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돌아오자 윤일춘은 또다시 당위 김서기의 독촉전화를 받았다.
“윤선생님, 음력설전으로 론문작성을 꼭 마무리지어주세요.”
다음날부터 윤일춘은 두문불출하고 서재에 묵박혀 있었다. 하루 두끼 식사도 서재에서 대충 에때웠다. 
“여보세요, 당신 그러다 진짜 큰 병 나겠어요. 련 몇일채 잠이 턱없이 부족하구 어떻게 지탱해요. 오늘은 만사를 다 제쳐놓고 한쉼 푹 주무셔요.”
안해가 촉촉히 젖은 목소리로 닥달했다.  
“아따 잔소리 그만 해. 안 그래두 신경이 날카로운데---”
윤일춘은 공연히 한마디 툭 쏘았다. 그는 충혈된 두눈을 치뜨며 무가내로 안해를 서재에서 내쫓았다. 
어느날 아침 서재에 들어선 안해는 외마디 비병을 질렀다. 바닥에 쓰러진 윤일춘의 반쪽 얼굴이 위켠으로 일그러졌다. 
“여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윤일춘은 구급차에 실려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그는 중환자실에서 몇일밤을 지낸후 다시 병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래에 지나친 피로와 무리한 스트레스로 인기된 경미한 뇌졸증
이였다. 

   며칠 뒤 김서기가 병실로 찾아왔다.
   “윤선생님, 좀 차도가 있으세요? 그동안 과분한 부담을 주었나 봅니다. 사실은 이번 기회를 빌어 윤선생님의 론문이 국가급간행물에 선재되면 국제심포지엄(国际研讨会)을 개최하려고 결정지었습니다. 
근데 너무 무리하셨나 봅니다. 건강을 잘 챙기셔야 합니다. 학교당위에서는 윤선생님의 건강에 각별한 중시를 돌리고 있습니다. 하루 속히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후 윤일춘의 병세는 차츰 차도를 보였다. 어느날 그는 병실에서 “월간문학”지를 뒤적이다가 박희준이 집필한 “문학의 마력”을 접했다. 그날 오후 그는 박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희준이냐, 래일 시간 나면 나 좀 만나볼가?”
“윤교수님이세요, 그럼 래일 댁으로 찾아갈가요?”
“아니여, 나 지금 병원이여.”
“네? 병원이라구요?”
“몸이 좀 불편해서 일전에 입원했어.”
“아니? 갑자기 입원이라니요?”
“큰병은 아니구, 인제 많이 호전됐어.”
“네, 알겠습니다. 그럼 래일 병원으로 찾아갈게요.”
다음날 박희준은 소설가 최수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점적주사를 부착한 윤일춘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사모님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석연히 어렸다.
“윤교수님, 괜찮으세요? ”
박희준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다잡았다. 
“윤교수님, 병문안이 늦어 미안합니다.”
소설가 최수길은 애써 숙스러운 표정을 감추었다.
“사모님, 윤교수님 내내 건재하셨잖아요, 근데 어떻게 갑자기 입원하셨어요?”
“원체 아집이 센 분이라 어쩔수 없어요. 당장 60고개를 넘기는데 아직두 밤낮으로 몸을 혹사하니 어떻게 당해내요.”
사모님이 부르튼 목소리로 하소연을 하였다. 때마침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와 점적주사기를 뽑았다. 
“나 인제 바깥출입을 해도 괜찮지요?”
윤일춘은 간호사에게 넌짓이 청들었다.
“아직은 바깥출입이 무리예요. 그러나 위층의 재활센터에는무난히 출입할수 있어요. 아무튼 지금부터 재활훈련이 더 필요하세요.”

윤일춘은 바른편 손과 발이 여전히 이따금씩 저렸다. 그러나 전처럼 말을 하고 걷는데는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 일행은 천천히 재활센터로 향했다. 아직 환자가 찾아오지 않은 재활센터는 썰렁한 기운이 돌았다.  
“<문학의 마력> 참 훌륭한 글이였다. 문장의 착안점을 능숙
하게 다룬 걸 보면 문필이 많이 성숙되였구나.”
“윤교수님의 기대에 비하면 아직두 부족한 점이 많은데요.”
“세상에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을 어디 쉽게 찾겠니?그래두 글쓴 이의 담략과 기백이 엿보여 좋았다. 게다가 문장이옥돌같이 이쁘게 다듬어져 좋았고 읽는 이의 가슴을 확 티워줘서 좋았다.”
윤일춘은 주춤 걸음을 뭠추고 박희준에게 물었다.
“혹시 문학의 품위에 대해 생각해 본적은 없냐?”
“문학의 품위요?”
박희준은 일씨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최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세요? 문학의 품위라면... 중국의 전통소설문학은 단순한 권선징악(劝善惩恶)의 훈계였지요. 그러나 19세기의 서구소설문학은 인성의 독립과 영혼의 해방에 립각했어요. 그러므로 중국의 전통소설문학과 19세기 서구의 인문주의 소설문학은 그품위가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개혁개방이후에 나타난 <상처문학>은 그후 새롭게 대두한 <뿌리찾기문학>과 <선봉파문학>의 품위와는 역시 선명하게 구분된다고 느껴지구요.”

