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경제학박사, 여행 작가,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동북아신문 객원논설위원

이남철 본지 객원 논설위원
이남철 동북아신문 객원논설위원

몇 년째 팔레스타인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연수시키는 일을 하면서 팔레스타인 국민 시인으로 알려진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는 1941년 3월 13일 영국령 갈릴레이에서 토지를 가진 수니파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 남매 가운데 둘째로 자랐다. 다르위시는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호수 근처 마을 데이르 알 아사드(Deir Al-Assad)에서 초등학교를, 인근 카푸르 야시프(Kafur Yasif)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후 지중해 하이파(Haifa, 현재 이스라엘에서 세 번째 큰 도시)로 이주했다.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살던 마을에 이스라엘 군대가 들어와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에 인접 국가 레바논으로 피신했다. 이듬해 그와 가족들이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이미 유대인 거주지가 되어 다시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팔레스타인 내무부, 교육부, 법무부, 보건부, 재무부 공무원들과 필자.
팔레스타인 내무부, 교육부, 법무부, 보건부, 재무부 공무원들과 필자.

다르위시는 이스라엘 사법 당국에 의해 4년 간 하이파로 주거가 제한되었는데 1970년 유학생 신분으로 소련 모스크바로 떠나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였다. 20대, 그의 글쓰기와 정치 활동이 여러 차례 치안기관으로부터 체포와 수감 생활을 불렀다. 팔레스타인 난민으로 오랜 유랑의 삶을 살아온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 필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과 비슷한 역사 경험을 겪는 팔레스타인, 다르위쉬의 시를 대하면 우리 민족시인 윤동주를 연상하게 된다. 두 사람은 고향을 떠나 죽을 때까지 유랑하면서 어두운 조국 현실을 글로 표현하였다. 19살부터 시를 쓴 다르위쉬와 중학생 때부터 글쓰기를 한 윤동주!

주: 연도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영토임. 횐 색 부분이 이스라엘 영토임.
주: 연도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영토임. 횐 색 부분이 이스라엘 영토임.

다르위쉬는 팔레스타인 내에서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전전했으며, 레바논,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윤동주는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나, 평양과 서울을 오갔으며, 일본으로 공부하러 갔지만 외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는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즈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숭실중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친구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쳤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다.  종교적 의미보다 조국 광복을 위한 고귀한 희생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는 시, ‘십자가’를 한번 읽어본다.

“쫓아오든 햇빛인데지금 교회당 꼭대기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괴로왓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목아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여나는 피를/어두가는 하늘밑에/조용이 흘리겠읍니다.”

19살인 1960년에 다르위시 ‘날개 없는 새’를 출판했다. 1964년, 그가 23살인 해에 그의 첫 번째 대작인 ‘신분증’을 발표하였다. 이 시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분노와 아픔을 형상화한 저항시이다. 거주지를 제한하고 검문과 부자유 속에 사람을 가둬버린 점령자들에 대해 그는 이 같은 시구로 맞섰다. 

“적어둬라! 나는 아랍인 내 등록번호는 50000번이다 아이가 여덟이고, 아홉 번째 아이가 올여름 태어난다

적어둬라! 
나는 아랍인
내게 직함 따윈 없다 
인내하라

그곳 분노한 이들이 사는 곳에선.내게 증오는 없다 남의 권리를 앗을 마음도 없다 하지만 내가 굶주린다면 착취자의 살점이 내 밥이 되리라  조심하라   조심하라   내 굶주림을  내 분노를.”   

이 시가 수록된 시집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은 팔레스타인을 넘어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과 서방에 참패를 당한 온 아랍의 찬가가 되었다. 다르위시는 자신의 시를 낭송하기를 즐겨했다. 소리를 내서 음악처럼 시를 읽는 것은 시를 재창조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다르위시는 아시아ㆍ아프리카 45개국 67명의 해외 작가가 참석한 국제 문학행사 ‘2007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전주’에 참석했다. 1년 후인2008년 8월 9일, 여름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의 병원에서 심장 수술 중 사망했다. 그 전에도 그는 2번이나 심장 수술을 받았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2022년 기준, 팔레스타인 내 약 536만 명, 요르단 등 아랍 국가와 기타 지역에 600만 명 이상 거주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인구는 약 1,3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지금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필자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필자가 강의 중 팔레스타인 연수생 한 사람이 발표 자료 제목에서 “Republic of Palestine을 State of Palestine으로 바꿔 주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국가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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