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중국 조선말 표기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날도 나는 밤늦게 영어학원수업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뒤늦게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로 향했다. 때마침 핸도폰의 호출신호가 울렸다. 

“미스타 조, 래일 땡스기빙데이(感恩节) 아시쬬. 래일 우리집으로 오세요. 외로움도 달래구 주님의 축복도 받으시구요.”
언제들어도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류기종목사님의 귀맛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목사님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래일 목사님댁에서 뵙겠습니다. 이렇게 저를 찾아주셔 고맙습니다.”
“땡스기빙데이”는 미국의 전통명절이였다. 그러므로 하루 휴식일이 주어졌다. 

사실 휴식일이 돌아오면 나는 아침나절까지 늦잠을 잦다. 오전에는 한주일간 밀린 빨래를 처리했다. 오후는 “예닮교회”에 나가 3부예배를 보았다. 그러나 래일은 만사를 제쳐놓고 류목사님
댁에서 “땡스기빙데이”를 지내기로 마음을 정했다. 

다음날 오전 나는 목사님댁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목사님은 계시지 않았다. 심사모님이 서글서글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미스타 조, 목사님 1부 예배 나갔어요, 인츰 돌아오실거예요. 이렇게 오시니 반갑네요. 커피라두 한잔 드릴까요?”

류목사님이 거주하고 있는 타운하우스는 2층으로 되였다. 1층은 널직한 객실이였다. 객실안쪽으로 주방이 있었다. 객실 왼편에에 서재로 통하는 복도가 있었다. 복도한켠에 세탁기와 드라이기(烘干机)가 설치된 자그마한 빨래방이 있었다.  2층은 거실 두가가 있었다. 얼핏 가늠해도 중국평수로 200평은 훨씬 넘겼다. 그러나 이저택은 류목사님의 개인저택이 아니였다. 미국에서 맞벌이 부부들이 흔히 찾는 전세방이였다. 

나는 거실에 놓인 쏘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목사님을 기다렸다. 문뜩 거실 두벽을 꽉 차지한 책장에 눈길이 끌렸다. 천여권도 넘을 장서가 빼곡하게 진렬되였다.

“한국의 신학사상”(韩国의 神学思想), “현대신학의 전망”(现代神学의 展望), “민중과 한국신학”(民众与韩国神学), “무신론자가 본예수”, “과정철학과 과정신학”(过程哲学和过程神学), “기독교조직신학”(基督教组织神学) “교회론”, “신론”(神论), “성령론”(圣灵论),“외슬레의 조직신학”, “그랜드 종합주석”, “신앙고전52선”, “예배와 설교 핸드북”

나는 책장귀퉁이에 꽂쳐있는 한글본 “탈무드”에 눈길이 쏠렸다.미국계 유대인랍비 마빈 토케이어의 저서였다. 나는 책장앞에 선채로 어느결에 “탈무드”에 빨려들었다. 

“오래 기다리셨쬬. 이렇게 와주셔 반갑네요. 미스타 조. 그책 좋아하세요?”
목사님은 “탈무드”를 넘겨보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이책 한번 꼭 읽어보고 싶었어요. 근데 중국에선 구경도 못했어요. 목사님, 이책 한번 빌려볼구 없을가요? 꼭 돌려드릴게요.”

나는 내친김에 당돌하게 청들었다. 목사님은 일씨 망설이는 눈빛이 스쳤다. 
“그책 아주 무게 있고 깊이 있는 책이예요. 미스타 조. 한번 열심히 읽어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날 류목사님은 웃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국 연변에서 온 조선족동포 미스타 김과 미스타 리가 오늘 아침 “예닮교회”의 1부예배에 참석했다. 이들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웬남국수상가(越南米线店)에서 일했다. 마침 가게의 정사장님이 “예닮교회”의 신도였다. 

