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 잡담
2.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이다
3.  아내의 의무

 

1. 자유 잡담

 

담연하고 해탈하는 것이 마음의 자유고, 격식 없고 홀가분하고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심령의 휴식처이기도 한 것이 자유이다.

자유란 말이 내 머리에 인상깊게 꽂혔던 시점이 바로 71년 초가을이었다. 그때 내가 중학 2학년생이었다. 어느 하루 공사公社보위조(파출소 전신)에서 근무하던 맏형이 뜬금없이 시립 탄광에 직장을 옮긴다고 했다. 집 식구들이 의아해 하는 모습에 맏형이 해석했다.

“공사에 출근하니 너무 힘들고 전혀 자유가 없어요”

맏형은 특히 자유란 말에 역점을 두었다.

맏형은 64년도에 군 입대해서 69년도 제대했다. 퇴역 후, 정식 편제로 공사 농중(초중과고중)에 들어갔다. 당시 교사校舍는 69년도 전시战事를 대비해서 건축한 목단강군분구 야전 병원이었다. 공사소재지와는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산속에 위치했다. 맏형은 거기서 정치 교원, 중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주일에는 중심소학교운동장에서 교원들에게 충성무忠诚舞를 가르쳤고, 전 공사민병훈련을 지도했다. 당시 모주석께 충성하는 열광 시대, 가슴에 단 주석 마크가 누구의 것이 더 큰가를 비기는 시대다. 쏘련(러시아)사회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후방에서도 만전의 전투태세를 갖추는 비상시국이었다.

맏형은 학교에서 1년간 출근하다가 공사보위조로 전근했다. 주로 공사간부들의 이력 심사를 책임졌다. ‘정치 통수’ ‘성분 제일론’의 극좌 경향이 요동치는 전성시대라 업무량이 과중했다. 주일에도 파견검사外调로 나갔다. 성내는 물론 성 외까지 나가 간부 뒷조사를 했다. 컴퓨터 시스템이 잘 가동된 지금이었다면 대수롭지 않았겠지만 당시는 사람이 직접 뛰며 조사했다. 신혼생활인데다가 과도한 업무량은 맏형을 질식하게 만들었다.

문화대혁명 연장 시기라 인심이 흉흉했다. 죄없이 투쟁 받고 투옥하는 일도 비일비재로 일어났다. 중학교 모 령도 간부는 현성에 올라가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후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앞길이 미망하고 작은 ‘죄’도 두려워 운명을 달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맏형은 본인의 과로, 무 자유도 그렇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인신 자유가 무차별로 밟히는 당시 정세를 혐오했다.

71년 “9.13사건” 터진 후, 맏형의 얼굴에 잠깐 수심에 잠겼던 일이 있었다. 맏형은 군입대 해서 림표 ‘왕패군 38군’ 정찰련에서 6년간 훈련 받았다. 전투기위에서 락하 연습을 했던 정찰련이다.  그 부대에서 복역했던 사람들은 부대 전통 명예로 ‘후광’을 누렸고 내심 자랑거리로 생각했다. 림표가 몽골 원두얼한에서 비명횡사 했으니 맏형으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맏형이 기업 직장으로 옮기는데도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맏형은 71년말부터 탄광 총무과 평범한 보이라안장기사를 하다가 92년도 퇴직했다. 전도 밝고 앞길이 창창한 기층 정부기관을 떠난 것에 후회하지 않았다. 명예, 승진, 영달 같은 것이 맏형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느슨하고 개인 자유 공간이 트인 직장이 맏형의 적성에 맞았던 것이다.

자유는 개인의 선택, 마음의 여유다. 좀 디테일 하게 말해, 국가운영에서 자유는 없으면 안될 ‘포퓰리즘’이다. 중국 문화혁명시기, 국가주석 류소기가 “자유시장경제”란 아젠다를 내들었다가 죽게 두들게 맞았다. 10년후 그의 자유시장, 도거리생산책임제가 전국에 꽃피우면서 나라가 부강의 길에 들어섰다.

