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궤적을 더듬어

리삼월, 한춘 시인과 함께 중국 북방 시단의 삼두마차로 불리우던 강효삼 시인께서 2023년 7월 12일 향년 81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장례는 7월 14일 상지에서 엄수되었습니다.

고 강효삼 시인 

(아래 글은 중국 조선말 표기법으로 됐습니다. 편집자 주)

강효삼시인을 말하자면 자연히‘작은 거인’이란 말이 떠오른다. 말 그대로 키가 작고 여위여 체구가 왜소하다. 그는 거인마냥 파란만장했던 인생길에서 불굴의 의지로 모진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온 강직한 선비이며,생애에 두번이나‘죽음’을 뚫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명이 긴 사람이다. 지지리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삶속에서도 한평생 우리글 농사를 해온 끈질긴 시인이다. 고달프고 서러운 인생의 밑바닥에서 건져내고 우려낸 민중들의 애환과 감정,고향에 대한 향토애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뼈와 살로 녹여 원로시인의 자리를 굳혔을 뿐 아니라 중국조선족문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강효삼시인이 심혈을 쏟아 쓴 시작품들과 기타 문학적 성과는 독자들과 문학평론가들이 평가할 과제이고 그의 기구하고 곡절 많은 인생사, 문학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서툰 글로나마 피력하고저 한다.

나와는 대학 동창생

지역과 학연 관계로 40년 전부터 강효삼시인을 알게 되였고 오랜 세월 만남을 이어오며 친분을 쌓아왔다. 그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80년 여름이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사회생활을 하던 우리에게도 배움의 ‘대학문’이 열리였다. 그 해 ‘문화대혁명’후 처음으로 동북3성 조선족중소학교원을 대상으로 제2기연변대학통신학부(函授部) 조선문학학부에 합격되여 강효삼선생과 동기 동창생이 되였다. 그렇게 대학공부 5년간 타지방에 모여 기숙하며 약 보름씩 대학교수들의 강의를 받으며 대학교교육과정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당시 나는 문학에 뜻을 두었던 문학청년이였고 강효삼시인은 이미 조선족문단에 이름을 올린 시인이였다. 신문과 잡지에서 흠모의 대상으로 이름만 봐왔던 시인을 처음 보게 되였다. 살짝 얽은 얼굴에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했고 상상 속의 모습과는 달랐다. 하지만 사람이 다부지고 당차 보였고 서로 익숙해지면서 재치 있는 특유한 유머와 뛰여난 말재주에 매료되였다. 연변통신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두 차례의 흑룡강성조선족문학창작회의, 그가 해마다 조직하는 상지시‘진달래문학살롱’모임, 상지시 교원들의 교수참관 등 활동에서도 만나군 하였다.

그 후에 나는 일찍 상지시를 떠나 연변텔레비죤방송국으로 전근되여 연길로 이주했지만 의연히 소식을 주고받으며 작품교류를 진행하였다. 그가 문학행사로 연길에 올 적마다 허물없이 우리 집에 들려 하루 이틀씩 묵어가군 하였다. 나 역시 내가 살던 고장에 가면 강효삼시인을 찾아뵙군 하였다. 나이로 말하면 년상년하지만 쌓은 정분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져 그의 래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 속심을 나누는 지기로 되였다.

‘산’ 넘어 또 ‘산’을 넘어

강효삼시인은 운명적으로 고생할 팔자로 태여난 듯싶었다. 두살 때 무서운 전염병인 마마병에 걸렸었다. 그 시기 사망률이 높은 그 돌림병에 많은 어린애들이 죽어나갔고 그의 집안에서도 이미 두 형이 불행히도 마마병으로 죽었다. 셋째인 그마저 그 병에 걸려 ‘죽었음’으로 그의‘시체’를 거적으로 둘둘 말아 내다 버리려 하는데 운명의 신이 도왔는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죽음에서 요행 살아났지만 그 흔적이 얼굴에 곰보자국으로 남아 오랜 세월 작은 키와 못난 얼굴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늘 주눅이 들어 위축됐다고 한다. 불행한 그에게 9세 때 부모가 리혼을 하게 되면서 자식 넷이나 딸린 아버지가 처녀장가를 가게 되여 자기보다 겨우 7살 우인 계모의 손아래서 눈치밥 먹고 자라며 슬픈 동년 시절을 보내게 되였다.

