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일 약력 :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필, 시, 소설 등 수십 편 발표. 수상 다수
남태일 약력 : 재한동포문인협회 소설분과장. 수필, 시, 소설 등 수십 편 발표. 수상 다수

1

어디를 가나 항상 마음속으로 훈훈한 정과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나의 고향 길림에 돌아왔다. 이번 걸음은 고향 떠난 지 딱 15년 만이었다. 길림시에도 현대화 상징인 대형 상점 음식점 그리고 외국 분위기를 풍기는 커피숍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시민들이 걸친 의복도 달라진 도시 풍경처럼 많이 변했다.
15년 전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아파트는 마치 거대한 고래인양 내가 20년 살던 벽돌집을 작은 물고기를 포식하듯 삼켜버려 기와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변했다. 옛날 모습을 찾아볼 수 없도록 변해 버렸다. 이제는 포근한 정감이 깃든 고향은 그저 나의 기억 속에만 살아있을 뿐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게 너무 낯설어 보였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길림 이모네 집에 꼭 다녀와야 했다. 원래 내가 살던 곳은 조선족 소학교가 없었다. 어릴 때 부모님들이 길림 이모네 집에 가서 조선족 소학교를 다니라고 했다. 사실 길림은 나의 두 번째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장춘시 버스 터미널에서 길림행 버스를 탔다. 옛날 비포장도로였던 흙길은 간곳없고 고속도로가 쭉쭉 아득하게 뻗어나갔다. 어릴 때 방학하여 집에 갈 때면 푸른 들판과 관목 사이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활짝 열린 차창으로 들어올 때 상쾌한 느낌이 가슴을 꽉 채워 주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삿갓 같은 나지막한 야산과 길가에 먼지를 잔뜩 덮어쓴 노란 민들레꽃을 바라보면서도 집에 간다는 하나의 이유로 기뻐하고 흥분하던 그 시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홀연 나지막한 야산에 긴 팔을 내밀고 서 있는 고목이 눈에 띄자 머릿속에 먹구름이 스치고 온몸이 섬뜩해 나며 소름이 쫙 끼치었다. 저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좁은 계곡에서 나의 친구가 ‘살인죄’로 사형을 당했다. 
그때 친구가 총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이 후회되었고 그 당시 느꼈던 공포는 무의식 속에 트라우마로 남아 시신을 보면 가슴이 떨리고 식은땀을 흘리고 몸살이 오며 며칠 앓곤 했다.
돈 벌러 한국어선을 타고 출국했다가 만기 되어 금방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벼 탈곡할 무렵 이모부가 오토바이 사고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나는 이모부네 일을 도우러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나의 친구 중서가 옆집에 사는 이쁜 미희를 살인한 죄로 사형당하는 날이었다. 그때 지방 신문에도 그 소식이 보도되었다. 범죄자를 총살하는 장면을 현장에 가서 직접 목격하며 법률 교육을 받으라고 공개 선전까지 했다.
중서 어머니는 정신이 잘못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총각들이 다 좋아하는 처녀를 죽인 중서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옛날 어릴 때 같이 놀았던 정을 봐서 마지막으로 시신이나 거둬주기로 친구들과 약속했다. 우리는 시체를 담을 비닐봉지, 담요 따위를 준비하여 경운기를 타고 현장에 갔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산 중턱에는 이미 많은 구경꾼이 와 있었고 완전 무장한 경찰들이 총을 들고 구경꾼들 앞에 일정한 간격으로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야산 골짜기의 축구장 절반만 한 공터에는 잡초들이 쓰러져 있고 아침에 내린 진눈깨비가 마른풀 위에 희끗희끗 덮여 있었다. 남북 방향 일자형으로 항아리만 한 구덩이 일곱 개를 파놓았다. 구덩이에서 50m 떨어진 곳에 큰 참나무 세 그루가 앙상한 가지를 펼치고 서 있었다. 마른 잎 몇 개는 아직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찬바람에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잠시 후, 트럭 세 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앞차와 세 번째 차에는 경찰들이 가득 탔다. 가운데 트럭에 실린 죄수 일곱 사람은 두 손에 수갑을 찬 채 두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앞에는 큰 간판을 목에 걸었는데 살인범 ‘000’라고 이름을 쓰고 그 위에 붉은색으로 큰 X자형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타인의 귀중한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간 살인범들이었다.
12시가 될 무렵 죄인들의 죄목을 한 사람씩 공포했다. 구경꾼들은 시루에 찬 콩나물같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거리가 멀고 모두 죄수복을 입어서 죄수들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할 수 없었다. 경찰은 죄인들을 하나씩 끌어다가 구덩이 앞에 꿇어앉혔다. 그중에 젊은 여자도 있었는데 남편을 농약을 먹여 죽인 살인범이었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한 경찰 열네 명이 흰 장갑을 낀 손에 권총을 들고 죄수들의 뒤통수를 겨누고 5m 쯤 멀리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열두 시 정각이 되자 “탕, 탕, 탕...” 소리와 함께 죄수들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부챗살모양으로 터져 나오면서 삽시간에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죄인들은 하나씩 앞으로 고꾸라져 이미 파놓은 구덩이에 머리를 처박았다. 검붉은 피와 하얀 뇌수가 구덩이 안에 점차 차올랐다. 그러나 여죄수와 중서는 총알이 머리를 관통했는데도 꿇어앉아 있었다. 
경찰이 쫓아가서 발로 걷어차자 힘없이 머리를 구덩이에 처박았다. 깨진 항아리 같은 머리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죄수들이 모두 쓰러지자 하얀 위생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죽음을 확인하고 수갑을 푼 다음 사진을 찍었다. 
총소리가 멎고 피비린내가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자 난데없이 까마귀 떼가 새카맣게 날아오르더니 사형장 옆에 서 있는 참나무 가지에 앉아 곧 덮칠 기세로 피가 낭자한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살당한 가족들이 피가 낭자한 네구의 시신을 비닐에 싸서 경운기와 마차에 싣고 떠났다. 
우리는 이철이를 따라 시신 옆으로 다가갔다. 한 청년 시신과 여인의 시신은 그냥 쓰러진 그대로였다. 중서의 시신은 아예 머리통 절반이 날아가고 없었다. 금방 터져 나온 피에서 더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때까지도 몸 전체가 꿈틀거리고 드러난 등허리 살결은 바르르 떨면서 검푸른색으로 변해갔다. 
흰 위생복을 입은 한 경찰이 무선전화를 받고 뒤수습하려고 남은 경찰들에게 뭐라고 말했다. 경찰이 총알에 얼굴이 다 날아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중서와 다른 청년의 시체를 준비한 비닐봉지에 담은 뒤 모 병원 구급차에 싣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환자들에게 그들의 장기를 이식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흩어지자 느티나무에 앉았던 까마귀 떼가 까맣게 땅에 내려앉아 서로 싸우며 구덩이에 고인 피를 먹어댔다. 조금 뒤 구덩이 속에서 흰 김이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해는 검은 구름 속에 숨고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지는 곧 흰색으로 변해 버렸고 구덩이 속 흰눈이 피가 배어 붉게 엉켰다.
달리는 차에 앉은 우리 셋은 무거운 침묵에 빠져 있었다. 날씨는 점점 저물어가고 함박눈은 온 천지를 흰색으로 포장했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눈이 희끗희끗한 잡초 위에 쓰러진 얼굴도 없는 붉은 피가 낭자한 중서의 시체가 자꾸 떠올랐다.
“자쓱 죽어도 싸지. 착하고 이쁜 미희를 어떻게 잔인하게 죽인단 말이야. 총살당해도 싸, 싸단 말이야!”
이때였다. 한 남자가 나의 옆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야, 너 수일이 아니야?”
낯이 익어 자세히 보다가 나는 그의 손을 텁석 잡았다.
“아니, 너 이철이구나!”
이모네 동네에 사는 어릴 때 딱친구이자 동창인 이철이었다. 그는 얼굴이 많이 변했다. 눈빛은 온화하고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누구나 같은 시간을 부여받지만 사는 모습은 왜 이렇게 다를까? 나는 그의 관옥같이 흰 얼굴을 바라보니 어쩐지 자존심이 점점 엷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중학교에서 교무 주임으로 있다고 했다. 
버스 정거장에 내렸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우리는 갈림길에서 이튿날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철이는 나의 손을 잡고 덧붙여 말했다.
“수일아, 오늘은 이모네 집에 갔다가 내일은 우리 집에 꼭 놀러 와. 미희 여동생이 키우는 토종닭을 사서 푹 삶아 술 한잔 하며 얘기하자.” 

