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청와대 생활
(2) 엄마의 손
(3) 태극기를 찾아 상해로
(4) 예순 새로운 출발점에서
(5) 국화꽃 피는 가을에

재한동포작가협회(재한동포문인협회와 재한동포문학연구회 주관)에서는 본지와 협력하여 재한동포문인들이 발표한 작품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정해서 발표하는 '自選대표작 프로젝트'를 실행 중에 있습니다. 매인, 시는 5-10수, 수필은 2-5편, 칼럼은 3편, 평론은 2-3편, 소설은 1-3편을 선정해 약력 및 사진과 함께 dong01118@naver.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고송숙 수필가의 自選 수필 대표 작품입니다.

 

1. 나의 <청와대> 생활 
    

내가 <청와대> 에서 생활한지도 어느덧 7년 세월이 흘렀다. 재한 조선족동포로서 대한민국의 <청와대> 에서 <대통령> 직무를 맡고 생활하고 있다. <청와대>와 <대통령>이라고 하면 궁궐 같은 서울의 <청와대> 로 착각하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청와대> 는 초라한 단칸방으로써 단지 푸른 기와를 얹은 다세대 전세집일뿐이다. 전세보증값 400만원에 매월 2만원 납부하는 관리비에는 전기요금, 수도요금, TV시청료까지 모두 포함되었는데 직장과도 3분거리로 가까워서 둘도없는 안성맞춤한 보금자리이다. 원룸이나 아파트에 비할 수는 없지만 제법 대문도 있고 작은 텃밭도 있고 다섯가구가 둘러앉아 청일색의 80대 할머니들이 인정으로 똘똘 뭉쳐서 오이하나도 나누어 먹는 인간애가 넘치는 전세집이다.

이 전세집을 나는<청와대>라고 이쁘게 이름 짓고 나혼자만 느낄 수 있는 <대통령>생활에 만족하면서 4명 할머니 경호원들과 칡넝쿨처럼 얼기설기 엉키고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떨어 질래야 떨어질 수없는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대통령> 선거도, 설문조사도, 취임연설 없이 무제한 임기의 <대통령>으로 자칭하고 4명 경호원들의 완벽하고 물샐틈없는 호위를 받으면서 매 하루를 즐기고 있다.

아침이면 경호원들의 한결같은 배웅을 받으면서 <대통령>사무실인 식당으로 출근한다. 출근하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잘 차례진 <신문밥상>이 기다리는데 <한국일보> <중앙일보> 지역신문 <동포타운신문> 을 구독하면서 국내외의 최신뉴스와 오늘의 증권시장까지 균형잡힌 식단에서 건강을 챙기듯이 세상을 챙겨본다. 신문구독이 끝나면 본격적인 업무로 <대통령>의 겸직인 식당 홀서빙으로서의 서비스에 전념하는데 접견하는 손님마다 <황제> 이고 <황후>이고 <공주>이고 <대통령>을 찾아온 귀빈이라고 생각하면서 귀빈접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통령> 과 홀서빙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식당이라는 <대통령접견실>에서 한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일하는 삶의 희열을 느낀다.

  한국에 체류하는 중국조선족의 한사람으로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마음을 연결하는 조선족대표 라는 책임감, 의무감, 자부심을 가지고 다재다능하고 전문지식을 소유한 조선족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하여 자신을 가꾸고 있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역할로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식당에서 직접 체험하면서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즐기는 지혜, 홀서빙의 예의와 서비스 마인드를 갖추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인의 정서문화와 음식문화, 서비스문화에 융합하면서 한국인들과 소통하고 있다.

  손님들이 호기심으로 질문하는 조선족의 인구, 문화, 예의범절, 두나라의 화폐차이, 전통음식, 백두산전설을 각 분야의 전문가 수준으로 막힘없이 대답한다. 중국의 가짜상품과 낙후한 화장실문화로 중국을 비하하는 사람들에게는 중국의 어제와 발전한 오늘을 대조시키면서 중국의 당당한 (북경), 우아한 (상해), 영원한 황제의도시 (서안)을 소개하면 중국을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한다면서 동감을 표시한다.

<대통령>처럼 다 같은 단군의 후손이요, 한줄기의 뿌리요, 통일이요 하고 즉흥 대변도하고 국적도 다르고 각각의 개성도 다르지만 한국인과 조선족은 하나로써 또 하나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서로가 한 핏줄인 동족으로 한국이 고국이고 모국이라면서 서로가 가까와지게 하는 매니저로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식당의 주요메뉴인 (용봉탕)의 자라효능에 대하여 자라와 오골계의 음식궁합에 맞추어 보양음식의 건강식단 설명과 함께 간단한 중국어까지 배워주면 모두가 만족되어 웃음꽃을 피우며 식사하신다.

  식당에는 특별한 단골손님인 서만준이라는 벙어리손님이 계시는데 소통이 가장 잘되는 중국아줌마라면서 아들의 취업이며 결혼, 부모님의 생일선물과 심지어 머리염색 색상까지 자문하는 각별한 사이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또 올해에 66세되는 김광예라는 손님은 34세에 남편을 잃고 완영이와 투영이라고 부르는 쌍둥이 아들을 키우면서 30여년의 긴 세월을 두 아들에게 헌신하신 존경하는 손님도 계신다. 쌍둥이 아들이 장가가서 또 쌍둥이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있는 아줌마의 가족들과 아줌마의 생일인 음력 7월7일도 함께 보내면서 돈독한 인연을 쌓아가고 있다.

  홀서빙 경력 7년에 손님들과 가족처럼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기초수급자로 살고 있는 이웃들과 불구자손님들을 각별히 보듬고 봉사하면서 뚱뚱한 몸매처럼 마음도 살찌고 넉넉한 아줌마로 살아가고 있다.

동네 이웃들은 (친절한 중국아줌마 ) 라고 불러주고 식당의 사장님은 영업경력 19년에 (가장 완벽하고 믿음이가는 홀서빙)이라고 동네방네에 자랑하고 손님들은 (중국아줌마가 주인님이세요?) 하면서 주인님과 똑같다고 과찬한다.