요즘 들어 자유란 말은 거의 앵무새 입버릇처럼 되어버렸다. 알다시피 발목이 족쇄에 묶이지 않고 풀어주고, 창업, 개인 지혜를 발휘시키는 것이 자유 가치다. 자유는 특유 자본시장발전의 상징이기도 하다.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사회는 자유가 억압되고 독재가 막연 되어 백성이 못산다고 조롱을 받고 있다.

자유는 사적인 인간생활에서 꿀과 같은 미적인 쾌감을 주기도 한다. 잠이 없이는 긴긴 밤을 지새우기 어렵고 자유가 없이는 기나긴 인생터미널을 달리는데 지루할 것이다. 자유는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촉매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칠정륙욕이 있다. 간추려 말해 즐겁게 먹고 ‘사랑’하고 ‘욕심’도 가진다는 말이다. 이것을 자본사회에서 교묘하게 이용한다. 이것이 ‘개인 욕구’적인 자본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

한국에 와서 흥미로운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저녁, A도시역 앞길을 걷고 있는데 세로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널판자현수막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19세미만 청소년 통행 금지”. 나는 호기심이 발동되어 우편 골목길을 계속 걸어나갔다. 갑자기 번쩍거리는 유리문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생각 밖으로 유리문을 빠끔히 열고 미녀들이 출현되었다. “어서 오세요” 야한 옷차림을 한 미녀들이 방긋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한다.

매춘, 이는 자본 사회의 자유시장에서 서식한다. 매춘은 ‘내 몸은 내 자유’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돈이 되는 것이면 영혼과 육체, 치부를 드러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 자본 사회의 산물이다. 서방국가들에서는 성 자유를 합법화 시키고 있다. 이는 자본사회에서 간판 없는 색정거래소다.

중국과 같은 나라들에서는 정부의 단속을 피해 가며 암暗으로 성 교역을 진행했다. 쌍나우, 안마점, 호텔이 매춘 장소로 되었다. 13년도 한국 전자측 중국어 통역으로 서안에 간 일이 있었다. 우리 회사측 20여 명이 저 마다 하루 밤 숙박료 450위안의 고급스러운 단칸방을 주문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문 앞에서 옷차림이 깔끔한 남자 청년이 명함장을 손님들 손에 내밀었다.

호텔에 들어와 훑어보니 어린 미녀 사진 아래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선생이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달려가 멋진 서비스 해 드리지요.”

듣는 말에 의하면 많은 여대학생들이 고가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색정 봉사를 한다고 한다. 돈을 위해 몸을 파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돈 때문에 정조를 바치는 것을 부모가 안다면 얼마나 가슴이 쓰릴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자유시장경제가 유입되면서 사람 의식에 변화가 생겼다. 집단주의가 조금씩 실각되면서 개인주의, 배금주의가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사회 풍기 문란이 대두했다. 출판업, 인터넷 망에 ‘푸른 등’이 켜졌다. 음란 서적, 야동 비디오 출현, “여인인체예술”을 빙자하여 촬영한 누드사진들이 인터넷을 달구었다. 표현 자유 극치를 자랑하는 한국 사회도 울고 갈 일이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특히 한창 자라는 청소년들의 영혼을 부식 시켰다. 어떤 자유도 법률규정내에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중국 샌야러마悬崖勒马란 말이 있다. 낭떠러지에 이르러 말고삐를 잡아챈다. 10년 내, 정부의 강경한 대책에 들어갔다. 각종 출판업이 재 정돈되었다. 사회제도, 대중 풍기가 양호하게 돌아섰다.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도 무 이식 대출, 경제적 원조를 진행하여 학업에 매진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엇바꾼 순서일지 모르겠지만 언론표현자유도 찍고 너머 가고 싶다. 언론표현자유는 자유시장경제와 더불어 쌍두마차로 달리는 한 축이다. 한국의 언론자유는 세계 언론 자유 지수 47위, 지난 해 보다 4단계 하락했다. 허나 여전히 세계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대통령, 정치인에 대한 풍자, 만화, 유머가 허용되는 나라, 퇴진, 타도가 찍힌 프랑 카드. 스피커를 들고 파도 마냥 거리를 휩쓰는 시위 행렬을 보면서 이 나라 표현 자유 형식에 깜작깜작 놀랄 때가 많다. 민심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헌법 표현 가치를 수호하기에 세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표현 형식은 세습에 젖은 북한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허나 애석하게도 언론자유 지형만은 기울어져 있다. 언론의 헤드라인이 중립적이지 않다. 한국의 뉴스 소식 보도는 엄연히 이념적 갈등에 몸부림치고 있다. 주류 신문, 종편지상파가 보수적 편향을 갖고 있다. 다만 공중파, 진보 미디어 유튜브만이 민주시민들에게는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신문, 방송은 보통 집단 기업, 자산가들의 소유물이다. 기업의 홍보, 광고로 수입창출한다. 기자들의 연봉은 매체 집단에서 지급한다. 그러니 기자들도 기업, 재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원칙상 친 기업 보수 정권이나 민주 정권을 가리지 말고, 국민들에게 정의를 호소하는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 민주 정권이 들어서면 입장, 태도, 얼굴을 카멜레온처럼 바꾸는데, 이래서는 절대 국민 화합을 이룰 수 없다.