윤일춘은 이따금식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서서히 말주머니를 풀었다. 
중국의 전통문학은 한결같이 “문이재도”(文以载道)를 주장했어요. 즉 문장은 반드시 “성현지도”(圣贤之道)와 “성현사상”(圣贤思想)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렇다면 “문장”이란 구경 무엇일가요? 

대문호 로신(鲁迅)은 이렇게 말했어요. “한나라 시기에 무릇대나무거나 비단에 적은 것은 이미 문장이라 했다.(한서, 예문지)그후 무릇 문장을 저술하는 것을 문학이라고 통칭했다. (汉时已并称凡著于竹帛者为文章《汉书,艺文志》。后来凡书文章,今通称文学)

이른바 “사서오경”(四书五经)은 “성현지도”와 “성현사상”을 담은 대표적인 문장이지요. “사서오경”(四书五经)은 “독존유술”(独尊儒术)을 떠받든 유교사상을 집대성한 “문의재도”의 문장이였지요. 그리고 로자(老子)가 남긴 “도덕경”과 장자(庄子)가 남긴 “소요유”(逍遥游), “호접몽”(蝴蝶梦), “제물론”(齐物论)은 도교사상을 집대성한 “문이재도”의 문장이였지요. 이같은 문장들은 중국전통문학의 정수로써 이미 “국수국학”(国粹国学)으로 자리매김을 하였어요. 

반면에 중국의 전통소설문학은 시초부터 일개 잔재주나 부리는 “조충소기”(雕虫小技)로 취급되였어요. 무엇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학은 이른바 “문이재도”에 문학의 품위를 두었을가요? 무엇때문에 중국의 전통소설문학은 시초부터 하잘것 없는 “조충소기”로 비하되였을가요?
문학은 “공리주의”를 갖고 있어요. 중국의 전통문학은 농경문화를 고수하는 보수적인 “공리주의 문학”이였어요.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400밀리미터(mm) 강우량(降雨量)의 분계선은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분수령으로 되였어요. 중국의 만리장성은 대개400밀리미터 강우량의 분계선에 놓여있어요. 만리장성이북의 유목문화는 사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천이문화”(迁移文化)였어요. 그러나 만리장성이남의 농경문화는 경작지를 고수하는 “정착문화”(定居文化)였어요. 

중국의 농경문화를 극명하게 표현한 문구(文句)가 있어요. “주례”(周礼) “진제”(秦制) “한풍”(汉风) “당운”(唐韵) 또는 “주례”(周礼) “진제”(秦制) “한습”(汉习) “당풍”(唐风)이라고도 하지요. “주례”(周礼)는 중원땅에 정착한 주문왕이 제정한 “례악제도”(礼乐制度)로써 “봉토건국”(封土建国)의 신분등급질서를 잡아주었어요. 이른바 천자(天子), 제후(诸侯), 대부(大夫)는 “적장자계승권”(嫡长子继承权)에 따르는 “종법제도”(宗法制度)를 실시했고 이른바 서민층은 “사, 농, 공, 상”(士,农,工,商)으로 업종에따르는 신분과 등급을 결정지었어요. “주례“이후에 형성된 “진제”(秦制)는 천하통일의 과업을 이룬 진시황이 “군현제”(郡县制)를 실시해 중앙통치권을 가강한 관료제도였어요. 그리고 이른바“한풍”(汉风)은 한무제시대에 흉뇨를 격파하고 “비단의 길”을 개척해 드넓은 령토를 확보한 한제국의 국위(国威)를 말하지요. 그밖에 “당운”(唐韵)은 “당시삼백수”(唐诗三百首)와 더불어 중국의 전통문화가 소지한 박대정심(博大精深)의 운치(风韵)를 뜻하지요. 

중국에는 “일산 일수 일성인”(一山, 一水,一圣人)이란 미담이있어요. “일산”은 태산 “일수”는 황하 “일성인”은 공자(孔子)를 뜻하지요.

공자의 생전의 가르침을 수록한 “론어”에는 “자왈 극기복례”(子曰,克己复礼)란 문구가 있어요. 안연(颜渊)이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극기복례가 인이다. 하루 극기복례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子曰,克己复礼为任。一日克己复礼,天下归任焉)라고 개탄했어요. 공자의 유교사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문구가 있어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처강”君为臣纲,父为子纲,夫为妻纲” “부자유친, 장유유서, 부부유별, 군신유의, 붕우유신”(父子有亲,长幼有序,夫妇有别,君臣有义,朋友有信) 이른바 유교의 “삼강오륜”(三纲五伦)사상을 “문이재도”한 문장이 바로 “론어”였어요. 그리고 남송의(南宋) 대철학가 주희(朱熹)는 “론어”를 유교경전인 “사서”(四书)로 추앙했어요. 그후 이른바 “반쪽 론어로 족히 천하를 다스린다”(半部论语治天下)라는 일설이 성행하였어요. 

중국에는 “3천식객”(食客三千)이란 일설이 있어요. “사서오경”을 글공부하는 유생을 두고 전해온 일설이지요. 이른바 천자,제후, 대부들의 문하에 식객으로 들어간 선비들이 “문이재도”의문장을 지으면 말단귀족으로 대접을 받았지요. 반면에 “문이재도”의 문장을 지을수 없으면 “상가집개”로 푸대접을 당했지요. 

