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흙 길 위에서 흐르는 발자국》 출판에 즈음하여

이는 중국 용정 오정묵 한의사의 일대기를 쓴 평전 《진흙 길 위에서 흐르는 발자국》의 '머리말'이다.

서녘의 낙조에 흠뻑 물든 오정묵의 영상이 비쳐온다.
   
천불지산(天佛指山)에서 발원한 육도하가 흐르고 흘러 해란강으로 흘러드는 두물머리 어룡만(禦龍灣)에서 나는 오정묵이 강변의 실히 두아름씩도 더 되는 200년 남짓한 수령(樹齡)의 느릅나무들이 점점 개발과 건설로 하여 베여버려 없어지는 장면을 마주하고 땅꺼지게 한탄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유관부서에 개발과정에서 고목을 보호하고 될수록 자연환경을 원래대로 유지할데 관한 건의도 해보았지만 개발상들의 어마어마한 경제적 이익구동(利益驅動) 앞에서는 전혀 효험이 없다는 것이였다. 어느 한 겨울끝 황혼무렵의 따스한 난색(暖色)에서 고향에 대한 애정, 지어 일초일목에도 더없는 정을 몰붓는 오정묵을 나는 다시 한번 눈여겨 본다.
   
칠보산, 청진, 회령, 두만강, 천불지산, 육도하, 해란강, 용정, 일송정, 용주사, 용문교, 팔도촌 등이 그의 선조와 더불어 그의 래력을 스케치할수있는 지표(地標)적인 연장선과 함께 상징적 좌표로 된다.
   
 그는 윤동주처럼 종교신앙이 있는 사람도 별로 아닌데 역시 스치는 한오리 바람에도 무척 애달퍼하고 서글퍼하고 그윽한 눈길속의 깊은 곳에 늘 우울하고 고독스러운 빛깔이 우수인듯 잔잔이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과묵에 편향된 성격에 그는 더욱 외로워 보이기도 하다. "묵"은 침묵이라는 묵이라, 자고로부터 중국에는 "침묵은 금(沈默是金)"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한번 그는 "말을 적게하라고 해서 부모님께서 이름에 '묵'자를 달아 주셨고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라고 정자를 붙여 주셨다"고 웃으며 얘기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면서도 일단 마음에 맞는 사람과 만나면 눈속에서 발사하는 열정과 진정과 진지함은 은은히 사람을 진한 감동에 빠지게하고 청산유수와도 같은 열변은 세상만사와 시시비비를 경위가 명백하게 갈라놓는다.  

    용정 팔도촌의 농가집에서 출생한 오정묵은 일찍 어릴때 어버지를 여의고 째지게 가난한 가정생활에서 또 허약하고 병많은 체질로서 무척 힘들게 지내온것으로 알려진다. "허기진 배는 음식의 부족으로 비고 텅빈 머리는 지식부족으로 비워 있었다"라고 그는 그때의 형편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멎은후 불같은 땡볕아래 논두렁의 진흙길에서 그는 한걸음 한걸음 힘겨운 발자국을 간신히 떼가면서 허기증과 현훈증에 아물아물해지는 앞을 내다 보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고난이 무엇인지 전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하기 시작하였다. 허약한 몸은 열악한 환경에서 요행 지탱해가면서도 생각만은 점점 심각해지고 성숙된다. 그래서일까? 주어지는 책들은 모두 읽어보면서 그는 소년시대부터 의사로 되어서 천하에 병으로 시달림받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덜어주는 것을 꿈으로 키워온 것 같다. 꿈은 항상 황홀하고 현실은 항상 두드러지게 험상궂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게 더 많아지고 의문스러운게 더 많아진다. 꿈과 현실의 부대낌속에서 곤혹에 빠지면 그래도 독서가 가장 좋은 해법이다. 책을 읽으면서 인생과 사회를 사색하며 많은 의혹을 풀어가고 미래를 동경한다. 갖은 시련을 겪은 후 그는 농촌 시골 마을의 약제사로부터 시작하여 "맨발의사"(赤腳醫生)로, 지금의 명의(名醫)로, 주변 현시에까지 용하다하여 신을 업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정도로 유명한 중의(中醫) 의사로 성장되여 왔다. 그래서 오정묵의 강덕의원(康德醫院)에는 항상 사방에서 찾아온 환자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오정묵은 실천에서 공부하고 공부를 실천에 옮기면서 때때로 전문학교에서 의학을 배워왔지만 주요하게는 그래도 민간에서 의학고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고 또 자습을 통해서 고학하여 민간에 숨겨진 더없이 소중한 중의학과 중의약 자원을 탐구하면서 스스로 의도(醫道)를 깨우치고 의덕(醫德)을 터득하면서 의술(醫術)을 익혀왔다. 의심할바 없이 그는 인간으로서의 철학을 정립해 가는 와중에서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였고 인생의 목표를 확정하였고 인생의 범상치 않은 경지로 승화하였으며 따라 출중한 중의사로 오늘에까지 성장하여 온 것이다. 젊었을 때 차사고로 거의 죽다 살아남은 경력과 눈을 앓아 실명할번 했고 귀를 앓아 실총(失聰)할번 했고 외상에 하반신이 마비될번 했고 폐암에 하마터면 저 세상에 갈번 했고 뇌간출혈에 하마터면 식물인이 될번 했던 오정묵, 그는 "환자의사"로 자칭하면서 여러 차례 흉험한 위기에서 전화위복한 신화적인 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러면서 그는 당연히 죽음에 대하여서도 족히 몇번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도 새로운 형태의 삶의 연장이며 자연순리의 한 과정"이라고 그는 역설한다. 그리고 또 그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시에서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천명한다.
 