언어 형식을 이용하여 자기의 사상과 관점,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언론자유형식을 이용한 왜곡 보도, 편파적 보도는 금물이다. 중립을 지키고 정권을 견제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신문, 보도 매체의 생명이다.

피의자 정치인에 대한 일부 신문, 방송을 보면, 거의 ‘몽골 기병 초토화’식 ‘마녀 사냥, 토끼몰이’ 수준이다. 세치 혀, 붓끝이 한 인간을 망칠 수도 매장시킬 수도 있는 거다. 언론이 전 초선에 선 용맹한 장수 마냥 검, 경 수사에 일조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

언론자유는 구속 받지 말고 국민들에게 진실을 잘 전달하라는 것이다. 언론이 자유가 있듯이 인간 모두에게 자유가 있다. 언론 자유를 남용하여 한 인간을 너덜너덜하게 때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악마화 된 사람’이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불행이다.        

이런 ‘언론지체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자본 사회의 논리 ‘자유 힘’에서 온다는 것도 간과 할 수 없다.

자유시장경제의 단맛을 톡톡히 알고 있는 한국 사회. 이런 우월한 자본 사회를 목숨으로 사수하려고 한다. 이런 자본 사회를 흔들려고 하는 모든 세력은 제거 대상이다. 친중, 친북 ‘주사파’들을 가시처럼 미워하는데, 그들처럼 ‘공산화’가 될 가봐 심히 우려하는 것이다. 동족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잘 먹고 잘산다면 역사는 달라지고 보는 시각도 크게 다를 것이라고 본다.    

그런 이데올로기 견해가 두뇌를 지배하기에 증오, 혐오가 폭발하고 있다. 황피부, 동족이건만 상호 적개심은 사라질 줄 모른다. 보수언론에서는 반대 진영 쪽을 색갈몰이, 친북 몰이로 끌고 가는 것에 익숙해 졌다. 그것이 자본 사회를 수호하려는 강경 보수파들에게는 가장 잘 먹혀 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들은 공산 체제는 끝났어야 하고 이미 끝났다고 심리적으로 본다. 이들은 북한,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는 언론 표현 자유도 전혀 보장되지 않는 ‘독재국가’라 유도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부 편견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도 지울 수 없다.