2

이튿날, 이철이 집에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렸다. 물건을 사들고 나오는데 어디선가 경상도사투리가 들렸다. 머리가 허옇고 색동저고리에 고급 치마를 입은 할멈이 지팡이를 짚고 옆으로 다가왔다. 할멈의 눈은 변질한 물고기 눈처럼 퀭하고 툭 불거진 광대뼈는 비바람에 문드러진 바위처럼 유난히 툭 튀어나왔다. 창백하고 주름살투성인 얼굴은 유령 같아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그녀는 길 가는 행인의 옷깃을 부여잡고 악을 쓰며 소리쳤다.
“야, 이놈들아! 우리 아들을 와 잡아갔노? 빨리 안 데려오면 너도 내 손에 죽을 기다!” 
행인들은 할멈의 손을 뿌리치며 마치 전염병 환자를 피하듯 도망쳤다. 멀어지는 행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할멈의 두 눈은 마치 먼지 가득 낀 유리 창같이 혼탁하고 막연했다.
조금 후 이철이 마중을 나왔다. 그는 할멈을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수일아, 저 미친 할멈 누군지 알아?”
“알아서 뭘 해, 재수 없다. 빨리 가자.”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수일아, 저 늙은이 김동형 향장의 마누라, 철우 엄마여. 못 알아 보겠지.”
“엉? 김동형 향장 마누라? 철우 엄마?”
나는 놀란 나머지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맞아, 집에 가서 내가 처음부터 이야기해줄게.” 
태평향은 화강석이 나는 광산지역이고 매장량이 무궁무진하다. 개혁개방 뒤 정부에서 거금을 투자하여 화강석을 채취하여 전국 각지로 보내고 외국으로도 수출했다. 옛적엔 농사꾼들만 살던 향정부 소재지였지만 지금은 인근에 이름난 건축자재를 판매하는 태평상업구역이 되었다.
이철이네 동네는 태평향과 3리 떨어진 조선족만 사는 동네였다. 마을 한가운데 조롱박 모양의 호수가 가로질러 있었다. 미풍이 불어오면 호수 표면의 물결은 햇빛을 받아 고기비늘처럼 반짝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하는 아름다운 호수였다. 
그때 호숫가 풀숲에서 이름 모를 검은 새 두 마리가 물을 차고 날아올라 검푸른 산을 넘어 아득한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두 마리 새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괜히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철이네 새로 지은 집은 호수 앞, 한옥을 모방하여 지은 벽돌집이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옛날에 돈과 권세 있다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던 거만하기 짝이 없던 김향장 마누라가 어찌 저 지경으로 되었는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참다못해 이철에게 물었다. 
“아까 길에서 만났던 철우 엄마가 왜 저렇게 처참하게 됐니?”
이철은 뒷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철네 집과 호수는 50m 남짓한 거리였다. 호수는 잔잔했다. 이따금 봄바람이 불어와 흰 파도가 돌로 쌓은 언덕을 살짝살짝 때렸다. 
이철은 나와 술상을 마주하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아릿한 추억이 되살아나고 이야기 속 사람들의 슬픔과 괴로움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3

총살당한 청년의 이름은 황중서고 피살당한 아가씨 이름은 강미희였다. 둘은 이웃이고 동기동창이었다. 중서와 미희는 동갑인데 중서가 미희보다 생일이 십 개월 늦었다. 둘은 중학교도 졸업 못 하고 일찍 중퇴하여 농사를 지었다. 
중서 아버지는 젊을 때 패기 넘치는 사내였고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거들먹거리는 반란파 두목이었다. 중서 아버지는 죄 없는 사람들에게 잔뜩 누명을 씌우다 보니 그 중에는 육체와 정신적 핍박에 못이겨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중서 아버지는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알코올 중독자로 되어 결국 간경변증으로 죽고 말았다. 늦둥이 중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자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미희네 집도 꽤나 불행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중풍으로 고생하다 사망하였다. 군대에서 제대한 오빠는 원래 향기업에서 인기가 많은 자동차 운전수로 일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간 이듬해에 채석장에서 돌을 가득 싣고 내리막을 내려오다 자동차가 전복하면서 왼쪽 다리를 잃었다. 이때부터 미희는 오빠와 여동생까지 돌봐야 하는 한 가정의 세대주 역을 떠맡게 되었다.
미희는 어느덧 어여쁘고 청초한 한 떨기 수선화로 피어났다. 날씬한 몸매에다 수려한 얼굴은 총각들의 뜨거운 눈길을 받았다. 미희는 가방끈이 짧다는 흠뿐이지 동네 사람들도 일등 며느릿감이라고 손꼽았다. 중서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미희를 좋아했고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미희는 비록 동갑이지만 생일이 열 달 아래인 중서를 남동생같이 끔찍이 아꼈다.
개혁개방 후 경제가 급성장하던 무렵에 미희와 중서도 어느덧 20대의 처녀, 총각이 되었다. 원래 호수 뒷동네 살던 사람들이 생활 형편이 좋아지자 하나둘 호수 앞 동네로 새 벽돌집을 짓고 옮겨갔다. 지금은 모두 이사를 가고 호수 뒷동네는 미희와 중서의 거무칙칙한 초가집만 호숫물에 외롭게 비쳐져 있다. 
어느 날 밤, 호수 앞 동네에서 촌민 회의가 열렸다. 늦은 밤까지 회의를 마치고 미희와 중서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은은한 달빛이 옅은 구름을 뚫고 오솔길 양쪽 어두운 옥수수밭을 희미하게 비췄다. 축축하고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고 미희와 중서는 이슬 내린 잔디를 밟으며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앞에서 길이가 한발 되고 팔뚝만큼 굵은 뱀이 길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기어가고 있었다. 원래 이곳에는 돌산이 많다 보니 뱀들이 많았다. 기겁한 미희는 돌아서면서 중서를 와락 껴안으며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중서는 미희를 본능적으로 꼭 껴안았다. 여인의 급격하고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두 개의 작은 공 같은 미희의 앞가슴이 중서의 가슴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닿았다. 중서는 마치 현기증이 날 때처럼 머리가 아찔해지고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곧 터질 것 같았다. 뱀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그들 쪽으로 기어왔다. 중서는 안고 있던 미희를 살짝 한쪽으로 밀어놓고 재빠르게 뱀의 꼬리를 덥석 쥐고 획 돌리며 멀리 팽개쳤다. 그리고 미희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그날 밤 중서는 잠자리에 누워 미희가 자기 품에 안기던 장면을 동영상처럼 반복적으로 되돌리며 음미했다. 그는 처음으로 여인의 향기가 풍기는 아련하고 신비한 이성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미희가 일부러 자기를 꼭 껴안은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그때 일을 회상하면 누를 수 없는 흥분에 휩싸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뱀사건’이 발생한 뒤 중서는 쭉 빠진 미희 몸매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었고 그녀의 집에 놀러 가서 물건을 건네주다 손끝만 살짝 스쳐도 가슴이 뭉클하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어쩌다 미희가 중서를 쳐다보고 한번만 웃어주면 그 무슨 기쁜 응낙을 받을 때처럼 머릿속에 오색찬란한 그림이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미희는 밥 짓고 빨래하고 채소밭 가꾸는 일상생활에만 몰두할 뿐 그날 발생한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 하는듯 했다. 중서는 여자 마음은 알 수가 없고 처녀 마음은 더욱 추측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지난 세기 90년대는 대부분 조선족 젊은이들이 한국이나 큰 도시로 돈 벌러 나갈 때였다. 미희는 가정 환경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해 몹시 안타까워 손만 싹싹 비비였다. 복실이와 명희는 한국으로 시집가고 자기보다 조건이 못한 친구나 동창생들도 큰 도시로 돈 벌러 나갔다. 그들은 한국 기업이나 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해 농촌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월급을 받았다. 친구들이 한 번씩 집에 올 때 자기가 번 돈으로 질 좋은 한국 화장품과 예쁜 옷을 잔뜩 사 들고 와서 자랑할 때면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가끔 창문 밖 하늘을 가르며 자유롭게 훨훨 나는 새들을 바라보며 자기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말뚝에 매인 암소처럼 가정에 꼭 묶여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는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기도 하고 죽은 부모를 원망도 해보았다. 고민 끝에 먼저 오빠의 자립을 돕기 위해 난생처음 향장의 처제(철우 이모) 집을 찾아가서 이자 돈을 빌렸다. 
태평향에서 대규모로 석재와 모래를 채굴하자 외지의 민공들이 구름같이 몰려들고 기업, 상점, 식당이 늘어났다. 태평향이 갑자기 흥성해지자 향장 김동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속을 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림시와 장춘시에 아파트를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향장 처제는 공공연하게 농민들에게 30% 이자로 사채를 빌려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미희는 김향장 처제에게 이자 돈을 빌린 뒤에 오빠를 시켜 텔레비전 수리하는 기술을 배우게 하고 동시에 수리하는 장비와 공구를 샀다. 오빠가 원래부터 손재주가 좋으니 조그마한 가게를 꾸려 자립시키는 방법이 제일 좋은 지름길이라고 여겼다. 그래야만 자기도 앞으로 차차 집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네에서 한국에 금방 다녀온 박씨 아줌마가 미희를 한국 총각에게 소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국 총각은 박씨 아줌마의 큰집 아들이었다. 서울에서 큰 식당을 운영하는데 총각이 곧 맞선 보러 온다고 했다. 소문을 들은 중서 어머니가 저녁상을 차려 놓고 아들 기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중서야, 미희가 한국으로 시집간다는 소문 들었느냐?”
“뭐, 미희가 한국으로 시집간다고? 누가 그래요?”
중서는 숟가락을 들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어머니만 쳐다보았다.
“온 동네가 다 알고 있다. 방앗간 박씨 아줌마네 한국 조카란다. 금방 한국에 다녀왔잖아.”
중서의 얼굴은 백지같이 창백해졌다. 잔뜩 찌푸린 얼굴에서 마치 누가 칼로 장기를 도려낼 때처럼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중서는 한국이란 부자 나라에서 맞선 보러 온다는 총각을 제치고 미희의 마음을 돌려세울 자신이 없었다. 그는 미희가 자기 옆을 떠난다는 사실은 하늘이 준 가장 혹독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무의식 속에 뿌리박힌 미희의 이름은 자기의 생명과 결합이 되어 있고 그 뿌리를 뽑아 버리면 자기의 존재 가치도 따라서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중서는 미희 여동생에게 쪽지를 주며 언니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미희는 설거지하다가 화장도 하지 않고 약속 장소로 찾아왔다. 중서는 미희 앞에서 우물쭈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미희가 무슨 일이 있냐며 다그쳐 물었다. 중서는 긴장한 나머지 몸을 약간 떨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절당할 걸 번연히 알면서 사랑을 고백한다는 그 자체가 더 고통스러웠다. 미희는 갑자기 밤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유성을 바라보며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너를 동생으로만 생각해 왔어.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배운 거 없고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어찌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겠니? 그리고 우리집의 무거운 짐을 너에게 맡길 순 없어. 나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한국을 선택하는 길 밖에 없었어…중서 너, 제발 술을 적게 먹고 연세 많은 어머니 속 썩이지 마. 요즘 머리가 혼란스러우니 다시는 나를 안 불렀으면 좋겠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 총총걸음으로 어둠 속에 사라졌다. 호수에서 이름 모를 새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중서는 괜히 미희를 불러 놓고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한 자기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미희에게 혹시나 하던 작은 기대마저 모래더미처럼 무너졌다. 짝사랑이란 얼마나 큰 아픔을 동반하는지 그제야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는 폭주가 일상이 되었다. 폭음이 반복되자 뇌 손상으로 의욕도 없고 누가 무엇을 알려 주어도 금방 잊어버리는 건망증까지 생기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중서에게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
“이번 돌아오는 공일에 미희가 한국 총각과 읍에 큰 식당에서 상견례를 한다고 하더라. 그리고 나는 이번 공일에 너 큰이모가 몹시 아프다고 하니까 다녀와야겠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이 없던 중서가 볼 부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날 보고 어쩌라고?…….”
그러고는 또 술병을 들었다.