그러므로 무능한 선비를 가리켜 “서푼짜리 문사”(三文文士)라고 일컫었고 무능한 병사(兵士)를 가리켜 사졸(士卒)이라고 일컫었어요. 이같이 “사서오경”을 경전으로 내세운 유교사상은 시초부터 보수적이였어요. 따라서 이른바 “문이재도”를 주장했던 중국의 전통문학도 결국은 보수적인 “공리주의문학”이였어요. 현재의 의식형태로 풀이하면 이른바 “주류의식”을 대변하는 “공리주의문학”이였어요. 

그러나 로자(老子)는 보수적인 “삼강오륜”의 유교사상을 극구 비판했어요. 로자가 집필했다는 “도덕경”(道德经)에는 이런 문구가 있어요. “대도페, 유인의. 지혜출, 유대위. 육친불화, 유효자”(大道废,有仁义。智慧出,有大伪。六亲不和,有孝慈) 이 문구의 뜻을 풀이하면 “천하에 대도가 있으면 어떻게 인의(仁义)가 설 자리가 있겠는가? 세상에 진실이 있으면 어떻게 위선이 있겠는가?  육친이 화목하면 왜 효자가 필요하겠는가?”

로자(老子)의 “도덕경”(道德经)은 “오천언”(五千言)으로 후세에 전해졌어요. “오천언”의 “도덕경”은 이른바 “무위지치”(无为之治)의 도교사상을 극명하게 “문이재도”했어요. 그러나 보수적인 “독존유술”에 의해 “사서오경”에는 귀속되지 못했어요. 로자이후 천하제일의 문장가 장자庄子)가 남겨놓은 “소요유”(逍遥游), “호접몽”(蝴蝶梦), “제물론”(齐物论)도 역시 “독존유술”에 의해 “사서오경”으로 대접받지 못했어요. 그러나 로자와 장자가남겨놓은 문장은 이미 “문이재도의 절창”(文以载道之绝唱)으로 
되였어요. 그밖에 도연명(陶渊明)의 “도화원기”(桃花源记), 법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阳楼记)등 문장도 역시 “문이재도”의색다른 빛을 발산했어요. 

반면에 중국의 전통소설문학은 시초부터 “사서오경”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공리주의문학”에 귀속되지 못했어요.  
대문호 로신은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중국은 본래 무당을 신봉하였다. 진한이래 신선일설이 성행하였고 한말에는 또 미신풍속을 대거 제창했다.”(中国本信巫,秦汉以来,神仙之说盛行,汉末又大畅巫风)

중국에는 “반고개천”(盘古开天)이란 민간신화전설이 있어요.이 전설은 동한말(东汉末)의 서정(徐整)이 저술한 “삼오력기”(三五历记)에 처음으로 수록되였어요. “반고개천”의 신화전설은 중국전통사회에서 사실상 서민계층이 신봉하는 천지창조설의 민간신앙에 불과했어요. 

그와는 달리 로자의 “도덕경”에는 이런 문구가 있어요. “천지도, 무극생태극, 태극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天之道,无极生太极,太极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万物) 이른바 “천하지대도”를 운운한 로자의 “도덕경”은 천자, 제후, 대부가 신봉하는 천지창조설의 세계관이였어요. 그에 비해 만팔천년을 잠들었던 거인 반고가 도끼를 휘둘러 하늘과 땅을 개척한 신화전설은 사실상 서민계층에 강요된 천지창조설의 세계관이였지요. 이같은 민간설화를 수록한 것이 “산해경”이였어요. 그리고 “산해 경”의 신화전설은 중국전통소설의 모티브로 되였어요. 

서한시기의 문학가 동방삭(东方朔)이 저술한 “신이경”(神异经)은 중국고대의 “지괴소설집”(志怪小说集)으로 간주되였어요. 남송시대의 학자 고사손(高似孙)은 “신의경”神异经)의 저자는 동방삭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러나 동시기의 기타 학자들은 “신의경”의 저술년대는 동한말(东汉末) 혹은 륙조시기(六朝时期)라고 주장하였어요. 그리고 “신이경”의 저자는 동방삭이 아니라는 의문도 제기하였어요. 그러면 왜 이같은 주장과 의문이 제기되였을가요? 

림어당선생은 “오국여오민”(吾国与吾民)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대저 중국의 소설가들은 흔히 일종의 특수한심리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소설창작은 유교를 그르치는 너절한 행위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항시 당대 명사들의 꾸리람이 두려워 번마다 이름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中国小说家常有一种特殊心里,他们自以为小说之写作,有谬于儒教,卑不足道,且惧为时贤所斥,每隐其名而不宣) 

그는 또 “소설을 론함”이란 글에서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수호전>의 저자 시내암(施耐庵)은 <4해지내에는 모두 형제들이다>(四海之内皆兄弟)라는 평민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당시 전통파학자들의 모함을 당했다. 그러므로 시내암은 남경으로 상경하는 도중에 부득불 “봉신방”(封神榜)을 집필해 황제에게 올린후 미치광이로 취급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그후 중국의 소설은 어두운 그늘에 묻쳤고 소설창작은 부득불 작자의 순수한 내적인 욕망에 의탁하였다.” 