중국이 언론 자유 지수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허나 편파적 뉴스 발표는 차단되어 있고, 방송이 가급적이면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의 신문, 방송 보도는 엄격한 팩트 체크 후 나간다. 사실 보도 기사는 지방정부, 기관, 단위(학교)의 공장公章을 맞지 않고는 투고할 수 없다. 투고한 건의성 비판글이 지방정부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월급越级해 반영하기도 한다. 30여년전 내가 처음 속해 있던 현에서 연속 몇 년 교사 임금을 몇 개월씩 체불해 왔던 일이 있었다. 이에 격분한 여라 문명 교원들이 상경하여 국무원 유관 부문에 반영했다. 그 이후로 임금이 바로바로 지불하는 속이 펑 뚫어지게 한 일도 있었다.

중국은 신문, 방송이 모두 국가소유제이기에 사실에 입각한다면 충분히 발표 자유 기회를 준다. 민족 신문에 지방과 학교의 불편한 비판 글을 비교적 많이 발표했던 필자는 언론 자유를 충분히 누렸다는 자부심을 가지군 한다.    

좋은 언론, 정론지, 방송, 미디어 유튜브는 국민 모두가 손잡고 애국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버팀목 역할을 한다. 언론의 표현 자유를 ‘도용’하여 진보와 보수 진영 갈라 치기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상호 혐오, 증오, 미움이 사라질 때만이 자유를 누리며 안정한 사회에서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마음과 행복의 자유, 진실한 언론 표현 자유, 글로벌 세계에서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한반도 평화의 자유도 한 목소리로 외칠 때만이 진정 명실상부한 자유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2.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이다

 

91년 전인 1930년, 이름난 ‘양호학안(学案)’이 일었다. 두 논쟁인은 저명한 학자 양수명(梁漱溟)과 호적(胡适)이다. 쟁론의 주제는 중국의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였다. 
그 해 7월, 양수명은 서한을 다시 띄워 호적에게 따져 물었다.“나와 주변 사람들이 중국의 최대 적은 국제자본주의, 봉건군벌이라 하는 데는 변화가 없소. 당신은 아직도 빈곤, 질병, 우매, 탐오(탐욕), 교란’이라 우길 수 있겠소?” 

호적의 대답은 의연했다. ”무엇이나 제국주의에 돌리다니, 제국주의가 강박해서 우리보고 영수(罂粟-약담배)를 심으라고는 하지 않았잖소?”잇달아 호적은 자기 주장을 피력했다. 

호적은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을 꿰뚫어보는 시선을 가졌다. 우매(마약의 피해도 큼)는 우리에게 논리 사고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정확하게 당면과 앞을 내다보고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없게 한다.

만일 근대 현대사에서 중국이 만청(晚清)때 권력과 이익을 탐내지 않고, 또 국방을 보호해야 할 군벌이, 세력 다투기,지역 늘이기로 혼전을 일으키지 않았던들. 일본이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기나 했을까. 탐욕, 바다를 끼고 안일한 생각만 하다 보면 일제의 침략을 받는 큰 치욕을 치를 것이다.‘국내 적’이 외부적을 끌어들인다. 내부 적이 외부 적 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 이래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른다. 

그리고 역사상 빈곤으로 대다수 사람이 양호한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우세를 점해야 할 인력 자원이 고갈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오늘 문명 시대, 조선반도에서 30년대 중국의 ‘학안’이 일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분단으로 남아있는 국가는 오직 한반도이다. 그것도 애잔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상대국을 바라본다면 이렇게 까지는 허탈 하지는 않을 텐데.
문 정부가 들어와서 서로 포옹하는 감격의 장면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잠시 반짝일 뿐, 통일 화합 진전 속도는 달팽이 걸음이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공동으로 자기로부터 문제점을 찾아야 한다.  