4

일요일이 돌아왔다. 일요일은 태평향의 장날인데 인근에서는 가장 큰 장터였다. 전날 밤에 과음한 중서는 아침에 충혈된 눈을 뜨니 머리가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았다. 아침밥을 대충 먹고 장에 갈 채비를 했다. 기실 장날에 가서 딱히 팔고 살 물건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무얼 하러 장에 가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미희가 상견례 하는 데 끼일 자격도 없고 한국 총각을 만나야 하는 명분은 더구나 없었다. 한참 망설이다 ‘그래, 오래간만에 친구들 만나 술이나 한잔 하고 마음이나 풀자.’라고 생각하며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장꾼들이 구름같이 장터로 몰려들었다. 중서가 목적도 없이 자전거를 밀고 백화점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발 디딜 자리조차 없었다. 그는 살 물건도 없고 구경할 재미도 없었다. 그는 백화점 앞 자그마한 호수 옆에 앉아서 담배만 태우며 혹시 술 친구나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마침, 동창인 김향장 아들 철우가 호숫가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예쁘장한 아줌마와 마주 서서 희희덕거리다가 사람들 보는 눈이 많은데도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을 마구 주물러댔다. 그때, 그녀의 남편이 찾아와서 자기 마누라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철우는 눈을 부릅뜨고 다짜고짜 왜소하게 생긴 남편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그 남자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지며 코에서 벌건 코피가 쏟아졌다. 
철우는 소문난 호색한이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굽실굽실한 까만 머리와 발달한 하체, 그만하면 허우대는 어디 가도 빠지지 않았다. 사춘기가 지나고 청춘기부터 지나치게 여자를 탐하여 아버지가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진을 받았다. 의사 선생은 이런 현상은 남성 호르몬 과다 분비 때문에 생긴 병인데 본인의 의지로 성욕을 자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대부분 강간 범죄자들이 이런 발병례가 있지만 자기가 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례도 많다고 했다. 약을 지어주었지만 철우가 강렬히 거부하기에 부모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향에서 왕 노릇을 하고 생김새도 괜찮고 거기에다 돈까지 물 쓰듯 하니 따르는 여자도 많았다. 그는 입버릇처럼 친구들 앞에서 언제는 어떤 아가씨와 놀았고, 또 어느 날은 어느 아줌마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며 자기는 여자를 다루는 능력자라고 자랑질하곤 했다. 
철우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중서 곁에 다가와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중서야, 너 소문 들었제? 오늘 니가 좋아하던 미희가 한국 총각과 맞선 본다고 하더라. 너 말이야, 미희하고 꼭 살고 싶으면 방법 수단 가리지 말고 하룻밤 데리고 탁 자버려, 응? 이때는 나를 따라 배우라고, 친구야. 알았제? 히히히.”
“야, 이 색마 같은 놈아, 뭐라고 지껄이노? 안 그래도 열불 나 죽겠는데 오늘 나한테 죽고 싶나?” 
중서가 호통을 치자 철우는 금방 수그러들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와 성질 내노? 동무들끼리 우스개로 말한 것인데 성질내지 말고 조금 있다가 식당에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 내가 술 사줄게.”
철우는 나이 많은 아줌마의 손목을 잡고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중키에 몸집이 다부지게 생긴 중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착하고 내성적이지만 욱하는 성질이 폭발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 중서가 어쩌다 성질을 내면 또래 친구들도 아예 피해 버렸다. 
중서는 곧바로 미희가 한국 총각과 맞선 본다는 <황학루식당>으로 찾아갔다. 열한 시가 조금 지났지만 식당에는 벌써 식사하는 사람들로 법석였다. 중서는 자기도 모르게 귀빈실 쪽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목을 빼고 기웃거리며 살펴보고 있는데 오른쪽 귀빈실 두 번째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정면에 하얀 와이셔츠에 연두색 넥타이를 맨 젊은이가 점잖게 앉아있었다. 미희는 한국 남자 옆 창문가에서 머리를 숙이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요란하게 꾸미지 않고 피부에 어울리는 밝은색 원피스만 입었을 뿐인데도 한결 돋보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아주 오래 보지 못했던 밝은 빛이 남실거렸다. 그 옆에 박씨네 부부가 앉아서 얘기가 한창이었다. 그때 얼굴에 약간 긴장기가 있는 듯한 미희가 일어서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와서 귀빈실 문을 꼭 닫았다. 
미희가 귀빈실 문을 꼭 닫는 순간, 두 사람의 모든 관계가 우당탕하고 완전히 끊기게 되었음을 절감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질투와 안타까움이 마치 곧 분출하려는 화산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자기가 제일 사랑했던 여자가 외국 남자의 품속에 안긴다는 사실 앞에서도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한 자신이 너무 안타깝고 원통했다. 
때마침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강하가 눈에 띄었다. 강하는 한 동네에서 살다 윗동네로 이사 간 소학교 친구인데 술 마시기와 책 읽기를 즐겼다. 서로 만나면 눈빛만으로도 상대방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서로 아는 술친구였다. 바로 옆 테이블에 진서와 철우, 그리고 여대생 같은 아가씨가 안주를 잔뜩 사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철우가 중서를 보고 자기네 상으로 오라고 했다. 중서는 앙숙인 진서를 힐끔 쳐다보고 험악한 얼굴로 거절했다.
“흥!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저 놈하고는 술 같이 안 먹어!”
진서도 중서의 말을 듣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맞받았다.
“나도 네놈이 절하며 빌어도 같이 안 먹을 거야!”
두 사람은 마치 곧 떠받으려는 황소같이 으르렁거렸다. 중서는 강하를 데리고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 철우, 진서, 중서와 미희는 모두 동창생이고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같이 자랐다. 두 사람이 앙숙이 된 원인은 아버지 세대부터 시작되었다. 문화혁명 시기 진서 아버지가 촌간부로 있을 때, 중서 아버지는 반란파 우두머리였다. 그때 모든 반란파들이 그랬듯이 중서 아버지가 진서 아버지를 ‘역사반혁명’이라 누명을 씌워 결국 자살로까지 내몰았다. 중서 아버지와 진서 아버지 두 사람이 이미 고인이 되었는데도 두 집은 서로 철천지원수 사이가 되어 서로를 사무치게 미워하고 있었다. 
이윽고 배갈과 안주가 올라왔다. 중서는 말도 없이 계속 잔을 비웠다.
“야, 너 오늘 와 술 그렇게 빨리 마시노? 무슨 일 있는 기가? 응?”
중서의 빈 술잔을 채우면서 강하가 의아해서 물었다. 중서는 강하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자꾸 엉뚱한 대답만 하고 모든 의식이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중서 머릿속에는 온통 미희와 한국 총각의 그림자만 얼른거렸다. 
강하는 중서의 이상한 행동에서 무엇을 알아차린 듯 물었다.
“한가지 물어봐도 되지? 너 지금 미희 때문에 괴로운 거지?”
중서는 괴로운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맞아, 정말 미희 때문에 미치겠어. 만약 이 세상에서 살 수 없으면 둘이 콱 죽어서 다른 세상에 가서라도 같이 살고 싶어.”
“너 정말 미쳤구나.”
중서는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을 끄기라도 하는 듯 연이어 술잔을 비웠다. 괴롭던 마음이 조금 평온되고 답답하던 가슴도 어느 정도 트이는 듯 했다.  “너 오늘 이렇게 마시다가 큰일 치겠다. 우리 술 그만하자. 나도 취한 것 같다.”
“강하야, 동무해서 한 병만 더 마시자.” 
두 사람은 배갈 세 병을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중서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전거를 밀고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힘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같았다. 장꾼들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식당 밖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모여서 물건을 놓고 티격태격 흥정을 하고 있었다.
향정부 건물을 벗어나 집으로 가는 길 입구에 조선족이 꾸린 한국용품상점이 있었다. 중서는 이미 술에 많이 취했지만 자꾸 술이 더 먹고 싶었고 오직 술을 마셔야만 모든 번뇌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는 갈증도 해소할 겸 상점에 들려 또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중서는 맥주를 들이키고는 담배 연기를 깊게 삼켰다가 후 내뿜었다. 파란 담배 연기는 갈기갈기 찢어진 대로 무엇을 찾는 듯 헤매다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한편, 박씨 아줌마 중매로 한국 총각과 맞선을 보고 나온 미희는 자신도 모르게 위축감이 느껴졌다. 높은 톤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중국 사람과 달리 말할 때 늘 목소리를 낮추어 조곤조곤 얘기하는 모습과 허리를 자주 굽실거리며 인사하는 태도에 남자의 패기가 모자라지 않나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총각의 그런 모습이 여자 마음을 얻는데 더 유리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맑은 피부와 깔끔한 옷차림과 겸손한 미소도 미희의 마음에 들었다. 불같이 뜨거운 눈길로 자주 자기의 온몸을 구석구석 훑어볼 때도 싫지는 않았다. 총각에게 호감이 갈수록 어쩐지 총각의 존재가 마치 멀고 먼 해안선을 바라보듯 자꾸 아련해졌다. 해질녘 미희는 빨리 집에 가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오빠와 여동생에게 소식을 전하고 저녁밥도 차려야 한다면서 총각이 바래다주려는 제안도 거절했다. 당장은 초라한 집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총각은 아쉬워하며 택시를 불렀으나 택시는 잡지 못했고 삼륜차를 불러 미희를 태웠다. 총각은 미희의 예쁜 손을 살짝 잡으며 내일 만나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희는 대답 대신 애틋한 표정으로 총각을 바라보았다. 헤어지는 찰나 어쩐지 마음이 울컥하고 이유 없이 허전하고 쓸쓸한 생각마저 들었다.
한창 달리는 삼륜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삼륜차는 한국용품상점 앞에서 고장이 나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익숙한 길이라 차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호수 뒤에 거무칙칙한 초가집 두 채가 보이고 자기네 집 굴뚝에서는 실타래 같은 파란 연기가 힘겹게 하늘을 향해 피어올랐다. 여동생이 서툴게 밥을 짓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풍 들기 시작한 나무 밑을 지날 때, 낙엽 하나가 미희 머리에 사뿐 떨어졌다. 그녀는 동그랗고 빨간 단풍잎을 손바닥에 놓고 입김으로 후 불었다. 뱅글뱅글 돌면서 떨어지던 찰나, 잔뜩 짐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면서 떨어지던 낙엽이 바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희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국용품상점 주인집 식구들은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히 돌아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한국에 다녀온 큰 사위와 북경에서 사업하는 둘째 아들이 함께 장춘에서 집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집식구들이 대통령이라도 모시는 분위기였다. 중서는 은근히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처가에 놀러 오는 사위가 부러웠다.
그는 상점에서 나왔을 때부터 마음은 끝없이 우울한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서산에 주홍색 해가 서서히 기울고 하늘은 피 같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두 차례 마신 술기운이 맑은 정신을 갉아먹으며 감당하기 힘들게 머리로 올랐다. 자전거가 도리어 사람을 타려고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겨우 탔는데 자전거 앞바퀴가 물고기 꼬리같이 흔들어댔다. 
큰 고개를 넘어서면 스키장 같이 긴 내리막길이 있고 내리막길 끝자락에 T자형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은 집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모래를 채취하는 현장이었다. 자전거는 고개를 넘어서자 점차 속도가 빨라졌다. 자전거 제동기로 내리막을 내려가는 속도를 줄이기는 역부족이었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얼굴을 스치는 거친 바람이 윙윙 소리를 냈다. 아득히 검푸른 산 너머 피 같은 노을이 보였다. 
중서는 속도의 스릴감으로 몸 전체가 붕 뜬 것 같았다. 또 머릿속에서 환각이 일어났다. 자기 가슴을 파고들며 안기던 미희와 어릴 때 그녀와 놀던 조각 난 추억들이 무의식 속에서 벌집 터진 듯 몰려 나왔다. 갈수록 속도는 빨라지고 중서는 마치 구름 위에서 날아다니는 듯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괴물과 퍽! 하고 부딪쳤다. 두 눈에서는 수천 개의 불꽃이 튀어나왔다. 밑창도 없는 심연으로 굴러떨어졌다. 춥고 어둡고 황량한 심연 밑바닥에서 자기와 미희가 주검처럼 누워 있었다. 미희는 피투성이가 되어 흐느낌 같기도 하고 하소연 같기도 한 애처로운 신음을 냈다. 그리고 그녀는 검붉은 피를 흘리며 까만 점이 되어 아득한 하늘 끝으로 날아갔다. 

