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때늦은 마지막 효도
2.   우리들의 동창모임, 그 이야기
3. 착하게 살아온 삶의 보람  
4.   아들아, 씩씩하게 살아라!          

재한동포작가협회(재한동포문인협회, 재한동포문학연구회 주관)에서는 본지와 협력하여 재한동포문인들이 발표한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정해서 발표하는 '自選대표작 프로젝트'를 실행 중에 있습니다. 매인, 시는 1-10수, 수필은 2-5편, 칼럼은 3편, 평론은 2ㅡ3편, 소설은 1-3편을 선정해 약력 및 사진과 함께 dong01118@naver.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自選작품은 제일 잘 된 작품부터 차례로 선정해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아래는 박영진 수필가의 自選 시 대표 작품입니다.

  때늦은 마지막 효도
                                           
 

해마다 봄과 더불어 어김없이 찾아오는 청명 날이다. 이때 즈음이면 하늘나라에서 아버지가 꿈속에 찾아오신다. 아버지의 제사상을 잘 차려달라고 미리 오셔서 부탁을 한다. 올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년 되는 해이다. 아버지의 제사상을 더 정성들여 잘 차려야겠다.
 세상에 후회를 치료하는 약이 없다지만 자꾸만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또한 인지상정이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효도 못하고 오히려 아버지를 싫어하고 미워했던 내가 너무도 미워난다. 어질고 마음씨 착한 아버지는 일찍 40대 초반에 지인들과 동업을 했다가 패가망신했고 또 사기꾼한테 사기도 당하여 가산을 완전히 탕진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재기불능 상황이라 정신상 타락되어 알코올에 의존하다보니 늘 술에 취해 박태백이 이태백이 되어 술귀신(酒鬼)이 붙었는지 가족들을 너무도 힘들게 하고 가정에는 큰 불행만 초래한 못난 가장이었다.
 현모양처였던 양띠인 어머니는 너무도 속상하고 짜증나서 아버지 몰래 술병마개를 가만히 열어놓아 알코올기운이 싹 빠지게 했고, 용띠인 아버지가 술에 취해 용쓰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면 이혼한다고 난리도 쳐봤지만 나 어린 나와 누나가 하도 불쌍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그런대로 그럭저럭 꾹 참고 살아왔다. 자기만 잘 살겠다고 자기가 좋아서 낳은 제 자식도 나 몰라라 하는 요즘여자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누나는 아버지의 술주정에 질려서 못생긴 사람이어도 술 안 마시는 신랑한테 시집간다고 했고 나는 술귀신(酒鬼)아버지만 안보고 살면 제일 행복할 것 같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꿈이라고 아버지는 이 아들이 출세하여 박가네 가문의 옛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며 늘 술만 마시면 잔소리를 늘여 놓아 나는 그게 그렇게도 싫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밖에 못 다녔어도 오랜 촌지서이고 큰아버지는 일찍 시장까지 지냈던 뼈대 있는 박가네 가문이라면서 말이다. 하긴 이전에는 망자성용(望子成龍)이라고 자식이 출세하면 부모가 자식 덕분에 부귀영화를 누렸다지만 지금은 정반대로 망부성용(望父成龍)의 시대가 아닌가. 부모덕이 없으면 출세하고 벼슬하기도 힘든 빈익빈, 부익부의 권력과 재부가 세습되는 무한경쟁시대가 아닌가. 
 아버지는 패가망신하고 날마다 술만 마시며 인생을 되는대로 막살면서 왜 나에게는 높은 요구만 하지? 못난 부모는 자식이 잘 되는걸 자랑거리로 삼지만 훌륭한 부모는 자신이 잘해서 자식들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았고 우습게만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너무 어리석었고 철이 없었다. 아무리 못나고 허물과 잘못이 많아도 나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분뿐인데 말이다.
 2007년, 한국국회에서 ‘재외동포법’개정안이 통과되어 중국동포들에게도 고국 방문길이 활짝 열리자 아버지는 그동안 가족들에게 너무 큰 빚을 졌다며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돈 좀 벌어야겠다고 했다. 귀여운 손자에게 용돈도 팍팍 주고 싶고 노후준비도 잘 해서 자식에게 절대로 부담 주지 않겠다며 한국에 돈 벌러 왔다가 흑룡이 재난을 몰고 온다는 2012년 임진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익산 원광대학병원에서 급성폐렴으로 돌아가셨다.