너무나 과분한 칭찬은 나에게하는 칭찬이 아닌 우리 조선족에 대한 평가와 이해로 받으면서 한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가진다. 일만하고 돈밖에 모르는 조선족이 아닌 여유로움으로 한국의 역사문화탐방 , 투자박람회도 다니고 제주도의 (삼성혈) 을찾아 꿈에도그리던 고씨 가문의 뿌리와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제주도 고씨로서의 탐라의 역사와 고씨 세개 분파도 깊이있게 이해하었다. 세계적인 <대통령> 테마명소이고 역사의 현장인 청남대에 가서는 역대 대통령들의 업적과 생활을 그리면서 한국의 역사를 배웠고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인 고은시인님 , (그럼에도 행복하소서) 의 저자 정덕희 작가님, 행복충전기인 김학래, 전원주, 엄용수 선배들과 만나서 추억의 시간을 보내면서 소중한 책도 선물 받았다.

  (시와 음악의 만남) 이라는 콘서트에서는 시낭송 우수상으로 시장상을 받았는데 비록 대상은 아니지만 50대의 중국아줌마가 한국에서 받은 첫 상장으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 지역의 시장님, 국회위원, 시청의 주요공무원들, 사회 각 단체단체장들과 마음을 담소하고 소통하는 인연을 이어가는것은 물론 (시민자치대학) 수료생으로 다니면서 당당한 한국의 한 시민으로 즐거운 여가생활을 보내고 있다. 한국에서 살고있는 조선족 이라는 이 작은 삶의 바다에서 꿈틀거리며 모지름을 쓰고 무수한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처럼 나의 작은 몸짓 하나 ,손짓 하나, 말 한 마디에도 내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그마음으로 항상 행복에 젖어있다.

  시장님과는 안성에서 7년을 근무했으니 명예시민증을 요구하는 어리광도 피우고 완벽하고 친절한 서비스에 만족한다고 신문에 소개된 나의 칭찬에 잠을 이루고 못하고 기초수급자가 선물한 홍삼사탕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이 감격하고 지역신문기자가 열심히 살아가는 조선족으로 취재 요청할 때에는 행복에취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었다.

  <대통령> 은 아니지만 <대통령>과 같은 넚고 품위있는 마음으로 모든 손님을 배려하고, 중국 조선족대표는 아니지만 조선족의 이미지를 높이려고 조그마한 힘을 보태고, 식당의 사장님은 아니지만 사장님과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되려고 모지름을 쓰고 있다.

  한국에 정착한지 7년세월, 한국에서 잠시 머무는 이 작은 역에서 인생의 제일 크고 높은 선인 행복과 동행하면서 자신을 성숙시키고 완미하고 후회없는 삶을 살아가려고 다짐한다. 이 7년 동안 더욱더 성숙된 인간으로 키워주고 삶의 희노애락을 깨우쳐주고 마음껏 일하고, 일 할 수있는 즐거운 일터를 마련해주고 부자꿈까지 이루게 한 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정부정책에 감사함으로 가슴이 뭉클해 진다.

황홀하고 번화한 서울이 유혹해도 나의 직장과 두터운 인연을 맺은 손님들과 헤어질 수가 없어서 이사가지 못하고 아파트와 원룸이 손짓해도 딸처럼 의지하면서 믿고 살아가는 80대 할머니들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어서 아직도 좁고 불편한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할 (안), 매력넘치는 황홀한 (성),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맞추니 안성맞춤의 도시인 안성을 나는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르며 어머니의 고향처럼 사랑한다.

안성에서 살고 있는 중국계 외국인 2900여 명 중의 한사람으로 더 사랑해야할 나의 이웃들과 더 나누어야할 이야기들을 마음껏 나누면서 마음이 피우는 꽃인 나의 활짝 핀 웃음꽃을 모든 인연에게 선물하는 웃음배달부가 되고 싶다. 나의 <청와대>에서 <대통령>생활을 끝내는 그날까지 사람들 가슴속에서 보석처럼 소중하고 반짝반짝 빛 뿌리는 중국아줌마로 살아갈 것이다.

<동포타운신문 10주년 공모 최우수상>

   

 2. 엄마의 손                   

 

 낙엽이 툭툭 떨어져 내린다. 낙엽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쳐다보니 엄마 생각,앙상한 나뭇가지가 엄마의 강마른 손이 되어 엄마 얼굴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낸 지 5년 세월이 흘렀건만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돌아오면 엄마생각에 누구라도 붙잡고 긴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의 엄마는 크지 않은 체구에 특별히 기억력이 비상했고 너그럽고 누구와 성내는 일이 없다보니 동네에서는 엄마의 이름보다 "법없이 살 사람"이라고 더 많이 불러주셨다. 9남매를 키웠지만 약도 의원도 없는 시골에서 병으로 다섯 자식을 요절시키고 겨우 4남매가 남았는데 제일 약골인 나에 대한 사랑이 특별히 강하셨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 시절에 풋옥수수며 채소들을 머리위에 이고 고개 몇 개를 넘어 시장가서 팔아서는 나의 옷들과 학용품들을 사 주셨다

언 땅이 녹기 전부터 달래와 민들레를 캐시고 가을걷이가 끝난 허허벌판에서 한 알 한 알의 콩알을 줍고 옥수수 이삭줍기 감자알 캐기를 하여 살림에 보태셨는데 빨갛게 언 손은 숟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어있었다. 겨울이면 퉁퉁 부은 손으로 우물가의 얼어붙은 얼음을 끄시고 동네 분들이 넘어질세라 마른 흙을 가져다 우물가 주위에 펴고 홀로 사는 할머니 집에는 늘 물을 길어다 주셨다. 내 기억속의 엄마 손은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는 부지런한 손, 빨갛게 얼어서 부어있고 이곳저곳 상처가 많은 손, 음식을 맛나게 하는 요술 같은 손, 가끔씩 속앓 이할 때에 어루 쓸어주시면 금방이라도 아픔이 멎는 약 손이였다