5

새벽에 난데없이 매지구름이 둥둥 떠오고 우르릉하는 천둥소리가 귀청을 찢으며 주먹 같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니 쏴-쏴- 쏟아지는 빗소리에 하늘땅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미희 오빠 상호는 새까만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 총각과 맞선 보러 나간 미희가 밤새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도 자지 않고 미희를 기다리던 상호는 점점 마음이 불안해났다. 
날이 밝아오자 막내 여동생 미옥을 시켜 박씨 아줌마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미옥이 박씨 아줌마 집 문을 두드렸다.
“엉? 네가 새벽에 웬일이니?”
박씨 아줌마는 현관문을 열고 하품을 하며 물었다.
“우리 언니 어젯밤에 여기서 잤어요?”
“아니, 어제 오후 삼륜차 타고 집에 갔는데….”
“우리 언니 어젯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고?”
아줌마는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부랴부랴 집안에 들어가서 남편을 깨웠다. 
“여보, 미희가 어젯밤에 집에 안 들어갔대요.”
박씨 아줌마 남편은 촌장 집에 미희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러 갔고 박씨 아줌마는 미옥을 보고 물었다.
“중서네 집에 가봤느냐?”
“아니요.” 
미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박씨 아줌마와 미옥은 중서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집안은 침침하고 지독한 술냄새가 확 풍겼다. 방에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중서가 전혀 무감각한 주검처럼 누워 있었다. 딱히 말할 수 없는 불길한 무엇이 중서 몸에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옆에는 빈 배갈 병 하나가 사람이 누워 있는 방향으로 일자로 넘어져 있었다. 
한쪽 발에는 운동화, 한쪽 발은 맨발이었다. 이마와 입술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콧구멍에는 검은 핏덩어리가 말라붙어 엉켜 있었다. 입고 있는 티셔츠 앞부분에는 검붉은 피가 얼룩져 원래 무슨 색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박씨 아줌마는 머리털이 곤두서고 몸서리를 쳤다. 미옥이 ‘오빠, 오빠’ 하며 자는 중서를 흔들었다. 아무 대답이 없다.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만 없으면 정말 죽은 사람 같았다. 
박씨 아줌마는 미옥을 데리고 집에 와서 아침밥을 지어 먹이고 학교에 보냈다. 촌장네 집 울안에 들어설 때 모래채취장에서 일하는 한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들어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촌, 촌장님, 큰일 났어요. 아침에 모래 더미에서 여자의 시신을 발견했어요. 이 동네 미희예요. 어쩌면 좋아요?”
한창 미희를 찾으려고 서두르던 촌장과 박씨네 식구들은 아저씨의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촌장은 허겁지겁 달려온 아저씨를 나무랐다. 
“자네 어제 마신 술 아직 덜 깼나? 엉? 어제까지 멀쩡한 젊은 사람이 왜 죽었다고 허튼소리를 치는 거요. 참.”
“정, 정말이에요, 촌, 촌장님, 사람이 죽었어요. 죽어서 뻣뻣해졌어요….”
그의 입에서 침방울이 튀어나오고 말까지 더듬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일행은 촌장의 경운기를 타고 모래채취장으로 갔다. 이때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서북쪽에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곧 큰비가 내릴 것 같았다. 
시신은 모래 더미에서 발견했다. 굴착기 운전수가 덤프트럭에 모래를 퍼담으려고 하는데 버킷에 무슨 물건이 부딪쳤다. 차는 무엇에 걸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시동이 꺼졌다. 운전기사는 무엇이 걸렸는지 알아보려고 삽으로 모래더미를 팠다. 한창 파던 운전기사는 삽을 집어던지고 비명을 지르며 모래 더미에서 뛰어 내려왔다.
“여기 시체가 있어요! 모래 더미 속에 죽은 사람이 있어요!”
비명을 듣고 모래 파던 일꾼들이 모여들었다. 모래 더미 위로 조금 보이는 검은 물체는 여자의 단발머리였다. 모래 범벅이가 된 사람 머리는 마치 모래를 일부러 발라 놓은 것 같았다. 그때 누구도 겁이 나서 모래 더미로 올라가지 못했다. 험상궂게 생긴 공장장이 그들 가운데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를 보고 모래 더미에 올라가서 확인하라고 시켰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던 아저씨는 모래 더미에 올라가서 삽으로 시신 주위의 모래를 파냈다. 확실히 젊은 여인의 시신이고 모래가 온몸에 묻어서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젊은 여인의 시신이고 찢어진 천 조각 사이로 젖가슴이 반 쯤 드러나 있었고 퍼런 멍이 든 허벅다리가 유표했다.
그의 얼굴에는 남자의 웃옷이 덮여 있었다. 남자의 웃옷을 치우고 모래를 대충 털어 땅바닥에 눕혀놓자 옆에서 구경하던 조선족 아저씨가 질겁하여 소리를 쳤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고……? 이 여자가 우리 동네 사는 미희라네. 미희가 왜 여기서 죽었는겨, 엉?” 
이때 멀리서부터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에 씻긴 시신은 얼굴 모양을 드러냈다. 미희의 시신이 옳았다. 머리 왼쪽 태양혈에 둔기로 맞은 자리가 움푹 들어가고 검붉은 피딱지가 흉터에 붙어있었다. 
조선족 아저씨가 휴식실에서 헌 담요를 들고 나와 비를 맞고 있는 미희의 시신을 덮었다. 소낙비는 금방 그치고 강렬한 가을 햇볕이 시신을 덮은 헌 담요를 비추자 하얀 수증기가 향불 연기같이 헌 담요에서 가냘프게 피어올랐다.
향파출소 경찰들의 지프차가 도착했다. 경찰들은 시신 주위에 경계선을 쳐놓고 시신 옆에 남자의 웃옷을 나란히 펼쳐 놓았다. 현 공안국 수사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김향장의 아들 철우가 사건 현장에 왔다. 미희 시신 옆에 다가와서 헌 담요를 젖히고 미희 시신을 잠깐 쳐다보고 이내 덮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어떤 몹쓸 놈이 미희를 죽인 거여? 어제 저녁녘에 술 취한 중서가 여기서 미희랑 다투는 것을 보았는데 이게 웬 일이고, 엉?”
그는 두 눈이 충혈되었고 오른쪽 귀는 붕대에 싸매여 있었다. 친구처럼 지내는 젊은 경찰이 철우를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하룻밤 사이에 왜 이렇게 초라해졌어? 귀는 왜 다친 거야? 어제 또…… 엉?” 
철우는 상한 귀를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젊은 경찰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어제 진서와 향간부 차를 타고 우리 이모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중서가 술에 취해 미희를 끌고 모래 구덩이로 가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바로 봤어.”
박씨 아줌마도 철우와 맞장구를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미희 여동생이랑 금방 중서네 집에 갔다 왔어요. 중서가 술에 취해 자는데 온몸이 피투성이에요. 혹시 중서가 미희를…….”
이때 철우가 파출소 소장과 촌장 옆에 다가가서 모래 채취장으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넘어져 있는 자전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요. 저 모래 구덩이 입구에 중서 자전거가 있어요…… 어제 중서와 장마당에서 만나 얘기도 나누고 했는데 시체 옆에 있는 검정 웃옷과 자전거가 확실히 중서의 물건이에요.” 
그때 박씨 아줌마도 다가와서 그들의 말에 끼어들었다.
“어제 우리는 미희와 점심 같이 먹고 오후에 상점에서 쇼핑하고 네 시쯤에 서로 갈라졌어요. 참, 미희는 어제 기분이 엄청 좋았어요. 오빠랑 저녁밥 때문에 집에 가야 한다면서 삼륜차 타고 혼자 갔는데 아쉬워 하는 눈치었어요.”
파출소 소장도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분석해 보면 중서가 살인 용의자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했다. 장소장은 경찰더러 중서를 파출소로 연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다른 경찰을 시켜 어제 오후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모래 현장 주위에 다녀간 모든 사람을 한 명도 빠짐없이 철저히 조사하라고 일렀다. 