 생전에 불효했던 나는 아버님께 속죄하는 마음에서 해마다 네 번씩 꼭꼭 제사상을 차려 올린다. 청명과 추석 그리고 아버지의 제삿날(기일)과 생신날에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낸다. 미신을 믿는 나는 제삿날에는 꼭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하늘나라에서 먼 길을 다녀오시는 아버지가 집으로 편히 들어오시라고 말이다. 
 인자하신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노라면 눈물이 절로 난다. 살아생전에 아버님을 편히 모시지 못한, 한국에 와서 별별 고생을 다 시킨 내가 너무나 후회된다. 불행과 행복은 한 끗 차이라고 내가 아프신 아버님을 하루만 일찍 병원으로 모셔갔더라면, 또 부모님 소원대로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았더라면 아버님은 아직 살아계실 것이다. 모든 게 운명이고 이 못난 자식의 불찰이다. 가족이 불화하여 화목하지 못하면 그 가정은 콩가루 집안이 되고 식구들은 각자도생하여 제각기 흩어져 살게 되는 법이다.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너무 술주정을 부려서 우리 집은 항상 초상집 분위기였고 오랜 세월 우리는 그렇게 기도 못 펴고 마음이 항상 불안해서 화기가 전혀 없이 살아왔다. 어찌된 영문인지 밖에 나가면 나쁜 사람만 만나게 되고 나쁜 일만 생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이니깐. 그래서 우리식구들은 미신을 미친 듯이 믿게 되었다. 아버지 몸에 붙은 술귀신(酒鬼)을 쫓아내려고 어머니는 뼈 빠지게 번 돈을 허비하며 점쟁이를 찾아가 방토도 하면서 별별 노력을 다해왔다. 그러나 술귀신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떠나가질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술귀신(酒鬼)도 그제야 우리 집에서 떠나갔다. 악귀 같은 술귀신이 사라지니 온 가족이 화목하고 가정에는 행운과 행복만이 가득하게 되었다. 신기하게 나도 지옥 같았던 노가대판에서 저절로 벗어나 좋은 회사를 만나니 진짜 살맛이 났다. 회사 창사 이래 처음으로 최우수모범사원도 되고 일 편하게 하면서 돈도 잘 벌고, 또 돈을 잘 벌어 아들을 좋은 대학에도 보내고 어머님께 생활비도 여유 있게 넉넉히 드리니 어머님은 아들을 잘 두어 노년에 호강한 생활을 한다며 낙루하신다. 고생 끝에 낙이 와서 복을 받는다면서 말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노라니 한때는 엄청 싫어하고 미워했던 아버지가 자꾸만 생각난다. 아버지가 살아계시어 아버님께도 효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황된 생각도 해본다. 자식은 효도하고 싶은데 부모님은 기다리지 않고 자식은 모시고 싶은데 부모님은 계시질 않네. 생전에 효도 못하고 부모님 세상 떠난 후 때늦게 후회하면서 땅을 치며 통곡한다. 참 안타깝고 허무한 게 바로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싶다. 
 자꾸만 내가 불효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아파난다. 이 불효자는 오늘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후회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다. 한국가요 ‘불효자는 웁니다’란 노랫소리가 귀가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아버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오실 아버지여! ... 그토록 고생하신 아버님이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아버지!”
 오곡백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은 제사상에 나는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즐겨마시던 술을 정성껏 부어 올린다.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아, 이 세상에서 다하지 못한 행복을 저 세상 하늘나라에서 마음껏 누리시기를 기도하면서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린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때늦은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한다. 