엄마는 그 손으로 대학시험에 낙방해서 슬프게 우는 나의 등을 다독여주셨고 내가 고열로 앓고 있을 때 몇 리길을 걸어 보온병에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와서 녹기전에 어서 먹으라던 사랑의 손이였으며 시골에서 힘든 일 한번 시키지 않고 공부만하라면서 묵묵히 뒤바라지를 해주던 든든하고 억센 손이였다

시집갈 때에는 그 손으로 이불 3채를 손수 다듬이하시고 한 뜸 한 뜸 지어서 주시면서 하얀 이불안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법 없이 살아가는 정직한 사람으로 되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시집간 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1년에 한두 번밖에 찾아뵙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 부지런한 두 손으로 돼지 길러 팔아서 모은 돈 ,산나물 뜯어서 모은 돈들을 목돈으로 주시고 고추가루며 고추장 강낭콩들을 아름아름 챙겨주셨다, 엄마의 사랑을 받기만하고 효도를 못한 채 한국에 나오면서 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3년만 돈 벌고 오겠으니 그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한국에 나온 후 매일매일 힘들다고 웨치며 살고 오직 돈에 대한 욕심과 또 불법체류자로 살다보니 3년이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힘든 식당일에 지쳐서 잠시 엄마라는 존재를 잊고 전화도 자주 못하는 불효녀로 되여버렸다.

4년이 지난 가을 엄마가 위독하니 속히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연길 직항이 없어 장춘으로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엄마에게 드릴 고급 원단의 옷을 삿다.

장춘 공항에 도착하니 엄마가 더 위독하다는 전화가 오자 나는 급급히 장춘에서 용정까지 택시를 타고 제발 이 막내딸이 갈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엄마에게 수십 번 빌고 또 빌면서 믿지도 않던 하느님 부처님에게 두 손을 맞잡고 소원을 들어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하면서 애간장이 타고 피가 마르고 속이 바질바질 타서 연기가 난다는 말의 의미를 가슴깊이 절감하였다.  장춘공항에서 용정시골까지 8시간을 달려온 택시기사에게 비행기 요금과 비슷한 거금을 드리고 엄마를 만났을때 엄마는 눈도 뜨지 못하고 가는 날 숨만 내쉬고 있었다.

왜 인제야 왔느냐고 묻는 듯한 엄마의 얼굴 표정, 눈확이 우묵하게 꺼져 들어 간 엄마의 수척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니 허무함으로 목구멍은 솜으로 틀어막은 듯이 말문이 막히고 두 다리는 물먹은 햇솜처럼 나른해지면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과 한 많은 아쉬운 일들, 엄마의 사랑을 받던 많은 일들이 영화 속의 한 장면 한 장면처럼 밀려오고 다가오고 또 지나가고, 평생을 자식위해 가정위해 산전수전 다 겪으시며 허이 허이 달려오며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 돈 때문에 자식들 모두 한국으로 나와서 마지막 임종에도 빈 껍데기인 몸으로 홀로 누워있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엄마의 두 손을 맞잡고 오열을 터뜨렸다,

"엄마 늦게 와서 미안해요,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3년이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요"하며 울음보를 터뜨리는 나의 목소리를 알아들으셨는지 엄마의 눈귀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엄마의 눈물을 씻어드리고 말하지도 못하고 눈도 못 뜨는 싸늘한 몸으로 점점 굳어져가는 엄마에게 급급히 한국에서 사온 새 옷을 속옷부터 양말까지 바꾸어 입혔다. "엄마,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하얀색 옷인데 금빛의 꽃무늬가 비껴 있어요, 한국에서 번 돈으로 고급 옷을 샀는데 빨리 눈 뜨시고 일어나서 몸에 맞는가 봐요" 하면서 엄마 손을 붙잡고 애원했지만 엄마 손은 힘없이 아래로 처지고, 자식을 보듬어 사랑을 주실 때의 지칠 줄 모르던 손이 건강해서 "쇠로 만든 사람" 이라고 불려 지던 엄마가 가는 호흡으로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그렇게 엄마의 손을 잡은 지 두 시간 후에 엄마는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떠났다는 두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나가셨다. 엉엉 흐느끼며 두 시간밖에 입어보지 못한 새 옷을 벗길 수가 없어서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가위로 잘라냈는데 썩뚝썩뚝 가위 소리가 나의 심장을 잘라내듯이 아프게 느껴오면서 자신의 불효에 후회의 눈물이 샘솟듯이 쏟아져 나왔다. 엄마에게 돈 넣을 주머니도 없는 수의를 입히면서 굽힐 수도 펼 수도 없는 나무 막대기 같은 두손에 100원짜리 인민페 한 장씩 간신히 잡아드리고 저 멀리 하늘나라에 가서 이 막내딸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용돈으로 하루만이라도 즐겁게 호강해 보시라면서 넑두리를 하였다.

한평생 자식 사랑만하고 주기만하면서 살아오신 엄마, 간염으로 누워계시던 아버지의 병시중으로 여행한번 못하시고 몇 푼 안 되는 휴지 돈을 아끼려고 신문종이를 쓰시고, 오랜 고질병인 두통을 싸구려 "정통편"약으로 달래시며 몰래 견디신 엄마, 나의 사진 뒤에 투박하고 굵은 손으로 "내 딸 숙이"라고 쓰시고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며 보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시고, 세상 뜨기 며칠 전에도 큰 길 어귀에 나가서 자식들을 기다리고, 잠결에도 내 이름 숙이를 불렀다는 동네 분들의 말을 들으며 그런 엄마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고 엄마의 아픈 손가락으로 살고 엄마가 걱정으로 가슴앓이 하는 딸로 살기만 했으니 엄마에게 평생 갚아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큰 죄를 진것만 같다,