6
경찰은 중서네 집에 가서 아직 술에 취해 자는 중서에게 다짜고짜 수갑을 채워 차에 태웠다. 그때까지 언니네 집에 갔던 중서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술에서 깨어나지 못한 중서는 충혈된 눈을 겨우 뜨고 고함만 질렀다. 
“왜 나를 잡아가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어요?”라며 발버둥을 쳤다.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경찰은 중서를 마치 사냥꾼이 잡은 짐승마냥 끌어다가 파출소 음침한 감방에다 가두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경찰은 중서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원래 중서를 현 공안국에 보내려 했으나 지금 엄타(嚴打) 운동이라 현 공안국에 체포한 죄인이 많아 현지에서 심문하라고 했다. 경찰은 사진 한 장을 중서 앞에 내밀었다.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을 살펴보던 중서는 너무도 놀라 온몸에 식은땀이 돋았다. 죽은 여자가 미희 아닌가. 그는 사진 속의 두 눈을 꼭 감고 아직 모래가 묻어 있는 창백하고 목석같이 무표정한 미희 얼굴을 넋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생시인지 꿈인지. 미희가 죽어서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 어슴푸레 생각이 났다. 내가 혹시 술에 취해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을 내려가다 미희를 깔아 죽였나? 요즘은 술만 마시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중서는 사진을 꼭 끌어안고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경찰을 바라보며 물었다. 
“미희를 누가 죽였어요? 이 여자는 미희가 아닐 거야, 미희가 죽을 수 없어요. 흑, 흑.” 
중서는 눈물 범벅이 되어 절규했다. 경찰은 모래 현장에서 수집한 미희 시신을 덮었던 중서의 검은 웃옷과 자전거가 찍힌 사진 두 장을 앞으로 밀면서 큰소리로 물었다.
“이 두 가지 물증은 살인 현장에서 발견한 증거물이야. 황중서, 실토해. 도대체 너의 자전거와 옷이 무엇 때문에 미희 시신 옆에 있는 거야? 그리고 어제 오후에 누구하고 같이 있었고 누구와 함께 집으로 갔는지 말해봐! 엉?”
이제 술이 조금 깨기 시작한 중서는 어제 발생한 일들과 만난 사람들을 차례로 생각해 보았다. 
“내리막 내려오다 무엇과 부딪친 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요. 미희는 정말 만난 적 없어요.” 
“야, 이놈아!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며? 그렇다면 미희를 만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기억해? 앞뒤가 맞지 않잖아? 네가 술에 취해 미희를 모래 더미로 끌고 가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어.”
“나는 미희를 안 죽였어요. 내가 왜 미희를 죽여요?”
경찰은 넋 빠진 사람 같이 중얼거리는 중서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황중서, 똑똑히 들어! 너는 엄타(嚴打) 운동 대상이야, 빨리 자백해!”
아직 얼굴에 시퍼런 멍이 지도같이 얼룩졌고 피딱지가 더덕더덕 붙어있는 중서는 어쩔 수 없는 고통으로 눈물만 흘릴 뿐이다. 중서를 바라보던 파출소 소장이 화가 나서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호통을 쳤다.
“안 되겠다. 너 이놈! 동네에서 제일 예쁜 처녀를 강간하여 죽이기까지 해놓고 지금 와서 물증 인증 다 있는데 시치미를 떼는 거야? 꼴통 같은 놈, 오늘은 이만큼 하겠다. 밤에 잘 생각해 보고 솔직히 탄백하면 몸뚱이가 성할 것이고 아니면 우리가 대책을  대는 거 알지?”
이튿날 아침 출근할 때 소장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입에서 술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중서는 노실한 사람이라는 거 잘 알아. 원래 내 생각에는 몸뚱아리에 손을 안 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너희들이 현 공안국에 가기 전에 꼭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말고 살인했다는 손도장을 받아 내야 해. 오늘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지 알겠지. 엉?” 
며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가혹한 심문을 받은 중서는 눈도 흐릿하고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의욕도 없고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정신마저 곧 붕괴될 직전이었다.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동창이자 친구인 철우가 중서 앞에 나타났다. 철우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만신창이 되어 늘어져 있는 중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밖에서 잔뜩 사들고 온 고급 담배, 사탕, 과자를 중서에게 넘겨주며 이상야릇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중서야,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구나. 너 이 고생 더 하지 말고 일단 죄를 승인하라구. 우리 짜개바지 친구잖아. 내가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너 풀려 나도록 할게. 응? 나를 믿어 봐. 너의 엄마도 지금 미쳐버렸는데 어쨌든 살아서 나가야지.”
콘크리트 바닥에서 몸을 겨우 일으킨 중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철우에게 매달렸다.
“철우야, 나를 좀 도와줘. 우리 엄마 정신이 나빠졌다는 말 들었어. 나 정말 미희를 안 죽였단 말이야. 흑, 흑.”
철우는 눈물을 흘리는 중서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사실을 부인하면 이 구치소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맞아 죽을 수도 있어. 너가 죽은 뒤 끌어다 들판에 버리면 끝이야. 누구도 사실 밝힐 사람 없을 꺼다……. 지금 우리 아버지가 중서 너를 아들 친구라고 봐준 거야. 아니면 벌써 현 구치소에 끌려갔지. 내 말 듣고 일단 죄를 승인하고 목숨부터 살려 놓고 보라구. 내가 방법을 구해 여기서 꼭 풀려 나도록 해줄게. 응?”
중서의 두 눈에서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들릴락말락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 처지에 찬밥 더운밥 가리겠나? 나 정말 너를 믿을게. 제발 목숨만 살려 줘. 향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흑,흑.”
이윽고 경찰이 중서를 보고 자백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중서는 망설이지도 않고 이내 자백서에 지장을 찍었다. 

미희의 살인사건은 살인 동기, 목격자, 물증이 모두 갖춰졌다. 미희가 죽던 날, 모래 채취장 주위에 다녀간 철우와 진서를 포함해서 여섯 사람을 조사한 결과 미희의 죽음과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혐의자에서 배제되었다.
문청시 검찰기관에서 ‘살인범’ 황중서의 강간살인 범죄 사건을 ‘엄하게 타격하는 운동’의 명단에 올려서 문청시 중급법원으로 기소했다. 성(省) 중급법원에서는 신속하게 황중서를 ‘살인죄’로 사형에 언도하고 즉시 집행하였다. 