       2022 05 22 전북 김제

  
  우리들의 동창모임, 그 이야기
                                                      

 

 코로나19사태가 터지기 전에는 한해에 몇 번씩 동창모임을 가졌던 우리 동창들은 이번 코로나 병난을 계기로 완전히 사람들이 몰라보게 변해버렸다. 동창들 카톡방과 위챗방은 텅텅 비어버렸고 누구하나 문안 한마디도 없다. 비록 동창모임은 빛을 잃어도 동창들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져만 간다. 이제부터 몇 해 전에 있었던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동창모임, 그 이야기를 좀 해보면서 동창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보려고 한다. 
 “야, 진짜 오래간만이다. 영팔아, 정말 반갑구나.” “그래, 벌써 30년도 넘는구나. 세월이 참 빠르네.” “중국에서도 못 만나던 동창들을 이렇게 한국에서 보게 되는구나!” “한국 땅이 참 좁고 한국이 정말 작기는 작은가본다.” 40년 만에 만난 고중시절 동창들이 뜨겁게 인사를 나누며 반가와 야단들이다.
 베이징에 있는 한국기업에서 부장으로 일하는 방홍범이 서울본사에 출장을 나왔다가 동창들 보고 싶어 얼굴 좀 보자고 해서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그동안 모임을 자제하다가 3년 만에 다시 만나는 동창모임이다. 통성명을 할 때면 항상 자기는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의 후손인 버들 유씨(柳)라고 밝히는 유한식 회장이 즐거운 식사자리를 마련했다며 누이동생네 가게인 봉천동에 있는 동해샤브샤브로 우리를 초대했다.
 서울지하철 2호선 봉천역 2번 출구 근처에 있는 이 가게는 우리 왕청 2중 동창들 만남의 장소(거점)이다. 동창생 누이동생 가게여서 내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기분 좋은 덕담을 나누고 즐거운 식사도 하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남길 수 있어 나는 그게 그렇게도 좋았다. 어머니가 한국국적인 연고로 20년 전에 벌써 한국에 나와 국적을 취득하고 건설현장에서 탄탄한 삶의 터전을 마련한 성공한 목수오야지라고 자부하는 유회장은 20억도 넘는 아파트에서 9살 연하의 예쁜 마누라와 재혼해 살고 있는데 동창모임 식사비용은 번마다 자기가 계산한다. 그리고 공짜를 진짜로 싫어하는 내가 2차 유흥비를 결제해서 동창들이 낸 회비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동창회 초대회장인 박남선朴男善 서울지점장이 한국파견근무(9년)를 마치고 장춘에 있는 중국공상은행으로 복귀하면서 자기가 없어도 너무 섭섭해 말고 동창모임을 자주 가지며 우정의 꽃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재미나게 잘 살라고 200만원이나 되는 후원금을 주었다. 동창들은 이 돈으로 시간을 내서 여름휴가철에 좋은 곳으로 2박3일 여행을 가자고 계획했다.
 그런데 재수 없는 영팔이 때문에 300만원 회비를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우리들의 여행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코로나19 위기가 터지기 전, 동창들이 모여 송년회를 가졌었다. 친척방문차로 한국에 온 동창들인 연길시 연신소학교 교사 방미화선생과 왕청 하마탕촌 김정봉촌장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김인복 부회장이 지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영팔이를 만났는데 이번 동창모임에 그도 초대했다. 
 최나발이라는 별명을 가진 영팔이는 학창시절부터 엄청난 말썽꾸러기였다. 나보다 네 살 이상인 그는 묵은돼지라는 불미스런 별칭도 갖고 있다. 습관적으로 입을 씨물씨물한다고 씨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늘 이상한 짓과 엉뚱한 소리를 해서 선생님을 화나게 했다. 어느 한번은 수학시험답안지에 이름을 쓸 때 장난질치며 최영팔을 최08이라고 쓰기도 했다. 또 선생님이 “넌 왜 자꾸 왕청같은 소리만 하느냐?”고 하면 ‘나는 왕청 사람이기에 왕청같은 소리를 합니다.’고 기만 채워주었다. 왕청현 왕청촌 태생인 영팔이는 어쩐지 왕청같은 생각에 왕청같은 말만 하며 왕청같은 짓을 찾아하는 왕청같은 사람 같았다. 
 동창모임에서 영팔이를 만났더니 처음에는 너무너무 반갑다며 나팔처럼 생긴 나발 입을 나불대며 떠들어 대다가 술이 좀 거나하게 되니 내 손을 꼭 잡고 짜증나게 자기를 형님이라고 하란다. 나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많다고 말이다. 영팔이가 형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나이차이가 많아도 동창은 동창이지 않는가? 지금 다 같이 늙어가는 판에 나이를 따져선 뭘 하려는지. 정말 기분 나쁘고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창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삐져서 간다는 소리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진, 술에 취한 영팔이를 찾느라고 유회장이 봉고차를 몰고 봉천역에 나갔다가 재수 없이 교통경찰의 음주운전단속에 딱 걸렸다. 후에 법원에서 범칙금 300만원과 운전면허정지 1년 판결을 받고 엄청 고생을 했다. 동창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범칙금은 우리가 회비로 해결했다. 유회장이 극구 만류했지만 인복이가 동창들 성의라면서 대신 전해달라고 돈을 누이동생에게 전달했다. 지난해 8월, 여름휴가철에 유회장이 감사의 인사로 우리 동창들을 초대하여 인천 영종도 을왕리해수욕장에 가서 해수욕도 즐기며 요트도 타고 바닷가 전망 좋은 횟집에서 조개구이와 회를 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아쉽게 무산되었던 2박3일 여름여행을 대체한 당일여행이었다.    
 세상은 쉽게 변해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남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좋아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날 일로 동창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니 영팔이는 동창회 위챗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에 온 방홍범이 한동네에 살던 영팔이도 함께 얼굴을 보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초대했다. 동창들이 어쩌다 만나면 서로 덕담도 나누고 좋은 말만 하면서 분위기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은데 꼭 별난 사람, 이상한 사람, 네가지 없는 사람(싸가지 없는 사람)이 있어 기분을 망치게 할 때가 있다. 바로 최나발 영팔이처럼 말이다. 