    잠은 살았을 때에
     잠간 죽음이다
    죽음은
    살다가 하는 영원한 잠이다
    누구나
     매일매일의 죽음속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착각속에서 산다
 
   그렇다. 사실상 생과 사는 상호를 전제로하여 존재하는 것으로서 어떻게 보면 죽음도 인생의 한부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잠이 들면 죽은바나 다름 없고 깨어나면 분명코 재생이다. 중국의 저명한 작가 사철생(史鐵生)의 죽음에 대한 변증적이고 활달하고 대범하고 철학적인 투철한 견해는 우리에게 진귀한 계시를 주고 있다. 중의로서 이론도 이론이지만 경륜을 쌓아가면서 나이가 먹어갈 수록, 시련이 많을 수록 더욱 풍부한 체험과 경험을 소유하게 되며 나아가서 그것이 큰 재부로 될 수 있고 또 고명한 의술로 승화될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볼때 70대를 눈앞에 둔 지금의 오정묵은 바야흐로 춘화추월(春花秋月)이요 풍경운담(風輕雲淡)이요 여좌춘풍(如坐春風)이요 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봐아할 것이다. 일단 60대에 이른 인생부터이면 자연히 항상 당전(當前)이, 즉 눈앞의 이 시간이 가장 좋은 시절이고 가장 좋은 시각이라고 봐야될 것이다. 《약명 전설집》같은 저서들은 바로 이런 인생이념을 전제로하여 펼쳐낸 것임이 분명하다. 의술과 의도도 그렇거니와 의덕에서도 오정묵은 줄곧 "모든 환자를 내자신이라고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명제 설정으로 평생을 두고 의료실천과 인생수업에서 그 답안의 탐구에 열중하고 있다.
   
   다년간 오정묵은 또 자기가 열애하는 문학을 위해서, 향토문화와 사회에 필요한 공익에 대해서 많은 사재를 털어 선후로 수많은 후원을 해왔다. 가끔씩 있는 의진(義診)은 물론이고 해란강여울소리가사신문, 천불지산문화연구, 육도하연구, 장학금조달, 빈곤호부축등 방면에서도 많은 기여를 하여왔다. 비용을 후원하여 용정에 살고 있는 전국모범인물들을 북경유람도 보내고 《해란강을 빛낸 별들》의 출판을 전담하여 용정지역 전국모범인물들의 사적을 문자로 역사와 이 시대에 집중적으로 조명해 주었다.
   
   윤동주생가 명동마을에 고풍스러운 한옥을 지어놓고 책방에 책들을 꽉박아 놓아 온 동내에 서향, 시향이 물씬 풍겨온다. 그는 늘 윤동주의 고향에서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민족에게 줄곧 유서깊은 곳으로 간주되는 용정에서 시집도 몇권 출간했고 가끔씩 노래도 지으면서 인간과 사회와 자연과의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나름대로의 인생의 보람을 만끽하고 있다.
   
   강덕의원 내지 팔도, 용정, 육도하, 천불지산, 두만강, 용두레와 어곡전 등이 그의 인생을 개괄할 수 있는 역시 지표성적인 상징으로 항상 그의 뇌리 속에 살아 숨쉬고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뚜렸이 기억되어 있다. 그가 투자하고 기획하고 개척하고 건설하고 가꾸어 온 어곡전(禦谷田)은 농부절, 민속절, 백종절등을 외연으로 확장하여 이미 2009년도에 길림성무형문화제로 확정되여 우리민족의 농경문화연구와 향토문화연구에 크게 한몫하고 있다. 이민으로 이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해온 우리민족의 선조들은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전형적인 농사가 바로 벼농사였다. 거칠은 불모지를 비옥한 옥답으로 개간하고 두만강물과 해란강물을 끌어올려 관개하면서 눈보라치는 만주땅 허허벌판에서 저온냉해를 견인하게 이겨내여 용케 성공해낸 벼농사, 그야말로 길이길이 이땅에서 전설로 대서특필해야만할 사건이다. 오정묵의 인생여정은 선친께서 칠보산으로부터 중국땅으로 이민하여 오신 그때부터 역사의 길, 전설의 길, 생존의 길을 걸어왔다 하여도 무방할 듯싶다. 그래서 오정묵이 애지중지하던 어곡전의 우량 벼가 마침내 중국대지에서 유명한 브랜드 백옥미로 부상하여 장춘으로, 전국각지로 수송되고 있고 따라 많은 호평들을 받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은 오정묵의 천불지산에 대한 정결(情結) 즉 정회, 잠재의식, 콤폴렉스다. 용정에서 남쪽 방향으로 대략 20키로 쯤 거리면 천불지산이다. 천불지산은 산림, 화초, 샘물, 바위, 이끼와 아울러 야생동물의 낙원으로도 되는 원생태적 환경으로 여직 그리 많이 남지 않는 오아시스와도 같은 순 자연적인 존재다. 오정묵은 어느때인지 모르게 천불지산의 매력에 푹 빠져 그 자연의 형성과 인문적 사료(史料)를 깊이 연구하며 남다르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게 된다. 그는 언제인가 《사자(使者)가 되여 천불지산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자작시를 격조높게 읊조리고 있다.
     
