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경제학박사, 여행 작가,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이남철 본지 객원논설위원 
이남철 본지 객원논설위원 

필자는 2022년 아제르바이잔 현지 방문 공무원 연수 기간과 올해 7월 그곳 공무원초청연수로 한국에 온 연수생들과 각각 보름을 같이 보냈다. 개인적으로 국가 간 관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튀르키예(구 터키)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튀르키예는 1950년 한국전쟁 시,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로 파병하였고, 희생자도 미군 다음으로 컸다. ‘튀르키예와 대한민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면서 서로의 동맹과 돈독한 우정을 중요시 한다’고 말하자 많은 아제르바잔 공무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기들도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 이와 같은 촌수를 따지면 아제르바잔은 대한민국과도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은 매우 사이가 좋다. 튀르키예는 대부분의 주변국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데 튀르키예와 거의 유일하게 역사적 앙금 없이 절친한 이웃나라가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인구 90퍼센트 이상이 튀르크 계열이라서 역시 같은 튀르크인 튀르키예와 형제의 나라라는 동질감이 크기 때문이다. 일단터키어와 아제르바이잔어는 같은 튀르크어족에 속하고 문법과 어휘가 거의 일치한다.
튀르키예는 여덟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북서쪽 불가리아, 서쪽 그리스, 북동쪽 조지아, 동쪽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월경지인 나흐츠반 자치 공화국), 이란, 남동쪽 이라크와 시리아가 있다. 북쪽에는 흑해, 아나톨리아와 동트라키아 사이로는마르마라해와 다르다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이 있다. 이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인식되어 튀르키예는 두 대륙에 걸친 나라이다.

필자는 튀르키예를 세 번 방문하면서 매번 이스탄불을 찾았다. 이스탄불은 터키 서부에 있고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운데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 있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중동에서 인구규모(2023년 기준 1,630만 명)가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에서 14번째로 인구수가 많은 도시이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 때까지 수도로 존속하다가 현재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1923년 이후로는 앙카라가 튀르키예의 수도가 되었다. 1985년 유네스코는 이스탄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유엔은 2022년 6월 1일 ‘터키’의 국호를 ‘투르키예’로 변경·승인하였다.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를 즐기는 주민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며, 다리 1층에는 식당이 있어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음. 다리 왼쪽은 흑해. 다리 위쪽은 유럽. 아래쪽은 아시아 지역임.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를 즐기는 주민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며, 다리 1층에는 식당이 있어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음. 다리 왼쪽은 흑해. 다리 위쪽은 유럽. 아래쪽은 아시아 지역임.

필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평가를 받고 있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튀르키예어: Sultan Ahmet Camii)를 찾았다. 모스크 안 벽면을 온통 뒤덮은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필자는 실내외 건물과 실내 장식물을 볼 때마다 신비감이 더하는 것 같다. 이 모스크는 이스탄불에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인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유서 깊은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술탄 아흐메드 성원이라고도 한다. 술탄 아흐메트 성원은 14세의 나이에 술탄 자리에 오른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지시 아래 건축가 시난의 제자인 세데프캬르 메흐메트 아아(Sedefkar Mehmet Ağa)가 1609년 착공을 시작해 1617년(약 7년 반)에 완공했다. 술탄 아흐메트 1세가 건축가 세데프캬르 메흐메트 아아에게 이 유명한 성원의 건축을 명령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9세였으며 자신 또한 성원 건축에 헌신하며 도왔다. 그는 14년간 세 개의 대륙을 아우르는 오스만 제국을 통치했으며 28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오스만 터키인들은 성원건축 시 예배장소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복합시설까지 만들어놓았다. 따라서 술탄 아흐메트 성원은 병원, 고등교육기관, 무료급식소, 초등학교, 시장 그리고 왕실의 무덤 등을 갖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문학자의 집(무왘깃하네(이슬람 달력의 주요 날들과 예배시간을 계산하는 곳)까지 있었다. 초등학교는 현재 성원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성원과 이슬람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안내소로서 쓰이고 있다. 

성원에 관한 일부 숫자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총 6개의 미나렛(벽면이 반원형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있으며 그것 중 4개의 각 발코니는 3개씩이며 미나렛의 높이는 73미터이다. 다른 2개의 미나렛의 각 발코니는 2개씩이며 미나렛의 높이는 60미터이다.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의 면적은 800평 정도이다. 안쪽 마당에는 30개의 작은 돔과 그 아래 26개의 기둥이 있다. 중앙 돔의 높이는 43미터이며 직경은 23.5미터이다. 최대 10,000명의 신자들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총 창문 수는 260개이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맞은 편 5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아야 소피아’ 또는 ‘하기아 소피아’의 정식 명칭은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The Hagia Sophia Grand Mosque)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동방 정교회 대성당으로 세워졌다. 현재는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 중이다. 537년에서 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 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이후 다시 정교회 성당으로 복귀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다. 그러나 2020년 7월 10일에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바뀌었고, 현재는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 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크며,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들은 미나레트라고 부른다.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 세계 각국에서 온 관람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임.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 세계 각국에서 온 관람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임.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바로 옆에 위치한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궁전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231만 제곱미터)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을 가지고 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은 ‘바브 휘마윤’(아랍어: Bâb-ı Hümâyûn)이라 불리는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Saltanat Kapısı)이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메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톱카프 궁전 ‘경의의 문’
톱카프 궁전 ‘경의의 문’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인 제1중정(I. Avlu or Alay Meydanı)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스만 군주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고 불리는 근위대가 위치하여 별칭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한다. 일반 백성은 이곳까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의 관리나 조정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일반 백성들이 드나드는 제1중정을 궁전 마당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1중정에는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제1중정을 지나면 ‘바뷔스 쎌람(Bâb-üs Selâm)’ 또는 디완 광장(Divan Meydanı)이라 불리는 두 번째 문인 경의의 문이 있다. 첫 번째 문과 중정은 일반 백성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경의의 문’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경의의 문 양쪽에는 방추형의 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의 오른쪽 벽에는 사형 집행자의 손과 칼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참수된 사람의 머리를 놓아둔 두 개의 대리석이 있었다고 한다. 경의의 문 뒤에 있는 넓은 마당은 제2중정(II. Avlu)으로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Saray Mutfakları)이 자리하고 있다.