 연변에는 남자 나이 45세 되면 철이 든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는 지천명知天命나이까지 먹었는데도 영팔이는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동안 한국 노가다건설현장에서 멍청해 진건지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정신이 잘못된 건지 참 안타깝기만 하다. 순이 부친이 한 달 전에 한국에서 돌아가셨는데 묘소도 못 쓰고 골회를 날렸다고 하니 자기 부모님을 개나 돼지가 죽은 것처럼 버리면 쓰냐고 핀잔을 준다. 명당자리를 얻어서 정성껏 잘 모셔야 한단다. 그래야 자식들도 잘 되고 자기가 하는 일도 척척 잘 풀린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한치 앞의 일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영팔이가 장난으로 한 불쾌한 말이 란자와 정자의 기분도 엉망으로 만들었다. 여성들의 성적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란자야, 정자야 하면서 말이다. 학창시절에도 이 이름 때문에 란자와 정자는 엄청 놀림을 당했었다. 란자는 한국에 와서 김연우로 개명했고 정자도 썩 오래전에 중국에서 큰돈을 써가면서 좋은 이름으로 고쳤는데 사람들이 새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정자란 이름을 그냥 쓰고 있단다.
 선순이도 홍순이라 개명했다고 하니 영팔이가 또 “왜 똥순이라고는 고치지 않았느냐? 이름을 바꾸면 새사람이 되고 뭐 운명이 바뀌고 팔자도 좋아 진다더냐!”고 해서 선순이를 화나게 했다. 인복이도 주연(姝延)이라고 이름을 고쳤다는데 왜들 다 그렇게 자기 좋은 이름을 바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복중의 복은 인복, 복중의 최고 복도 인복(인연복)이라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번에는 인복이가 정치적인 말을 해서 내 기분을 망쳤다. 이미 고인이 된 박원순 전임 특별시장의 성추행사건을 끄집어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돈 있고 권력만 있으면 다 나쁘게 변한단다. 서울특별시장이라고 뭐 다르겠느냐고. 여자는 돈 없으면 나쁘게 변하고 남자는 돈 있으면 나쁘게 변한다면서 우스개도 피우면서 말이다. 인권변호사로 한평생 사회활동에 헌신한, 제집까지 팔아가면서 남을 도와주고 36억이나 기부하며 가족에게는 7억 빚만 남기고 간 그런 분을 매도하고 모독하다니. 억울하게 떠나간 슬픈 분을 위해 ‘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란 애도의 글을 그 당시에 유명한 동북아신문에 발표했던 나였다. 내가 존경하는 분을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인복이가 함부로 비난하니깐 말이다.
 내가 인복에게 애모의 감정이 싹터서 짝사랑 하게 된 것은 이팔청춘 16세 사춘기였다. 인연이라고 할까 나보다 한 살 이상인 인복이와 나의 고모사촌 인숙이는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에서 함께 커왔고 나의 친누나 영복이와는 초중 때 친구였는데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왔었다. 그리고 왕청2중 때는 나와 한반을 다니는 동창이었다. 인복이라는 이름도 두 누님의 이름과도 비슷하다. 이런 인연도 참 드물다. 
 인복이 말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울적해 있던 내가 방홍범의 말을 듣자 흘러간 옛일이 생각나 금시 웃음이 나오고 기분도 좋아졌다. 우리의 고중시절, 그 당시에는 대학고시에 합격되어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으면 동네잔치를 벌이는 게 유행이었다. 방홍범이는 자기 아버지가 돈이 아까워 부들부들 떨면서 개 한 마리도 못 잡아주어 몹시 서운했는데 배초구百草泃에 사는 배포가 큰 영진이네 아버지는 통도 크게 소를 척 잡아서 동네잔치를 벌리는 것을 보고 엄청 놀라고 부러웠다고 했다. 하긴 나도 그런 즐거운 추억이 있어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난다. 그 후에도 내가 결혼할 때 아버지는 또 소를 잡았고 누님이 시집 갈 때는 왜서인지 소는 안 잡고 돼지를 잡았었다. 우리 박가네 가문이 뼈대 있는 현장县长가문이어서 사람도 배포가 크고 통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피는 못 속이니깐.
 몇 해 전에 성좌문학사 카톡방에 내가 이전에 아버지가 소를 잡은 이야기를 자랑삼아 올렸더니 다들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문우文友 송미옥 수필가는 소가 얼마나 비싼데 아들이 대학에 붙었다고 소를 잡느냐면서 뻥친다고 댓글을 달기도 했다. 1988년, 그때 소고기 육질이 최상급인 3살짜리 중국 연변황소는 800원쯤 했다. 소고기 양이 너무 많아서 잔치에 다 쓰지 못하니 일부 소고기는 팔기도 했다.
 한국가요 ‘잘났어, 정말’이라는 노래가 나의 애창가 18번지이다. 네가 잘나 일색이더냐 내가 못나 바보였더냐,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어울리며 사는 거지, 잘나면 잘났지 못나면 못났지 제멋에 사는 거지, 그저 사는 게 행복한 거지! 배포가 크나 통이 크나 깍쟁이로 사나 좀생이로 사나 산다는 건 행복한 거지!
 우리들의 동창모임, 그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동창모임에서 내가 피부로 느낀 반드시 주의할 점 몇 가지를 말하고 싶다. 정치와 종교에 관한 말이나 불쾌한 말,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과 험담은 하지 말고 남의 허물과 흉은 보지 말며 되도록 덕담과 좋은 말을 많이 하면서 건설적인 대화와 우아한 언어로 품위 있고 격이 있는 만남이 되어야 한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모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분들도 즐거운 동창모임을 자주 가지며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들의 동창들도 일상으로 돌아와 즐거운 동창모임을 자주 가지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우정의 푸른 소나무 영원하리라!(友情之松, 萬古長靑!)

