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현란한 세상의 문에 
빗장을 지르고
눈 닫고 귀 닫고 입 닫고
집에 들어선다

태양을 끄고 
달을 끄고 
별을 끄고 
방에 등잔 하나 켠다

어둠이 서서히 가시고 
가없는 우주가 펼쳐진다

물 먹은 몸 
현기증 나는 머리 
은하수에 목욕 시킨다

빗장을 다시 풀고 
문턱을 넘어선다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리고
입이 근질거린다

또 다른 
태양이 솟고
달이 돋고
별이 흐른다

나만의 바다에서
또다시 자맥질을 시작한다

 

촛불

 

머리 한 올
흐트러질세라
깔끔한 자태

하늘하늘 
춤사위로
뭇 시선 받아안는다

어디서 바람이 찾아오면 
몸과 마음 녹여가며 
춤을 추는 

나는 
발레리나

 

조약돌

 

태초엔 거룩한 존재였으리라
천지개벽이 잠든 영혼 흔들었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진동에
잠 깬 사자처럼
포효하며 날뛰었으리라

흉물스러운 분신이 되어
강물로 흘러들어
살 저미고 뼈 깎는 아픔으로
긴 세월 
남 모르게 울고 울었으리라

한없이 작아지고
끝없이 단단해지며
적막의 밑바닥에 겸허히 누웠으리라

한 알의 모래가 되는 날까지
한 톨의 먼지가 되는 날까지


콩나물

 

발 붙일 땅이 어디인지
빛 볼 날은 언제인지
삶터는 왜 이다지 비좁은지 

잠깐의 탄식 끝에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아침의 물세례로 머리 감으며
밝은 곳을 향해 
목을 뻗고 뻗었다

점심의 물벼락을 받아 마시며
외다리 힘을 
키우고 키웠다

저녁의 물사태로 발 씻으며
뿌리 내릴 곳 찾아
더듬고 또 더듬었다

어느새 콩은 
늘씬한 콩나물 아가씨가 되어
말쑥한 얼굴을 내민다


바람개비

 

바람의 꼬드김에 
정신줄 놓았다 비웃지 마라

그냥 허공에 버려졌더라면 
어느 뒤안길로 자취없이
사라졌을 신세

네 날개 펼쳐
콩알 하나 심장에 박은 그날부터 
나의 삶은 시작되었다

보채는 아기 어르느라
토라진 계집애 달래느라
진종일 팽글팽글 춤을 추었지

근데 아느냐
저 만치 어깨 들썩이며 걸어가는 
사람들 뒷모습을 보면 
처량해지는 마음
나에게도 남 모르게 훔칠 
눈물이 있다는 걸 

연지곤지 분단장하고 
오늘도 바람따라 골목 누비는 
나는 나는 풍각쟁이 


농구공

 

통, 통, 통,
헐레벌떡
뜀뛰기를 멈추지 못한다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저 손에서 다시 다른 손으로
총아처럼 빼앗고 빼앗기며
승부에 목숨을 건 이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몸부림친다

해거름이 되면 
수차례의 올가미에서 간신히 벗어나 
뜀박질 멈추고 숨을 고른다

날마다 어김없이
정오의 정점 찍고 
꿋꿋이 제 갈 길 가는 저녁 해를 
부러운 듯 바라본다


빨랫줄

 

때론 잠자리들의 쉼터였다
가끔은 제비들의 모임장소였다

손 꼽아 보라 긴 세월
진정 빨랫줄로 살아온 날
고작 며칠이더냐

칠흑같은 밤이면
허공에서 덜덜 
사시나무처럼 떨어야 했다

비바람 몰아치면 
벌거벗은 몸으로
군말 없이 버텨야 했다

쨍하고 해뜨는 날이면
알록달록 옷 입고
흥겹게 팔랑거렸다

빨랫줄은 
빨랫줄이다
옷을 걸치든 벌거숭이든


시래기 

 

바람에 너붓거리는
색 바랜 무명옷  

바람목에 벗어 놓고 
어머니는 어딜 가셨나 

오늘도 찬바람에  
바르르 떠는 무명옷 한 벌 

산에 들에 심은 땀
마를줄 모르던 치맛자락 
기나긴 세파에 
단물 빠지고 뼈도 삭아 

안으면 바스라질 것 같던
찬바람 잦아들자 야윈 몸 

어머니는
언제나 돌아올까

바람결에 귀 기울이며 
너붓거리는
후줄근한 무명옷 한 벌 


가을 담쟁이 

 

바락바락 기어오르던 서슬
어디로 가고
축 늘어져 바람에 휘청거리나

무작정 오르기만 하면 
잘 난 것 같아 
머리 빳빳이 들고
남의 등 쿡쿡 밟아댔다

폼 잡고 얼마나 으시댔더냐
고개 떨구고 흐느적거린다

목에 힘 빼고 
갈퀴 발톱 거둬들이는데  
어느덧 찬서리가 문고리를 잡는다 


맷돌                 

 

덩그마니 
마당 한 구석에 놓여있는 
먼지 낀 맷돌  

드르륵, 드르륵......
마른 것 궂은 것 가리지 않고 
엄마의 온기 엄마 손때마저
삼킨 가난 타령 

달든 쓰든 삼키기만 하고 
벙어리처럼 살다 간 엄마 

뙤약볕에 그을리고 
찬바람에 터져 까슬까슬하던 
엄마 살결같은 맷돌 

하늘 향해 다물지 못한 
우묵진 곳 우두커니 바라본다

흰구름도 가던 길 멈추고
힐끔 내려다 본다

 

이준실 프로필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한국디카시인협회 중국동포디카시연구회(지부) 회원
‘동북아신문’에 디카시 해설 연재 중
시, 디카시, 디카시 해설 수십 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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