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동
 

대나무 숲이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굽히기 싫어하는 절개
풀도 나무도 아닌
인내심 다해 여기 도심에
사철 푸르른
수많은 이야기를 썼다

멀리 떠나 왔어도
마디마다 생기 넘치는
바람의 설레임과 
죽순으로 살던 
약동의 물결 멈춘 적 없었다

여기 사는 그들은
뿌리 긴 용처럼 뻗치고
천년을 하늘에 세 들어 사는
별처럼 달처럼
타운 아닌 타운에서
이방인 아닌 이방인으로 산다

크기만하는 것이 
어찌 세월 뿐이랴
대림은 아직도 
대꽃 피울 그 날 기다리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길과 걸음 
 

들국화 반겨주는 
가을 옷 입은 들녘
숙성된 가을 향기
촐랑촐랑 뛰어 오는 길

지구를 바라보며
오늘도 걸어 가는 달
달을 따라 만물이 걷고
나도 걸어 간다

길 위에 길이 있고
길 옆에 길이 있는 세상
걸음이 느려 
따를 수 없음에야

매일 걷고 걷느라면
지구도 한 바퀴
우주도 한 바퀴
다 돌아볼 수 있으리


진눈깨비

 

자야를 흔드는 촛불처럼
옷자락 날리는 여인
발자국 소리 사르륵 사르륵 
잠 든 창 허비며
누굴 찿아 헤매느냐

생각은 가푼해도
흐르는 눈물 달랠길 없어
못 다한 이야기
미어지는 가슴
빛 바랜 청춘 되살리느냐

그대로는 포기 못해
미련만을 고집하는 듯
이리저리 휘날리며 
젖은 몸 허위허위
친정 찾아오는 누이여


풀잎과 이슬

 

연초록 어머니 등에 엎혀
단잠 자고 있다

어머니는 미동도 없이
잠에서 깰세라 들릴까 말까
자장가 부른다
자거라, 자거라, 푹 자거라

보아라, 보아라, 
눈여겨 보아라
진주같이 말랑말랑한 알몸
자고 있는 귀여운 저 모습을

휘여진 연초록 등에
미끄러 떨어질까  
위태롭다, 위태롭다
햇님이 웃으며 반겨준다


고향 마을

 

썰물이 빠져나간 해변에
줄지어 누워 먼 바다로 나간
새끼들 그리워 하는
검은등 큰 고래들인가
꾹 다문 입은 열릴줄 모르고

키다리 백양나무 
가지에 앉은 작은 새는
떠나간 엄마 그리운듯
구슬프게 우짖고 있다

제 씨앗을 품은
둥근 과일은 다 어디 가고
과일나무 머리에 기어오른
무성한 덩쿨 풀만 히죽히죽
세월 좋다 즐거워 한다

동구밖의 백년 고목
휘어진 가지를 드리우고 서서
고향마을 바래며
하염없이 고개만 휘젓고 있다


실개천

 

산간을 감돌아 내리는
어머니 젖줄기런가
은방울 굴리는 
랑랑한 소리로
계곡을 꽉 움켜잡았다 

옹글납작한 돌 틈새
크고 작은 물고기
꼬리치는 귀여움에
살랑살랑 아양떨며
가끔씩 가끔씩 찾아와
투정 부리 듯 물차는
산새들도 너그럽게 반겨준다

누가 찾건 말건
누가 봐주건 말건
본분만 꾸준히 하는
내 마음 가짐의
훌륭한 스승이여


수평선

 

누구나 한번쯤 수평선
일출의 순간을 포착했다면
그대 머리 속 앨범에는
잊지 못할 멋진 추억이
하나 더 추가되었으리

보라, 하늘과 바다가
서로를 살갑게 포옹하며
낳아 올린 태양의 모습을
피어오르는 홍조 또한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가

끝없이 가고가도 무연한
수평선을 바라보면
나는 왜 강물이 고집스레
바다로만 흘러가는지
알 수 있을 같다

그대, 아시는가
바다가 저토록 황홀하고
넘치지도 줄지도 않는 것이
저 수평선이 잘 보듬어
주고 있기 때문인 것을


바이올린

 

가녀리게 기다란 목
검은 머리 반짝반짝 
동그랗게 감아 올린
요염한 흑비녀

도톰히 살진 알몸
잘록 섹시한 허리
슬쩍 품고 픈 전율 소름 돋친다

더듬고 더듬는
봉긋 솟은 젓무덤
얹혀진 말초신경 네가닥
어루쓸어 대는 검은 손
흥분 젖은 교성 애잔하다

베토벤이 보인다
아니, 부활해 오셨다


아카시아 향기

 

보드레한 꽃구름 
청옥 색으로 내린
참신한 누나의 향
도고하게 날려온다

유혹에 못 이겨 
화려함보다 향기로
승부한다고 속삭인다

푸른잎 자잘한 가지
이름도 엿 보이는 
아카시아 여름 빛난다

푸른 하늘 솔솔 은빛 화분
부끄럼 타는 소녀
5월의 자락에 내리는
누나의 여린 한숨 소복하다


가을 산길

 

살랑살랑 오색 바람
어서 오라 손짓 해주는
낙옆 깔린 산길

마음 들떠 걷고 걷노라면
발길따라 들려오는
바스락바스락 속삭임소리
누가 내말 하는지

곰삭힌 희로애락 슴배인
멀리 굽어보는 바위 하나 
구름따라 어정쩡 돌아가고
무서리에 목 비틀어진
풀들이 마지막 길손인 듯
간신히 나를 맞아준다

가지 끝 저 혼자 힘겹게 남아
발레 하듯 바람과 놀고 있는
갈 참나무잎 하나,
태고의 산길이 내게와 안긴다


오래 된 까치집

 

새끼 까치가 커서 떠난
오래된 까치집,
오래된 까치만 남아
맛없는 밥상 바라보며
우두커니 않아 있다

새끼키우며 흥겨웁던
꿈같은 지난 날 돌아보면
어느새 늙어 쇠잔해진 몸

왜 산처럼 강물처럼
느긋하게 살아가지 못하는지

자장가로 들려오던
수풀 속 풀벌레들
노래 소리마저
오늘은 아픈 가슴 허빈다

리종화 프로필

길림성 화룡시 출생.
미술, 촬영업, 정년퇴직
국내외 각종 간행물에 시 다수 발표
시향만리 신인상, 시조문학 우수 가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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