                                                                           2023. 02 23 전북 김제     
     
      
  착하게 살아온 삶의 보람      
                                             

 천국이라 믿고 찾아온 한국은 꿈같은 나의 유토피아, 고마운 나의 고국이다. 아름다운 한국의 푸른 하늘아래서 살아온 세월이 벌써 20년이 된다. 그동안 한국인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일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 땅에서 나의 꿈도 활짝 꽃피워나는 것 같았다. 
 동포문학 수필우수상 2회, 한반도문학 신인상과 최우수상, 법무부 세계인의 날 수기공모 특선상, 동포역사교육문화탐방 후기상 2회, 대국민칼럼공모 은상과 장려상, 국제 가이아 환경문화대상, 그리고 KBS한민족방송 우수상도 수차 수상했지만 내 집 같은 우리 회사에서 가족 같은 동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부모님 같은 사장님한테서 받은 최우수모범사원상이 제일 보람차고 값지게 느껴진다. 
 최우수모범사원, 우리 회사 창사 이래 내가 처음이자 유일한 수상자라고 한다. 한국 중소기업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직원들에게 상을 주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내가 남들이 기피하는 더럽고 힘든 바렐작업을 도맡아하면서 방청유도 많이 절약하고 폐수도 엄청 적게 방출하면서 소재를 불량품 없이 깨끗하게 씻어냈으며 6년 동안 아껴준 절약한 비용만 한화로 1억이 넘는다. 하여 응당 상을 주어야 상식이 아니냐고 했더니 김치문사장님이 ‘알았어! 미스터박이 회사에 기여한 공로도 큰데 응당 상을 주어야지’하며 흔쾌히 받아들이고 생산관리를 책임진 변덕재부장님에게 상패를 주문제작하라고 지시를 하달했다. 
 상을 수상하는 일이 회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변덕재부장님도 상패에 들어가는 문구를 어떻게 작성해야 할지 몰라 글 좀 쓴다하는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부장님이 작성한 감사장을 표창장이라 고치고 최우수모범사원이라는 칭호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렇게 나의 최우수모범사원상이 만들어졌다. 어질고 착하며 부지런히 일도 잘하니 회사에서는 나를 엄청 아끼고 사랑해주는 터였다.
 피는 못 속인다고 마음씨 착한 부모님들의 피가 흐르는 나는 법이 없이도 사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착하고 바르게 살자’는 내가 한국에 와서 지천명나이를 먹고 세운 우리 집의 가훈이다. 내 아들도 이 가훈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착하고 바르게 열심히 살아서 이십대에 입당도 하고 지금 연길에서 교사사업에 종사하니 나는 너무 가슴이 뿌듯하다. 
 한국에서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일회용종이컵하나 함부로 버린 적 없이 깨끗하고 철저하게 살아온 나였다. 지하철을 타거나 길을 가다가도 쓰레기를 보면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꼭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고야 시름이 놓이는 이상한 습관을 가진 좋은 사람으로 살아왔다. 나눔과 베품의 미학을 항상 실천하면서 생활화, 습관화하니 운명도 저도모르는 사이에 많이 바뀌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는 노다지판이지만 누구에게는 더러운 쓰레기판이라 저주받고 욕을 먹는 노가대판(건설현장)에서 네 가지 없는 사람, 4가지(싸가지)없는 사람들을 만나 한국의 매운맛을 톡톡히 보면서 디아스포라의 피눈물을 흘렸던 나였다. 한국의 악덕업자들을 만나 힘들게 일하고 돈도 받지 못하던 내가 착하게 산 덕분인지 보람인지 하늘이 도와 좋은 회사를 만나 돈도 잘 벌고 마음 편한 삶을 살게 되었다.
 불행을 맛본 사람이야말로 진정 행복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고 행복의 소중함도 잘 아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원망 한마디 없이 항상 대한민국에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나에게 행복을 준 우리 회사와 위대한 대한민국을 위해 무언가 기여할 기회를 찾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 시간만 있으면 회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청소를 한다. 또 남들이 기피하는 기숙사 사감(舍監)도 자발적으로 도맡아하면서 기숙사를 책임지고 제집처럼 깨끗하게 관리하니 ‘요즘 세상에도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며 다들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회사 주변에는 심은 지 십년 되는 50그루되는 소나무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해 사랑의 손길이 전혀 가지 않아 흉물스럽게 자라나 있었다. 어느 봄날에 나는 심심풀이 삼아 또 재미삼아 짬짬이 톱으로 정원사처럼 예술적으로 그 소나무들을 가지치기해서 엄청 멋지게 해놓고 휴식공간까지 만들었다. 그리고는 기분이 좋아서 막걸리를 마시며 즉흥적으로 시 한수를 지었다. 
       