디완 건물은 중정의 왼쪽에, 주방 건물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디완은 오늘날의 내각(內閣)을 말하는 것으로, 조정의 주요 업무가 이곳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디완 건물을 ‘쿱베알트’라고 부른다. 콥베는 ‘돔’이라는 뜻이고, 알트는 ‘아래’라는 뜻이다. 내각회의는 톱카프 궁전 초기에는 매일 열렸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줄어들다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일주일에 하루만 열리게 되었다. 디완 회의 초기에는 군주가 직접 회의에 참여하였으나, 얼마 안 있다가 디완 회의는 총리대신이 주재하게 되었다.

마당 오른쪽에 있는 부엌 궁전은 군주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200여 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접시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올려졌다. 궁전의 주방에서는 주로 양고기를 포함한 육류가 준비되었는데, 하루에 양 200마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생선은 원하면 요리할 수도 있었으나, 거의 먹지 않았다.

‘바쉬스 싸데(Bâbüssaâde 또는 Bab-üs Saadet)’라 불리는 세 번째 ‘지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3중정(III. Avlu)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또한,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다.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박힌 선물들이 즐비하다. 성물관(聖物館)에는 1517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가져왔다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이빨, 그가 들었던 군기, 그의 발자국 주조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를 정복한 술탄 셀림 1세는 1516년 8월 칼리파직을 이양 받음으로써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리파란은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인데, 이전에는 바그다드와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는 주요 도시였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학과 기술을 설명한 이슬람 과학관이 개설되었다. 특히, 도자기관에는 14~19세기 중국과 일본산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중국산 자기 1만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 명, 청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중국산 도자기는 9~10세기경 중동 지역에 수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오스만 조정에서는 중국산 자기를 대량 수입하여 즐겨 사용하였다. 일본 자기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들여온 것으로 큐슈 지방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것인데, 선적한 곳의 이름을 따 붙인 이마리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일본산 자기 중에는 오스만 군주가 특별 주문하여 제작된 것도 있다.

제3중정에는 남성 출입금지 구역으로 알려진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개에 이르는 방이 있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인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하렘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에 이르렀고, 군주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제4중정에는 오스만 조정 근위대의 지휘관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궁전학교가 있었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궁전학교는 톱카프 궁전 안에 설립된 관리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궁전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이었으나 오스만 고위 관리의 자제들도 입학하였다. 그들은 튀르키예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는 물론 쿠란, 역사, 수학, 음악 등을 배웠다. 엄격한 체력 단련을 통해 기마술과 무기 다루기에 능했으며, 궁중 내 예의범절도 익혔다. 궁전학교를 졸업하면 무사(武士)이면서 학자와 신사의 면모를 겸비하게 되었고, 건전한 무슬림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신하가 되었다. 궁전학교 출신들은 주로 오스만 조정의 행정관리로 배치되었고, 그들은 능력과 공적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하였다.

톱카프 궁전은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을 두고 구경할 것이 많고, 특히 자기, 무기, 직물, 보석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그러나 자기, 무기, 직물, 보석 등 구경거리가 많은 곳이지만,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 여러 곳이 있어 눈으로만 봐야 한다.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필자의 기억을 지배한 것은 ‘모세의 지팡이’였다. 필자는 모세의 지팡이가 있는 전시실 관람 전(前) 전시장은 사진 촬영금지 표시가 없어 (아마 필자가 보지 못했음)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곳도 같은 규제가 적용되는 곳인가 하고 사진 한 장 찍었다. 그러나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이었음을 동행인이 전시실을 나오면서 이야기를 해서 알게 되었다. 규정을 어겨 사진을 촬영함에 찝찝함을 느꼈지만 귀한 사진을 버리기가 무척 아까웠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이스탄불 공항에서 몇 달 전 튀르키예 대형 지진 사건을 생각했다. 유니세프는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2023년 4월 22일 파악된 튀르키예 지진 피해 사망자 수는 5만783명, 부상자는 10만7,204명이며, 시리아 지진 피해 사망자 수는 7,259명, 부상자는 1만2,000명 이상으로 추산 발표했다. 

공항 라운지에서 피아노 치는 어린 아이.
공항 라운지에서 피아노 치는 어린 아이.
지진 발생으로 고통 받는 어린 아이.
지진 발생으로 고통 받는 어린 아이.

유니세프는 지진 피해를 복구하기 긴급구호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NGO, 기업들의 지원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도움도 계속되고 있다. 튀르키예에는 240만 명이 고향집을 떠나 아직도 임시 거주지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400만 명의 어린이들은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곤경에 처한 튀르키예를 생각하면서 공항 라운지에서 어머니가 바라보는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피아노 치는 어린 아이 행동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고통 받는 튀르키예 어린이들과 국민들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면서 필자 자신은 물론이고‘혈맹의 나라’대한민국이 튀르키예가 절실히 필요한 물적·인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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