목사님은 머나먼 중국 연변에서 찾아온 조선족동포들이 하도 반가워 주기도시간에 기도를 드려달라고 요청했다. 30대 후반의 키가 훤칠한 미스타 김이 앞장서 강단에 올랐다. 그런데 주님앞에 드리는 기도는 뜻밖에 이렇게 시작되였다. 
“하나님, 안녕하십니까?”
류목사님은 대뜸 난색한 표정을 지었다. 목회생활 20여년만에 이런 주기도는 난생처음이였다. 

“미스타 조, 어떻게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에게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기도를 드려요? 그래 주님이 안녕하시지 않으면 죽기라도 바랐다는 건가요? 중국에서는 모두 이렇게 주님앞에 기도를 드려요?”

나는 일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종잡지 못했다. 중국에 있을 때 나는 교회와는 담을 쌓은 무신론자였다. “성부, 성자, 성령”(圣父,圣子,圣灵)의 이름으로 주님앞에 기도하는 신도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곳 미국에서 나는 로모 홍씨의 손길에 끌려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여직것 주님앞에 경건한 기도는 드리지 못했다. 

“목사님은 한국 충남 출신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함북도말이 낯설것 같아요. 안녕하십니까? 이말은 흔히 쓰이는 함북도어투의 인사말이예요. 아마도 미스타 김이 무척 긴장했나 봐요. 얼결에 함북도식 인사말이 튕겨나왔군요.”

“아- 그러세요. 어쩐지 그렇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목사님은 다시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뭉스런 표정이 석연히 드러났다. 목사님은 책장에서 “기독교영성”이란 책을 뽑아 들었다. 

“이책은 얼마전에 내가 한국에서 펴낸건데요. 미스타 조. 한번 읽어보실래요?”
“네, 감사합니다. 목사님, 한가지 궁금한것 있는데요. 물어봐도 괜찮겠어요?”
“안 그래도 미스타 조하구 이야기 좀 나누고 싶었는데여. 잘됐네요. 궁금한것 있으면 물어보세요.”

“목사님. 기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기도요? 어떤 기도를 말하세요?”
“주님에게 열심히 기도를 드리면 축복을 받는다고 하던데요.”
“미스타 조는 영성신학(灵性神学)에 무척 흥취가 있는것 같아요.
기독교의 영성신학은 심오한 학설을 갖고 있어요.”

목사님은 대뜸 근엄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기독교영성”에 대한 목사님의 강의를 열심히 청취했다. 

기독교는 예언자적인 종교예요. 그리고 영성적인 종교예요. 성서의 주제들인 믿음과 회개, 구원. 그리스도와의 련합과 일치. 성령의 내재 등등은 리론인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사실이였어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치트(Dionisins Areopagite)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 소아시아지역에서 활동한 신비신학자였어요. 그는 인간영혼의 정화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은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는 기도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기도는 인간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귀의하는 마음가짐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빛을 인간령혼을 통해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기도는 인간생명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을 찬성하고 탐구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향한 탐구의 삶과 행위는 그 자체가 이미 기도인 것이다.”

5세기에서 8세기사이 동방교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기도운동이 일어났어요. 이른바 “예수기도”였어요. 그시기 “예수기도”는지역과 신도들에 따라 그 내용과 형태가 다양했어요.
“우리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이는 현재까지 전해온 주기도 형태였어요. 기도의 목적은 인간들의 죄된 사념을 제거하는 것이였어요. 지금도 이기도는 평신도들이 많이 리용하고 있어요. 

“목사님. 2부예배시간 다 됐어요. 교회 나가세요.”
심사모님이 다급하게 독촉했다. 류목사님은 부득불 “영성신학”강의를 뭠췄다. 나는 로모 홍씨를 모시고 교회로 향했다. 

“예닮교회”는 140여명의 신도가 있었다. 그중에는 포유기의 영아 4명도 포함되였다. 이날 2부예배는 30여명의 신도들이 참가했다. 예배가 끝난후 윤 야브라함 장로 댁으로 이동했다. “땡스기빙데이”의 특별식인 “터키”(火鸡)를 시식한다고 하였다. 