  어느 봄날의 풍경
           
 겨울에 지친 영혼이 
 허기져 비틀거릴 때
 강가의 얼음장 돌아눕는 소리에
 깊은 잠에 빠졌던 여석들
 꿈결에 뒤척인다.

 아물아물 아지랑이
 토실토실 버들강아지
 입 다시고 몸 비틀며
 옴실대는 귀염둥이들

 목련은 부푼 가슴 붙안고
 불안하게 서성이는데
 벚꽃은 하얗게 웃으며
 수줍게 윙크한다.

 누굴 기다리느라 민들레는
 저토록 바장이고 있을까
 산기슭에 진달래는 왜 또 저렇게
 홍조 띄우며 수줍어하는지

 어허, 뭔가를 목마르게 기다리며
 그리는 귀여운 친구들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날 보고 넌지시 웃고 있다. 
  
 먼 훗날, 내가 우리 회사를 떠날 때 이 소나무들이 어느 정도로 커있을까? 얼마나 멋진 모습으로 자라나 있을까? 미래에 있을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십년수목, 백년수인(十年树木, 百年树人)이라는 옛사람들이 남긴 성구도 저절로 떠오른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람대접 받으며 사랑받으며 사는 것도 그동안 착하게 살아온 삶의 보상이고 세월이 주는 착한 선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드디어 표창장을 타는 날이 왔다. 아침 체조시간에 나에게 직접 상을 주려고 김치문사장님이 사장실에서 나오셨다. ‘박영진씨!’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앞으로 나오라 하고는 ‘최우수모범사원’이라고 쓴 상패와 상금 50만원이 들어있는 돈 봉투를 수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열심히 일하는 자 보상이 따른다.”면서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원들을 계속 장려”할 것이라고 했다.
 ‘최우수모범사원’ 표창을 받은 나는 열심히 일하면 보상이 따른다는 도리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면서 보람차게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한국의 푸른 하늘아래서 최우수모범사원답게 더욱더 최선을 다해 모범적인 삶을 살 것이다.      
    