7

태평향에는 두 미녀가 있었는데 하나는 조선족 처녀 강미희였고 다른 하나는 한족 처녀 링링이었다. 미희가 서시같이 날씬한 대신, 링링은 전설 속의 양귀비처럼 약간 풍만한 편인데 허리가 가늘고 얼굴 피부가 유난히 예뻤다.
링링은 조선족 총각 진서와 결혼하였다. 진서는 현재 향정부에서 정부 전용 승용차 운전수로 있는데 결혼한 지 1년 남짓 되었다. 봄철이 되면 문청시 기층 간부들은 당교에서 네닷새 동안 <당규약>에 관한 교육을 받는다. 진서는 향장인 철우 아버지와 다른 간부들을 간부 전용차에 태워 문청시 당교(党校)에 교육받으러 갔다. 철우는 아버지가 잠시 집에 없는 사이 어머니를 시골 이모네 집으로 보내고 남녀 또래 친구들을 끌어모아 마작판을 벌였다.  철우 집에 마작이 한틀 밖에 없었다. 철우는 옆집에 사는 진서네 집에 마작을 빌리러 갔다. 철우는 노크도 하지 않고 무작정 집 안으로 들어갔다. 따사로운 햇볕이 봄기운을 살짝 묻혀 깔끔하게 꾸려놓은 진서네 신혼방을 따스하게 비췄다.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진서의 아내 링링은 대자로 누워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미끈하고 허연 허벅다리가 드러나고 발달된 흰 젖가슴 윗부분도 노출되어 있었다. 여성미가 뚜렷한 링링이 누워 있는 모습을 게걸스레 쳐다보던 철우는 뒷골이 짜릿해지면서 변태적 욕정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심장이 세차게 뛰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링링이 누워 있는 방 위에 올라갔다. 늘 해왔던 버릇처럼 철우의 강렬한 욕정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뿐더러 주저하지 않고 곧장 행동으로 옮겨졌다.
철우가 손으로 젖가슴을 만졌지만 링링은 세상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다. 철우가 떨리는 손으로 아랫배를 만지는 순간 링링은 눈을 떴다. 그녀는 마치 흉기에 가슴이 찔린 듯 앙칼진 비명을 질렀다. 철우가 겁에 질려 뒤로 주춤할 때 링링은 벌떡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가 큰소리로 사람들을 불렀다. 
색광에게 모욕당한 링링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철우 멱살을 쥐고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조금 뒤에 뒷집에 사는 부녀회장이 쫓아오고 이윽고 철우네 집에 놀러 왔던 친구들도 찾아와서 철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새파랗게 질린 링링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엉엉 울며 철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울음을 겨우 멈추고 남편 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금방 집에서 발생한 사실을 일러바치고 당장 이사를 가자고 졸랐다. 진서는 철우가 다른 아가씨나 유부녀들을 상대로 바람을 피워도 자기 아내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않으리라 철석같이 믿어 왔다. 그는 생각할수록 치솟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당장 향파출소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 얘기를 하고 빨리 구치소에 처넣으라고 했다.
유년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고 동창이었던 철우가 자기가 없는 틈을 타서 집안에까지 침입하여 갓 임신한 집사람을 희롱하였으니 짐승보다 못하다고 욕설을 퍼부으며 이를 갈았다. 세상 사람들 몰래 철우의 악행도 감추어 줬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냐며 펄펄 뛰었다. 
이튿날 아침, 출근한 진서는 링링의 전화를 받고 더 미칠 것 같았다. 새벽에 철우 어머니가 파출소를 찾아 가서 터무니 없이 아들을 구치소에 가두었다고 소장에게 야단을 쳤단다. 그리고 곧바로 파출소에 갇힌 철우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고 했다. 게다가 생각만 해도 역겨운 철우가 자기네 담장 밑에서 링링을 쳐다보고 얼굴을 씰룩거리며 징그럽게 웃더라고 했다. 철우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아랫배가 더 아팠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며 링링은 엉엉 울었다.
“철우 이 자식 너, 나도 무시한다는 말이지? 이번엔 정말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는 점심시간에 김향장을 찾아가서 철우가 자기 아내를 성희롱했던 사실과 링링이 놀란 뒤부터 아랫배가 계속 아프다고 얘기했다. 김향장은 얼굴이 백지장같이 창백해지고 안절부절못했다. 
“철우 이놈, 큰일 쳤구먼. 조만간에 우리 집이 아들놈 때문에 풍비박산이 날 거야!”
김향장은 현 공안국 형사과에 전화하여 태평향에 가서 철우를 체포하여 구치소에 처넣으라고 했다. 진서는 집에 돌아오자 링링을 큰 병원으로 이송하여 입원시켰다. 큰 병원에서 치료했지만 과거에 유산했던 사례가 있어 사흘 만에 유산하고 말았다. 
진서는 철우가 이틀 만에 현 구치소에서 또 풀려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방에서 식칼을 뽑아 들고 철우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진서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마음을 진정하고 빨리 문청시 부검찰장인 삼촌을 찾아가라고 했다. 진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했다.
“철우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내가 꼭 너한테 총알맛을 보이고 말 거야. 넌 죽었어.”
진서는 그날 저녁으로 문청시 부검찰장인 삼촌을 찾아갔다. 삼촌을 찾아갔던 진서는 이틀 후에 집에 돌아왔다. 시 공안국의 경찰차가 곧바로 철우네 집 앞에 멈추더니 완전무장한 경찰 네 명이 철우네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때, 철우네 집식구와 일가친척들이 모여 풍성한 밥상을 차려 놓고 식사할 때였다. 철우의 생일날이었다. 경찰 네 명이 밥상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쌌다. 경찰은 닭다리를 한창 뜯고 있는 철우의 손목을 끌어당겨 수갑을 채우며 말했다.
“김철우, 당신을 살인 용의자로 체포한다.”
“뭐라고요? 살인 용의자라고요?”
옆에 누군가 물었다. 경찰은 대답도 하지 않고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철우를 강제로 끌고 경찰차에 태웠다. 놀란 철우 어머니는 울며불며 난리였다.
“우리 아들은 살인한 적 없어요.”
김향장은 담배를 피우며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부검찰장이 화가 많이 낫구만, 어휴-”

8

미희는 서산에 곧 넘어가려는 빨간 해를 바라보며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미희는 한국 총각이 술과 인연이 없다고 하니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안정되었다. 자기 아버지, 오빠, 중서네 아버지, 중서까지 지나치게 술 마시는 걸 보면서 술을 마시는 남자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한국 총각과 결혼만 하면 이미 준비해 놓은 아파트에서 딴살림을 하고 앞으로 식당 일에 좀 익숙해지면 카운터도 맡기겠다고 했다. 그녀는 타국에 시집가서 일가친척이 옆에 없어도 신랑만 자기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면 어떤 힘든 일도 이겨 나가고 누구보다 더 잘살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녀는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에 도취되었지만 웬일인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끼며 자꾸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쓸쓸해났다. 
모래채취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도착했을 때였다. 옆으로 지나가던 향 간부 전용차가 멈추어 서면서 술기운이 잔뜩 올라 얼굴이 지지 벌개진 철우가 승용차에서 내려 미희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 중서가 자전거와 웃옷을 모래채취장에 버리고 떠난 지 불과 10분 뒤였다. 
향간부 전용차를 운전하던 진서는 철우를 차에서 내려놓고 차를 운전하며 가다가 장삼 아저씨가 술에 몹시 취한 중서를 당나귀 차에 힘겹게 끌어올리는 것을 보고 본체만체하며 마른 먼지를 자욱하게 날리며 지나쳐 버렸다. 승용차에서 내린 철우는 걸어가는 미희 앞을 가로막고 바싹 다가서면서 물었다. 
“미희, 너 오늘 한국 총각 냄새를 맡아 보니까 어때? 우리 중국 총각 냄새보다 더 향기로웠어?”
 지독한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희는 앞을 막고 있는 철우를 옆으로 밀어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저리 비켜! 집에 오빠랑 동생이 날 기다리고 있어. 너하고 말장난할 새가 없단 말이야.”
철우는 벌건 잇몸을 드러내고 징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며칠 전에 너에게 보낸 편지 받고 왜 회답이 없어? 내가 몇 번이나 편지를 썼는데 한 번도 회답 안했잖아. 나 정말 너를 좋아한단 말이야.”
미희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매몰차게 되받았다.
“야! 내가 너에게 시집가면 몇 번째 색시야? 열 번째? 아니면 서른 번째? 내가 왜 색시도 아니고 첩도 아닌 짓거리를 하냐? 바람둥이 같은 자식, 저리 비켜!”
철우는 히죽히죽 웃으며 미희의 얼굴과 몸매를 걸탐스럽게 훑어보며 말했다.
“야, 너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인다. 정말 우리 향에 일등 미녀네, 히히히.”
밝은색 원피스를 입은 미희의 균형 잡힌 몸매는 오늘따라 더 매력적이었다. 철우는 마치 피에 주린 모기처럼 끈질기게 미희에게 접근했다. 
“내 말 좀 들어봐. 너를 한 번만 안게 하면 우리 이모가 너에게 빌려준 돈 안 받을 게. 이런 장사할 만하는 거 아니야?”
미희는 철우의 모욕적인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야, 이 미친 색광 같은 놈아! 내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네놈에게 안기지는 않을 거다. 저리 비켜, 너 이모에게 빌린 돈은 갚을 날짜가 아직 멀었어. 비키라니까!”
달아오른 욕정이 온몸으로 뻗쳐 나간 철우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무작정 미희를 껴안으려고 했다. 그녀는 몸을 피하며 철우의 뺨을 철석 갈겼다. 철우는 왼손으로 벌겋게 된 뺨을 만지다가 눈을 부릅뜨고 오른 주먹으로 미희의 태양혈을 사정없이 쳤다. 나약한 여자가 어찌 젊은 남자의 센 주먹을 당하랴. 미희는 휘청거리며 풀썩 주저앉더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철우는 혼미한 미희를 질질 끌고 사람이 없는 모래 더미 뒤로 갔다. 이때 날은 저물어가고 모래더미 뒤에서 굿을 한다 해도 길가는 행인들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혼미하여 반드시 누워있는 미희 아랫배에 걸터앉았다. 찢어진 원피스 속으로 손을 넣어 앞가슴을 거칠게 만졌다. 
꽃잎같이 부드러운 미희 입술을 보고 강한 충동을 느끼며 철우가 입을 갖다대려는 순간, 미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입을 살짝 돌리며 철우의 귀를 이발로 꼭 물었다. 철우는 소리는 지를 수는 없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 잡아당겼다. 귀에서 흐르는 검붉은 피가 미희 얼굴에 떨어졌다. 
철우는 미희 머리카락을 잡았던 오른손으로 옆에 놓여있는 주먹만 한 돌을 쥐어 들었다. 미희는 더욱더 억세게 귀를 물고 머리를 흔들었다. 다급한 비명을 지르던 철우는 손에 쥐고 있던 돌로 ‘퍽-’ 소리 나도록 미희의 머리를 쳤다. 미희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는 머리카락을 적셨고 꿈틀거리던 몸은 미동을 멈췄다. 철우는 꼼짝도 하지 않는 미희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미희를 죽였구나……, 어쩌면 좋아?”
철우의 머릿속에 불현듯 모래 채취장 입구에 헌 자전거와 자전거에 걸린 웃옷이 생각났다. 그는 다가가서 자전거를 보니 오전에 보았던 중서의 헌 자전거였고 자전거에 걸려 있는 옷도 중서의 웃옷이었다. 그는 음침한 웃음을 보이더니 중서의 헌 옷을 들고 미희의 시신 옆으로 다가갔다. 
마지막 한 가닥 남은 석양빛이 모래 더미 뒤에 앉아 있는 검은 물체를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이상했다. 가까이 가보니 죽은 줄 알았던 미희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앉아 있었는데 검은 머리카락에는 낙엽 몇 개가 붙어있었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지 않고 사람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었다. 너무 놀란 철우는 뒷걸음 치다가 벌렁 자빠졌다. 
“난...죽기 싫어...날 좀... 살려 줘...나는 한국... 갈 거야...” 
미희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눈빛에는 삶의 욕망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철우는 두 무릎을 꿇고 기어서 미희 앞으로 다가갔다. 이때, 이상하게도 무리에서 쫓겨났는지 까마귀 한 마리가 머리 위에서 원을 그으며 ‘까옥 까옥 ’ 우짖다가 날아가 버렸다. 철우는 으쓱 진저리 쳤다. 미희와 철우의 얼굴은 붉은색을 칠한 듯 피범벅이 돼 있었다. 목석처럼 앉아 있는 미희의 앞가슴 오른쪽 유방이 허옇게 나와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때 철우는 미희의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피하며 왼손으로 봉긋이 밖으로 내민 미희 유방을 만지려고 했다. 미희는 점차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하고 온몸에 세차게 경련을 일으키면서 “날...좀...살려줘...”라며 미약한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는 갑자기 울컥하며 붉은 피를 철우 얼굴에다 뿜어댔다. 그녀는 나모토막 넘어지듯 무너지더니 눈길을 허공에 못 박았다.
방금까지 매력 넘치던 얼굴 모양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싸늘하게 굳어가는 미희를 보던 철우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철우는 중서의 웃옷으로 미희 얼굴을 덮은 후 옆에 놓인 삽으로 황급히 그를 모래 더미 속에 묻었다. 
철우는 오솔길로 에돌아 집에 와보니 다행히 부모가 집에 없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집에 있던 약으로 귀의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 금방 발생한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과거에 목격한 죄인들을 총살하던 끔찍한 장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기가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고 곧 총살당할 거라는 공포감을 느꼈다. 몹시 후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오직 진서가 자기와 함께 장에서 시골 이모네 집에 같이 갔다 왔다는 것을 증명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중서가 살인 용의자가 되고 자기는 혐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서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금방 발생한 일들을 얘기했다. 듣고 난 진서는 펄쩍 뛰며 증명을 서줄 수 없다고 딱 잡아뗐다. 철우는 진서 앞에 두 무릎을 꿇으며 사정했다. 
“너 아버지 목매어 죽은 사실 잊었어? 나는 비록 어렸지만 너의 아버지가 처참하게 죽은 장면을 똑똑히 봤어. 그 당시 너 아버지는 자살이 아니고 중서 아버지가 자기가 촌간부 되려고 너의 아버지 목을 졸라 죽였다는 소문도 돌았잖아. 이 기회에 복수하지 않고 언제 복수하려고 그래, 엉?”
철우의 목소리도 떨렸다. 가만 듣고 있던 진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거실에 왔다갔다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직접 철우에게 대답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중서가 술이 많이 취했는데 장삼이 당나귀 차에 중서를 싣고 집에 데려다주었어. 장삼이 술에 취한 중서를 집에 데려다주었다고 증명하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될 수 있어. 돈 좀 써야겠다. 장삼 마누라가 지금 폐암에 걸렸는데 많은 돈이 필요할 거야, 알겠지?”
철우는 진서의 도움으로 살인사건에서 빠져나오고 대신 중서는 억울하게 총살당하게 되었다. 