그러므로 지괴소설(志怪小说)을 집대성한 ““신이경”(神异经)은 당연히 “문이재도”의 문장을 고수한 중국의 전통문학에 귀속될 수가 없었어요. 따라서 “신이경”의 저술년대와 저자에 대한 물의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되였어요. “수호전”은 이미 중국의 “사대고전소설”(四大古典小说)로 되였어요. 그러나 “사해지내제형제”(四海之内皆兄弟)라는 평민사상은 “충신효도”를 고취한 유교학설에 어긋났어요. 하여 “수호전”의 저자 시내암은 부득불 미치광이로 자처할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므로 중국의 전통소설문학은 시초부터 “권선징악”의 “공리주의문학”으로 자리매김을 할수밖에 없었어요.

“홍루몽”은 또 한부의 “사대고전소설”(四大古典小说)로 지목되였어요. 그러나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曹雪芹)은 대학자 호적(胡适)의 고증에 의해 1917년에 비로서 세상에 알려졌어요.

림어당선생은 조설근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어요. “조설근은천성적인 이야기꾼이다. 하늘은 흡사 의도적으로 소년시절의 조설근을 방탕하고 사치한 가정환경에서 가산을 탕진하게 하였다.그러나 중년에 빈한도골(贫寒到骨)의 선비로 몰락한 조설근은 인생의 허무함을 통절하게 절감했다. 그런 울쩍한 심정을 쏟아놓은 것이 <홍루몽>이였다. 그리고 후세사람들은 홍루몽을 문학
으로 간주하였다.” 
“홍루몽”은 청나라 건륭년간인 1765년에 홀연 북경에서 이목을 끌었어요. 그당시 “석두기”(石头记)로 불리웠던 “홍루몽”은
저자거리에서 많게는 수십냥에 거래되기도 하였어요. 그러나 한편으로 “홍루몽은 일국을 명망시키기에 족하다”(红楼梦足以毁灭一个国家)라고 삿대질을 당하기도 하였어요.  

“홍루몽”의 이같은 현상에 대해 림어당선생은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가보옥과 림대옥은 이미 전 민족의 련인으로 되였다.그리고 중국의 청춘남녀들은 여전히 <홍루몽>을 읽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여직것 망하지 않았다.”

조설근이 집필한 “홍루몽”은 “팔고문”(八股文)이 아닌 “백화문”(白话文)이였어요. “백화문”은 “홍루몽”의 통속성을 살렸어요. 그러나 소설의 품위는 결코 비하되지 않았고 도리여 “4대고전소설”(四大古典小说)의 최고봉에 올랐어요. “홍루몽”의 출현은“문이재도”를 주장했던 중국전통문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앞도적인 승리였어요.

“홍루몽”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 로신은 이렇게 평가하였어요. “홍루몽은 과감히 사회진상을 여실하게 묘사하였고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전시기의 소설들은 대개 좋은 사람은 절대적으로 좋고 나쁜 사람은 절대적으로 나쁘게 서술했다. 그에 비해 홍루몽은 진실한 인물을 서술하였기에 판이하게 달랐다. 아무튼 “홍루몽”이 출두한 후 전통적인 사상과 창작기법은 모두 타파되였다.(《红楼梦》敢于如实描写,并无讳饰,和从前的小说叙好人完全是好,坏人完全是坏的,大不相同,所以其中所叙的人物,都是真的人物。总之自有《红楼梦》出来以后,传统的思想和写法都打破了)

중국의 고전소설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수 있어요. 첫째 협객소설(侠义小说)로는 “수호전”, 둘째 신괴소설(神怪小说)로는 “서유기”, 셋째 역사소설로는 “삼국연의” , 네째 애정소설로는 “홍루몽”, 다섯째 음란소설(淫荡小说)로는 “금병매”, 여섯째 풍자소설로는 “유림외사”, 일곱째 견책소설(谴责小说)로는 “료재지이”(聊斋志异) 그밖에 이상주의소설(理想主义小说)로는 “경화연”(镜花缘)이 있어요. 중국의 고전소설은 왜 이같은 경향성을 갖게 되였을가요? 

“산해경”(山海经)은 중국의 “상고삼대기서”(上古三大奇书)로 간주되였어요. “산해경”이 책으로 출두된 시기는 대개 전국시기(战国时期)에서 서한초기(西汉初期)로 확인되였어요. “산해경”에는 창세기신화, 홍수신화, 민족기원신화, 영웅신화, 부족신화 및자연신화 등 상고시대의 신화전설들이 대량으로 수록되였어요. 이같은 신화전설은 후세의 문학창작에 다양한 소재와 풍부한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문학의 주제”(文学母题)로 되였어요. 따라서 “산해경”을 모티브로 한 중국의 고전소설은 “문이재도”를 고수한 전통문학과 어깨를 견줄수가 없었어요. 

중국의 고전소설은 명청시기(明清时期)에 창작의 전성기를 맞이했어요. “산해경”이 출두한지 천여년도 넘은 시점이였지요.