                                                                2022 10 02 전북 김제          
           
  아들아, 씩씩하게 살아라!                           
  -아들에게 쓴 아빠의 편지

                                               
 사랑하는 내 아들 동규에게:
 내 아들로 태어나 씩씩하고 반듯하게 잘 자라서 너무너무 고마워! 너와 나 부자지간으로 인연이 되어 만난 지도 벌써 22년, 이 아빠가 이렇게 아들에게 편지 쓰기는 난생처음이구나! 
 봄이 여자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 그리고 가을을 수확의 계절, 성숙의 계절, 사색의 계절이라고도 하지. 요즘 넉넉하고 풍성한 한가위, 한국의 전통적인 추석명절을 맞으며 고향생각이 절로 나고 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이렇게 편지를 쓴단다.
 가정을 지키지 못한 못난 가장이라는 죄책감으로, 또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돈 벌러 한국에 와서 그동안 너를 지켜주지 못한, 그리고 네가 커오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다는 무거운 마음의 십자가를 이 아빠는 평생 짊어지고 갈 것 같구나! 
 초등학교를 다닐 때, 너는 한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었지? 지금도 이 아빠는 그게 마음에 걸려 마음이 아프구나. 널 두고 떠나간 엄마 아빠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네가 외롭게 홀로 있을 때면 땅바닥에 쭈크리고 앉아 조용히 나뭇가지로 엄마 아빠를 쓰다가 울음보를 터뜨렸을까? 그림종이에다는 날마다 초가삼간 예쁜 집을 그리고, 우리 세 식구가 오순도순 모여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해바라기 그림만 그렸을까?
 12년 전, 체류기간이 만기되어 내가 한국에서 연길로 갔을 때 나는 너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지. 10살 난 어린 아들이 너무 불쌍해서 이 아빠는 마음이 찢어졌단다. ‘아빠가 너에게 너무 미안해! 가정을 지키지 못해 너에게 고생만 시켰어! 너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졌구나!’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너는 그 작은 손으로 살살 닦아주면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어른스럽게 말했지. ‘아빠, 미안해 마요. 전 다 알아요! 아빠는 잘못 없어요! 아빠 힘내세요! 저 있잖아요! 제가 잘 할게요’
 한국에 가서 서울강남에서 살면서 호강시켜준다는 한국사기꾼에게 속아 가정을 내팽개치고 너를 버렸던 엄마소식을 묻는 너에게 고지식한 내가 사실대로 말했지. 엄마가 한국인을 잘못 만나 돈 없어 엄청 고생한다고. 그러자 너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너무도 안타까워 두발을 통통 굴렀지. 아껴 모은 자기의 돼지통장 돈을 엄마에게 보내주겠다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지. 돈 없으면 엄마가 굶는다고 통곡을 했지. 
 이 편지를 너의 엄마가 보면 어떤 심정일까? 인정미 없는 엄마가 자기 자식을 무정하게 버려도 똑똑한 자식은 그래도 자기 엄마라고 마음이 아파하는구나! 범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고 돼지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하는데 요즘 세상은 파렴치아빠와 몰염치한 엄마들이 천륜을 저버리고 제 자식도 나 몰라라 하는 후안무치시대가 됐다고, 사람이 짐승보다도 못하다고 한탄하고 있지.
 세월이 빨리도 흘러 아빠는 이젠 지천명나이를 먹고 쉬쉬한 쉰 고개에 올라섰다. 너도 어엿한 대학생으로 되어 벌써 내년이면 졸업을 앞두게 되었지. 우선 올해 봄에 있었던 교사자격시험에 합격된 것을 축하드린다. 인류영혼의 공정사라는 교사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 드린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가슴 아픈 추억들은 영영 잊어버리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만 바랄뿐이다. 원망하는 삶을 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행운의 여신은 웃으며 찾아온단다.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넌 아빠의 꿈이다. 이 세상 모든 아빠들이 ‘아들은 아빠의 꿈’으로 생각하듯이 이 아빠도 예외가 아니다. 넌 또 이 아빠의 외동아들이다. 난 네가 너의 꿈을 이루어 성공하면 그게 이 아빠의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널 후원할 것이다. 듣자니 네가 공부를 더해 석사, 박사학위까지 따고 싶다는데 반대할 아빠가 아니다. 지금까지 아빠가 혼자 힘으로 널 키워왔다고 부담을 느끼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 너의 후원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아빠는 너무너무 행복해. 넌 아빠의 아들이고 아빠의 꿈이니까.
 연변가요 ‘다 갔다’라는 노래처럼 중국조선족이 세계 곳곳으로 다 떠나가면서 조선족사회가 무너져 가고 있다. 너처럼 중국에서 사는 사람은 나중에 중국인으로 동화되고, 아빠처럼 한국에 장기간 정착한 사람은 점차 한국사회에 흡수되고 한국인으로 살게 되지. 이런 현상을 문화회귀라고 한단다. 
 중국조선족은 이렇게 흩어져 살다가 나중에는 점차 사라져 먼 훗날 역사책에서나 만날 수 있다는 학자들도 있다. 저 출산, 고령화시대를 맞은 지금, 조선족들이 쉽게 한국에 나와 살 수 있는데 이런 문화회귀현상은 세계시민화시대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한다. 지구도 지구촌이 되어 국경이 따로 없이 출입국이 편리해서 우리가 한민족이 사는 한국에 와서 함께 사는 것은 인지상정이지.
