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주 (시인·문학평론가)

1. 

서정(抒情)이란 시인이 시적 대상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서정시는 시인의 자아와 세계와의 소통에서 태어난다. 강효삼 시인의 근작시는 바로 그 소통의 접점에서 태어났다. 
강효삼 시인의 시적 대상물은 자연이라는 어느 한 대상물이 아닌, 자신의 생애이자 삶이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나무, 꽃, 강물, 달, 종소리 등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시의 미적 원근법을 이용해 자신의 생(生)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가 겪은 삶의 구체성에서 시적 소재와 전언을 취해간다. 이는 그의 깊은 연륜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평생을 시인의 눈으로, 세상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적 기록을 멈추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이제 그의 작품을 읽어보자.

그러나 꽃은 꽃을 떠나야 열매가 들어서기에 
서둘러 떠나면서 자리를 내면 
그때 비로소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잎들
서둘러 나타나서 열매들을 감싸안는다 

아아, 그때부터다 
열매를 키우는 몫은 
모두가 푸른 잎들의 몫이여서 
과일이 배고플 때 밥이 되여주고 
비가 오면 젖지 않는 우산이 되여주며 
목마를 때 물이 되고 
바람이 몰아칠 때 담벽이 되면서 
싱싱하던 육체가 고엽이 다 되도록
열매들을 받쳐주며 쓰다듬고 보듬어 
푸른 감동에 휩쌓인 열매들
저마다 농익은 결실이 된다 
- 「과일나무」, 부분

이 시편을 통해 우리는 한 그루의 과일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꽃과 푸른 잎사귀들이 얼마나 많은 인내의 시간을 견뎌왔는지를 알 수 있다. 시인은 “꽃으로의 아름다움보다/ 열매 맺는 과업이 더 크고 소중하기”에 “서둘러 떠나면서 자리를 내는” 꽃의 겸손한 미덕과 “싱싱하던 육체가 고엽이 다 되도록” 온갖 험궂은 일을 도맡아가며 열매를 키워내는 잎사귀들은 헌신적인 감동을 노래한다. 시인은 과일나무의 풍성한 열매라는 표면구조 뒤에 숨겨진 이면구조를 이야기한다. 꽃과 잎사귀의 묵묵한 헌신이 없었다면 저 열매들이 어떻게 “저마다 농익은 결실이” 되었을까? 물론 그 이면에는 다시 “꽃은 산모, 잎은 보모”라는 시인의 비유처럼, 이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의 헌신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자식이라는 크고 멋진 열매가 성장하기까지 “배고플 때 밥이 되어주고/ 비가 오면 젖지 않는 우산이 되어주며/ 목마를 때 물이 되고/ 바람이 몰아칠 때 담벽이 되면서/ 싱싱하던 육체가 고엽이 다 되도록/ 열매들을 받쳐주며 쓰다듬고 보듬어”준다. 

“싱싱한 육체가 고엽이 다 다 되록.” 이 한 구절을 통해 시인은 이 세상 부모님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한편의 파노라마로 펼쳐 보여준다. 이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사랑이 어디 있으랴? 시인은 평범한 일상에서 쉽게 보이는 과일나무 하나에서 꽃과 잎사귀, 열매의 시간을 읽어냈고, 그 시간 너머의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읽어냈다. 이처럼 그의 시편들을 사물 뒤의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전통적 서정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이데거가 언어를 기호라고 했듯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는 직접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를 지칭하기 어렵다. 그래서 시적 언어도 대상물을 직접 ‘적시’하는 대신 비유나 상징, 은유 등을 동원하여 간접 ‘암시’를 사용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정시는 사물의 진리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에둘러서 접근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강효삼 시인도 이러한 표현법과 상상력에 기초한 ‘암시’를 통해, 그리운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호명해냈다. 