문청시 공안국에 잡혀간 철우는 자기는 살인한 적이 없다고 강렬히 부인했다. 진서가 자기 마누라를 희롱했다고 없는 사실을 꾸며 자기를 모함했다고 했다. 미희를 살해한 사실 증거를 내놓으라고 배짱을 부리며 자기도 변호사를 불러 법원에 소송하겠다고 했다. 한동안 진서도 확실한 증거를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민하던 중 한 사람을 생각해냈다. 미희가 피살당하던 날 술에 취한 중서를 당나귀 차에 실어 중서네 집에 데려다준 장삼이 생각났다. 
진서는 장삼을 찾아갔다. 매우 가난한 집이었다. 장삼은 갑자기 진서가 자기네 집을 찾아오니 당황했다. 진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미희가 살해당한 당일, 장삼이 당나귀 차에 중서를 싣고 가는 것을 향간부 전용차에서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자기가 철우를 시켜 장삼에게 돈을 주면서 입을 막게 했다고 덧붙여 말하였다. 듣고 난 장삼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돋아났다. 그는 한참 동안 말 없이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그날 발생한 일들을 말했다. 
“진서, 너도 알다시피 그 무렵 마누라가 폐암 판정 받았잖아. 장날에 당나귀 차로 쌀을 팔고 오는 길에 중서가 술에 취해 나무에 기대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더라. 자전거 타고 내리막 내려오다 엎어져 입술, 코, 이마가 피투성이 되었어. 나는 원래부터 중서와 괜찮은 관계라서 술 취한 그를 당나귀 차에 그를 실어 집까지 데려다주었던 거야……. 아, 차라리 그날 술 취한 중서를 가만 놔두었으면 혹시 죽지 않았을 수도...”
그의 충혈된 두 눈은 피곤해 보였고 담배를 피우며 담뱃재를 아무 데나 털었다.
“그 이튿날, 난데없이 철우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돈 한 뭉치 주는 거야. 모두 새 돈이었어. 그때, 내가 마누라 수술비 구하러 동네방네 다닌 걸 알았던 모양이야. 철우 말로는 다른 도움은 필요 없고 경찰이 물으면 그날 집에 돌아 오면서 중서를 보지 못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된다고 했어. 나중에 중서가 미희를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난 뒤에야 철우가 돈을 준 원인을 알게 됐어…….”
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괴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중서가 총살당하고 난 후 죄책감으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이 악몽에 시달렸어. 내가 거짓 진술만 하지 않았으면 착한 중서가 억울하게 죽지 않을 건데.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마누라를 살리려고 했지만 결국 마누라도 중서가 총살당한 뒤 얼마 가지 않아 죽었어. 흑흑...”
장삼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진서의 두 눈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진서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천장을 쳐다보며 침통하게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도 중서에게 복수하려고 거짓 증명까지 했지만 배 속에 새 생명도 결국 잃고 말았어. 우리 지금도 늦지 않았어. 공안국에 가서 철우가 저지른 죄를 낱낱이 밝히자.” 
이튿날, 진서는 장삼과 함께 공안국에 찾아가서 철우의 살인죄를 비호해 준 범죄사실을 자수하고 철우의 범죄 행각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과거에 철우와 친구처럼 지내다가 지금은 향 파출소 부소장이 된 경찰도 미희의 시신을 발견했던 날 철우의 귀에 웬 상처가 나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확실한 증거 앞에서 철우는 미희를 살해한 범행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9

몇 달 후 어느 날 밤, 먹장구름이 밤하늘을 뒤덮고 천둥 번개가 요란했다. 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이 캄캄했다. 아들 때문에 사처로 뛰어 다니던 김향장이 술을 잔뜩 마시고 택시에서 내려 비칠거리며 집 대문 문고리를 잡아당기려 하는데 흰옷을 입은 한 사람이 대문 앞에 있었다. 의아한 김향장은 가까이 다가가서 그 사람의 얼굴을 바싹 맞대고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칠흑 같은 밤하늘에 번갯불이 번쩍였다. 고막이 터질 듯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앗!’ 김향장은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섰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시퍼런 번갯불 속에서 흰 머리에 소복을 입은 흉물스럽게 생긴 여인이 벌건 혀를 길게 빼물고 목에 밧줄을 건 채 대문간에 매달려 있었다.
축 처진 여인의 몸에서 냉기가 확 풍겨 나왔다. 기절초풍한 김향장은 혼미하여 쓰러졌다. 한참 후에 차가운 비를 맞고 혼자 기여 일어서서 사람들을 불렀다. 김향장 집 대문에서 목을 매 죽은 늙은 여자는 중서의 어머니였다. 
중서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정부에서 중서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했다. 그리고 중서의 유해를 찾아서 미희 묘지 옆에 나란히 묻었다. 
제 정신이 돌아오고 중서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게 된 중서 어머니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희망도 없이 살 바엔 차라리 옛날 같이 미쳐버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도망쳐 나와 김향장 집 대문간에서 목을 매었다. 
김향장은 중서 어머니가 목매어 죽은 시신을 본 후부터 심장병으로 앓기 시작했고 좋다는 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다.
15년 징역형을 받은 철우는 흑룡강성 북대황 허허벌판 한가운데 덩그렇게 있는 감옥에 감금되었다. 죄수들이 탈옥하다가 늑대 무리의 먹이로 된 사례도 있었다고 했다. 일망무제한 들판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눈도 뜰 수 없었다. 감옥에서 범인들은 주로 농사일을 하는데 날이 밝기 바쁘게 들판에 나가 일을 시작하면 저녁녘 어두워야 일을 마친다. 
철우는 비록 농촌에서 자랐지만 할 줄 아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세월 살아왔던 호화로운 생활은 그를 남달리 불행하게 만들었다. 일할 줄 모르니 욕 먹고 맞는 거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같이 일하는 죄수들 대부분 말이 거칠고 행동이 난폭했다. ‘향장 아들’은 그
에게 담배 한 갑보다도 가치가 없었다. 
환경이 열악한 북대황 감옥에 갇힌 뒤부터 철우는 중노동을 하루에 열두 시간씩, 때로는 야간작업까지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욕 먹고 맞아 피가 터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선천적인 남성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화장실에서 자위행위를 하고 나면 또 성기가 감염되었다. 때로는 너무 고통스러워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려 물에서 금방 나온 것처럼 흠뻑 젖었다. 그는 종종 알지 못할 분노를 느끼며 머리카락을 쥐어 뜯다가 눈보라 날리는 밤에 혼자 밖에 나와서 엉엉 울었다. 그 모습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깊은 밤중에 광야에서 애처롭게 우는 소리 같았다. 그는 극심한 우울증과 광장공포증 등 심리적 압박감이 심해지면서 자살 시도도 여러 번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른 나무 꼬챙이처럼 야위어 몸이 극도로 허약해졌다.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드러누웠다. 감옥 책임자는 철우 아버지에게 아들의 병이 위중하다는 사실을 전보로 알렸다. 
철우 아버지가 달려와 아들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은 갈고리로 긁는 것처럼 아팠고 평생 후회를 동반하며 살아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철우는 한 달 남짓이 입원하고 나서 회복이 되었다. 감옥에 다시 들어가서 15년의 감방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푸줏간에 들어가는 소처럼 진저리를 쳤다. 비록 몸에 병은 들었지만 한 달간의 감옥 밖의 생활은 구속 없는 생활에 대한 욕구를 충동질했다. 
감옥에 다시 들어간 뒤 얼마 안 되어 탈옥을 감행하던 철우는 늑대에게 물려 처참하게 죽고 말았다. 