조선의 옛 관습대로 라면, 미국이 ‘철천지 웬수’, 남조선이 ‘괴뢰집단’이다. 한국에서는 북한이 ‘주적’이다. 지금은 서로 적대시 하던 조선, 미국과 대한민국사이 해빙기가 다가오고, 숨통이 살짝 트여 있다. 또 대한민국 군사백화사전에는 ‘주적’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그럼 무엇이 아직까지 한반도의 화합, 경제 거래를 막는데 걸림돌이 될까. 경제 제재, 핵무장? 같은 것도 중요한데, 내가 보기에는 그 전에 더 중요한 요소가 작동해야 한다고 본다. 제재 해제, 핵포기는 물리적 ‘해쇄(解锁)‘에 불과하다. 진짜로 화합하려 한다면 한반도 국민(인민)들의 홍익인간 사랑, 심장이 고동치는 그런 화합을 만들어 내야 한다. 

아직까지 ‘빨갱이’이요, ‘수구꼴통’이요 이래서는 안 된다. 정치계에서 선거용으로 쓰던 ‘이념 팔이’는 진부해진 감을 준다. 하지만 여야 대립, 보수 우경화는 더 심각해졌다. 한 나라안에서 진영 싸움으로, 두 쪽이 되고서야 통일을 논 할 수 있단 말인 가. 이대로 나가면, 가령 통일로 이루어진다 해도,  ‘세 쪽’이 서로 물고 뜯고 갉히는 일이 일어 날것이 불 보듯 뻔하다. 

정치적 욕망, 편 가름은 궁극적으로 여야간 대립, 갈등으로 이어진다. 이래서는 이념적 사고방식에 길들어져 있는 국민들을 결집시킬 수 없다. 통일을 이루려고 해도, 조선이 저들을 좋아했던 여당(민주당)의 편을 들어 줄 가봐 우려가 앞설 것이다. 저들의 이익이 더 곤란해 질 가봐, 속으로는 통일이 안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국가가 정확한 길로 나가고, 국가 발전과 진보를 위해 매진하려 하는데, 어느 나라든 두 손들어 찬성 할 것이다. 20세기 초, 중반도 아니고, 21세기 문명 시대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 어느 강대국이든지 억압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이 경제 기초가 비교적 박약하여 경솔하게 대외개방을 했다가 국가 정권, 체제가 흔들릴 가봐 우려하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백성을 위한 선택이라면 체제 변혁도 불사를 수 있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한반도 통일은 미국의 문제도 아니다. 중국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총적으로 말해 한반도 통일 화합은 두 나라 기득권자들, 정권 유혹, 변혁 불허를 바라는 자들이 욕심을 털어놓고, 이익을 내려놀 때만이 가능하다. 한반도 국민(인민)들의 사심 없는 공동번영의 불길이 확 타 번질 때만이 더 가능하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자만이 진짜 이기는 자다. 국가도 마찬이다. 가장 무서운 적은 타국이 아니라 자기 나라 그 ‘자체’이다.   


3.  아내의 의무


“잘 먹고 잘 입기만 했으면” 하던 말은 먼 얘기가 되었다. 오늘 먹고 입고 살림집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의 삶이 눈 뿌리 빠지게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하자만 요즘 사는 세상이 크게 바뀌었 서도 사람들은 시무룩하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고 얻을수록 더 얻고 싶은 것이 오늘의 사회 풍경이다. 생활 소비관념과 대사를 치르는 데 있어서 천지지변이 일어났다. 

자식 혼사를 치르는데 돈과 자산요구가 눈덩이 불어나듯이 늘어만 나고 있다. 아들 가진 집에서는 새 차는 필수. 수십만위안, 몇 천만원(한국 돈)의 예물 돈(彩礼钱)을 준비, 아파트도 마련되어야 한다. 20년전에는 언감생심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돈을 준비하느라 등허리 휘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부모들의 마음이 애잔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떼돈을 벌게끔 토대를 마련해준 한국 정부의 좋은 경제 시책이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오늘 대사에 돈을 퍼붓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되었다. 결혼에서 새 차를 사고 아파트를 사는 것은 당연한줄로만 안다. 그것이 시집오는 처녀에 대한 사랑의   징표이다. 그것이 친구또래들에게 뒤지려 하지 않는 처녀들의 자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고 왈가왈부할 것 까지는 없다.