 고마운 고국에 와서 살면서 아빠는 너무너무 행복하단다. 한국의 푸른 하늘아래서 우리 말, 우리글로 쓴 내 글이 KBS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프로에 방송될 때면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슴 뿌듯하단다. 한편으로는 우리말, 우리글에 약한 네가 걱정이 되어 밤잠도 못 이룰 때가 많단다. 지금도 너 때문에 있었던 재미나는 에피소드- ‘왕청 갔던 소리’(왕청같은 소리)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너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네가 중학교 때, 내가 널 데리고 왕청 고모네 집으로 갔다 온 며칠 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 온 네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빠, 오늘 우리 선생님이 날 보고 내가 왕청 갔다 온 소리 한다고 했어요. 내가 왕청 갔다 온 소리(왕청 갔던 소리) 안했는데 선생님이 어떻게 내가 왕청 갔던 일 아시는지 참 이상해요.’ 그 말을 듣고 나도 처음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뜩 깨닫는바가 있었다. ‘왕청같은 소리를 왕청 갔던 소리(왕청 갔다 온 소리)로 잘못 들었구나!’ 왕청같다는 말은 엉뚱하다는 뜻인데 연변사투리로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만 아는 말이다, 그러니 네가 ‘왕청같은 소리’를 몰라 왕청같은 말을 했구나. 
 그때 그 우스운 에피소드가 있은 후, 아빠는 네가 우리 말, 우리글을 잊어버리고 한민족의 정체성도 잊어버리면 어쩔까? 나중에 혹시 이 아빠까지도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단다. 그래서 너의 한글수준을 업그레이드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몇 해 전부터 너와 나는 날마다 위챗으로 문안도 하고 소식도 전했지. 네가 한자로 문자를 보내면 나는 꼭 한글로 보내라고 야단을 쳤지. 처음에는 철자와 받침이 너무 틀려 한심할 때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져 한시름이 놓이는구나. 내가 발표한 글이 실린 동포문학과 한반도문학, 동북아신문와 중국동포타운신문을 한국에서 수시로 국제택배로 너에게 보내주면 너는 이 작가아빠에 대한 긍지와 사랑, 그리고 그리움과 존경의 마음으로 몇 번씩 읽는다고 했지. 그러는 동안 너의 한글 실력도 엄청 늘었다고 했지.
 근본을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고 우리말, 우리글을 잃은 사람은 희망이 없고 삶의 가치도 없으며 삶의 의미도 모른단다. 뿌리 없는 나무가 살수 없듯이 자기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잃은 사람은 사람다운 삶을 살수 없지. 그 근본과 뿌리가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풍속습관과 전통이지.
 우리 민족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자기의 성씨를 고치는 것이 최대의 수치라 생각하며 죽기보다도 더 싫어한단다. 전통문화인 본인의 본도 모르면 아예 인간취급도 안하지. 만약 평산 신씨가 난 신라면 매울 신씨요, 충주석씨가 난 돌 석씨, 밀양박씨가 난 바가지 박씨, 김해김씨가 난 김치 김씨요 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니? 
 아빠는 우리 박가 가문의 족보에 마지막으로 이름이 기재된 사람이다. 우리 가문의 족보가 없어진 아쉬움과 나를 끝으로 족보도 끝났다는 사실로 하여 아빠는 지금도 마음이 심란하고 기분이 찜찜하다. 다행히 아빠의 아들로 네가 태어나서 큰 위로가 되는구나. 딸딸딸거리며 딸들로 넘쳐나는 우리 박가 가문이 대를 이어 가게 됐다며 친척들도 너무도 기뻐했지.
 요즘 세상에도 족보를 따지며 아들딸 따지는 가문이 있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넓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양하듯이 중국조선족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족보와 가문에 대해 엄청 따진다. 족보도 없는 사람은 천대 받고 조상도 모르면 혼 없는 사람, 얼빠진 사람이라 욕을 먹는다. 천년사직을 이어온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몇 대손인가? 밀양 박가 시조 박언침의 몇 대손인가? 밀양 박가의 무슨 파인가? 한국인들이 물어보면 나는 엄청 당혹스럽단다.  
 지난해, 서울특별시 잠실에 위치해 있는 공자문화센터에서 신라오릉보존회 박씨대종친회 중국총본부 현판식이 있었단다. 중국에 사는 박씨들이 한국의 종친문화와 전통문화에 접하고 박씨에 대한 자긍심으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서로간의 단합과 소통 그리고 발전을 도모하자는데 그 취지가 있었지. 
 공자문화센터 총재인 성공한 사업가 박홍영 본부장의 초청을 받고 행사에 참석했던 아빠는 감회가 깊었다. 조상을 잊지 않고 대대손손 대를 이어가면서 덕을 쌓는 가문이나 민족은 영원하리라는 철리를.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조상을 배신하지 않으며 조상신을 잘 모신다면 언젠가는 쨍하고 해 뜰 날이 온다는 자연의 섭리를 뼈저리게 느꼈단다. 
 편지를 마감하면서 아빠는 더 멋진 아빠로, 민족과 시대 앞에 그리고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박가네 후손으로 살기를 다짐하면서 내 아들이 박가네 가문을 더욱 번성시켜주길 간절히 빈다. 단군의 후손,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배달민족과 백의민족으로 깨끗하게, 씩씩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기 바란다. 
 아빠가 보낸 이 편지를 읽고 너도 우리말, 우리글로 멋진 편지를 써서 이 아빠에게 보내주기 바란다. 꼭 보내기 바란다. 믿는다, 사랑한다, 내 아들아! 너는 아빠의 아들이고 넌 아빠의 꿈이니깐. 

                        2022 08 28 전북 김제                     
    
         

 박영진 프로필 

 중국 왕청현 출생 
수필 등 수십 편 발표.
동포문학 우수상, KBS한민족방송 우수상 등 수상  
메일: yongzhenpi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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