이른 아침 깨여나 하늘을 바라보니 
달은 의연히 초저녁 그 자리서 머뭇대누나 
밤새워 걸은 길이 고작 저 거리 뿐이냐 
초저녁 길 떠난 자리에서 
한마장도 못되는 짧은 거리 
간다는 흉내만 내고
아예 가지를 않는 거냐 아니면 
가는 것이 맘에 걸려 가던 길 
되돌아온 거냐 
그냥 그 자리 서 있은 아침 달  
아침이 되여도 그냥 한자리 서있는 달을 보니 
생각나네, 술주정 자주 하는 아버지가 
미워도 너무 미워 간다고 아주 간다고 
그 몇 번 보따리 싸쥐고 문밖을 뛰쳐나섰다가도 
올롱졸롱 눈이 새까만 우리 4남매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가던 길 되돌아와 문밖에서 밤을 지세운 
마음 약한 내 어머니 
- 「아침의 달」, 부분

시인의 농익은 언어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그의 시적 상상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이른 아침 깨어나 바라보아도 간밤의 그 자리에서 한 마장도 움직이지 않은 채 머물러 있는 달을 호명하며 그리운 어머니를 불러낸다. 술주정하는 남편이 미워서 몇 번이나 보따리를 싸쥐고 문밖을 뛰쳐나섰다가도, 눈이 새까만 어린 4남매가 눈에 밟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가던 길 되돌아봐 문밖에서 밤을 지새우시던 어머니, 마음 약한 시인의 어머니는 결국 집을 떠나지 못했다. 

성인이 된 시인은 어머니의 마음이 궁금해져서 달에게 묻는다. “아예 가지를 않는 거냐 아니면/ 가는 것이 맘에 걸려 가던 길/ 되돌아온 거냐?” 그러나 그 이유를 알아서 무엇하리, 세상의 모든 위대한 어머니들이 그러하셨듯이 시인의 어머니도 결국 자식들을 선택하셨을 것이다.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을 강인하게 먹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지금도 밤하늘의 밝은 달이 되어 시인의 길을 비춰주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시편들은 감성으로 충만한 시적 언어로 서정의 한 정점에 도달해 있다. 

이번에 시인은 ‘담배’를 통해 아버지를 불러낸다. 아버지는 “염병처럼 떠나지 않은 가난과/ 비리로 가득한 세상을”( 「아버지의 담배」, 부분) 견뎌내기 위하여 담배를 피우셨다. 시인은 아버지의 담배는 온갖 고뇌와 번뇌를 이겨낸 인내였으며 울분과 한을 태워버린 세월의 흔적이었음을 노래한다. 그렇게 시인은 달을 통해 어머니를 이해하고, 담배를 통해 아버지를 이해한다. 그 ‘이해’는 성인이 되어,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부모가 되어 생을 살아온 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존재론적 성찰이다. 그리고 그 성찰의 과정 끝에, 시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들은 이제 전부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와 시인 스스로의 자화상을 그리는 밑거름이 되어준다. 


2. 

프랑스의 문예 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시적 상상력의 작용이나 역할을 존재 생성의 내면적 힘으로 본다. 그는 상상력이 이미지를 재현해 낸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에서 벗어나 상상력이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이미지를 변형하는 창조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상상력의 창조성은, 주체 스스로의 인식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시인 주체의 인식에 따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자연의 들꽃 한 포기마저 전혀 색다른 역동적인 생명체로 재탄생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시인의 상상력이 현실적 대상물과 만나 새로운 시적 언어로 거듭날 때, 그 시적 이미지를 통해 역으로 시인이 지닌 역동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쩍쩍 갈라진 얼음과 얼음 사이 
맨맨한 강물의 푸른 이마 우에 
깊이 패인 상처는 
하루 밤새 폭삭 늙어버린 겨울강물의 주름살인가
(중략)
몸은 동태가 되여도 
입만 벙어리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때고 할말을 할 수 있다고 
두터운 얼음 밑 속 깊은 내면 강물의 호흡이여
그리하여 걸음은 멈추었으나
감춰진 그 속에 피가 흐른다 
숨결이 도도히 흐르고 있으니
이제 겨울강은 죽지 않았다 
죽음의 상징인 하얀백포를 들쓰고 있지만  
굼틀거림의 몸부림을 멈추지 않은 
지독한 뱀 한 마리 
- 「겨울강물의 숨결」, 부분