10

철우가 탈옥하다가 늑대에게 처참하게 물려 죽은 뒤에 김동형 향장은 사흘이 멀다하게 심장병이 발작하여 쓰러졌다. 철우가 탈옥하다 죽은 소식은 그때까지도 누구도 몰랐다. 김동형 향장은 아들 문제로 향장직에서 물러났지만 능력이 검증된 간부라며 ‘향기업판공실’ 주임직을 맡게 되었다. 그의 끝없는 탐욕은 멈출 줄 몰랐다. 석산(石山) 하나를 개광(開鑛)하도록 허가를 내어주면 뒷거래로 거액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인들과 주민들의 공분이 커졌다. 많은 주민이 문청시 규율검찰위원회에 김동형이 직위를 이용하여 금품을 수수한 죄를 여러 번 고발하였다. 
문청시 검찰청에서 김동형의 재산을 동결하고 재산 내원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검찰관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뇌물을 받았길래 장춘시와 길림시에 처제, 처남, 집식구들의 명의로 아파트 여섯 채나 사놓았던 것이다. 문청시 검찰청과 법원에서는 불법으로 수수한 뇌물과 금품을 모두 억류, 회수했다. 김동형은 유기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아들과 남편을 감옥에 보낸 철우 어머니도 정신에 이상이 와 온거리를 다니면서 난동을 부렸다. 김동형은 감옥에 감금된 지 반년 후, 추운 겨울에 음침한 감옥에서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11
이철이 아내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올렸다. 나는 마치 잠시 슬픔과 회한과 아픔과 고통의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안타깝고 애석하고 비통했다.
미옥이 기른 토종닭은 옛날 집에서 기르던 토종닭 맛이었다. 이철은 일어서서 뒷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비단같이 윤기 흐르는 호수에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자 파도가 대팻밥처럼 돌돌 말리면서 사방으로 굴러갔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이철이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너 와이프랑 정말 갈라진 거여?”
나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배속에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혼했어. 가슴 아팠던 얘기 그만하자, 응?”
“그래. 내가 너 아픈 과거를 일부러 들추는 것이 아니고 와이프와 확실하게 갈라졌나 알아보려고 그랬어. 오해하지 마.”
나는 호수 건너편을 가리키며 이철에게 물었다. 
“상호 형님과 미옥이는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노? 걔도 이제는 시집갔제?”
이철은 얼굴색이 어두워지며 말했다.
“지금 상호 형님과 미옥이는 사는 게 말이 아니야. 아직도 그 옛날 낡고 허물어져가는 토집에 살고 있어. 하루 아침에 여동생이 비참하게 죽고 집기둥이 무너지자 오빠와 여동생은 생활난으로 허덕이게 되었고 상호 형님은 술로 나날을 보냈어. 얼마 가지 않아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져 버렸어. 공부 잘하던 미옥이는 언니가 처참하게 죽게 되자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우울증으로 공부도 그만두었어…….” 
“미옥이 지금은 정신상태도 많이 좋아진 거 같아. 언제부터 양계기술을 배워 토종닭을 기르는데 돌산과 사장(沙場)의 민공들에게 모자라서 못 팔 정도야. 오늘 우리가 먹은 것이 미옥이가 키운 토종닭이거든.우리 밥 먹고 상호 형님 집에 가보자. 나도 오랫동안 못 가봤어.” 

나는 이철과 함께 호수를 에돌아 미옥이네 집으로 갔다. 작은 실개천을 넘어서자 허물어졌는지 오래된 중서네 옛집터가 눈에 들어왔다. 무덤같이 황폐해져 버린 옛집터에는 얼마나 많은 추억이 묻혀 있었던가. 옛날에 조무래기 친구들이 중서네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집 뒤 왕가네 비탈밭에서 참외를 서리하여 중서네 집에서 먹다 발각되어 회초리로 엉덩이를 맞고 돈까지 물어주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집터 주변은 쑥대며 엉겅퀴 같은 억세고 질긴 풀들이 엉켜 있었다. 이따금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쑥대밭을 스칠 때 마른 잎들이 서로 스치며 스륵스륵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옛날 어린 친구들이 장난치며 놀던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되어 메아리처럼 내 귀에 들려 왔다. 
지금은 저 무덤 같은 황폐한 옛집터에 추억밖에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 살던 한 젊은 생명은 억울하게 생명을 빼앗겼다. 나는 쑥대가 무성하게 자란 흙더미에 엎드려 울고 싶었다.
미옥네 초갓집은 몇십 년 전의 모습과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은 너무 낡고 오래동안 수리하지 않아 앞으로 엎어질 듯 했다. 그때 집 뒤로부터 털이 듬성듬성 빠진 쥐 한 마리가 마당 가운데로 기어갔다. 출입문 옆에 한쪽 다리가 없는 머리가 허연 아저씨가 쪽걸상에 앉아 저 멀리 저물어가는 석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은 암담하고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아이구, 형님 안녕하세요? 이전에 여기서 공부했던 수일입니다. 기억나죠?”
“이거 누구? 수일이라고? 못 알아보겠다. 지금 어디서 살고 있노?”
“네, 한국에 있어요.”
이때였다. 이철이 다급한 목소리로 상호에게 물었다.
“형님, 미옥이 왜 누워서 진땀을 흘려요?”
“아까 닭장을 수리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졌는데 팔이 아프다고 해서 된장 붙여 놓았제…….”
나는 미옥이 방에 들어섰다. 음침하고 컴컴한 방에 한 사람이 눈을 감고 누워있고 신음이 들려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파리한 얼굴과 귀에 어지럽게 덮여 있었다. 옆으로 쪼그리고 누워있는 애처로운 모습에서 아픈 과거가 엿보였다. 이철이 퉁명스럽게 상호 형님에게 말했다.
“형님, 미옥이 저렇게 놔두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내가 택시 부를게요. 향 병원에 먼저 가서 치료해요.”
조금 후 택시가 도착했다. 이때 갑자기 이철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학교에서 급한 일이 있다고 빨리 오라고 했다.
“수일아, 나는 일이 있어 학교에 가야 하니까 니가 미옥이 데리고 병원에 좀 가주겠니?”
“응, 그래. 내가 병원에 데리고 갈게. 너 가서 일 봐.”
나는 미옥이 옆에 다가가서 그의 허리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아픈 팔을 보니 많이 부었고 된장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는 너무나 연약하여 부딪치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 나는 미옥을 일으켜 업었다. 그녀를 업는 순간 가슴이 너무 아팠다. 혼미할 정도로 아픈 사람이 된장만 바르고 있으니…… 이윽고 그녀는 눈을 떴다. 눈, 이마는 미희를 많이 닮았다. 
“아저씨, 누구세요?”
“나, 옛날에 여기서 공부했던 수일이 오빠야. 팔꿈치가 이렇게 많이 부었는데 많이 아프지?”
잔뜩 찌푸린 얼굴이 밝아지며 그녀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수일 오빠라고요? 만나자마자 폐를 끼쳐 미안해요.”
병원에서 사진을 찍어보니 오른쪽 팔꿈치 안쪽 인대가 파열되었다고 하였다. 의사는 2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중국에 온 후 가장 바빴던 2주였다. 미옥이 퇴원하는 날이다. 이철과 아내도 찾아왔다. 퇴원 절차를 마치고 네 사람은 택시를 타고 호숫가 쉼터에 갔다.
이철 아내는 미옥과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제, 미옥이가 두 분 관계를 다 얘기했어요. 앞으로 결혼할 계획까지  세웠다면서요. 축하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하하하, 호호호.”
네 사람의 웃음소리에 호숫가에서 졸고 있던 집오리들이 놀라서 풍덩 풍덩 물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파랗게 새싹이 돋는 초록색 잔디밭에 둘러앉았다. 신록들이 내뿜는 냄새는 향기롭고 청신했다. 
이때였다. 이철이 뒷산을 바라보다가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오늘같이 날씨도 화창하고 미옥이도 좋은 인연을 맺었으니 미희와 중서보러 가자.”
호수 북쪽으로 야산을 넘어 작은 계곡을 지나면 높은 산이다. 돌과 바위가 많은 산에 나무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산 중턱에 중서 묘지와 미희 묘지가 나란히 있었다. 
준비한 술과 과당류를 들고 미희와 중서의 묘지 앞으로 다가갔다. 둥그스름하게 생긴 봉분 앞에는 자그마한 비석이 우뚝 서있었다. 봉분 주위에는 푸른 풀들이 융단을 깐 듯 부드럽게 펼쳐져 있고 자그마한 보랏빛 풀꽃들이 묘지 위에 여기저기 조용히 앉아 있었다.
더없이 밝고 투명한 햇살 아래 두 묘지는 무섭게 고요했다. 너무 조용하여 안에서 무엇이 벌떡 일어나 뛰쳐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묘지의 주인은 친구와 동생이 찾아왔어도 억울함을 안고 고요 속에 묻혀 신이 준 침묵 이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번갈아 가며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미옥이는 울며 자기의 지나간 슬픔과 언니의 한스러운 죽음을 눈물로 쏟아 냈다. 나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점차 차오른 아픔과 슬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네 사람의 눈물이 푸른 잔디 위에 떨어져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나는 산 아래 고요히 누워있는 호수에 눈길을 돌렸다. 호수의 풀숲에서 이름 모를 검은 새 두 마리가 호숫물을 차고 날아오른 뒤 검푸른 산을 넘어 아득한 하늘 끝으로 사라지는 풍경이 떠올랐다.

2021년 10월호 <연변문학>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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