단 하루라도 빨리 찾아왔다면,아니 몇 시간이라도 빨리 달려왔더라면 엄마의 눈을 보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고 엄마의 손을 잡고 마지막 유언이라도 들을 수 있었으련만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엄마를 보면서 목 놓아 통곡해도 뼈저리는 후회와 자책감만 밀려왔다. 장례식 날 엄마를 엄마 고향인 양지바른 언덕에 모시고 엄마의 산소앞에서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였던 내가 엄마 산소의 풀도 다듬고 엄마에게 맛있는 음식도 섬기면서 엄마 산소를 지키는 보배 손으로 되여 지금까지 못했던 효도를 인제부터라도 하려고 1년에 한번 씩 꼭 찾아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여 그 약속을 지키려고 엄마가 떠나간 가을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엄마 산소를 찾아 고향으로 달려간다

고향의 가을에는 엄마가 있고 엄마만의 특유한 끈적한 냄새가 풍겨오고 엄마가 버섯 따던 솔밭이 두 팔 벌리고 반겨준다

고향의 바람은 엄마 손처럼 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타향에서 힘들고 지쳐있던 몸을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엄마가 들려주던 옛날 옛적의 이야기들과 엄마가 즐겨 부르던 노래들이 도란도란 들려온다

고향의 가을에서 엄마가 해주시던 손 두부 맛, 달래냄새를 음미하며 세상에서 제일 이쁜 거쿨지고 검버섯 가득 돋은 엄마의 손을 잡고 그 옛날 오솔길을 산책하며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살아계시는 엄마, 엄마 산소앞에서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이쁜 효녀 숙이로 돌아와서 엄마라는 그 이름을 높이 부르며 엄마가 혹시라도 들어줄가 허공에 대고 목 터지게 불러본다

"엄마 미안합니다, 엄마 보고파요, 엄마 그립습니다"

   <설원컵 문학상 공모  최우수상>


 

3.태극기를  찾아 상해로

   

 
2019년은 3.1독립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 뜻깊은 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의 흔적을 찾아 역사 문화를 답사하려고 상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해에 도착한 이튿날인 2월 4일 남편과 함께 임시정부 이동 경로를 따라 첫번째 목적지인 상해 임시정부 청사로 찾아갔다. 상해 황포가의 한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임시정부청사는 지하철 신천지역 6번 출구에서 200m거리의 평범한 주택가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입구 앞 양옆과 주위에는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긴 집에 띄엄띄엄 검은색 문들이 달려있고 그중의 한 집 앞에 중국어와 한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라는 표지판과 유적지 관광 안내 등 현판들이 걸려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얼기설기 연결되어있는 전선줄, 청사 맞은편 집에서 살고 있는 주민이 걸어놓은 온갖 빨래들, 지어는 빨간색 속옷까지 바람에 날리고 있는 낯선 풍경과 마주하니 이곳이 바로 내가 그토록 찾아보고 싶었던 유적지가 옳은지 두 눈을 의심하며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놀라움과 실망에 빠졌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독립운동을 하였던 청사로써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부인데 너무 초라하고 허름하여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협소한 공간을 마주하니 무거운 돌에 가슴이 짓눌리듯이 갑갑해지며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임시정부 유적지라고 씌어 진 현판 바로 옆에 있는 매표소에서 인민페 20위안 (한화 3300원)으로 입장권을 끊고 실내로 들어가면 영상실에서 임시정부의 역사와 발자취를 소개하는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영상을 본 후 층별로 순서대로 관람할 수 있었는데 1층에서 작은 회의실과 바로 세 발자욱 옆에 있는 2인식 식탁이 마련된 부엌 그리고 비좁게 자리하고 있는 가마솥을 만나볼 수 있었다. 

내부에 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관리인원이 나누어주는 비닐 덧신을 신발 위에 씌우고 한사람이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좁고 경사진 나무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씩 기다싶이 걸어서 2층으로 올라가면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던 김구선생의 집무실과 침실, 세 발자욱 옆에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집무실과 숙소를 볼 수 있었다.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방에 책상 하나가 놓여있는 회의실에서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태극기였는데 그 태극기에 시선이 집중되면서 경건함과 숙연함으로 온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그 시절에 사용했던 태극기는 태극문양이 세로로 되어있는 팔쾌였는데 천안독립기념관과 안성 3.1운동기념관에서 만났던 태극기를 또 이곳에서 다시 보니 아주 오래전의 익숙한 얼굴을 만나 본듯이 만감이 교차되며 짜릿한 감동과 울렁거림이 내 가슴속 구석구석에서 꿈틀거렸다.

좁은 나무침대, 낡아빠진 선풍기, 보온병, 소박한 필기구들과 독립지사들이 사용하였을 몇 개의 찻잔, 빈 의자들, 하나하나의 소품들이 그들과 함께 했었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미어지는 울컥함이 솟아올랐다.

험난한 그 시대에 감시가 심했던 시절 빈민구의 열악한 환경에서 굶주림으로 하루에 한끼의 식사로 겨우겨우 연명해나가며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지만 임시정부 청사의 간판을 하루도 내린 날이 없었다는 설명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며 그들의 발자욱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3층에는 임시정부와 관련된 각종자료, 정부요인들의 활동사진, 청사를 다녀가신 역대 대통령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의원 30여명이 모여 설립한 대한민국의 산실, 민족혼의 기개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 민족의 유산인 대한민국을 있게해준 뿌리, 희생된 독립투사들의 얼과 넋이 살아있는 곳에서 그들의 익숙한 이름 낯익은 사진을 바라보니 100년 전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독립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환각에 빠졌다.

 중국 속의 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사진촬영으로 기록을 남기고 그분들과 함께 사진도 찍으면서 한층 더 가까이 만나보고 싶었지만 청사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너무 안타깝고 아쉬웠다. 

전시관 끝자락에는 많은 관람객들이 기부금을 내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있었는데 20여명 관람자 대부분이 년세가 지긋한 한국인으로 보여졌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단체명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나도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나의 기부금을 청사관리 후원금으로 잘 유지해서 감사함을 전달하고 또 유적지가 더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편과 나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넣었다. 

