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아일체

무수한 나무잎이
무수한 혀가 되어 
비물을 받아먹고 있다 
나무는 수액으로 출렁인다 
날개짓을 멈춘 채

허공을 나는 새처럼 
미동도 없이 
명상하는 자세로 
나무도 허공을 잡는다 
수액이내몸속을 관통하는 소리 
나무와 하나가 된다 

 



빈 가지 빈 들 빈 마음에
어깨를 내보이며
생명이 빛을 갈망하고 있다
갓 핀 봄꽃을 시샘하듯 
종일 비바람이 몰아쳤다
벚꽃이 무사하길
마음으로 빌고 빌다 
비가 멎은 뒤 서둘러 가보니
벚꽃은 더 많이 달려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앙다물고 싸운 게 아니라
맞받아 피어난 것이다
비바람을 이겨낸 봄이
나무위에 앉아 웃고 있다.

 


물의 옷을 입다


비는 화살 같이 꽂히고
눈은 꽃잎 같이 흩날리고
안개는 연기 같이 맴돈다
꽂히고 흩날리고 맴도는 것
물의 속도다
강물은 눕고 폭포는 서고
옹달샘은 고인다
눕고 서고 고이는 것
물의 옷이다
물의 속도로 나는
누웠다가 섰다가 고인다
사랑하며 분노하며
성찰하며 물이 된다.

 


지리산 시인


산을 탈줄 모르는 나는
지리산 시인의 시집을 읽고
내 안에 지리산을 들여앉혔다
세상으로 향한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있으면
내 안으로의 눈이 열린다
그곳에서는 우윳빛 물안개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이름 모를 새들의 인사가
아침을 불러오고
풀들이 몸을 뉘어 만들어진
산길을 붙잡고 올라가면 
띄엄띄엄 묘지들이 보이고
계곡물 흐르는 소리도
간간히 들려오고
산신령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길
걷는 나는 보이지 않고
안개가 된 사람 하나
숲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덜컥 맑은 햇살을 만나면
증발하듯 사라진다
운 좋아 지리산 시인을 만나면
산신령을 만난 듯
소주 한잔 올리고 싶다.

 


걸어다니는 바다


멈춰있는 것들은 썩는다
바다는 쉴 새 없이 철썩이고
나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일출과 일몰의 웅장함에서
좁쌀만 한 풀꽃의 떨림에서
만개한 모란의 황홀함에서
하룻밤 새 통째로 무너져 내린
동백꽃을 가슴에 대고서
그들만의 삶의 기록을 
내 안 가득 채워
썩지 않도록 출렁이는
바다를 내 안에 들여앉혔다

걸어다니는 바다가 되어
세상 속으로 스며드니
나의 몸에서 향기가 난다

 


흔들리는 달


강물에 빠진 달은
순간의 고요함을 모른다
흔들리고 출렁이고
끊임없이 불안하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깨지고 부셔지고
그러면서도 흩어지지도 못해
다시 몸서리치며 모인다
강물 속 달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몸도 흔들리고
부셔지고 또 모인다
강물은 흘러가는데
달과 나는 흘러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출렁일 뿐이다
그런 나와 달을 
교교한 달빛이 안개처럼
감싸주지 않았다면
나는 울었을 것이다.

 


눈물에 갇힌 것들


가을비에
낙엽은 무겁게 가라앉고
그 위를 누르는 적막

가을비에
상념은 슬픈 날개 달고
그 위로 고이는 그리움

그리움을 데리고
적막을 건너다보면
그 끝에
먼저와 걸려있는
반짝이는 눈물들.

 


날개의 예의


쫓으려 하지 않았는데도
산책을 하다 보면
비둘기며 까마귀며 참새며
날개를 가진 것들은
다가가면 본능적으로 날아오른다
잠시 멈춰서 올려다보니
나뭇가지나 전깃줄에 앉아서는
머리만 갸웃거릴 뿐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더니
파다닥거리며 한 말씀 하신다
허공이 날개의 것이라면
땅은 다리의 것
너에게 길을 내주는 건
두려워 피한 것이 아니라
날개 없는 너의 다리에 대한
나의 예의일 뿐이야.

 


소쇄하다


가는 봄 잡느라
오는 겨울 막느라
한 해 헛되이 바빴다

돋아나 꽃피울 때까지 백 년
창자마저 텅 비운 채
청정하게 살아가는 대나무처럼
남은 생 짧을지언정
물어뜯고 뜯기는 세상을 피해
푸르게 직립할 수는 없을까

살포시 눈 감으니
울산 갈대숲 일렁임이
물결 되어 나를 삼킨다

 


눈물겨운 아침


젊었을 때는
부모님 있는 곳이 고향이었고
나이 드니
딸 사는 곳이 고향이 됐다
나에게 고향이란
구름처럼 떠도는 마음을
잡아두는 곳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다
어제 걸었던 길
들렸던 가게가 그립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백합
이 빗속에 잘 있는지
문득 걱정이 된다

내가 딛고 있는 이곳이
어느새 고향이 되었구나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에도
내 마음이 스며있네
언젠가 이들을 두고
떠날 일을 생각하니
벌써 눈물 난다

김화수 프로필 

본명 김화숙. 중국 사평사범학원 정치계(철학학사) 졸업. 길림조선족중학교 교사. 1999년 일본에 이주, 한국어 강사, 연변작가협회 회원.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2014년 월간 「문학세계」신인문학상. 2015년 대한민국통일예술제 해외작가상. 제12회 세계문인협회 세계문학상 해외문학 시 부문 대상. 2020년 『동포문학』10호 해외문학 작가상 시부문 최우수상. 『도라지』 해외조선족 문학상 수상. 시집 『아름다운 착각』(2015), 『빛이 오는 방식』(2017), 『날개는 꿈이 아니다』(2019), 『날개의 례의』 연변작가협회 계획도서에 선정(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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