나는 로모 홍씨를 모시고 봉고차에 탑승했다. 시초에 나는 로모 홍씨를 이모님이라고 호칭했다. 그러나 “예닮교회”의 신도들은 한결같이 “대모”라고 호칭했다. 당시 나는 “대모”호칭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다. 어느날 한석중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대모”는 물론 년장자에 대한 가장 높은 존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로모 홍씨는 교회에서 특수한 위치를 갖고 있었다. 신도들의 안목에도 특별히 경위스런 존재였다. 따라서 “대모”호칭은 불교의 “보살”과도 같은 신성한 뜻도 포함되였다. 그후 나는 로모 홍씨를 “대모”라고 호칭했다. 

이날 심사모님이 봉고차의 핸들을 잡았다. 길 량옆으로 짛푸른 잔디벌이 눈이 시리도록 끝없이 펼쳐졌다. 봉고차가 20여분을 족히 달렸다. 갑자기 눈앞에 송백이 빼곡한 숲이 나타났다. 봉고차는 숲속을 뚫고 한참을 달리다가 드디여 뭠춰섰다. 나는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고 한식경이나 멍하니 한곳에 굳어버렸다. 

윤 야브라함 장로의 저택은 전통적인 유럽식 멋이 물씬 풍기는 3층짜리 씽글하우스(独立别墅)였다. 저택주변은 1000여평도 훨씬 넘을 푸른 잔디밭이 깔렸다. 널찍한 정원에는 로천수영장이 있었다. 정원 한편의 주차장에는 자가용 넉대가 나란히 줄서있었다. 미국산 캐딜락 고급승용차 2대, 포드스포츠카1대, 일본산 도요다승용차 1대였다.

정원남쪽의 언덕위에는 송백을 가쯘하게 다듬어 만든 나무집이 있었다. 내부에는 뜨끈뜨끈한 증기욕도 즐기고 시원한 랭수욕도 즐길수 있는 시설이 구전했다. 나무집 뒤면에는 널찍한 롱구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앞을 내다보면 검푸른 태평양이 한눈에 안겨왔다. 

윤 야브라함 장로는 와이프와 큰아들 작은아들까지 네식구가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이 3층저택은  객실, 거실, 주방, 욕실을 합쳐 크고작은 방이 무려 13개나 되였다. 바닥은 일색으로 은회색 고급카펫를 깔았다. 주먹구구를 해도 중국평수로 1500평을 훨씬 넘겼다. 

“세상에- 네 식솔이 생활하는 주택이 어쩌면 이렇게 클수가? 세상에- 이렇게 고급스런 주택은 미화로 대체 얼마나 할가?”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형, 이 주택 미화로 얼만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한석중씨가 넌짓히 물었다. 나는 얼결에 머리를 끄떡였다. 
“조형,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값비싼 주택은 이렇게 태평양연안의 비치에 자리잡은 씽글하우스예요. 이 주택은 저두 확실하게 가늠하긴 어려워요. 그래도 미화로는 자그만치 300만불을 넘길 건데요.”

“뭐라구?  300만불?”
나는 미화 300만달러를 중국돈으로 환산했다. 당시 달러와 인민페는1대8로 환산되였다. 주택 한채값이 인민페로 2400만원이였다. 내 평생에 이런 주택은 “달속의 궁전”이였다. 

로천수영장의 공터에는 태양광을 가리운 시원한 풍막이 있었다. “땡그기빙데이”음식은 부페식으로 이곳에 차려놓았다. 신도들은 선후 순서에 따라 자리에 착석했다. 목사님은 신도들과 함께 식전기도를 드렸다. 

“거룩하사 우리주 예수그리스도 주님이시여. 위대하사 우리주 예수그리스도 주님이시여. 오늘도 이렇게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풍성한 음식 사하여 주시니 그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하나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이자리에 나온 모든 신도들에게 축복을, 축복을 사하여 주세요. 
오늘도 주님앞에 성실하게 기도 드리는 윤 야브라함 장로님 일가에게 거창한 축복을, 거창한 축복을 사하여 주세요. 
아멘- 아멘.”