한 장 한 장의 사진과 소품들, 전시된 모든 해설을 마음과 눈 머리 속에 더 많이 담아가려는 욕심으로 전람했더니 다른 관람객들이 30분이면 끝마친다는 관람을 무려 두 시간 넘게 관람했어도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으로 청사 문을 나서니 상해의 하늘도 나의 무거운 마음처럼 검은 구름에 뒤덮인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부을 듯이 잔뜩 흐려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상해에서 대한민국 아픔의 역사와 함께 공존하는 특별한 지역, 공산당 제1차 당대표 대회를 열었던 아담하고 고풍적인 창당기념관과 빛나는 도시의 상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좁고 한적한 거리의 한 귀퉁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서로 다른 문화들이 마주 보며 미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100년 전의 이름할 수 없는 아리숭한 냄새와 체취에 젖어 깊은 사색 속에 빠져 들어갔다.

100년의 긴긴 세월을 견뎌낸 빨간색 벽돌 청사를 뒤로하며 걸음을 옮겼어도 삐꺽이는 그 나무계단 소리가 어느 독립투사의 힘든 신음소리처럼 들려오고 이곳 저곳에서 "나의 소원은 대한민국의 독립이오" 하는 목소리가 메아리로 들려오며 몽롱한 환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벼운 묵념을 다시 한번 하고 임시정부 청사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해있는 루쉰 ( 홍커우)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루쉰공뭔에서 200m 걸어 들어가면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1층 기념관에서 윤봉길의사의 동상과 유언시, 김구선생의 시계와 자신의 시계를 교환했던 회중시계, 태극기를 배경으로 가슴에 선서문을 붙이고 왼손에는 수류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찍은 사진이 전시되었고 2층에서는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었다. 일본 천왕의 생일 겸 축하행사에서 일본군 수뇌부를 향해 물통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등을 처단한 의거현장에서 큰 바위에 중국어와 한자로 그의 업적을 소개한 글을 읽으며 25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감한 삶에 머리가 숙어졌다.

 윤봉길 의사의 "매헌"이란 호를 따서 "매헌"이라고 이름 지은 빨간색건물의 기념관, 또 앞마당에 200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관리하는 중국정부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이 계절에 봉우리를 살짝 터뜨린 매화꽃을 보니 윤봉길 의사를 만나듯이 반가웠고 우리의 영웅이 자신이 좋아하던 매화와 늘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마음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시계를 보면서 그의 체취를 느끼고 십자가 형틀 아래 거적따위에 무릎을 꿇린 채 포승에 묶이어 총살형을 당하는 마지막 모습의 사진을 보니 그의 아픔을 나누지 못한 애석함과 일제의 만행에 저도 모르게 빨라지는 심장박동소리를 느끼며 가슴이 터질듯한 분노로 숨 가쁜 시간을 보냈다.

 매헌 기념관에서 전람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 사이에 창살같은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2월에 내리는 비라고 믿지 못할 정도로 마구마구 쏟아졌는데 길가의 가로수며 매화나무며 착잡한 내 마음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크나큰 슬픔으로 목구멍까지 올리미는 응어리를 토해버리고 싶었던 나는 남편이 건네주는 우산을 받지 않고 온몸으로 큰 비를 맞아가며 매화나무를 부여잡고 참고 참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슬픔과 눈물을 큰비와 함께 맘껏 울고 흘렸더니 뇌를 씻은듯한 청신한 느낌으로 무거웠던 마음과 머리가 가벼워졌다.

이튿날 중경에 도착하여 1940년부터 5년간 사용했던 중경 임시정부청사에서 상해 청사의 12배나 큰 규모의 5개 건물에서 사진촬영도 자유롭게 하면서 전람하였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김구선생의 빛바랜 흉상사진, 광복을 맞아 오랜 타향살이에 마침표를 찍고 환국기념으로 청사계단에서 태극기를 손에 꼭 잡고 찍었던 정부요인들의 빛바랜 기념사진들, 100년이 흐른 후에 그 청사계단에 서서 그날의 그 순간을 느껴보니 또다시 크고 작은 감격과 설레임으로 목이 메어오고 짜릿한 전률로 눈굽이 뜨거워졌다.

 전람하는 내내 사연 하나하나에 마음이 아프고 숙연해지는 마음이 들고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독립투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다 같은 단군의 후손이고 같은 고구려의 피가 흐르고 같은 말과 같은 글을 쓰는 한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이었을 것이다.

같은 한민족이었기에 긴 세월을 떨어져 지내면서도 우리말과 우리 글을 잊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고 용정 3.13운동, 청산리 전역, 봉오동전투에서도 하나로 뭉쳐 싸웠기에 나라의 독립이 가능할 수 있었고 정부에서도 동포라고 포용해주고 좋은 정책으로 반겨주게 되었다.

 100년 전의 독립영웅들이 있었기에 100년 후에 우리 가족도 할아버지의 탯줄이 묻힌 고국에 와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신화처럼 동경하던 무릉도원에서 딸과 남편은 회사에 나는 식당에 근무하면서 같은 문화가 주는 편안함과 같은 말과 같은 글을 쓰는 익숙함 속에서 각자가 자기의 꿈을 펼쳐가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3년 전에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에서 후원하는 "민족의 정체성 찾기 교육"에 참여하여 천안독립기념관, 백제유적지를 탐방한 후부터 고기가 물을 만나 즐기듯이 한국역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역사탐방에 중독되어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민족의 뿌리와 한국사를 배워가고 유적지가 세계 유네스코에 선정될 때면 가슴 뛰는 뿌듯함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50대 후반의 평범한 가정주부이지만 무궁화꽃을 보면서 애국가가 저도 모르게 불려지고, 3.1운동기념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3창을 목청껏 웨치고, 안성 위안부 동상 제막식에 후원금을 헌납하고, 상해임시정부 매표소에서 한화와 카드불가로 중국지페가 없어 관람을 포기하는 한국 관람객들에게 주저없이 입장권을 사서 선사하는 마음은 한민족의 피가 흐르는 한사람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100주년이라는 의미가 뭉클하게 다가오고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는 역사적인 시점에 나도 한국인들과 똑같은 애국심으로 동질감을 느끼며 구정휴가의 시간을 내어 남편과 동행하여 임시정부 유적지 체험을 하였더니 책에서 보지 못했던 다채로운 이야기와 더 많은 내용을 알게 되어서 더 뭉클하고 더 숙연한 마음으로 독립영웅들을 공경하게 되었다.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대한민국 인천에서 상해까지 1시간 40여분, 상해에서 가흥 김구선생피난처까지 버스로 두시간, 김구선생 피난처에서 항주 임시정부청사까지 버스로 1시간 30여분, 항주에서 중경까지 비행기로 3시간 30분이란 시간을 이동하면서 민족의 역사를 더 많이 더 가까이 더 세세히 탐방하면서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태극기 따라 떠난 역사 여행에서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를 돌아보고 어둡고 무거운 유적지답사로 5박 6일의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부부가 한마음으로 동행하여 순간순간을 공감하고 중국동포라는 한사람으로, 한민족이라는 뜨거운 이름으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해에 역사적현장을 찾아가서 감사함을 표현하는 의미있는 체험을 하니 뿌듯하고 특별한 최고의 여행을 보냈다. 

