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연분홍 진달래꽃도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도  
쌍겹눈 화반에 담아 보았다 

언제 부터인가 
나는 명필이 되어 있었다  

산새들의 지저귐 소리  
풀벌레의 울음소리 
강물의 겸손까지도 
나비 노트에 꽉 박아 적어 넣었다   

어느 고즈넉한 밤,
나는 
개똥벌레가 열심히 드라마 
찍는 것을 보았다 

날아 오르며 돌리는 렌즈에는 
사냥꾼 박쥐도, 
고양이의 발자국도, 그리고   
호기심 많은 나의 눈빛도 있었다  

알고보면
우리는 서로 다른 취미로 사는 
꽤 괜찮은 이웃이다 

 

여름의 노래는 푸르다 
 

소프라노 소나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뽑는 고음에
싸리 나무 개암 나무도   
어깨 세워 신나게 따라 부른다

흰 피부 자랑하는 자작 나무는 
하늘 우러러 푸른입 벌리고
행실바른 참나무는
가슴열어 무거운 중음을 뽑는다

금빛 지휘봉을 들고
빛나게 박자를 치며 햇님은
나무잎 사이사이를 지나 
어린 싹 하나도 놓지지 않는다 

마을앞 돌각담 틈새에서도
샘물가의 빨래터에서도
머리를 내밀고
이구동성으로 웨치는 소리 

여름은 푸르다
여름은 싱그럽다
울려퍼지는 교향악으로 이어지는 
푸르름의 노래

풀벌레들의 노래마저 푸르러
꾀꼴새의 노래는 절정을 이룬다
산과 들과 강은 흥분하여   
한껏 달아 오른다

아,몸부림치는 여름의 활무대여 
화끈한 목소리로
대지를 진동시키는
오케스트라 대합창이여 
 

 

화초
 

 

내가 아프던 날 
화초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물을 달라고
귀찮아서 눈을 부라리며 
물을 주었습니다  

내가 외롭던 날 
화초가 나를 재촉했습니다 
빨리 기음 매여달라고 
아니꼽게 눈을 흘기면서 
기음 매여주었습니다

그 어느 날 
화초는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푸르름 한아름 안고 내 앞에 
다가왔습니다 

그 다음날 
화초는 연분홍 드레스를 입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가슴이 탁 틔였습니다 
사랑이 찾아온 
황홀한 순간이였습니다   
 

 

콩새 한마리 
 

 

세상에 저소리 보다 더
결 고운것이 있었던가

나무는 푸르름을 뽐내고 
샘물은 퐁퐁퐁 박수를 치는데   

길잃은 콩새 한마리
덩치큰 바위곁에 내려 앉았다

똑똑 먹이 쫏는소리
저녁노을 타는듯 웃음 짓는데 

올방자를 틀고 앉은 바위
울먹울먹 눈물 짓는다   
 

 

아, 두만강! 

 

왜 두만강 기슭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줄
그대는 아는가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면서
먹고 보고 들은 것 모두가
내 피와 살인 것을

두만강의 가슴 속에
박제된 허구한 사연들   
그대는 아는가
강기슭 버드나무 위에 까치가 날아와
기쁜 소식 전해 줄 때면
민들레 꽃씨 낙하산 타고
날아 다니며 강안을 수놓는다
   
칠백리 뿌리 내린 물결 위에   
쉴새없이 들리는 저 숨소리
손길 닿는 곳마다 붉은피 흐르는 곳
침묵으로 꾸역꾸역 강물은 흘러가도
소나무는 아스라한 푸른 하늘을 꿰고 있다

천혜의 강물아 산아 나무야 바위야
너는 늘 그 자리,
풀숲을 헤집고 나와
허리 쓰다듬어 주는 강바람에       
사이섬은 정겹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 

아, 두만강!
물새들 물결 가르며 오르내릴 때   
강안 과원의 주렁주렁 달린
사과알 같은 소망들이
줄줄이 가슴 속에 날아들어   
아낙네의 붉디붉은 두 볼로 무르익는다

그대는 아는가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던 뱃사공
옛말이 되어버린 강기슭에
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줄을
 

 

단풍잎 독백
 

 

보람있게 살았으니 
꽃 보다 이쁠 수밖에 
꽃 보다 이쁘니 
가을이 빛날 수밖에 

한철 피운 꽃 
순간 진다고 말하지 마라
흙속에 태를 묻었으니
흙에 돌아갔다 오리라
 

얼결에 
 

오늘이 하지라고 
지인이 귀띔 해 주네 

아,그런가? 
무언간 되물으며 돌아보니 
어느새 그림자가  
발밑에 엎드려 있네 

서 있자 그자리에  
내가 머무르면 
그림자도 머무를 것을  


오곡밥 
 

할아버지의 땀방울은 
옥수수 알 만큼 크고 
할머니의 땀방울은 
팥알처럼 붉게 물들었었지  

산기슭 밭머리에는 
풀냄새외에 또 다른냄새가 났어 

아버지의 땀방울은 
흰적삼 볼품없이 절여 놓았고 
어머니의 머리수건은 
대야에서 건져낸 빨래 같았지 

논도랑과 개울물은 
묵묵히 바라보며 밭을 적셨지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숨결이 전설로 살아 있는것을 

오곡밥을 먹고 있노라면
풀밭의 귀뚜라미도  
논밭의 뜸북새도 
다가와 알은척 머리를 끄덕인다  

나는 지금 똑똑히 듣고 있지
뿌리깊은 나무 
손에 쥐워준 계주봉이    
끊임없이 울려주는 박동소리 

흙냄새 땀냄새 배인 오곡밥 
대를 이어온 명약 
병든가슴 씻어내고 
녹쓴머리 윤나게 닦아 주려니  

어험 , 얘들아  
어서 모여앉아 오곡밥 먹자구나 
 

사과배 나무
 

참배나무와 돌배나무는
오래동안 마주보고 있었다

땅속 깊이 뿌리 내린걸 보면
한고향이 틀림 없었다

둘이는 말을 걸가말가 하였다
누가 보나 망설이면서
손을 잡을가 말가 하였다

산아래 신선이 보고 있었다
껄껄껄 웃으면서
손수 만든 피리를 불어 주었다

엔돌핀이 돌았다
둘이는 죽도록 사랑했다
궁합이 딱 맞았나 보다

모아산 기슭에 뿌리내려
이름하여 사과배 나무
일심 동체가 된 부부

뼈마디 굵어지고 등휘도록
자손들 낳아 길러 내었다

꽃은 잎을 바라보고 방긋
잎은 꽃을 쳐다보며 벙긋
살아갈수록 좋은세상 이란다
 

눈꽃
 

배 나무에 피였으니
배꽃인가 

복숭아 나무에 피였으니
복사꽃인가 

황홀한 이월청춘 탐내여
서둘러 피는것은

순간을 살아도 꽃이고 싶어
뭇사람들 시선 강타하는 건가 

꽃피면 열매나 맺을 것을
왜 하얗게 질려서 입술 떠는가

뚝뚝 눈물 세수하고
영원으로 가는 2월 눈꽃이여 
 

박계옥 프로필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연변조선족자치주가사협회 회원
연변문학, 연변일보, 장백산, 흑룡강신문에  시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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