그때 갑자기 껑충한 키에 비대한 체구의 남자애가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 20대 초반이였다. 남자애는 성큼 손을 내밀어 터키고기를 한움큼 움켜쥐였다. “히-히-히-” 느낮없이 소름끼치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다짜고짜 터키고기를 잡채볶음쟁반에 집어넣고 마구 휘젓었다. 그러나 신도들은 누구도 선뜻이 제지하지 않았다. 

“저 자식 저거, 또 음식 다 망쳐 먹네. 망쳐 먹어. 저걸 어쩔고? 저걸 어쩌면 좋을고?”
“대모”홍씨가 혀끝을 튕기며 탄식했다. 

비대한 체구의 남자애는 윤 야브라함 장로의 큰아들이였다. 올해 19세였는데 어려서부터 극심한  “대인기피증”(孤独症)을 앓았다. 윤 야브라함 장로는 다년간 “예닮교회”에 아낌없이 거금을 내밀었다. 그리고 주님앞에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어느날 주님이 기적을 내려 “대인기피증” 아들이 정상신도로 돌아올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땡스기빙데이”식사가 끝난후 나는 한석중씨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널찍한 방에는 장방형의 긴 테불이 놓였다. 20여명 신도들이 테불에 둘러 앉아 핸드폰조립작업을 하였다. 당시 이들이 조립한 핸드폰은 중국에서 “따거따”라고 호칭했던 큼직한 전화기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페물로 취급되였다. 

윤 야브라함 장로는 3년전부터 한국에서 페기물로 된 “따거따”를 미국으로 직수입했다. 까바를 새롭게 쒸우고 건전지도 재활용했다. 나중에 “메이딩코리아”(韩国制造) 딱지를 부착하고 이쁘게 포장했다. 새롭게 조립된 핸드폰은 멕시코, 홍두라스, 아르헨티나, 과떼말라, 에꽈도르 등 남미지역에서 불티나게 팔려 엄청난 미화를 벌어들었다.

“예닮교회”의 신도들은 매주 4차씩 이곳에서 무보수로 핸드폰조립작업을 하였다. 나는 한석중씨의 가르침을 받으며 핸드폰작업에 열중했다. 
“미스타 조는 중국에서 오셨지요. 어떻게 머나먼 중국에서 미국으로 올수 있었어요?”
웬남국수상가(越南米线)의 정사장님이 의뭉스런 눈길로 나를 지켜보았다.

사실 나는 영어회화학원에서 이같은 질문을 수차례나 당했다. 시초에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한번 듣고 두번 들을 때가 달랐다. 세번 듣고 네번 들을 때는 확연히 달랐다. 이질문의 배후에는 또다른 의문이 있었다. 

잘나가는 한국인들도 요지음 세월에는 미국행이 여간 힘들었다. 그런데 중국은 김밥도 없는 못사는 나라가 아닌가? 그런 곳에서 굴러 먹던 조선족이 어떻게 부자나라 미국으로 올수 있는가? 
생각할수록 고약한 심뽀가 엿보였다.

“사장님, 중국에 만리장성 있는거 아시쬬.”
나는 마주 앉은 정사장님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굴에는 불쾌한 표정이 석연히 드리웠다. 
“이자식, 만리장성 누가 몰라? 사람 어떻게 알구 이따위 시시껄렁한걸 다 물어?” 

“사장님, 저는 미국으로 올 때 만리장성을 걸었어요. 왜 웃어요? 진짜라니까요.”
“이자식, 소웃다 꾸레미 터질 소릴 하고 지랄이네. 그래 한것 떠들어봐.”
정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사장님, 왜 믿기지 않으세요? 저는 한달 내내 만리장성을 걸었어요. 그랬더니 태평양을 건너 미국땅에 발을 디뎠어요. 웃지 마세요?  안그러면 사장님도 한번 만리장성 걸어보세요. 그러면 당장 중국으로 갈수 있어요. 길고 짜른건 재봐야 하거든요. 안그래요? 사장님.”