왜 그리하였을가요? 북송(北宋)의 제8대 황제 송휘종(宋徽宗)은 “정강지변”(靖康之变)을 당해 북녘땅의 무주고혼으로 되였어요. 그후 장강이남으로 쫓겨난 남송(南宋)은 칭키스칸의 강대한 초원제국에 정복되였지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분수령으로 되였던 만리장성은 결국 보수적인 농경문화를 지켜주지 못했어요.북송이후 중국의 농경문화는 바야흐로 위축되였어요. 그러자 망국의 설음을 달래주는 “송사”(宋词)가 성행했어요. 그리고 치욕적인 “전족”(缠足)이 극성스럽게 성행했어요. 풍진세상은 거침없이 타락의 일로를 향했어요. 게다가 명청시기(明清时期)에는 유례없는 “쇄국정책”을 강요했어요. 그러니 세속민심은 스스로 “문이재도”의 보수적인 “사서오경”과 멀어졌어요. 그러면 세속민심은 어디에 쏠렸을가요? 

자고로 중국의 서민계층은 세가지 리상을 추구했어요. 이른바 “성군몽”(圣君梦) “청관몽”(清官梦) “협객몽”(侠客梦)이였어요. “삼국연의”에서 류비(刘备)는 “성군몽”을 대표했어요. 제갈량(诸葛亮)은 “청관몽”을 대표했어요. 그리고 관우와 장비(关羽,张飞)는 “협객몽”을 대표했어요. 그밖에 “도원삼결의”(桃园三结义)는 “강호대도”(江湖大盗)의 리상을 선망했어요. 그러므로 세속민심은 불가불 진수(陈寿)의 “삼국지”(三国志)와 멀어졌어요. 반면에 세속민심은 불가불 라관중의 “삼국연의”에 쏠렸어요. “산해경”이후 세속민심이 다시 한번 중국고전소설의 “문학주제”(文学母题)를 확정지었어요. 

     로신은 “중국소설사략”(中国小说史略)에서 “명대소설의 두 갈래 추세”(明代小说两大主潮)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신괴소설”(神魔小说)로는 “서유기”(西游记), “봉신전”(封神传), “삼보환관서양기”(三宝太监西洋记) 등이 있다. 그리고 “세정소설”(世情小说)로는 “금병매”(金瓶梅), “평산랭연”(平山冷燕), “호구전”(好逑传), “옥교리”(玉娇犁) 등이 있다. 로신은 또 “청대소설의 네갈래류파”(清代小说之四派)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의고파소설”(拟古派小说)로는 “료재지이”(聊斋志异)가 있다. “풍자파소설”(讽刺派小说)로는 “유림외사”(儒林外史)가 있다. “인정파소설”(人情派小说)로는 “홍루몽”(红楼梦)이 있다. “협의파소설”(侠义派小说)로는 “삼협오의”(三侠五义)가 있다. 

중국에는 옛적부터 이런 충고가 있었어요. “소년에는 수호전을 읽지 말고 로년에는 삼국연의를 읽지 말라”(小时不读水浒,老时不读三国). 왜 이같은 어설픈 충고가 생겼을가요? “수호전”은 세속의 불공평에 가차없이 반기를 든 “영웅호걸전”(英雄豪杰传)이였지요. 그러므로 혈기방장한 소년들의 들뜬 마음을 사로잡기에 족했어요. 그러나 “삼국연의”는 천하제패를 두고 권모술에 익달한 “왕후장상전”(帝王将相传)이였지요. 그러므로 풍진세상을 겪은 로인들의 느긋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족했어요. 하기에 “수호전”은 소년을 망치고 “삼국연의”은 로인을 망친다고 충고했어요. 그리고 또 “홍루몽”은 나라를 망쳐먹는다고 충고했어요. 그래도 세속민심은 여전히 돌아서지 않았어요. “서유기”, “료재지이”, “유림외사”등 지괴소설도 분분히 세속민심을 끄당
겼어요. 그리고 마침내 세속민심은 “금병매”에 매료되였어요. 이같은 현상을 두고 위인(伟人) 모택동은 “삼국연의, 수호전, 홍루몽 등 세부의 소설을 읽지 않으면 중국사람으로 간주할 수 없다.”(三国演义,水浒传,红楼梦,谁不看完这三部小说不算中国人)라고 개탄했어요. 

작가 장애령은 “홍루몽엄”(红楼梦阉)에서 이렇게 지적했어요. “인생에는 세가지 원통한 일이 있다. 첫째 한은 준치가 가시가 많은 것이다. 둘째 한은 해당이 향기가 없는 것이다. 셋째 한은 홍루몽이 미완성된 것이다.”(人生有三大恨事;一恨鲥鱼多刺,二恨海棠无香,三恨红楼梦未完) 작가 장애령은 왜 “홍루몽”에 대해 이같이 절규했을가요? 

북송의 대화가 장택단(张择端)은 화려한 화필로 “청명상하도”(清明上河图)란 민속화를 일매지게 창작했어요. 그후 청나라시기의 조설근은 “홍루몽”의 섬세한 문필로 또 하나의 색다른 “청명상하도”를 그려냈어요. 현존하는 “홍루몽”은 통합 120회로 매듭을 지었어요. 그러나 전 80회는 조설근의 집필로 인정되였지만 후 40회는 고악(高鹗)이 꾸며낸 것으로 간주되였지요. 결국 “홍루몽”은 룡두사미격의 어설픈 매듭 때문에 후세에 “천고의한”(千古之恨)을 남겼어요. 