역사 유적지 여행을 마치며 우리의 역사를 지켜주고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에게 편안한 일상을 지켜주신 독립투사들에게 내가 배운 가장 따뜻한 말과 무거운 말로 머리 숙여 삼가 인사를 드린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 KBS 체험수기 공모 특별상>


 

4. 예순, 새로운 출발점에서          

 

어느덧 올해 나이 예순이 되었다. 마음은 청춘인데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온 몸으로 느낀다. 백세 인생 중반을 넘어 예순의 문을 노크하니 건강관리에 신경 쓰이고 약병의 글씨가 아른거릴 때면 가슴 짠한 시간에 잠겨본다. 뒤돌아보면 한 남자의 아내로 두 딸애의 엄마로 안정된 직장에 근무하며 조용한 일상을 살아왔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예순이 되는 나이에 평범하던 일상이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코로나 확산여파로 2주 휴직이 4주가 되고 4주 휴직이 7개월로 이어지고 길고 긴 장기휴직 끝에 15년을 근무하던 식당 종업원 일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코로나 직격탄을 온몸으로 맞고 십자로의 갈림길에 섰다. 인생 2막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헝클어진 실타래를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시작을 찾는 것이 힘들겠지만 시작이 있는 실은 끝이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지인들은 편하게 손주를 돌보라고 권유했지만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나는 여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인생은 예순부터 시작이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하고 1년, 2년, 15년을 향하여 뛰어보자고 다짐했다. 하여 평소에 관심 있었지만 시간 때문에 못했던 일들을 다시 찾아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 공부부터 시작하였다. 끈기 하나로 몇 번의 코로나 검사와 힘든 실습 과정을 거쳐 "요양보호사 자격증" "장애인 활동지원사 자격증" "스마트 폰 활용지도사 자격증" "컴퓨터 인터넷 활용 수료증" "생애 설계와 행복 디자인 수료증" "미래 교육을 위한 구글 도구 수료증" "SNS마케팅기초" "지금은 자기경영 시대 수료증" 을 취득하였다.

"언텍트 시대에 나를 위한 시간들" 이란 수료에 참여하여 고령화 시대의 후반생을 디자인 하면서 부지런한 꿀벌이 꿀을 채집하듯이 나만의 시간표대로 분주히 맴돌아 쳤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지금까지 머물러 있던 익숙함과 편안함을 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장애인 자립생활 센터" 에 이력서를 제출했더니 힘든 면접시험을 통과하고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취직하였다.

첫 인연으로 만난 이용자는 뇌병변 중증장애 1급으로 철이 (가명) 라고 부르는 41세 되는 남자였는데 대소변 처리부터 목욕까지 전면 지원해야 했다. 처음 철이를 만났을 때 1,68cm되는 키, 35kg되는 가냘픈 체중, S자로 되어있는 깡마른 척추와 변형된 얼굴을 보며 놀라움으로 도저히 잘해나갈 자신감이 없었다. 휄체어에 끈으로 묶어 놓고 양치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충격이었고 언어 장애로 말 못하고 누워서 한쪽 식도로만 식사하고 알 수 없는 표정과 눈짓, 손짓 하는 것을 보면서 무서움으로 당장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낯선 사람과 생소한 일, 그리고 빨대로 물을 먹여주는 것부터 맨땅에 헤딩하듯이 우왕좌왕하며 긴장감과 두려움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취직으로 한껏 부풀었던 설레임과 출발, 그 신선함과는 달리 현실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가족을 대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케어했지만 하루 내내 밥을 못 먹었다는 손짓과 목욕을 못했다고 엄마에게 표현할 때는 실망과 배신감으로 세상 못 할 일이라고 펑펑 눈물을 쏟으며 카메라를 설치해서 확인해달라고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사직할 생각으로 고민했지만 지능장애여서 때로는 억울하게 표현하고 또 간절한 눈빛으로 "선생님 최고" 라며 각각 다르게 표현하는 철이를 이해하고 사명감 없이 할 수 없는 직업을 선택했으니 직업인의 프로 정신과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 되겠다고 다시 마음을 먹었다.

폭염 주의보가 이어지던 어느 날 철이는 휄체어를 수리해 달라고 했다. 두 손잡이가 고장나서 삐걱거렸고 두 바퀴는 공기가 없어 납작했는데 지금 이용하는 휄체어를 이용하고 수리는 삼복더위가 지난 후에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수리부로 향했다. 찜통 더위에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좌로 위로 회전하는 바퀴로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1시간 만에 수리부에 도착했더니 이렇게 망가진 휄체어를 어떻게 밀고 왔는가고 수리부 주인은 놀란 얼굴로 혀를 끌끌 차는 것 이었다.