롱담조가 다분한 말투에 정사장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석중씨가 썰렁한 느낌을 받았는지 이렇게 물었다.
“조형, 연변이란 곳에 랭면 있어요? 한국은 함흥냉면이 있는데”

미국의 한인커무니티(韩国人社区)는 특이한 선입견이 있었다. 
“미국은 심심한 천국이다. 한국은 재미 있는 지옥이다.”
“무엇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가?”
“한국이 실물나게 싫어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한국이 왜 싫은가?”
“말도 말아요, 진짜진짜 실물나요, 뭐 하나 잘되는것 없어요. 막말로 지옥이지요. 지옥. 안그래요?”
“한국이 지옥이면 미국은 천당인가?”
“당연한것 아닌가요. 주님의 축복을 받은 땅이니까 당연히 천국이지요. 아니면 왜 미국으로 이민을 왔겠어요?”

“근데 미국은 왜 심심한 천국인가?”
“글세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러면 한국은 왜 재미 있는 지옥인가?”
“글세요? 다들 짜증나게 싫다고들 하던데요. 그래두 너무너무 궁금한게 많찮아요.”

“한인커므니티”는 왜 이같은 선입견이 생겼는가? 나는 일시 해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중국에서 태여났고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다. 나는 이곳 미국이 확실히 중국보다 부유한 나라인 것을 내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무작정 “미국은 천국이다”라고 가정하면 불쾌한 심정이 앞섰다. 나는 여직것 “미국이 천국이면 중국은 지옥이다.”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느날 나는 “한국일보”에서 “한국인의 재미”란 한편의 문장을읽었다. 중국인 교수 추귀화(邱桂花)의 칼럼이였다. 그는 산동대학 중문학과 교수였다. 중한수교후 한국의 한양대학교에서 7년간 중국어교수로 근무했다. 그는 “한국인의 재미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인은 무엇때문에 중국사람을 만나면 궁금한 것이 그렇게도 많은가? 중국에는 소고기국이 있는가? 케불TV가 있는가? 은행이 있는가? 미국돈 달러가 있는가? 중국은 왜 남녀가 수수밭에서 련애하는가?(电影-红高粱)

나는 한국에 7년이나 체류했다. 벌써 한국인처럼 궁굼한것이 많아졌다. 중국에서는 탕(汤)을 먹을 때만 숟가락을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왜 밥을 먹을 때도 숟가락을 사용하는가? 중국은 사람과 차량이 모두 우측통행을 한다. 한국은 왜 차량은 우측통행을 하는데 사람은 귀찮게 좌측통행을 하는가? 중국은 하루 세끼 기름진 음식을 먹는다. 한국은 왜 하루 세끼 기름 한방울 없는 음식만 먹고도 살수 있는가?”

한국인은 유별나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허구한날 몸에 배인 특이한 기질이였다. 
“미국은 천국인데 왜 심심한 천국인가?” 
“한국은 지옥인데 왜 재미 있는 지옥인가?”
“궁금하지 않은가? 근데 답이 없으니 더구나 궁금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곳 “한인커무니티”에는 또다른 궁금한 것이 있었다. “심심한 천국” 미국에 대해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다. 
“미국은 무엇때문에 심심한 천국인가?”
“대답이 필요없어요. 미국은 원래부터 그래요.”

이곳의 한국인 이민 1세대와 2세대는 대부분 영세업에 종사했다. 세탁소, 그로서리, 마켓, 부페집, 페인트, 아빠트청소, 전기가설 등등. 그리고 365일 특별히 휴식일도 따로 없다. 하루 12~16시간씩 다람쥐 채바퀴 돌리듯 지겹게 일손을 놀린다. 

이곳 “한인커므니티”는 TV안방극장이 없다. 가라오케도 없다. 단란주점도 없다. 춤도 없고 노래도 없다. 닭이 홰를 치면 일밭으로 끌려가는 황소처럼 움직였다. 어쩌다 고개를 쳐들면 눈에 띠우는 것은 교회당의 십자가뿐이였다. 그래도 숲을 이룬 십자가 덕분에 미국은 주님의 축복을 받은 “천국의 나라”로 되였다. 