사실상 “홍루몽”의 모티브는 중국4대고전기서(中国四大古典奇书)로 지목된 “금병매”(金瓶梅)였어요. “금병매”는 줄곧 “음담소설”로 질책당했어요. 그러나 “추수당 금병매를 론함”(秋水堂论金瓶梅)에서 학자 전효비(田晓菲)는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금병매”가 세상에 출두한후 수많은 작가와 학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조설근은 물론 그후 호적, 장애령등 학자와 작가들은모두 <금병매>에서 자양분을 섭취하였다. 현존하는 <금병매>는<사화본>(词话本)과 <수상본>(绣像本) 두가지 판본이 있다. <사화본>은 민간문학으로 전해졌기에 음담패설로 간주되였다. 그러나 200여점의 수놓이도안(绣像插图)을 보존한 <수상본>은 순수한 문인문학(文人文学)으로 전해졌기에 여직것 줄곧 <금병매>의전통판본으로 인정받았다.” 

학자 전효비는 “금병매”의 진정한 문학적 가치는 “문인문학”이라고 지적하였어요. 사실상 학자 전효비가 인정하는 “문인문학”은 순문학(纯文学)을 념두에 두었어요. 오로지 순문학의 차원에서 “금병매”를 통찰할 때 진정한 문학적 가치를 발굴할수 있다는 것이 “추수당 금병매를 론함”의 핵심적인 론점이였어요.“금병매”이후 세상에 출두한 “홍루몽”도 역시 “문인문학”으로 지목되였어요. “금병매”와 “홍루몽”은 중국고전소설문학에서 순문학의 쌍벽을 쌓은 기서(奇书)로 되였어요. 그러므로 명청시기에 이르러 중국의 고전소설문학은 이미 “문인문학”이란 뚜렸한 “공리주의문학”의 경향성을 소지하였어요. 

1919년 “5.4운동”을 전후하여 중국은 새로운 “문학혁명”의 시대를 맞이했어요. 이시기 로신은 “광인일기”, “공을기” “축복” “아큐정전”, “고향” 등 작품을 륙속 선보여 신문학운동의 기수로 되였어요. 로신의 문학세계는 사람을 잡아 먹는 “삼강오륜”의 유교학설에 대한 랭혹한 매질이였어요. 그리고 비렬한 노예근성에 묵이운 국민성에 대한 피타는 매도였어요. 그러므로 로신의 문학세계는 철저한 “문학혁명”이란 “공리주의문학”의 경향성을 구비하였어요. 

반면에 장헌수(张恨水)를 대표하는 “원앙나비파문학”과 장애령(张爱玲)을 대표하는 “인정세태파문학”은 여전히 “금병매”와 “홍루몽”과 같은 고전소설문학을 답습하였어요. 그러므로 “원앙나비파문학”과 “인정세태파문학”은 “우익문학”으로 지목되였어요. 그러나 작가 모순의 소설 “림가네점포”(林家铺子)와 “자오”(子夜). 그리고 작가 파금의 3부작 소설 “집”, “봄”, “가을”등 작품은 프로레타리아투쟁주의 “혁명문학”을 주장하였기에 “좌파문학”으로 지목되였어요. 

“5.4신문학운동”이후 중국의 소설문학은 우선 로신을 기수로 하는 “문학혁명”이란 공리주의문학으로 탈변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헌수, 장애령을 대표하는 “문인문학”의 전통성을 고수한 이른바 “순문학”이란 공리주의문학도 보존되였어요. 그리고 작가 모순과 파금이 극구 주장했던 프로레타리아투쟁주의 “혁명문학”이란 새로운 공리주의문학이 대두하였어요. 

1959년은 공화국창건 10주년을 맞는 해였어요. 이해 “림가네점포”, “림측서”, “청춘의 노래”, “다섯금화”등 우수한 영화가제작되였어요. 당시 “림가네점포”는 공화국창건 10주년 헌례작품으로 대중들의 주목을 끌었어요. 그러나 중국의 문예계는 그후 돌연히 치렬한 정치투쟁에 말려들었어요. 새중국의 문예진지는 구경 누가 점하고 있는가? 무산계급이 점했는가? 아니면 자산계급이 점했는가? 영화 “림가네점포”는 자산계급이 문예진지를 점령한 작품으로 지목되여 상영이 금지되였어요. 

그리고 1960년대부터 “극좌문학”이 성행했어요. 이른바 혁명본보기극이 문예계를 독점했어요. 이른바 계급투쟁리론이 문예계를 독점했어요. 이른바 “삼돌출”이란 공리주의문학이 문단을 독점했어요. “정면인물을 돌출히 해야 한다. 영웅인물을 돌출히 해야 한다. 중요한 영웅인물은 반드시 각별히 돌출히 해야한다.” 이것이 “삼돌출”창작원칙이였어요. 당시 혁명본보기극 “홍등기”,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 “사가풍”, “홍색랑자군”, “백모녀”등 작품은 이른바 “삼돌출”창작원칙을 투철하게 실천한 공리주의문학이였어요. 