휄체어를 밀고 돌아오는 길에는 예보에도 없던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 휄체어 때문에 버스와 택시를 이용하지 못하고 온몸으로 소낙비를 맞으며 집에 도착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은 나를 보자 철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엄지척을 내밀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힘들었던 피로가 방금 지나간 소낙비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휄체어에 부딪쳐 이곳저곳 멍든 다리와 뻐근하게 아픈 어깨로 휴식하고 싶었지만 가족을 만나러 가는 시간이 다가와서 휴식할 수도 없었다. 대소변으로 젖어있는 기저귀를 바꾸고 외출복을 입혀야 하는데 철이가 옷 입기를 거부하고 양말 신기도 거부했다. 약속시간은 다가오는데 조급함으로 서랍의 양말을 모두 꺼내 테블 위에 놓고 한 컬레씩 보여주었지만 수십 개의 양말을 보면서 자기 양말이 없다고 고집하는 철이를 보며 답답함으로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이렇게 양말을 신겨주는 작은 일에 한 시간을 보내고 한끼 식사도 한 시간을 이용해서 대접하고 물은 빨대로 한 모금씩 마시는 것을 기다리면서 울지도 웃지도 못할 돌발상황에 부딛치는 것이 일상으로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인내력으로 웃음 짓는 자신이 때로는 대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대변 처리가 힘들어서 쩔쩔 매며 실수를 연발하던 왕초보 지원사가 인제는 그의 표현을 이해하는 척척 박사로 되고 넉살 좋은 수다쟁이가 되어 소통하면서 사이 좋은 짝꿍으로 되었다. 올림픽 대회 편싱 경기를 보면서 선수들처럼 빨간색 빨대와 파란색 빨대를 들고 서로 경쟁하고 먹방하는 방송을 보며 라면 한 그릇을 한 번에 먹어보는 흉내도 내면서 우리만의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 길가의 들꽃을 꺽어 철이의 침대곁에 놓아주고 첫눈 풍경을 함께 즐기고 휴가받았던 남편의 생일날에도 철이 가족에서 긴급지원을 요구하니 급급히 뛰어가 케어하고 그의 눈높이에 맟추어 어린애처럼 춤추고 책을 읽어주며 진심을 전달하니 나의 일상도 풍요롭고 다채로워졌다.

꽂꽂이 수업에서 철이와 함께 만든 꽃이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7만원에 판매될 때는 철이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준 것같아 아들을 보는 엄마의 마음으로 기쁜 시간을 보냈다. 장애인 센터에서 주체한 "가을 풍경담기 행사" 에는 단풍이 물든 나무아래에서 웃고 있는 철이의 모습을 찍어 "낙엽과 코스모스" 라는 주제로 사진전에 출품했는데 입선작으로 선정받아 상을 받고, 받은 상품을 철이에게 줄 때 철이가 내미는 엄지척을 보며 따뜻한 진정을 느꼈다. 연말에 "최우수 지원사" 로 선정되어 상금을 주며 표창 받을때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을 받은듯 하고 " 미래를 준비하는 슬기로운 생활" 이란 글로 지역 신문에 사진과 함께 소개되고 유튜브로 알려질 때는 온 세상을 다 가진듯이 활동지원사로 취직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적인 코로나로 모든 사람들이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철이와 잡은 인연의 끈이 끈끈하게 이어져서 신비롭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었지만 또 새로운 직장에서 백신접종도 최우선으로 받는 혜택도 누렸으니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최고의 보상을 받은 것 같다. 코로나를 걸림돌이라고 하지만 디딤돌로 삼고 한 박자 쉬어가는 쉼표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여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고 많은 것을 얻었으니 활동지원사 홍보대사처럼 일자리를 잃고 집에서 쉬고있는 지인들에게 정보를 공유하며 새 출발하라고 격려 전화를 보낸다.

예순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코로나 시대를 살아보니 지극히 당연한 일상에도 봉급을 받는 기쁨, 코로나 시대에 일할 수 있다는 긍지감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마음에서 새삼스럽게 감사함을 느끼고 인생길 걸어가는 여행길에 철이라는 동행을 만났으니 얄미운 코로나가 어느 정도 고맙기도 하다. 뚱뚱한 몸매처럼 마음도 살찌고 넉넉한 사람으로 친절한 "감정 노동자" 로 잘 웃는 지원사 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싶다.

오늘의 도전과 노력이 먼 훗날 자랑스럽게 회고할 수 있도록 부스터를 달고 새로운 출발점에서 신들메를 동이고 걸어가야 되겠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언젠가는 기적이 나타나 철이의 손을 잡고 중국 여행에 함께 가며 웃고 즐길 수 있는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특별한 세계에서 특별한 하루를 시작한다.

 < 일본세계조선족 글짓기 대회 우수상>

 

5. 국화꽃 피는 가을에

 

가을이다.

국화의 계절이 돌아왔다.

국화는 온 누리에 내린 햇볕의 은총을 받아 무더기로 여기저기에 흐드러지게 피었다.

노오란 구름을 펼친듯한 고운 자태, 찬서리를 두려워하지않고 단아한 모습으로 수줍게 미소하는 꽃송이는 너무 매혹적이다.

국화는 매화,난초,대나무와 함께 4군자의 하나에 속하지만 스스로를 낯추고 겸양의 미덕을 갖춘 꽃으로 평범하면서도 수수하여 서민의 꽃으로 불리우며 모든이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조용히 관찰해보면 국화꽃은 나의 인생과 닮은곳이 너무 많은것 같다.

한국에 입국하여 음식점에 취직한후 한복희 사모님께서 국화라고 이름짓고 정답게 불러준 이후부터 오늘까지 국화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국화꽃의 매력에 푹 빠져서 아예 한송이의 국화꽃이 되어버렸다.

10여년전 낯선 타향땅인 한국에서 집 생각 고향 생각으로 힘들고 외로워할때 식당의 사모님께서 많은 배려와 도움을 주셨다.

생활의 필수품인 비누와 창문커텐,선풍기,무엇이 필요하면 무엇을 선물로 주면서 도와주었는데 그때 사모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 시련을 이기지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집 생각에 누구보다 집착해서 하루에도 몇번씩 눈물을 떨구었고, 한가닥 슬픈 노래에도 펑펑 눈물을 쏟고,일하면서 실수를 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면서 살뜰하게 보듬어 주셨다.