집을 떠나 상지중학교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시절에 키가 작고 얼굴이 얽어 늘 반급의 머리 큰 애들한테 치여서 괄시를 받고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과외서적을 많이 찾아 읽으면서 글짓기에 흥취를 가졌고 중학교에서도 늘 칭찬을 받아 그나마 위안을 얻게 되였고 따라서 문학꿈을 갖게 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학교공부를 끝까지 하지 못하고 고중 일학년에서 중퇴하는 불행을 맞게 되였다. 공부를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시대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누구보다 민감하여 당시(1958년) 대대적으로 진행된 ‘대약진’에 대한 반감과 회의를 가진 언론을 한데서 학교로부터 대과 1차라는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와 고중중퇴생도 지식분자로 인정을 받아 학교에 민영교원으로 교편을 잡게 되였다.

워낙 거짓을 모르고 성품이 바른 그는 당시의 현실을 두고 바른대로 말을 한 대가로 인생의 쓰라린 고배를 마시게 되였다. 하루 아침에 날벼락을 맞아‘반혁명분자’로 몰리면서 10년 동안 종사해온 교단에서 쫓겨나고 결혼한 지 불과 11개월 만에 리혼까지 하여 왜소한 체구에 홀아비가 되고 사회적 멸시를 받는 로동개조 대상이 되였다. 젊은 나이에 그 미친 세월의 희생자가 되는 곤혹을 겪게 되였다.

로동개조를 받는 괴로운 나날에 이런 일도 있었다. 서툴고 손놀림이 뜬 줄 알면서도 모 잘 꼽는 선수녀인들과 한줄에서 모를 심게 하여 미처 자기 앞의 것을 꼽지 못하면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주기도 하였다. 워낙 신체가 약골인 그는 흙이 잔뜩 게발린 무거운 벼모짐을 지고 좁은 논둑길로 가다가 그만 미끄러워 논판에 푹 고꾸라져 흙탕물투성이가 되여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가르친 학생들 앞에서 이런 꼴을 당하고 나니 그 처참한 꼴이야말로 그의 말을 빌면 ‘물에 빠진 개’의 신세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물인지 눈물인지 딱히 기릴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고 약한 체구에도 이를 악물고 무거운 모짐을 끝내 논판까지 져 날랐다고 한다.

로동의 고됨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가난이였다. 힘든 일에 로동보수라도 제대로 차례진다면 얼마나 좋을가만 흉년이 들어 년말 결산분배에서 우표 한장 값인 8전이 분배됐으니 일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하고도 되려 160원 빚을 지게 되였다. 적지 않은 금액이여서 아껴 먹고 아껴 쓰며 무려 3년의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그 빚을 갚았다고 한다.

그 세월 누군들 가난하지 않았으랴만 한때 집이 없어 농촌에서도 한족집을 세 맡아 살았다. 몸에 10전도 없어 할수없이 먹는 쌀을 팔려고 주머니에 쌀을 넣어 가지고 마을돌이를 했으나 차마 쌀 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도로 집으로 가져온 일도 있었다 한다. 너무 가난하여 갓 태여난 자식을 남에게 주려고 하였는데 그 자식을 남에게 주었더라면 후날 얼마나 가슴 아픈 후회가 되였을가? 후에 잘 자라서 중국의 명문대인 북경대학에 가면서 가문의 영예를 떨쳤던 것이다.

고되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마음속으로 굳은 신념을 가지고 문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쉴 참에 논두렁에서 책을 보고 글을 썼다. 그것이 은을 냈는지 험한 세월에도 글쟁이인 그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중학교의 부름을 받고 조선어문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사상개조 받던 농민으로부터 교원신분이 된 덕택으로 그는 인물이 환한 9살 년하의 농촌녀인과 재혼을 하고 새 가정도 꾸리게 되였다.

그러나 늘 붙어다니는 ‘정치적 꼬리표’를 떼여내지 못하여 정식 편제가 아닌 대과(代课)교원으로 중학교 교원직을 일년밖에 하지 못하고 다시 살던 농촌마을로 돌아왔다.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이 억울한 정치적 루명을 떼여버리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결심한 그는 ‘번안’한다는 죄명을 들쓸 각오를 하고 대담하게 상급기관에 찾아가 여러 차례의 신소 편지를 보냈다. 재심사를 거쳐 드디어‘죄’를 면죄 받고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기 앞서 마을소학교에 민영교원으로 복직 되여 교편을 잡게 되였다. 과감히 불의와 도전한 결과로 쉽지 않은 선택인 것이다. 그 후 완전히 명예회복을 받고 교원으로 되여 늘 그리던 해볕 쨍쨍한 날을 맞게 되였다.