개혁개방이후 계급투쟁리론이 살아졌어요. “극좌문학”을 대표하는 혁명본보기극이 자취를 감추었어요. 그리고 “상처문학”의 대두는 “삼돌출”창착원칙을 철저히 부정했어요. 중국문단은 새로운 창작의 봄을 맞이했어요. “상처문학”(伤痕文学), “반성문
학”(反思文学), “개혁문학”(改革文学), “뿌리찾기문학”(寻根文学)“선봉파문학”(先锋文学), “의식류문학”(意识流文学), “신사실주의 문학”(新写实文学), “신력사문학”(新历史文学), “초현실주의문학”(超现实主义文学), “탈구조주의문학”(解构主义文学) 등등 이시기의 중국문단은 “5.4신문학운동”이후 새로운 “문학혁명”의 시대를 맞이했어요. 

지난 한시기 저는 “건국 70년 중국문학의 경향성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가졌어요. 작가 로사(老舍)는 1951년에 북경시인민정부로부터 “인민예술가”(人民艺术家)칭호를 수여받았어요. 그는 새중국이 건립된후 처음으로 “인민예술가”칭호를 수여받은 작가였어요. 1924년 로사가 집필한 소설 “로장의 철학”(老张的哲学)이 “소설월보”에 련재되였어요. 당시 작가 로사는 “북경말투”(北京腔)라는 특유한 지방특색의 언어로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냈어요. 1936년 로사의 장편소설 “락타상자”가 “우주풍”(宇宙风)잡지에 련재되였어요. 그후 1944년 로사는 다부작 장편소설 “사세동당”(四世同堂)을 집필했어요. 새중국이 창건된후 1950년 로사는 희곡작품 “룡수구”(龙须沟)을 창작했어요. 그리고 1957년 로사의 희곡작품 “차집”(茶馆)이 “수확”(收获)잡지에 계재되였어요. 1966년 8월 로사는 67세로 북경에서 생을 마감했어요. 

작가 로사의 고향은 북경의 소양가골목(小杨家胡同)이였어요. 그는 1899년 몰락하는 청나라의 황성호위군의 후예로 태여났어요. 1924년부터 그는 런던대학에서 중국어강사로 취직하였고 1930년에 귀국하였어요. 그리고 1945년 일제가 패망한후 줄곧 북경에서 생활하였어요. 작가 로사의 작품세계는 북경이란도회지를 지목했어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매지게 “북경말투”를 구사했어요. 하여 그는 “언어대사”로(语言大师) 추앙되였어요. 로사는 다년간 중국문단을 주름잡은 굴지의 작가였어요. 그의 작품세계는 영국식의 짛은 유머와 정교한 북경방언으로 이색적인 빛을 발산했어요. 이는 작가 로사가 “건국70년 중국문학”에 헌신한 독특한 문학적 경향성이였어요. 

작가 막언(莫言)은 개혁개방이후 중국문단에 출두한 중견작가였어요. 1985년 막언은 중편소설 “투명한 홍당무우”(透明的红萝卜)를 집필하여 대뜸 문단의 이목을 끌었어요. 그후 그는“붉은 수수”(红高粱), “풍유비비”(丰乳肥臂), “사십일포”(四十一炮), “생사피로”(生死疲劳), “개구리”(蛙), “완숙한 사람”(晚熟的人)등 작품을 륙속 집필하였어요. 소설 “투명한 홍당무우”는 막언의 출세작이였어요. 작품에 등장하는 검둥이아이(小黑孩)는 과묵하지만 아집이 강하며 소외된 인간으로 갖은 학대와 기시를 당한 고독한 령혼이였어요. 검둥이아이는 배고품에 시달리던 지난시절에 음식물에 대한 야수적인 본성을 드러낸 괴짜였어요. 막언의 소설은 시초부터 “괴짜인물”을 능숙하게 다루는 문학적 경향성을 투시했어요. 장편소설 “생사피로”는 지주 서문뇨(西门闹)가 당나귀, 소, 도야지, 개, 원숭이, 대두영아(大头婴儿)로 “륙도환생”(六道还回)하는 “괴짜이야기”를 서술했어요. “생사피로”는 막언의 판타지사실주의문학의 성공작이였어요. 하여 막언은 “중국의 마르케스”로 추앙되였어요. 이것이 작가 막언이 “건국 70년 중국문학”에 기여한 특유한 판타지사실주의문학(魔幻现实主义文学)의 경향성이였어요.

지난 2016년 4월 작가 진충실(陈忠实)은 74세로 생을 마감했어요. 그는 관속에 넣어 벼개로 삼은 “점관작침”(垫棺作枕)의 장편소설 “백록원”(白鹿原)과 함께 “중화민족의 밀사”를 지니고 떠나갔어요. 그는 “백록원”의 서두에 프랑스 작가 발자크의 “소설은 한개 민족의 밀사로 간주된다”(小说被认为一个民族的秘史)라는 명언을 수록하였어요. 소설 “백록원”에 대해 그는 또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백록원”의 령혼은 중국인이 군주전제하에서 현대 문명으로 전향하는 정신적 박리(剥离)과정으로써 진부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생명을 자생한 것이다.”(白鹿原的灵魂就是中国人从帝制之下走向现代文明的一个精神剥离的过程,剥去腐朽,滋生新生)