“심심한 천국이면 어때?” 
주님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으로 경건하게 기도를 드려야 하였다.

그러나 나의 눈에 비친 미국은 결코 “심심한 천국”이 아니였다. 미국은 현혹스럽게 유혹되는 것이 많았다. 입을 딱 벌리게 감탄되는 것도 많았다. 이것저것 배워야 할것도 많았다. 미국은 배울수록 재미나고 배울수록 심취했다. 

“극락세계도 재미가 있어야 간다”라는 고사(古事)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어떤 아릿다운 아녀자가 불경을 수련하는 고승(高僧)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 이세상에 아녀자가 없다면 불제자들은 어떻게 금욕수련을할지 몹시 궁금하네요.”

고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법당에서 좌선한 불제자에게 불경이 없는 좌선이란 세상 심심한 노릇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아녀자가 없이 무슨 재미로 금욕수련의 삼매경에 들수 있겠느나? 극락세계도 재미가 있어야 갈것이 아니겠냐? 알아들었느냐?”

아녀자는 여직것 념불을 외우는 것만이 불법수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승의 가르침에 크게 득도(得道)하여 곧바로 삭발하고 절에 들어갔다. 

통일신라의 고승은 “극락세계도 재미가 있어야 가는 곳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곳 한인커므니티는 옛고승의 귀중한 가르침을 감감히 잊어버렸다. 그들은 앞다투어 태평양을 날아 넘어 미국땅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곳의 “극락세계”는 별다른 재미가 없는 “심심한 천국”이였다. 

이날 나는 류목사님댁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후 한인제1장로교회로 향했다. 다년간 한국에서 믿음설교를 해온 구동태목사님의 특강이 있었다. 

교회당은 빠리노트르담사원을 련상케하는 고풍스러운 멋이 물씬 풍겼다. 실내는 화려한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조각상은 음침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500여명의 신도들이 빼곡히 죽쳐 앉았다. 

구동태목사는 50대로 보였다. 다소 뚱뚱하지만 다부진 몸매였다. 특히 번쩍번쩍 빛나는 대머리가 각별히 이목을 끌었다. 지난 15년간 그는 믿음설교를 해왔다. 그러나 믿음은 있지만 변화가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변화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 

“신도 여러분, 삶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뽑인 자와 쓰임받는 자에 대한 믿음에 있어요.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시고 귀천하실 때 내고향은 언제나 하늘나라였음을 믿으셔야 해요.

저는 변화의 설교를 위해 3개월간 새벽기도를 드렸어요. 그때마다 마을의 개짓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느날 갑자기 개짓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나는 기도를 드릴수가 없었어요. 그때 나는 문뜩 크게 깨쳤어요. 

그것이 무엇일가요? 기도가 안될 때가 바로 기도를 드릴 때라는 것을 깨쳤어요. 이날 아침 쌀이 없어 금식을 했어요. 금식을 통해 또 하나 새롭게 깨쳤어요. 그것이 무엇일가요? 배부른 자는 기도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나 굶주린 자는 웃으면서 기도할수 있어요.”

“아멘- 아멘- 아멘-”
500여명의 신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멘”을 합창했다. 교회당이 떠나갈듯 쩌렁쩌렁 울렸다. 

“신앙인은 반드시 변화기 있어야 해요. 빛과 함께 하는 자가 진정한 신앙인이예요. 인간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빛의 사역이지요. 변화의 사역은 빛이 이루어줘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다같이 주님앞에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주 예수그리스도 주님이시여. 오늘도 주님앞에 나선 신도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세요. 선택 받고 뽑힌 자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내려주세요. 축복을, 축복을 내려주세요.”
“아멘- 아멘- 아멘-”
신도들은 다시 한번 목놓아 “아멘”을 열창했다. 