문학은 그에게 삶의 에너지였고 강심제였다
문학을 내놓고 인생을 말할 수 없는 강효삼시인에게 문학은 삶의 에너지였고 강심제였다.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면서 황페화되였던 민족문단에도 문예부흥기를 맞아 ‘상처문학’이 붐을 이뤘다. 그에게도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작가적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이 열려 십년간 억눌리고 가슴에 한으로 맺혔던 것들이 글로 쏟아져 나왔다. 사회적으로 문학의 위상이 가장 좋았던 그 시기에 륙속 많은 작품들을 신문과 잡지들에 발표하여 흑룡강작가협회, 연변작가협회에도 가입하게 되였다. 그 시기 대표작으로는 시 〈노래 불러라, 영이야〉가 있다. 억울한 안건을 시정받는 자신의 기쁨과 감격을 격조높이 노래한 시 〈노래 불러라, 영이야〉는 흑룡강신문사에서 조직한 공화국창건30돐기념작품공모 3등상,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 3등상을 받았다. 새 시기에 들어서 처음 받는 상으로 문학의 새로운 리정표가 된 것이다.

정직교원이 되면서 다시 전에 근무했었던 하동조선족중학교 교원으로 전근되여갔고 그 후에 중학교에서 향 문화소에 전근되여 체질적으로 세속의 출세와 벼슬과는 인연이 없는 향정부 말단 공무원이 되였다. 공무원이라 하지만 이 직업이 자기 적성에 딱 맞고 좋았다. 시간성이 강한 교원직의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었다. 문화소에서 근무한 15년은 그의 인생과 가족의 삶은 물론 그가 문학에서 많은 성과를 내고 문인의 자리를 굳힌 고임돌의 역할을 한 시간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글 쓰는 책상조차 없어 밥상을 책상 삼아, 식솔들의 새벽잠을 깨울가봐 전등 대신 초불을 켜고, 시골의 자드락길을 걸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하향하면서 글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시를 위주로 수필, 아동문학, 가사, 칼럼 지어는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쟝르에 거쳐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여러차례 상급문화부문의 표창을 받았다. 작품집으로는 리삼월, 한춘 등 북방의 7인 시인들의 종합본인 시집《칠색무지개》 외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아동시집 《봄비》(1986년)를 출판해주었다. 이는 그 때 아동시집이 없던 공백을 메웼고 흑룡강성소수민족 3등상을 받았다. 그 시기 창작한 작품 가운데 시 〈나는 마음 앓는 사람〉, 〈바다가에서 떡방아 찧은 소리〉, 수필 〈산정에 찍힌 발자국〉 등 작품들이 선후로 ‘흑룡강신문진달래문학상’, ‘료녕신문압록강문학상’, ‘송화강문학상’, ‘장백산문학상’ 등 상을 받아 문인으로서의 강효삼의 립지를 굳히게 되였다.

자기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문학신인들을 더 많이 배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해마다 향내의 ‘진달래문학살롱’을 조직하였고 후에 범위를 현급으로 넓혀 국가정식민간문학단체인 ‘상지시진달래문학사’를 성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다년간 활동하였다. 90년대 말 흑룡강조선족창작위원회 부회장을 맡아 회장 한춘시인이 흑룡강신문한국특파기자로 간 기간 전성조선족창작위원회를 도맡아 여러차례 문필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95년 정년퇴직후 자유기고인으로, ‘전직작가’로 부지런히 시, 가사, 수필,수기, 아동문학 등 여러 쟝르의 문학작품 천여편을 발표했으며 두권의 시집을 출판했고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해외동포문학상’, ‘민족문학문학상’등 크고 작은 문학상을 여러차례 수상하였다. 발표한 글에 비해 작품집이 적은 것은 경제적 여견 때문이였다. 세집에서 자식들을 대학공부 시키는 사람에게 언제 자비로 책을 출판할 경제적 여유가 있겠는가. 1999년에 출판한 성인시집 《먼 훗날 저 하늘 너머》도 한 기업가가 협찬금을 내주어 근근이 출판을 한 것이다.

리얼한 향토시인

평론가가 아니기에 강효삼시인이 심혈을 쏟아 쓴 시작품들에 대해서는 독자들과 문학평론가들에게 맡기겠다. 다만 나름 보고 느낀 강효삼시인의 시 세계에 대하여 나의 천박한 견해나마 피력하려 한다.

장장 50여년, 문학의 외길을 걸어온 강효삼시인이 가장 추구하고 집념하는 주제는 고향이다. 고향은 그의 창작의 주제이고 모색이고 소망이며 쓸쓸한 위안이다. 고향과 민족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작가가 몇이나 있을가만 강효삼의 고향에 대한 집념은 조금 더 열렬한 것 같다. 지금껏 대표작으로 꼽히고 상을 받은 작품들이 고향을 주제로 하여 쓴 시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표작으로 〈고향이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송화강문학상), 〈우리의 고향에 무엇이 있는가?〉(록환컵문학상), 〈북방〉(흑룡강소수민족문학상), 〈북방의 강〉(랑시문학상), 〈민들레〉(민족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고향시가 일명 문단에서는 리얼한 정서를 지닌 ‘향토시인’이라고 한다.