손편지로 <<열심이 사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국화꽃처럼 활짝 웃으면서 삽시다>>하고 칭찬글도 적어주셨고 비타민이며,건강식품이며,계절에 맞게 옷을 사주었고 1년내내 먹을 김장 김치를 듬뿍듬뿍 담아 주셨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일은 남편과 딸애의 취직을 도맡아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친정엄마의 제사로 중국에 3번 다녀올때마다 너무나 많은 사랑과 배려를 주셨다.

설 명절과, 추석 명절 ,생일까지 선물을 두둑히 챙겨주셨고 4대보험도 가입시켜주어서 많은 혜택을 받고있다.

사모님과의 인연으로 한국에서 사모님의 여섯남매와 가족처럼 오빠 동생하면서 인정을 쌓아가고 있다.

한국은 정이 넘치는 나라여서 식당에서 일하면서도 너무 좋은 인연들과 만나고 있다.

단골손님인 강혜연 언니는 회사에 출근하면서 야식으로 주는 라면을 먹지않고 하나하나 모아서 끼니를 거르지말고 식사하라면서 택배로 보내주었는데 정성이 담긴 컵라면을 200봉지도 넘게 받았다.

목욕탕의 사장님으로 계시는 74세의 할머니께서 서비스에 만족한다면서 10만원 돈을 팁으로 줄때에는 너무 황송해서 몸둘바를 몰랐고 지체장애자 할아버지가 꼬깃꼬깃접은 5천원을 팁으로 주면서 <<웃는 얼굴이 부자집의 맏며느리같다>>고 칭찬해줄때 목이 꺽 메여서 할말을 찾지 못했다.

이렇게 내가 만난 사람들이 겸손과 나눔의 미덕을 가르쳐주었고 따스한 사람사는 세상을 가슴으로 일깨워주어서 너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수년전에 하루에도 몇번씩 울고 실수를 연발하던 왕초보 서빙이 인젠 넉살좋은 아줌마로 여유롭게 담소하고 모든일을 감내할수있는 직원으로 탈바꿈 하였다.

사장님 부부에게서 (보배)라고 불리우고 가계의 (꽃)이라고 칭찬해주고 가족과 똑같은 대접하고 믿음을 받으니 날마다 웃음과 노래가 넘쳐흐른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어느곳에 뿌리를 내려도 꽃을 피우는 국화꽃처럼 강한 생명력을 키우는 인내를 배웠고 어려운 환경에서 함부로 굴어도 악착같이 삶을 지속하는 국화꽃처럼 생명을 이어가는 지혜를 배웠고 그윽한 향기로 주어진 모든것에 용납하고 감사하고, 변함없는 그 빛갈, 그향기 그대로 오래오래 빛뿌리는 국화같은 꽃으로 피여나게하는 인생수업을 받은것 같다.

이름이란 사람이 살고있는 집의 문패이고 말은 그사람의 얼굴이고 얼굴은 그사람의 명함이고 행동은 그사람의 향기라고 생각한다.

국화라는 이름은 사모님이 지어주신것이지만 빛과 윤기로 이름을 빛나게하는것은 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이름에 도금한 버젓한 명함장도 없고 수수한 들꽃처럼 국화라는 이름밖에 적을것이 없다.

하지만 깊은 시련과 고통의 몸부림으로 피여난 국화꽃처럼 가을의 농익은 향기가 저절로 넘쳐흐르는 가을여인이고 국화곷처럼 활짝웃는 얼굴이 나의 도금한 명함장이다.

얼굴도 몸매도 내세울곳이 없고 실팍한 몸매에 나이도 50대를 넘어섰지만 나의 재산인 건강한 신체와 즐거운 웃음과 소박한 진정이 조화되여 50대의 내 나이에 주렁주렁 매달려서 국화곷 향기가 솔솔 풍겨나고 있다.

한국이라는 이 삶의 간이역에서 국화로 살면서 눈길로 하늘의 원고지에 시를 쓰고 국화꽃의 꽃살로 대지에 수를 놓으면서 꿈꾸는 여자, 배움에 꿈틀거리는 여자로 부푼꿈을 꾸고있다.

국화꽃은 신이 모든꽃의 완성품으로 제일 마지막으로 정성을 다해서 빚은 꽃이라고 한다.

성숙된 아름다움으로 사색의 계절인 이 가을날 지나온 인생여정을 돌이켜보니 내가 선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의 꽃인 완벽한 국화꽃을 피워낸것이 너무 대견스럽고 국화꽃이 나이고 내가 국화꽃이라고 생각한다.

20개의 테블로 30여평되는 작은 음식점에서 나는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따뜻한 눈길과 조용한 웃음을 보낸다.

손님들이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웃고 때로는 어줍짢은 위로도 건네고 한사람 한사람 그 얼굴을 익혀가면서 언젠가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칠때 정답게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그런 인연을 이어가려고 한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좋은일도 많이하면서 나의 마음속에 시들지않는 국화곷 한송이를 날마다 키워간다면 나의 인생은 향기로와지고 세상은 아름다워질것이다.

이것이 국제인으로서 가져야할 나의 마음가짐이고 또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국화라는 이름을 지키고 빛내며 살아가고 이름에서 향기가 나고 잔잔한 감동소리가 돌돌 흐르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엷은 미소를 짓는 한송이의 가을 국화로 살아갈때 진정으로 국화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노랗게 통통 익은 가을이 내가 가는 길우에 황금의 국화꽃 주단을 깔아놓고 어서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렇다.

나 성숙되고 완미한 가을 여자- 국화꽃으로 살아갈것이다.

< 길림신문 해외판 수필공모 우수상>

고송숙 프로필

연변작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계간 "시산맥" 특별회원
수필 '봄과 가을' 연변TV공모 금상, 수기 '시어머님의 유산' 연변일보 평강컵 공모 1등상.  2017년 청암문학 수필부문 신인상으로 한국문단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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