원형 심상으로 볼 때 모든 계절 가운데 겨울은 가장 나이가 많다. 그곳의 시간은 언제나 늙고 병들어 있다. 생명의 기운 가득 넘치는 경쾌한 노래를 부르며 힘차게 달려가던 강물도 겨울이 오면 저들끼리 차가운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입을 닫아버린다. 시인은 바로 그 계절의 끝을, 겨울의 혹독함을, 미처 껴안지 못한 채 갈라 터져버린 얼음과 얼음 사이의 균열을 “푸른 이마 우에 깊이 패인 상처”로 부른다. 그 상처는 “폭삭 늙어버린 겨울 강물의 주름살”이었다. 바로 그 순간 시인의 시적 상상력의 언어를 통해 ‘겨울 강물’이라는 대상물은, 거침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 세월의 흐름에 못 견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름 가득한 얼굴이 되어있는 한 사나이로 거듭난다. 물론 두터운 얼음 밑층 속에서 강물은 “걸음은 멈추었으나/ 감춰진 그 속에 피가 흐르므로” 아직 살아있다. 그리하여 겨울잠 내내 숨 고르기에 들어갔던 강물은 봄이 오면 다시 가슴을 활짝 열고 힘차게 내달릴 것이다. 

자연은 그렇게 다시 순환한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겨울’이라는 춥고 무서운 종착역에 도착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것은 단지 육신이 지쳐 도착하는 정거장일 뿐이다. 인간의 육신은 생노병사의 순리를 벗어날 수 없어, 때가 되면 “죽음의 상징인 하얀백포를 들쓰”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나이의 여정이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 육신을 지배하는 시인의 정신과 영혼이 맑음 그 자체로 깨어있다면, 늙고 병든 육체 속에서도 “굼틀거림의 몸부림을 멈추지 않은/ 지독한 뱀 한 마리”처럼 언제나 역동적인 에너지 그 자체로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시인은 자화상을 그리듯이 겨울 강물에 자신을 투영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의 흐름을 거슬러 다시 젊은 육신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쌓아온 시간만큼 시인의 영혼은 성장하고, 인내하고, 다시 깨어나면서 삶에 대한 성찰을 거듭했을 것이다. 이러한 성찰적인 시적 투영은 ‘겨울 강물’에 이어 겨울 ‘나무’에서도 나타난다. 

훌훌 다 털어내면 나무는 
얼기설기 빈 그물만 남는다 
훤하게 드러난 자리
그래도 겨울나무는 가난하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나무가 잎을 비우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한 것 
(중략)
맨맨하게 비워낸 그 빈 그물에
의지없어 떠돌던 하늘들이 
살길을 만난 듯 너도 나도 뛰여들어
무성한 가지 사이 얼기설기 둥지에
마치나 알과 알이 빼곡히 박힌 듯  
푸른 하늘로 넉넉해졌네 
- 「겨울 나무는 가난하지 않다」, 부분

가을 내내 알록달록 단풍으로 살쪘던 나무도 겨울이 오면 빈 가지만 드러낸다. 시인은 “나무가 잎을 비우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한 것‘임을 안다. 이는 사이사이로 하늘이 걸려 ”알과 알이 빼곡히 박힌 듯/ 푸른 하늘로 넉넉해졌네“라는 시인의 감탄과도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생명 지향의 시학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하고도 역동적인 시선에서 빚어지는 결실일 것이다. 물론 더 나아가서 겨울 나무 같이 내려놓음으로써 다시 채워지는 삶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한 현자의 성찰적 기록일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영혼은 춥고 깊은 겨울속에서도 따뜻하게, 또는 맑게 울리는 밝은 「종소리」가 된다. 