고향시를 즐겨 쓰는 리유는 무엇일가? 〈나에게서 문학이 무엇인가?〉란 글에서 강효삼은 말한다. 농촌에서 자라고 농촌에서 사업했기에 고향 농촌에 대하여 심후한 감정이 있다. 실로 그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자식공부를 시키기 위해 할수없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 이사가기는 했지만 20리 떨어진 하동에 갔고 타지의 사람이 된 후에도 고향에 주요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퇴직후 5년 동안 고향의 백년 력사를 정리하여 40만자나 되는 《연수현조선족백년사》를 펴냈다.

고향은 사랑스러운 곳이다. 그러므로 격조높이 노래하여야 한다. 강효삼의 고향시는 아름다운 추억이나 로맨틱한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고향사랑을 민족사랑으로 승화시켰다는데 더욱 의미가 있다.

고향이 해체와 멸망의 갈림길에서 선 불리한 환경에서 고향을 잃으면 문화를 잃고 문화를 잃으면 민족을 잃을 수 있기에 고향에 대한 그의 시들은 단순 송가가 아닌 우환의식을 갖고 ‘울음을 우는 사실주의 넋두리’시기에 평론가 김룡운선생은 강효삼시인에게‘조선족문단의 제1푸닥거리군’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고 적지 않은 시들은 이 세상 한에 맺힌 몸부림에 가까운 신들린 푸닥거리라고 말했다.

힘겨운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강효삼시인의 시작품들은 대개가 생활바탕을 기저에 깔고 일상에서 시적 소재와 시의 종자를 쥐고 최하층 대중들의 애환과 감정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 가슴속에 맺힌 한과 슬픔을 표출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만의 스찔, 자기만의 감정, 자기만의 철학, 자기만의 추구를 가지고 개성이 있는 사실주의 시를 써왔다. 그렇다고 하여 사실주의 전통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시, 모더니즘시 지어는 하이퍼시까지 보면서도 시류에 흔들리거나 맹목적으로 편승하지 않고 자신을 초월한 시를 쓰려고 부단한 탐구와 노력을 멈추지 않기에 만년에 젊었을 때 보다 좋은 시들이 생산된다고 본다. 시 창작에서 그가 추구하는 최종의 목적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남은 여생에 명시는 못 써도 독자들이 공감하고 인정해주는 시를 써내는 것이라고 한다.

‘해학’과 ‘유머의 달인’

강효삼시인은 글재간에 뒤지지 않는‘달변가’이고 유머의 달인이다. 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발음이 또박또박 힘이 있고 말의 강약과 악센트가 살아있는 그만의 특유한 평안도 말투로, 장소에 따라 재치 있고 순발력 있는걸죽한 유머와 입담은 단번에 좌중을 압도하군 하였다. 유머와 익살은 그에게 생활고를 극복하고 밝고 락관적으로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약이 되였다.

처음 만났던 그 때는 문화가 락후하고 볼거리가 없었던 시기여서 무미건조했던 생활에 익살과 유머가 더더욱 빛을 발했는지도 모른다. 사회에 갓 발을 들여놓은 순진했던 나에게 술기운에 점점 농도가 짙은 성인유머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의 맛깔스럽고 익살스러운 언변에 넋이 나갈 지경으로 매혹되고 끌려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의 해학과 유머는 어디서 왔는가? 그는 말한다, 평생 밑바닥인생을 살았기에 최하층 대중들에게서 유머와 육담을 배웠고. 불행했던 운명에 상처 입고 멍든 가슴을 치유하고 심중의 설음과 울분을 달래였다. 그의 해학과 유머는 글쟁이라고 뽐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과 격의 없이 친근하게 어울리면서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는데 유조했다. 유머는 또한 그에게 고달픈 삶의 윤활제였고 아픔을 치유하는 진통제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도 아닌 우리 민족 산재지구에 살면서 문학은 떼여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숙명으로 절망과 가난에서 해탈하게 한 정신적 구원이며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과 같은 것이다.

강효삼시인은 한평생 문학과 연분을 맺고 시의 뮤즈를 짝사랑하며 살아왔다.  이 글을 마치면서 필자는 이 여유롭고 행복한 만년에 온갖 풍상고초를 겪어온 그의 가슴 깊이에서 숙성되여 피여나는 아름다운 시를 떨기떨기 꽃피울 것을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출처: 《도라지》 2019년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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