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한 쌍의 신발이 있다
꼭 함께 신어야 한다
칼끝 꽃샘추위에도
생강나무 꽃 햇살에도
우산 없는 여름비에도
황금 빛 낙엽길에도
지저분해졌다고 뒤처진다고
한 짝을 버리면
다른 한 짝은 무용지물이다
물감 같은 노을 속으로 나란히 가려면
땅을 꼭꼭 밟아도 주고
부지런히 함께 닦아도 주고
자꾸 끈을 죄여야만 한다

 

석별 
 

인연은 갈대 스치는 바람이런가
손잡고 이뤄낸 정오의 태양
꿈꾸며 바라본 황혼의 석양
이제는 그대를 떠나보낼 때
진토에 몸을 푸는 분홍빛 연꽃처럼
서해바다의 부레 없는 상어처럼
항상 은근하면서도 열심히 뛰었던 그 모습
분홍빛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고
미끈미끈한 비늘도 모두 흩어지고
아무리 불러 봐도 산산이 부서진 그 이름 
아무리 소리쳐도 메아리 없는 이 아침에 
그대 떠난 빈자리에 
한그루의 정한 갈매나무로 호젓이 남고 싶다

 

클립 

 

뿔뿔이 흩어지려는 마음에 내려앉아

몸을 반쪽으로 갈라 사정없이 집결시킨다, 소리 없이

하마의 입처럼 길게 치켜든 욕망을 억누르고

기나긴 분신의 아픔을 감내하는 인내력

아득한 여백의 문턱에서 

어느덧 기약 없는 한생이 지나가고

또 다른 한생이 넘겨질 때

몇 겹씩 겹쳐지는 전생의 스토리를 마주하고 

만남의 회포를 나누리

소리 없는 집합명령은 멈추지 않는다

촘촘히 침목을 박으며 레일이 뻗어나간다.
 

감정갈보 

 

30년전 만주로 건너온 나의 할아버지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성실한 농사군이셨단다
광복 그해에 태어나신 아버지는
뜨락또르로 땅을 갈아엎고 벼 새 품종을 개발하시는 기술자셨다
우리 집안에는 근면하고 성실한 피만 흐르는데
나의 피는 왜 이리 나쁘고 퇴폐적일까?
내 몸을 팔아서라도 영감(靈感)이라도 뫼시고 싶고 
바지내린 마귀의 그것을 빨아서라도 글 한줄 얻고 싶은
이 심정은 방탕한 창녀와 다름없다
자고 일어나 하고 흐트러진 머리칼 아랑곳 없이
또 하는 기분으로 
나는 밤을 지새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뭔가를 쓰고 또 쓴다
나는 내가 글을 쓴다고 말할 때면 감정갈보라고
자백하는 심정이다
그러나 오늘도 불끈 펜을 든 채 부르르 떨며
춤이라도 추고 싶다.

 

낯선 둥지
 

튕길 것만 같은 푸른 하늘 바탕에 아파트는 소리 없이 질서정연하고 
제철 따라 무궁화는 의연히 쉬임없이 피었다 지는데
골목골목 즐비하게 늘어선 한글 간판 거리에서는
팔십 년 전 조상의 흰 그림자들이 얼른 거린다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누구의 핏줄이라 주어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분명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익숙한 냄새를 알아 차릴 수 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고향 떠나 우리들은 왜 그리도 먼 둥지로 옮겨가 살고 있는 걸까
간도로, 만주로, 연해주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고 후두둑 소나기가 지나간 후에 
고즈넉한 거리에서 처마 밑에 빗방울 소리를 듣노라면
언젠가 태어난 적이 있는 둥지로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들지만
한없이 외롭고 새삼 서러운 것은
품어주던 어미새들도 떠나고 
노래 소리가 끊겨진 나의 가난한 둥지 때문이 아니라
여기에 내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너무 오래 떠돌다 이제야 여기에 이른 까닭이다

 

들국화 여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산기슭 후미진 곳의 들국화
비바람에 흔들리어도
햇살과 이야기하는 들국화
누구와 보리 고개 넘어 왔던가
그날의 아픔은 
어디로 동댕이쳤는가
가을 서리를 머리에 이고
노랗게 웃음 짓는
들국화 여인

 

가을비

 

저물어가는
떨리는 가을비 속에
국화꽃은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나로 인해
그대 더욱 풍성할 수만 있다면
사랑과 행복
나눠 가질 수 있다면

국화꽃은
싸늘한 가을 추위가 
자신을 괴롭혀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겨울의 기도

 

생을 마무리 짓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한 여름과 인연은 끊어지고
즐거웠던 옛일을 뒤돌아보며
사색으로 침묵한다

그리고 점지한다
저 멀리 봄의 숨결 들으며
꽃나무 뿌리 내릴 곳을

인동초 하나 추켜들고
찬바람을 꾸중하며
살며서 두 손 모은다


꽃은 안다

 

한 알의 씨앗을 
익히기 위하여
찬 이슬을 이마에 떠올렸다
번개와 천둥을 이겼다
아픔으로 퇴색하고
한 잎 두 잎 꽃잎을 날리며
어여쁘게 죽어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 또
한 알의 씨앗을 
잉태하기 위하여
한 겨울 언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함을
꽃은 알고 있다

전월매 프로필 

천진사범대학교 부교수, 연변작가협회 회원, 동북아신문 편집위원. 『재중조선인시에 나타난 만주 인식』, 『중한수교 30년, 한국소설에 나타난 중국 담론』, 『중국 소수민족 특색마을 문화 연구』 등 단독 저서 5권 출간, 시, 수필, 칼럼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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