허나 자산이 늘어나 살기는 좋아졌건만 행복한 것만은 같지 않다. 요즘 젊은 신부들의 불편불만 소리가 늘어난다고 하는 것이 귀동냥으로 들려오고 있다. 예물돈을 적게 받은 신부는 그렇다 치고 비교적 풍요로운 살림을 누리는 신부들 중에 트집과 원성이 많이 일어난다고 하니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지금의 아내들은 남편이 돈을 잘 벌고 많이 벌 것을 바란다. 그리고 집에 와서도 섬세하게 집안일을 잘 돌 볼 것을 기대 한다. 팔소매를 쓱쓱 걷어붙이고 요리도 척척 해내는 그런 ‘전능 신랑’을 바란다. 옛날 “남자 하는 일이 따로 있고 여자 하는 일이 따로 있다.” 고 하는 말은 촌구석으로 동댕이쳐버린지 오래다. 

남편이 그런 요구에 도달하지 못할 때, 아내의 꾸중을 받는 게다. 특히 아이를 낳고 힘들 때, 신랑이 잘 거들어 주지 못하면 아내의 짜증이 더 심하다. 신랑이 술을 좋아하고 옷에 담배 찌든 냄새를 맡는 아내는 눈살을 찌푸리다 못해 미워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신랑과 술을 잘 마시는 부부라면 그래도 가정 평온은 잘 유지된다.                   
옛날에는 가난해서 살림살이가 어려워서 가정주부들이 바가지를 긁는 일이 있었다면 지금 신부들은 고생을 회피하면서 남편이 무엇이나 다 잘 들어주지 못하는 데서 성질을 부리고 있다. 물론 남편을 공대하고 남편을 이해하며 사는 아량이 넘쳐나는 그런 신부들도 많다. 

 요즘은 확실히 젊은 신부가 화를 많이 내도 참으며 대꾸 한마디 못하는 신랑이 많다. 속으로는 욕하고 한 번 패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남편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다. 지금은 남편에게 욕먹고 얻어맞으며 살 여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매를 맞으면 애가 있다해도 가출하고, 이혼하는 여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것은 이혼녀에게 삿대질하던 시대가 변한 것 하고도 무관하지 않을 수 없다. 이혼해도 더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경우도 많다. 오늘은 여자가 고귀한 시대다. 또 남자들은 엄청 난 대가를 치르면서 한 결혼인데, 아내를 쉽게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때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여인한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실지 인간은 누구나 완전무결하지 않다. 아내의 요구가 끝없고 너무 위로 쳐다보면 못 산다. ‘조강지처’(糟糠之妻)는 아니어도, 금전을 넘어서 남편과 함께 동고 동락한다는 마음자세를 갖출 필요가 있다. 남편이 지난 시기 경제적으로나 기타 방면에서 잘 해주지 못한 구석이 있다 해도 너그럽게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남편을 미워하고 탓할 때 “내가 남편 보다 잘 하는 것은 무엇일 까?” 하고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되물을 줄 알아야 한다. 남편의 결함을 확대경으로 보지 말고 작은 장점도 현미경으로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세상살이는 다 그렇다. 생활은 둥근 상처럼 두리뭉실하게 살아갈 때가 많아야 한다. 두리뭉실하다 해서 나태하고 무엇이나 덮어 감추며 살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생활에서 너무 자질구레하지 말고 대범하고 너그러운 인격을 갖추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남편도 노력하고 아내도 노력할 때 그 가정은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서 아내들의 신경질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서 불평없이 가정평화도 오래 지키며 생활을 영위해 나갈 것이다.    

최세만 프로필 

중국 목단강시 양명구 출생. 
흑룡강성 교육학원 조선언어문학전공.
1977년3월~2005년5월 교사.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흑룡강성조선족작가협회 회원, 칼럼니스트. 
신문, 잡지, 라디오방송에 수필, 칼럼 백 여 편 발표, 수상 다수. 
공저 "독수리의 비상". 동포문학 수필 우수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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