장편소설 “백록원”은 1988년에 집필을 시작했어요. 그후 6년간의 피마르는 혹독한 필경을 경유하여 1993년에 드디여 세상에 출두하였어요. 작가 진충실은 “백록원”의 창작경유에 대해이렇게 설명하였어요. 
“백록원”은 서안시에서 동쪽으로 불과 20리 상거한 촌락(古原)으로 중화민족의 유구한 력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2천년전 진시황제는 백록원과 60~70리 상거한 “함양원”(咸阳原)에최초의 군주전제국가를 설립하였다. 그후 20세기초 청나라 말대 황제가 페위할 때까지 “백록원”은 수많은 전란과 재황과 온역을겪었다. 그러나 지난 2천년간 “백록원”은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였다. 나는 그 비밀을 밝히려고 작심했다. 소설 “백록원”은 지난 한세기 “백록원”에 숨겨진 중화민족의 신비로운 밀사(秘史)를 기록하였다. 

소설 “백록원”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였어요. “백가헌이 이후 가장 호기롭고 자랑스럽게 간주한 것은 평생에 7명의 녀자를 안해로 맞아들인 것이다.”(白嘉轩后来引以为豪壮的是一生娶过七房女人) 백가헌은 “백록원”의 마지막 족장(族长)이였어요. 그는 혈통을 이어나가는 막중한 과업을 목숨으로 지켰어요. 그러나 백가헌의 종법관념은 결국 선후로 6명 아녀자의 목숨을빼앗고 말았어요. 이같이 “다자다복”(多子多福)이란 고루하고 진부한 “종법의식”에는 수많은 아녀자들의 목숨이 제물로 바쳐졌어요. 백가헌은 조상들이 물려준 “향약”(乡约)으로 “백록원”을 지배했어요. “향약”은 전통적인 종법가족제도와 진부한 유교도덕을 고취하였어요. 그러므로 “향약”은 “백록원”의 제2세대들에게 무거운 쇠사슬을 동여놓았어요. 그러나 국공내전, 항일구국, 해방전쟁 등 일련의 격변하는 시대는 “백록원”의 진부한 “향약”을 깡그리 찢어버렸어요. 백가헌의 외동딸 백령(白灵)은 공산당원 록조풍(鹿兆鹏)의 인도하에 혁명투쟁의 길에 뛰여들어 서슴없이 목숨을 바쳤어요. 그리고 “향약”을 어긴 백가헌의 장자 백효문(白孝文)은 아편에 찌들고 도박에 심취해 패가의 일로을 걸었고결국은 반혁명의 길을 선택해 목숨을 잃었어요. 검둥이아이(黑娃)는 제2세대 머슴군출신이였어요. 그는 “향약”을 위반하고 과감하게 주인집소첩과 연분을 맺었어요. 그로 인해 “백록원”에서 쫓겨났지만 나중에 혁명군에 가담하였어요. 록자림(鹿子霖)은 “백록원”의 족장을 탐내 한평생 백가헌과 고약한 암투를 치렀어요. 그러나 결굴은 패가망신하고 “백록원”을 떠나 살길을 찾아 타곳으로 이주하였어요. 

소설 “백록원”은 개혁개방이후 중화민족전통문화의 뿌리를 완벽하게 파헤친 대표적인 작품이였어요. “백록원”이 출두한후 당시 평론계는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백록원”의 집필은 사실상작가 진충실에게 그이상 뛰여 넘을수 없는 난이한 고봉을 설정하였다. 아울러 중국당대현실주의문학의 창작에도 뛰여 넘기 어려운 대들보를 설정하였다.(这部白鹿原,不仅为陈忠实自己设置了一座很难以逾越的高峰,也为中国当代现实主义文学创作设置了一道很难跨越的梁坎) 이것이 작가 진충실이 “건국 70년 중국문학”에 기여한 신력사주의소설의 경향성이였어요. 

사실상 “건국 70년 중국문학”은 시종일관하게 혁명영웅주의문학과 혁명투쟁주의문학이 지배했어요. 의식형태로 풀이하면“주선률문학”을 뜻하지요. “주선률문학” 역시 “건국 70년 중국문학”이 드팀없이 지켜온 뚜렸한 문학적 경향성이였어요. 그러므로 “건국70년 중국문학의 경향성 문제”는 여전히 풀지 못한 미완의 숙제로 남겨졌어요. 그러나 나에게는 미완의 숙제를 풀어갈 기백과 담략이 부족해요. 기량과 재질도 모자라구요. 그래서 갑절로 안타갑고 아쉽고 불안하지요. 

어느새 재활선테에 꾸역꾸역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윤일춘은 드디여 깊은 사색에서 깨여났다. 그들 일행은 다시 병동으로향했다.  

음력설을 앞두고 윤일춘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하늘에서 햇솜같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졌다. 천지간은 백설로 정갈하게 뒤덮혔다. 그는 새봄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경침에 땅이 풀리고 곡우에 훈훈한 기운이 감돌면 다시 답사길에 나서려고 작심했다. 소설가 최수길과 문우 박희준도 이번 답사에동참하기로 약속하였다.

종일토록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는 도무지 끊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믐날에 내래는 폭설은 새해를 맞이하는 축복이라고 하였다. 

끝 

조광연(曹光延)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다년간 연변텔례비죤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2005년 미국에 체류. 현재 자유기고인으로 활약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발표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