목소리의 수련이란 무엇인데?
아픈 매를 맞으면 맞을수록
거칠고 탁한 소리들이
맑고 우아한 목소리로 바뀌기에
스님들이 수련을 하듯 가부좌하고 앉아서
소리들은 지금 수시로 매를 견딜 마음을 닦는 거다 
(중략)
따앙- 따앙- 너도 나도 
그동안 벼르고 별렸던 소리들을
세상이 떠나가게 한껏 터치는 거다 
울음이 아닌 환희의 목소리
- 「종소리 1」, 부분

자연 사물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그 사물들을 신성한 차원으로 끌어 올려준다. 이러한 시적 상상력을 통해 시인은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 지쳐 무심하게 넘어가는 것에서도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시인은 종을 “허공에 매달려있는 둥근 집”이라고 보는 특별한 눈을 지녔다. 시인의 눈에 그 종은 “쇠창살도 치지 않고 문도 걸지 않고/ 더구나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는데도/ 한번 문 열고 들어가면/ 들어갈 땐 자유로워도 나올 때는/ 마음대로 나오지 못하는 집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된 삶이라는 긴 여정은 ‘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 폭의 드라마이다. 따라서 “저 특별한 집안에 누가 들어있는가” 라는 시인의 질문은, 이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궁금증이 되겠다. 

삶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존재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물론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는 이제 그걸 살아가는 주체에게 달린 일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세상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면서 평생을 ‘상황’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평생을 원한과 슬픔과 증오의 ‘감정’에 시달린 채 살아갈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후회와 자책으로 가득한 ‘생각’으로 자신을 다 소모시키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삶을 살아가는 ‘행동’을 하는 존재는 ‘주체’인 자신이라는 점에서, 시인은 스스로 그 해답을 냈다. 

그는 삶은 곧 주체가 하는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아픈 매를 맞으면 맞을수록” 즉 상황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주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탁한 소리도 결국 “맑고 우아한 목소리로 바뀌어” 세상이 떠나가게 힘껏 터지는 것은 “울음이 아닌 환희의 목소리”라고 한다. 이러한 시인의 언어는, 자신의 생애를 마치 스님들이 가부좌하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갈고 닦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목소리’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깨달음은 시인의 “감추는 것 없이 속의 진실을 다 드러낸다/ 아무렴, 평생을 어지게 살면서/ 남에게 잘못하거나 량심에 꺼리는 일/ 조금도 하지 않은 꽃이거늘 ”( 「꽃 1」, 부분)이라고 표현한 시인의 삶과도 연결된다. 시인은 “까다롭고 말썽 많은 세상이지만/ 있는 그대로를 다 내보이는 사람이/ 미사려구 없어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자신의 신념을 고백한다. 시인의 이런 고백이 단순한 미적 표현의 과정을 넘어, 객관적인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사랑이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줄 줄도 안다는 것/ 사랑을 받기만 하고 줄 줄을 몰랐던/ 내 어린 시절이 부끄러워진다”( 「사랑할줄 안다면」, 부분)는 자기성찰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해진다. 성서에서도 “부끄러워하라, 두려워하라” 했듯이 부끄러움을 아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시인은 존재론적 성찰의 근원에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효삼 시인은 서정시를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종의 존재론적 전환을 꿈꾼다. 그리고 독자들은 시인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통해 물리적 현실을 벗어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무한한 상상적 확장을 통해, 시인이 기록한 존재론적 성찰에 대한 고백을 통해, 사물에서 시인에게로, 시인에게서 다시 나 자신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렇게 그의 시는 내밀하고 잔잔한 언어로 자신의 생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성찰하는 존재로 회귀하게 만든다. 

출처: 도라지 2022년 6기

전은주 프로필 

시인·문학평론가
연변대학 조문학부, 동대학원 문학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디아스포라 시치료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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