     나는 고통속에서 신음하는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천불지산의 사자이다
     차디찬 세계에서
     떨고 있는 혼백을
     따스하게 품어주려고  
     땅에 떨어진  
     하늘이 되지 않았던가
     남들은 오지 않은 곳을
     나만은 온다고
     고혼이라 자칭했노라
 
   그렇다, 사색하고 있는 인생은 마냥 외롭고 사색하는 사람은 늘 고독하기 마련이다. 그는 시로서 몸이 죽어서도 이 세상에 그 무슨 보충, 도움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좋은 가치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있다. 그래서 그는 사단법인 천불지산문화연구협회도 창립했고 전문 특별히 기획하여 《천불이 점지(占指)한 산 그리고 천불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저서까지 펼쳐낸다. 천불지산에 대한 오정묵의 인지(認知)를 가히 아래와 같이 개괄할 수 있는 듯싶다. "산은 부처님이요, 사찰이며 불법(佛法)이다. 산은 석간수, 이끼, 바위와 대화를 나누는 곳이다. 산은 약재요, 의사이며 병원이다." 천불지산에 대한 애착심과 숭배심, 그리고 경외감은 심지어 불교 신앙과도 근사한 정도로 독실하고 끈질기고 치렬하고  처절하여 분명 그에게 영혼의 안식처로 지향된다. 오죽하면 그는 "육체는 천불지산 기슭에서 살다가 영혼은 천불지산 품에 안긴다면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랴"라고 까지 청천을 우러러 장태식을 뿜었겠는가.
   
   복잡다단한 인생살이를 하면서도 인생의 자세와 인생의 의의에 대하여 그는 시종 한점의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신조를 지켜가고 지내온 경력과 세월의 세파가 그를 성숙되고 세련되고 은인자중한 사나이로 부각한다. 항상 깔끔한 정장차림에 한오리 머리카락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갈한 모습으로 그의 반듯하고 방정한 인생관을 세상사람들에게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삼라만상의 사물에 대한 쉽지 않은 가치판단이 그래도 종내 인류의 보편적인 인지에 정착되고 예민한 시각과 정밀한 사유는 그에게 성공에 필수한 토대를 갖추게 한다. 그의 개성과 더불어 주견이 있는 안목은 항상 새로운 탐구에서 경이롭게 새로운 발견을 창출한다. 착하고 어지고 정의로운 기질은 그의 정신속성으로 자리매김 되고 영혼의 외적 표출로 특징된다. 행위방식과 달리 정신적 주향(走向)은 늘 새롭고 선명하고 독립적인 지향을 고집하며 외로운 영혼의 자기만의 길을 독행(獨行)하는 궤적을 남겨 놓는다.
 
   간혹 달빛이 유유히 비추어주는 용문교두에서, 간혹 선구자들이 활쏘면서 말달리던 비암산기슭에서 용주사의 은은히 들려오는 전설의 종소리를 마음속으로 거듭거듭 음미해 보기도하는 오정묵이다. 그러면서 그는 또 짬짬이 강경애작가와 리주복등 작가들이 북향문학을 온양(醞釀)했던 해란강변의 오솔길을 묵묵히 거닐고 있고 력사와 현실의 시공간을 홀로 산책하고 있다.
   
   오정묵은 바로 천불지산에서 발원하여 출렁이며 흘러오는 육도하가 해란강으로 합류하는 두물머리에서, 용문교의 교두에 위치한 어룡만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심지어 시시각각 육도하의 물결에 실려오는 천불지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고 천불지산의 맥박을 짚을 수 있고 천불지산의 체온을 감지할 수 있고 천불지산의 정서를 어루만져보고 보듬어줄 수 있다. 그리고 또 육도하가 해란강에 합류하여 부르하통하로, 두만강으로, 동해바다로 천불지산의 초지(初志)를 지니고 흘러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물끄러미 의미심장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런 오정묵을 나는 이렇게 알고있다.
                                           
                                     2022. 6. 6

金學泉 프로필 

시인, 번역가. 
중국작가협회 제5기와 제6기 전국위원,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 문학위원회 위원, 연변작가협회 주석, 연변사회과학계연합회 주석,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역임. 
시집 《봇나무숲 情結》 등 다부, 번역시집 《은장도여 은장도》 등 다부 출판. 《중국조선족문학작품정수》 (5권6책) 등 다부 주편집. 
제4기와 제7기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제4회 한국한민족글마당문학상등 다수 수상. 
현임 중국시가학회 이사, 중국신강사범대학특약연구원.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