중국의 속담에 “아는 자는 내면의 리치를 보고 모르는 자는 겉보기에만 만족한다.”(内行看门道,外行看热闹)라고 했다. 나는 무엇이 믿음설교인지 모른다. 무엇이 빛의 사역인지도 모른다. 구속시대가 무엇이고 뽑인 자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후 나는 마빈 토케이어의 저서 “탈무드”를 읽고 비로서 교회에 대해 어섯눈을 떴다. 마빈 토키이어는 유대인랍비였다. 그는 1936년에 뉴욕에서 태여났고 1958년에 예시바대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일본에서 미군공군기지의 유대교랍비로 활동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 구분되였다. 유대교는 “구약성서”를 뜻하였다. “성서”는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였다. “토라”는 “가르침”이란 뜻을 갖고 있다. 

“탈무드”는 기원전 5천년부터 기원후 5백년까지의 유대인력사를 기술했다. 선후 2천여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10여년간 집요하게 “탈무드”를 편찬했다. “탈무드”는 “위대한 연구, 위대한 학문, 위대한 고전연구”라는 뜻을 갖고 있다. “탈무드”는 “법전”(法典)은 아니지만 법을 설명했다. “사서”(史书)가 아니지만 력사를 기술했다. 그러므로 “탈무드”는 “유대인의 령혼”으로 불리웠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해마다 아테네거리에서 무고한 노예를 끌고다니는 악습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죄를 무고한 노예한테 뒤집어 쒸우고 속죄자로 참혹하게 처형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무고한 노예대신 한마리의 면양을 선택했다. 세상의 모든 죄를 면양에게 지우고 사해(死海)로 풀어주었다. “탈무드”에 기록된 “속죄양”의 설화였다. 

기독교의 예수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였다. 그는 인간의 모든 죄를 한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신자들은 지금도 “예수그리스도 주님이시여, 저의 죄를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교회와 기도는 모두 유대교에서 발생했다. 선사시대의 인류는 태양, 동물, 나무, 바위 등을 숭배하는 다신교신앙이였다. 선사시대의 인류는 소나 양과 같은 동물과 심지어 살아있는 노예를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유대교는 시초부터 다신교를 부정했다. “여호와”을 유일 신으로 숭배하는 일신교였다. 유대교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철거하고 그곳에 교회당을 구축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악습을 단절하고 “금식일”을 고수하는 기도전통을 지켰다.

과학의 인식론적 측면에서 기독교의 “신”(神)은 과학이 인증하는 “존재밖의 존재”(存在)였다. 그러므로 “신”(神)의 존재는 검증불가능의 미스터리였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뉴턴의 “만유인력법칙”. 챨스 다윈의 “진화론”. 칼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모두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미국의 드넓은 국토에는 도처에 교회당이 있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십자가는 빼곡한 숲을 이루었다. 신도들은 여전히 예수그리스도에게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기도가 이루어지면 그대는 철저한 지옥에 떨어질것이다.”

그리스신화에 “마이다스왕의 기도”(King midas)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마이다스왕이 신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제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금으로 변하게 해주세요.”
“지금부터 네가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할것이다.”
신의 대답이였다. 

그러나 마이다스왕에게는 험악한 재앙이 닥쳤다. 바위돌이 금으로 변했다. 나무가 금으로 변했다. 강물과 바다도 모두 금으로 변했다. 결국 마이다스왕은 한모금의 물도 먹을수 없어 죽음에 이르렀다.

기독교의 천당은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 있다. 기독교의 지옥은 분명히 죽어서도 죄값을 치러야 하는 칠흙같은 땅속에 있다. 그래도 신도들은 “천당”으로 가려고 “주님이여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그러나 죽어서 갈수 있는 곳은 분명히 18층 지옥이 있다는 땅속이였다. 

이것은 또 무엇때문인가? 
나는 “심심한 천국” 미국에서 이같은 놀라운 진실을 발견했다. 

조광연(曹光延)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다년간 연변텔례비죤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2005년 미국에 체류. 현재 자유기고인으로 활약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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