. 하나의 착상, 직관력을 통해 그 유명한 상대론을 탄생시켰다. 직관은 평범한 직관, 전문가의 직관, 전략적 직관 세 개 종류로 구분한다.

스티브 잡스의 가장 원천적인 힘은 직관력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는 오직 직관에 따를 때만이 참신하고 독창적인 생각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잡스는 제품 개발에서 직관에 의한 통찰을 첫 자리에 놓고, 자질구레한 시장조사를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누구나 직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잘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직관과 쓸데없는 근심·걱정은 동시에 나타날 수 없다. 근심 걱정이란 먼지를 걷어내고 마음이 평온하면 미묘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바로 이때 우리의 직관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A라는 나의 친구가 있다. 며칠 전에 A가 아침에 차를 운전해 고속도로 3차선에서 운전하고 있는데 이유 없이 4차선으로 넘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쳤다고 했다. 가만히 따져보니 딱히 4차선으로 갈 필요가 없어 계속 3차선에서 운전하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 불안해지더라고 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음주 운전자의 차가 쾌속으로 달려와 차 뒷부분을 들이받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4차선으로 가라는 직관의 암시대로 했으면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나는 A를 보고 ‘네가 4차선으로 가라는 암시가 바로 직관력이다,’ 라며 알려 주니, A 친구는 ‘직관력이 뭐야?’ 도로 나에게 물었다. 직관이 몸에서 수시로 작동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 너무나 많다.

때로 건설 현장이나, 회사에서 사장이 일을 시켰을 때, 괜히 이유도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무거워지며 그냥 가기 싫을 때가 있다. 그른 상황에서 일하러 가면 대부분 사고를 칠 확률이 높다.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무거워진다는 거는 사실상 직감이 몸에서 작동한 것이다. 사람들이 무슨 결정이나, 어떤 사물을 선택해야 할 때, 작은 암시들이 육체로 반응한다고 한다, 운동하여 근육을 단련하듯이 직관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자꾸 하면 작은 암시를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어, 큰 결정이나 선택할 때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잠자는 직관을 깨워서 잘 활용하면 두뇌 하나가 더 생긴 것과 같다고 한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일 중에 무엇을 선택하거나 결정할 때, 머릿속에 첫 3초 이내에 떠오른 결정이나 선택이 대부분 직관력이 작동했던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결정이나 선택을 이성과 논리로 따지면 안 된다. 직관은 딱히 증거나 논리로 따질 수 없는 제7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직관력을 얻으려면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갈고 닦으면 직관이 우리의 혜안을 열어 준다. 더 나은 선택과 직관력을 잘 사용한 방법을 터득하면 분명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내리는 매 하나의 결정과 선택이 쌓여 개인과 조직, 더 나가서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 우리의 가정과 직장, 사회, 국가도 더 좋은 결과를 얻을 거로 생각한다.

남태일 프로필 

2016년 <문예감성> 수필 등단
2018년 <한반도문학> 수필 등단
2021년 <세계문학예술작가협회> 소설 등단
2017년 KBC주최 체험수기 공모전 특별상, <시와 창작> 특별문학대상 수상.
현재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중무역에 종사.

메일: mocha5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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